쌍수도

 


1. 개요
2. 무기
2.1. 주척 vs 영조척
3. 검술
3.1. 중국 군사도법
3.2. 중국 민간도법
3.3. 조선 군사도법
3.4. 복원 현황
3.5. 대중 매체
4. 참고 문헌


1. 개요


중국 명나라의 장군 척계광왜구노다치를 보고 모방해서 생산한 모조 일본도와 그것을 사용하는 무술을 둘다 가리킨다.
기효신서에서는 장도(長刀), 장도술이 민간에 전해졌을 때 민간무술계에서는 단도(單刀)[1], 청나라에서는 쌍수대도(雙手帶刀), 민국시대와 현대 중국에서는 묘도(苗刀)라고 불린다.
조선에서는 무예제보에서는 중국의 예를 따라 장도라고 불렀다가, 정조 시절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쌍수도라고 불렀다.
기효신서의 내용
長刀製
(圖) 刃長五尺, 後用銅護刃一尺, 柄長一尺五寸, 共長六尺五寸. 重二尺八兩.
장도의 모양과 만듬
(그림) 날[刃]의 길이가 다섯자[五尺]이고, 뒷 부분에 동호인(銅護刃) 한자[一尺]이 있으며, 병(柄)의 길이가 한자 다섯치[一尺五寸]이니 모두 여섯자 다섯치(六尺五寸)이다. 무게는 두근여덟량[二斤八兩]이다.
長刀解
此自倭犯中國始有之. 彼以此跳舞, 光閃而前, 我兵已奪氣矣. 倭善躍, 一많足則丈餘, 刀長五尺, 則丈五尺矣. 我兵短器難接長器, 不捷, 遭之者身多兩斷, 緣器利而雙手使, 用力重故也.
今如獨用則無衛. 惟鳥銃手賊遠發銃, 賊至近身再無他器可以攻刺, 如兼殺器則銃重藥子又多, 勢所不能. 惟此刀輕而且長, 可以兼用, 以備臨身棄銃用此. 􆉌有殺手當鋒, 故用長刀備之耳.
장도를 풀이함
이것은 왜(倭)가 중국을 침범할 때부터 있었다. 그들이 이를 가지고 휘둘러 춤추며 번쩍거리고 뛰어 들어오면, 우리 병사들은 이미 용기를 잃어 버렸다. 왜(倭)는 잘 뛰어서 한번 뛰면 일장(一丈) 남짓을 뛰었고, 도의 길이가 다섯자[五尺]이니, (합하면) 일장다섯자[一丈五尺]이다. 우리 병사들의 짧은 무기로는 긴 무기에 닿기 힘들어 이기지 못했으며, 당하게 되면 몸이 두동강 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무기가 날카롭고 양손으로 써서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이것만 쓰면 방어가 안 된다. 단, 조총수는 적(賊)이 멀 때는 총을 쏘지만, 적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왔을 때 다시, 찔러 공격할 만한 다른 무기가 없는데, (다른) 무기를 겸해 지니자니 총은 무겁고 약과 탄환 또한 많아서 형편상 불가능하다. 오직 이 도만은 가볍고 길어 겸용할 수 있으니, 몸에 지니고 있다가 총을 못 쓰게 되면 이것을 쓴다. 아무래도 죽이는데 손이 칼을 당하겠는가. 그래서 장도(長刀)를 준비하는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의 내용
"原
척계광이 말하기를,
"쌍수도는 날의 길이가 5척인데, 밑부분 구리로 싼 날(銅護刃)이 1척이며, 칼자루의 길이는 1척 5촌으로 전체의 길이는 6척 5촌이며, 무게는 2근 8량이다. 이는 왜구가 중국을 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이 칼을 가지고 춤추듯이 뛰어, 섬광이 번듯이는 앞에 우리 병사는 탈기가 되어 버렸다. 왜구가 한 번 뛰면 1장여 밖에 있는 조우자가 양단이 되어 버린 것은 무기가 예리하고 두 손을 사용하여 힘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들만이 전용으로 쓰고 있으니 막을 수가 없고, 오직 조총수만이 가히 겸할 수 있다. 적이 멀리 있으면 총을 쏘고, 가까이 있으면 칼을 쓴다."

본명은 장도이며, 지금 쌍수도라고 부르는 것은 쌍수를 사용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검제(劍制)(법)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요도로 대신 연습한다.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모원의(茅元儀)가 말하기를,
"장도는 왜놈들의 체계이다. 보병에게는 매우 날카로우나 옛날에는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중화고금』의 주에 이르기를, "「한세전」에 고제(高帝)께서 백사(白蛇)를 베었는데, 칼 길이가 7척이었다."
『한서』 「광천혜왕월(廣川惠王越: 한 경제의 아들)전」에 "손거(孫去)가 7척 5촌의 칼을 만들었다."
『후한서』 「풍이전(풍이전)」에 "수레(車駕)가 하남에 이르러 전송할 때 7척되는 옥구검(玉具劍: 옥으로 장식한 칼)을 하사했다."
『도검록(刀劍錄)』에, "주나라 소왕(昭王)이 다섯 검을 주조하여 오악(五嶽)의 이름을 붙였다. 진악(鎭嶽)이라 이름한 것은 길이가 5척이고, 석계룡(石季龍: 오호 후조 석호의 자가 계룡이다)의 칼 길이는 5척이고, 모용수(慕容垂: 오호 후연)의 두 개의 칼의 길이는 7척이며 웅(雄: 수컷)하나 자(雌: 암컷) 하나이니, 장도의 내력이 오래 되었다." "

2. 무기


날길이 104cm에 동호인 20.8cm가 포함되고 손잡이 길이 31.2cm로 전체길이 135cm정도에 무게 1.5kg 정도 되는 외날 형태의 도이다.(기효신서 기준)
명나라 말기 민간에 퍼진 단도(單刀)의 규격은 더 길어졌다. 정종유의 단도법선에 실린 제식은 칼날 3척8촌, 손잡이 1척2촌으로 전체길이 5척의 도검인데 정종유는 명나라 목공척(30.7cm)을 사용하므로 칼날 116.6cm, 자루 36.84cm, 전체길이 153.5cm의 더 커진 도검이 되었다. 다만 쇠뇌를 쓰는 병사는 불편하지 않게 날길이 2척8촌(85.96cm), 손잡이 9촌(27.63cm), 전체길이 3척7촌(113.6cm)의 짧은 칼을 쓰도록 권하고 있다. 이것도 도검 중에선 상당히 큰 편.
척계광이 왜구들이 사용하는 노다치의 무서운 기세와 위력을 감안하여 이를 모방 생산하여 화승총병에게 지급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기효신서 6권 비교편 유차역에서는 각각 단거리 무기와 장거리 무기를 함께 익힐 것을 강조하면서 각 병종마다 백병전 무기와 투사무기를 규정했다. 등패수는 표창(투창), 당파수는 화전(로켓화살), 장창수는 궁시(활과 화살)를 익히고, 지방 관아에서는 궁술을 기본으로 검과 등패, 장창, 대봉 등을 각자 알아서 익히면 되었다. 화승총도 백병전 무기가 있어야 하지만 총과 탄약, 개인장비가 많아 길면서도 가벼운 장도를 지급했다고 되어 있다.[2]
북방으로 파견된 이후로는 조총보병은 물론 조총기병에까지 지급되었으며, 이때는 쌍수장도(雙手長刀)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대 기병용 장비로도 사용되었으며, 갑옷을 입고 몸을 낮춰 말다리를 베고 일어서서 말머리를 베는 두가지 기법으로 사용되었다.[3][4]
장도의 양식은 일본도를 충실히 모방했으나 특유의 모양새가 있어 구분이 가능하다. 진린 제독이 이순신 장군의 유족에게 전달한 명조팔사품의 참도,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검 두자루는 기효신서에 나온 장도의 규격을 영조척으로 환산한 길이에 검 전체에서 자루의 비율이 길어진 형태[5]이기는 하지만 당시 명나라식 일본도의 제도를 잘 보여준다. 물고기 꼬리처럼 퍼진 형태의 카시라(손잡이 뒤쪽 보강 부품)는 명-청대의 중국 도검에서 계속 나타나고, 붉은색 어피, 그리고 솟은 부분이 번갈아 올라오지 않고 한방향으로만 나오는 츠카마키(손잡이 끈 감기) 등이 그것이다. 특히 진린의 명조팔사품을 보면 물고기 꼬리 모양의 카시라는 아니지만 길게 덮는 독특한 카시라에 지나치게 넓은 끈으로 감겨진 손잡이 끈의 흔적이 남아있어 전형적인 모조일본도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image]
[image]
이순신 장군의 검
명조팔사품의 참도
패용법은 진린 명조팔사품 참도가 전형적인 쿠리카타(栗形:칼집 옆으로 튀어나와 칼집이 빠지지 않게 해주는 걸림턱)를 가진 일본도 칼집인 점, 후대의 명나라 민간무술서인 단도법선(單刀法選)에서도 쿠리카타를 가진 일본도 칼집을 카타나처럼 허리띠에 착용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때 척계광 군대의 화승총병들도 허리띠에 끼워 찼을 것으로 추정된다.
[image]
녹영 쌍수대도(綠營 雙手帶刀) 출처
청나라 시대에도 한족 군대 녹영을 통해 계속해서 실전에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섯가지의 다른 길이를 가진 도검으로 분화되었다. 1766년 출간된 황조예기도식(皇朝禮器圖式)에서는 녹영에서 사용하는 참마도(斬馬刀), 장인대도(長刃大刀), 쌍수대도(雙手帶刀), 와도(窩刀), 배도(背刀) 총 5가지의 도검이 나타나는데, 와도와 배도는 일본도를 모방한 평범한 도검이고,[6] 쌍수대도가 길이와 무게로 보았을 때 기효신서 장도의 후계자이다. 참마도와 장인대도는 더 거대화된 것. 쌍수대도와 참마도, 장인대도는 일반 도검 비율이었던 장도에 비해 자루와 칼날의 길이가 5:5에 가까워진 나가마키와 같은 형태로 변했는데, 이미 기효신서 때부터 검의 조작을 위해 오른손으로 동호인 내지는 칼날을 잡는 묘사가 자주 나타났고, 결국 위험하게 칼날을 잡느니 아예 손잡이를 늘려서 쓰자는 발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노다치가 칼날에 새끼줄을 감아 잡고 쓰다가 아예 손잡이를 늘려버린 나가마키와 똑같은 발전 테크트리를 취한 것이다. 청나라 시대에는 칼집의 양식 등이 전형적인 만주인들의 도검 형태로 바뀌었으며, 만주족의 방식대로 띠돈을 이용해 허리에 착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image]
현대 중국에서 생산되는 묘도
청말 민국초에는 묘도(苗刀)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고, 기효신서의 스펙과 유사한 타입이었으나 양식은 명나라 시절의 유사 일본도 형태가 아니라 황동제 칼막이와 부품, 청나라식 칼집을 갖춘 청말 민국초 특유의 중국도 디자인을 차용했다.
조선에서는 군관 한교가 낙상지(駱尙志)를 비롯한 중국 군관들에게 절강병법을 배우면서 들어왔고, 무예제보에서 이를 정리했다. 이때만 해도 명나라와 똑같은 양식의 도검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무예도보통지를 출판하던 시대에는 이미 장도를 사용안한지 오래되었고, 요도(환도)로 대체해서 연습한다는 언급이 있었다.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에 이미 평범한 환도를 사용하는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광해군 2년 이전에 이미 장도가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아 환도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2.1. 주척 vs 영조척


척도의 차이로 의견이 분분한 것이 무예도보통지인데, 경인미술관과 사학계에서는 무예도보통지는 당시에 쓰인 주척으로 통일하여 측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무기의 길이를 잴 때는 주척을 사용했고, 영조척은 건물을 지을 때 썼던 척이었다. 주척은 1척당 20.8cm[7] 에서 21cm[8] 정도의 길이이므로, 이를 통해 환산한 스펙은 날길이 104cm에 동호인 20.8cm가 포함되고 손잡이 길이 31.2cm로 전체길이 135cm정도에 무게 1.5kg가 된다. 청나라 한족 군대인 녹영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장도(長刀) 유물의 스펙도 전체길이 146.3cm에 무게 1436g이라 주척으로 환산한 스펙과 유사하다. 유물과 무게에서 모두 뒷받침이 된다.
반면 영조척 복원은 무게가 맞지 않는다. 영조척으로 쌍수도를 제작하여 시연하는 곳이 무예24기 보존회 인데, 길이 180cm에 무게 3.4kg로 이미 기효신서의 무게의 2배가 넘는다. 그래서 무예도보통지에서처럼 손잡이를 잡아 시연하지 못하고 기효신서, 무예제보에서처럼 오른손으로 동호인을 거의 끝까지 잡아 시연한다. 하지만 기효신서, 무예제보에서도 손잡이를 잡고 쓰는 삽화도 나오는 만큼 거의 무조건 동호인만 잡고 시연하는 것은 유물의 복원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명나라 시대의 장도 유물은 사실상 거의 없고 그나마 조선에만 남아있는데, 진린 제독이 이순신 장군의 유족들에게 남기고 간 명조팔사품 중에서 참도,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검 두자루가 전형적인 명나라 장도 양식을 그대로 갖춘 도검인데, 이 두가지는 확실히 영조척 복원에 더 가깝다. 그러나 실전 사용을 염두에 둔 명조팔사품의 참도조차도 기효신서에서 나타난 무게를 아득히 초월하며, 이순신 장군의 검 두자루는 말할 것도 없다. 유물과 무게에서 주척 복원이 다른 모든 무예도보통지의 무기들의 경우에도 가장 현실적이고 유물과 오차가 적다.
또 무예제보의 재현이 아닌 무예도보통지의 재현으로 한정한다면 사실 큰 칼을 만들어 쓸 필요가 없는 것도 아이러니. 무예도보통지에서 요도로 대신 연습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평범한 환도로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만 무예도보통지 삽화에서 향상방적세에서 나타나는 칼의 비율을 예로 들어 환도로 재현하면 비율이 맞지 않고, 비율을 맞추려면 칼날만 1.2m정도 되어야 하며, 따라서 주척 영조척 어느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화기 위주의 편제로 쌍수도의 필요성이 적어진 후기의 사례를 무조건 확대해서는 안되고 정조 연간의 쌍수도법만을 복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진정한 쌍수도를 사용하는 기법의 복원도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 시대에는 확실하게 요도(환도)를 사용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만일 장도=쌍수도를 사용한 복원이 필요하다면 무예제보를 재현하면 된다.
본래 기효신서 중국판과 무비지, 무예제보에서는 오른손이 칼날을 잡고 있으나, 효종대 병조판서 김좌명이 여러 무예에 능한 사람들을 모아 잘못된 것을 고쳐 기효신서 조선판을 내놓으면서 여기서부터 양손 다 손잡이를 잡는 것으로 바뀌었고, 덤으로 향우방적세와 식검사적세도 바뀌었다. 이 기효신서 조선본의 삽화는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진다. 이것은 화기 위주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참 예전인 광해군 2년의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에서도 장도의 자세와 명칭을 쓰고 있는데도 일반 환도를 쓰고 있었고, 본국검과 제독검은 인조 6년에 어영청등록에서 처음 나타났는데도 평범한 환도를 쓰는 검술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이미 광해군 때부터 조총병이 환도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또 화기 위주의 편제가 아니라 원래 처음부터 장도=쌍수도는 조총병이 사용하는 병기였고 이들은 원앙진을 구성하여 백병전을 하는 살수와는 달리 조총수만 모아서 따로 편제되었다. 화기로 무장한 청나라의 한족군대 녹영에서는 오히려 더 거대한 장인대도 같은 칼까지 나타났기 때문에 화기의 등장으로 환도로 변했다는 것은 시대에도 배경에도 맞지 않는다.
삽화는 기효신서, 무비지, 무예제보 모두 칼의 길이는 들쑥날쑥하다. 지검진좌세나 견적출검세에서 보여지는 칼의 길이는 평범한 환도 수준일 뿐더러, 실제로 재현해보면 영조척이 아닌 주척 장도를 사용해도 지검진좌세에서 팔이 그림처럼 가슴에서 수평으로 뻗지 않고 머리 위로 올라간다. 영조척 장도는 말할 필요도 없다. 삽화대로 따지면 장도는 척계광 시절부터 평범한 길이의 칼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 삽화는 원래 가급적 옛 그림을 따라서 그리는 경향이 있는데 기효신서 조선본도 칼의 비율이 기효신서 중국판과 비슷하게 들쑥날쑥하다. 무예도보통지는 기효신서 조선판의 그림 비례를 최대한 따라간다. 즉 옛 그림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리되 복장이나 파지법에서 현재를 반영할 뿐인 것이며, 삽화의 비율대로 칼의 비례를 추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비슷한 사례가 대봉(곤방)이나 당파에서도 나타나는데 대봉의 경우 삽화만 보면 아무리 짧아도 2m를 넘는 길이지만, 실제 주척으로 재현하면 147cm의 짧은 봉이기에 영조척이 맞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연병실기에서 대봉의 굵기가 2촌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영조척으로 재현하면 굵기가 6cm가 되어 사람이 잡지도 못한다. 군대의 척촌법은 한가지 기준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기효신서의 척촌법은 주척 기준임을 알 수 있다.

3. 검술



3.1. 중국 군사도법


검술로써의 장도, 쌍수도의 기원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중국의 병법서 육도삼략을 기원으로 삼는 쿄하치류(京八流,경팔류)를 배운 스님 넨아미 지온(念阿弥 慈恩)이 중국에서 온 신승 영우에게 중국검술과 밀교 비전을 전수받아 창시한 넨류(念流)의 14명의 제자, 넨류십사철(念流十四哲)중 한명인 사루 고젠(猿御前)이 창시한 카게류(陰流)에서 시작된다.
사루 고젠에서 시대가 흘러 카게류의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하는 아이스 히사타다(愛洲久忠)는 세토 내해 지역에서 활약한 가문으로, 세토 내해의 호족은 해적질을 겸업으로 삼고 있었으며, 아이스 히사타다 자신도 검술을 배우기 위해 명나라, 조선까지 다녀왔다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왜구 활동을 좋게 포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왜구들이 카게류를 배워 해적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척계광이 1561년 신유년에 왜구와 대전을 벌여 압승을 거두고 진중에서 노획한 카게류 전서를 통해 어느 정도 입증된다.
척계광은 1561년 승리를 거두고 얻은 카게류 전서와 왜구의 검법을 바탕으로 왜구의 노다치를 모방한 병기와 도법을 제정하였고, 그것이 바로 기효신서에 수록된 카게류 전서와 15가지 세법이었다. 그러나 기효신서에는 그림 하나에 세법 이름 하나만 달랑 써놓아서 도대체 무슨 기법인지, 어떻게 훈련했는지 전혀 단서가 없었다. 카게류 전서는 그동안 초서체로 흘려써서 내용 판독이 안되었으나, 일본에 보존된 아이슈카게노류 전서와 비교해서 1번형 엔삐(猿飛), 2번형 엔카이(猿廻)의 내용은 판독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나머지 9개 형은 그림만 남아있어서 같은 넨류에서 발생한 츄조류의 카타 해설서인 병법수경의 기법을 통해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조선의 무예제보에서는 다행히도 낙상지 등에게 직접 배워 15가지 세법을 해설하고 그것을 연결하여 연습하는 명나라 군대의 훈련투로가 수록되어 척계광 군대에서 어떻게 수련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기록이며, 안개에 싸인 명나라 도법의 구체적인 동작도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 본국검, 제독검 등을 통해서 식별이 가능하다. 이 무예제보의 훈련 세법이 효종 대 병조판서 김좌명의 기효신서 조선판에서의 변개를 거쳐 무예도보통지까지 계속 이어진다.
또 척계광 군대에서는 한달에 15일 훈련하고 3일 무술, 1일 진법, 1일 평가하는 체계였는데 모든 병력은 원거리 병기인 원기(遠技)와 근접전투술인 단예(短藝)를 각각 시험보았으며, 단예는 각각 자유롭게 동작을 혼자서 시연하는 무(舞) 그리고 2명이서 대련하는 대(對) 두가지로 나뉘어졌다. 이 둘을 합쳐서 무대(舞對)라고 불렀다. 장도는 목검으로 둘이서 대련했으며, 공격이 계속 이어져 상대가 반격도 못하면 상등(上等)으로 판정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기효신서 수전편을 보면 참마도라는 무기가 나타나는데, 장도, 당파를 부를 때와 같이 백방기를 세우면 소집되는 점이나, 척계광 군대에서는 월도, 청룡도를 사용하지 않은 점, 북방으로 파견된 후 연병실기에서 말다리와 말머리를 베는 기법을 "왜도의 기법대로"라고 말하여 대 기병무기로도 쓴 점을 보아 장도의 이명으로 추정된다. 참마도의 평가방법은 창을 상대로 싸워 이기는 것이며 창의 현란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정확히 들어오는 한 공격만 잡아서 이기면 상등(上等)으로 판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당파의 평가 방법과 같다.
특이하게도 삽화를 보면 오른손이 칼날을 잡고 있는데, 왜구나 일본군은 노다치를 빠르고 섬세하게 쓰기 위해서 손잡이 앞쪽의 칼날에 천이나 새끼줄을 감고 그곳을 잡고 쓰기도 했으며, 현재도 카게류와 신토류를 배워 신카게류를 창시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조카였던 히키타 분고로의 유파 히고 신카게류에서는 지금도 거대한 노다치에 천을 감아 거기를 잡고, 갑옷을 입고 시연하는 행사를 보여준다. 기효신서를 보면 칼날 104cm에 21cm를 황동으로 감으라고 규정하였으므로 아예 임시방편이 아닌 정규 제식으로 왜구들의 방법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써보면 칼날에 비해 손잡이가 31.5cm로 너무 짧아서 손잡이만 잡고 쓰면 돌려치지 않고서는 제대로 쓰기 힘든데, 황동으로 감싸진 칼날 부분을 잡고 쓰면 짧은 칼을 쓰는 것처럼 빠르고 세밀하게 쓸 수 있다.
훗날 민간무술가인 정종유(程宗猷, 1561 - ?)가 1621년 출판한 경여잉기(耕余剩技)에 수록된 단도법선(單刀法選), 오수(吳殳, 1611 - 1695)가 1678년 출판한 수비록(手臂錄)의 단도편(單刀編), 조선의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 제독검을 보면 명나라 군사 도법이 어떤 형태였는지 판별된다.
향전격적(向前擊賊)은 칼날이 아래에 있다가 돌려서 내려치는 기법이다. 일본에서 흔히 보여주는 상대 검을 받아흘리고 돌려서 내려치는 동작과 같다. 진전살적(進前殺賊)은 돌리지 않고 그대로 수직으로 들어올렸다가 검도처럼 뛰쳐나가며 뻗어치는 기법이며, 휘검향적은 올려베기를 하며 나아가는 기법, 그리고 무예제보 검보에서 나타나는 일자(一刺)는 뒤집어 오른쪽으로 찌르고 재퇴방적으로 이어지는 것 하나뿐이지만, 단도법선을 보면 초퇴방적, 삼퇴방적에서 나오는 찌르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수는 눌러서 썰어버리는 삭(削)은 원래 없었고 군대에서는 벽(劈:수직내려베기)와 감(砍:대각선베기) 딱 두개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장도 투로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일치한다. 이것을 보면 장도는 내려베기 2종, 올려베기 1종, 찌르기 4종에 불과한 아주 단순한 도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투로에서 향전격적을 하고 삼퇴방적으로 바꾸는 동작은 카게류1번형 엔삐와 동일하고, 삼퇴방적을 하고 물러났다가 오른쪽, 왼쪽으로 향전격적을 하는 것은 카게류2변형 엔카이와 같아서 최대한 카게류 전서를 반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처음에 지검대적세에서 향좌방적세로 내리는 동작은 신카게류 엔삐 카타에서 상대의 베기를 칼 옆면으로 내려쳐버리는 동작으로 나타난다. 향상방적세는 일본에서 유파를 불문하고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기법이다. 이런 점을 보면 장도 투로는 생각 외로 최대한 왜구의 도법을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에서 명나라 무술을 전수하고 훈련도감 설치를 건의했던 참장 낙상지가 전수한 제독검을 보면, 쭉 전진했다가 물러나고 다시 전진하는 투로의 구성이나 사용하는 단어는 장도와 똑같으며, 단도법선의 속도세 12세 중 일부와 공통되는 기법이 나타나며 주로 수평베기를 위주로 한 도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낙상지는 북방기병 체계의 군대를 이끌던 이여송의 측근이었지만 낙상지 자신의 군경력 대부분은 척계광 체계로 돌아가는 남병이었고, 척계광의 6가지 백병전 무술을 전수한 것도 그 자신이었다. 이것을 보아 제독검이라 불리온 투로는 올려베기, 내려베기밖에 없던 장도를 보완하고자 수평베기 위주로 만들어진 제2투로라고 볼 수 있다.
장도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족 지배하의 청나라에서도 한족 군대 녹영(綠營)에서 척계광의 체계를 유지하면서 살아남았다. 오히려 더 발전하여 다섯가지의 각기 다른 길이의 파생형으로 분리되었는데 이중 쌍수대도, 장인대도, 참마도는 칼날을 잡느니 손잡이를 길게 만들자는 발상으로 손잡이가 길어져 나가마키와 같은 무기로 변질되었다. 특히 직계 후손으로 추정되는 쌍수대도는 칼날 길이가 84cm대이지만 손잡이를 1주척 21cm정도만 줄이면 정확하게 기효신서 장도의 스펙과 맞는 105cm정도의 칼날 길이가 나온다. 이런 점을 감안했을 때 군대에서는 민간의 단도술과 별개로 장도술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으나, 민첩하게 싸우기 어렵고 무조건 돌려쳐야만 하는 것은 무기로써 약점이므로 이 부분이 결국 칼날을 줄이고 손잡이를 늘이는 것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 명나라 군사 장도법은 남아있지 않으며, 민간에 남은 묘도법은 그 기본기나 형태로 보아 정종유의 단도법선에서 파생된 도법이다. 오히려 군사 도법의 복원 및 재현은 무예제보를 비롯해 명나라 군사 도법의 단서를 보유한 한국에서 무예도보통지 복원의 일환으로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중국에서는 조선군사사료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대부분 단도법선의 복원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

3.2. 중국 민간도법


민간무술계로 척계광 군대의 장도와 장도술이 퍼져 독자적으로 발전했는데, 민간무술계에서는 칼 한자루(單刀)만 사용한다고 해서 단도술이라고 불렀다.
소림곤법천종, 장창법선의 저자로 유명한 정종유의 단도법선은 창을 상대로 하는 도법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가 창은 만병지왕이니 창을 이기면 다른 무기도 다 이길 수 있다는 취지로 작성했다고 밝히고 있다.[9] 발도법부터 납도법은 물론 다양한 자세에서 나타나는 좌우 내려베기(砍), 수평베기(腰砍), 좌우 올려베기(撩,掠) 찌르기(刺), 다시 이것들을 한손으로 하는 것을 보여주고, 칼을 뒤집어 칼등으로 강하게 내려쳐버리는 것(刀背格鐵器勢), 좌우 깎기(삭削:눌러썰기 혹은 빗겨내기)와 오른손을 칼등에 대고 막아내거나 공격하는 수법까지 22세+12세로 총 34세의 다양한 기술을 보여주며 혼자 하는 연습을 위해 총서단도1로(總敘單刀一路)라는 투로를 하나 실어놓았다. 기술의 출처는 절강성의 유운봉, 호주의 곽오도에게 배웠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오수의 수비록 단도편은 단도법선과 같은 단도술의 전통을 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창을 상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단도법선에 비해 훨씬 간략하게 정리되었다. 오수는 내려베기가 조천세와 사제세에서, 올려베기가 좌우 요도세에서, 창을 깎는 것이 좌우 정슬도세에서, 올리고 내리고 좌우로 베고 깎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이 두 요보세[10]에서 나오는 것으로 기술을 총 좌우 내려베기, 좌우 올려베기, 좌우 깎기, 좌우 윤법 총 8가지 기술로 정리했다. 창을 상대하는데 오직 이 8가지만이 실전 기술이라고 정리했다.[11]
이 민간 단도(單刀:칼 하나라는 뜻)술은 쓰는 칼만 동일하고 세법의 이름이나 용어가 명나라 민간무술의 그것으로 되어 있어서 기효신서의 군사 무술과는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비교해보면 기효신서의 무술을 기반으로 확장된 형태를 보인다. 좌우 요도세에서 올려베는 것을 이어서 하면 장도의 휘검향적이 되고, 입동도세와 매두도세는 각각 장도의 향상방적이다. 상궁도세는 초퇴방적, 저간도세는 삼퇴방적과 연결된다. 역수로 잡고 휘둘러 치는 것 또한 장도 투로에서 잠시 나온다. 기효신서 장도에서는 각 세법명이 하나의 통합된 몇가지의 움직임을 포함했지만, 단도술에서는 좀더 자잘하게 분화된 것이다.
또 단도술의 특징은 보통의 도검처럼 머리 위로 들어서 직선으로 바로 베는 것이 아니라 항상 회전을 거쳐서 내려베고, 방어를 할 때에도 그 회전 동작 안에서 칼을 비스듬히 뒤집어 막는 자세를 거쳐가면서 칼날이나 칼등으로 빗겨내거나 막으면서 그대로 검을 돌려서 내려친다. 이러는 이유는 실제 기효신서 스펙에 맞춘 도검을 써보면 알 수 있는데 1.5kg가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질량이 칼날에 전부 몰려 있어서 들어서 직선으로 바로 내려베려고 하면 칼날이 느리게 가속되면서 힘이 없고 딜레이가 심하게 생겨 그 틈에 맞기가 쉽다. 그래서 방어 자세를 거치며 회전시켜 가속시켜 치는 방법을 고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올려베기는 그런 문제가 없고 빠르게 상대를 압박할 수 있어서 단도술에서도 올려베기의 유용함을 설파하고 있다. 심지어 민간의 단도는 기효신서의 것보다 훨씬 길어져 1.53m에 달한다.
한편 이 특징을 알면 기효신서 장도술에서 왜 위험천만하게 오른손으로 칼날이나 동호인을 잡고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기효신서처럼 잡고 써보면, 그 무거운 딜레이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굉장히 민첩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싸울 수 있다. 단도법에서 수직 내려베기가 없고 대각선으로만 내려베지만 장도법에서는 오히려 수직 내려베기가 있는 것도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단도법에서는 바로 들어서 내려치는 진전살적 계통의 기술이 없다.
민간 도법은 각 무술가들이 군사 도법의 아주 단순한 내용들을 보완하기 위해 검술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오수는 원래 단도법에는 벽(劈:수직내려베기)와 감(砍:대각선베기) 딱 두개밖에 없었고, 정종유가 눌러 써는 삭(削)을 추가했다고 했으며, 자신이 어양노인의 검술에서 창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세(洗)를 추가했다고 했다. 좀더 나중의 도법인 왕오공의 태극도법을 보면, 숫제 조선세법의 단어까지 들어가고, 세(洗)를 시간과 공간에 맞춰 더 분화시키기까지 했다. 또 투보와 같은 민간무술에서 쓰는 조금 아크로바틱한 보법이 추가되기도 했다. 왕오공 태극도법 이후에는 따로 단도법의 사료를 찾을 수 없다.
한편 오수는 단도법이 진짜 왜도법과는 다르고, 비록 왜도법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이를 배우면 중국의 화법은 모두 세번이나 물러설 것이다라고 수비록에 언급했다. 명나라 말기부터 일본에서 검객들이 건너와 일본도법을 가르치는 경우가 있었다. 지키신카게류(直心影流,직심영류)의 창시자인 오가사와라 겐신사이는 중국으로 건너가 검술을 가르치고 장량의 창술을 배워왔다는 일화를 언급하는데, 이런 교류를 통해 이미 상당히 중국민간무술과의 융합이 끝나있던 단도법과의 이질적인 형태를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극초기 군사 도법은 왜구의 검술을 최대한 반영했지만 점점 민간무술의 기술이나 독특한 움직임이 들어가면서 차이가 커진 것이다.

3.3. 조선 군사도법


조선의 장도 도법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지도에서 시작되었다. 참장 낙상지는 훈련도감 설치를 건의하고 제독검을 비롯한 여러 백병전 무술을 지도했는데, 무예제보에서 한교의 언급을 보면 정작 명나라 장교들도 자세히 모르거나, 훈련할 때 별다른 설명 없이 빠르게 움직여 끝내버리면서 잘 알아보지 못하게 행동하거나, 장창은 24세 중 12세만 지도하고 나머지 12세는 말을 안해주려는 것 등 완전히 가르쳐주는 것을 경계한 듯한 행동이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한교는 명나라 군대에서 배운 6가지 무기술을 1598년(선조 31년) 무예제보(武藝諸譜)로 정리했고, 여기에 명나라 군대의 장도 훈련 투로가 실려 있으며, 이때만 해도 명나라 식으로 오른손이 칼날의 동호인을 잡고 사용하는 도법이었다.
이후 훈련도감의 도청을 맡았던 최기남이 1610년(광해군 2년)에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을 출간하고, 여기에는 장도와 대봉의 단어를 이용해 왜구의 도법을 2인 기술훈련 형태로 정리한 왜검보가 실려 있는데 기술과 자세가 장도와 동일해서 장도의 움직임을 재구성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며, 기법도 일본 고류와 유사한 부분들이 있으며 실전적인 기술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에서 장도를 장기간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광해군 2년에 출간된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에서부터 평범한 환도를 쓰고 있고 양손 다 손잡이를 잡고 있으며, 인조대에 나타난 것이 확실한 제독검과 본국검도 평범한 환도로 시연하기 때문이다. 기효신서 체계에 의해 조선군도 조총병은 총수로 따로 편제되어 집중 운용되었고, 이들이 가진 백병전 무기로 장도가 지정되었다. 간혹 장도가 원앙진을 구성하는 무기 중 일부인 것처럼 오해받는데, 원앙진은 백병전을 전담하는 살수가 전개하는 것이고 조총병은 살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장도는 기효신서에서 말하는 대로 조총병의 백병전 호신용 무기였고, 조선에서는 일찍 장도를 쓰지 않고 환도로 바꾸어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효종 대에 병조판서를 역임했던 김좌명(金佐明, 1616~1671)은 기효신서 조선본을 출판하면서 여러 무예에 능한 자를 모아 잘못된 것을 수정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기효신서 조선본부터 장도 투로가 양손 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고, 향우방적은 본래 칼을 아래로 뒤집어 오른쪽을 막는 것이었지만 칼을 들어서 막는 것으로 바뀌고, 식검사적은 왼손에 쥐고 오른소매에 칼을 닦는 것이었지만 판화를 좌우반전시켜서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소매에 칼을 닦는 것으로 바뀌었다. 향상방적세도 기효신서 14권본, 무예제보, 무비지는 목 앞에 칼을 두지만, 기효신서 조선본에서는 목 뒤에 칼을 두는 것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해보면 환도로 할 때 기효신서 조선본대로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점, 기효신서 조선본의 다른 무기술 부분은 크게 변한 것이 없는 점으로 보아 무예에 능한 자를 모아 수정했다는 것은 장도 투로임이 확실하다.
이후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가 있었으나, 무예신보는 사라져서 내용을 알 수 없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쌍수도의 내용과 투로도 기본적으로 문장과 순서는 무예제보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나, 以左手持劒向前, 以右手更把 문장을 以左手揮劒向前 以右手更把 라고 하여 持를 揮로 바꿈으로써 무예제보 장도 언해본의 휘둘러 라는 단어와 더 맞는 뉘앙스로 한문이 수정되었다. 삽화는 기효신서 조선본부터 나타난 환도 사용으로 수정한 삽화를 계승했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진 복장에 맞게 두건이 호건에서 전건으로 바뀌었고 그림을 새로 그렸다. 또 섬검퇴좌세가 기효신서 조선본은 중국의 것과 차이가 없던 것에 비해, 조금 독특한 형태로 바뀌어 있다.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기사 에서 사도세자가 무기신식(武技新式)을 써서 쌍수도를 비롯한 여섯 기예가 잘못되어 옛것을 기반으로 바로잡았다는 내용을 보면 무예신보에서 다시 변경된 부분들이 무예도보통지에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장도 혹은 쌍수도라는 이름보다는 용검(用劒), 평검(平劒)이라고 불렸으며, 제독검과 함께 18세기 어영청 중순 시험 합격자의 60%를 차지했다.[12]
장도 도법이 단순해서인지 조선은 계속해서 여러 도법을 제정하거나 수입했다. 이미 선조 사후 얼마 되지도 않은 광해군 2년에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가 제정되었고, 낙상지에게 지도받은 제독검이나 조선이 조선세법과 장도 도법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본국검은 상당히 이른 시기인 1628년(인조6년) 어영청사례에서부터 관무재 시험과목으로 나타나고, 숙종 시대의 군관인 김체건은 일본에서 왜검을 배워 이것이 무예신보에서 8개 유파, 무예도보통지에서는 4개유파로 축소되었다.[13] 영조 대에는 훈련도감의 군관 고만흥이 아버지 고후점에게 배운 예도를 급히 보급하여 교관단을 육성했다. 그러나 제독검을 제외한 본국검, 왜검은 인기를 잃고 본국검의 어영청 중순시험 합격자는 0.25%에 불과했으며, 왜검은 이미 4개유파 중 운홍류만 하고 있다는 언급이 무예도보통지에 나온다. 예도는 우리나라의 검술이라며 크게 환영받았지만 순조 초기 이후에는 군영등록에 아예 언급이 되지 않아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마지막까지 장도, 쌍수도 혹은 용검, 평검이라 불린 도법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4. 복원 현황



매화당랑권의 묘도 시연

싱가포르의 중국무술 연구가 잭 첸의 단도법선 재현
중국에서는 다른 명나라 무술들이 그렇듯이 약간 변형된 상태로 전수되고 있다. 창주통비벽괘문에서 묘도(苗刀)라고 하며 가르친다. 묘도 1로는 전수된 것이고, 묘도2로 등이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무술인이나 역사 재현가들이 묘도와 명나라 기효신서를 연결하여 재현을 시도하지만 기효신서는 연상할 만한 내용 자체가 없다시피하고 무예제보는 투로만 수록하고 있어서 실전적인 재현이 쉽지 않다. 그래서 명나라의 무술가 정종유가 쓴 단도법선, 명말청초의 창술가 오수가 쓴 단도18세를 재현하면서 기효신서 오리지날 스타일에 대한 재현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의 히키다 신카게류의 노다치 시연을 참고하기도 한다.

경당의 쌍수도 시연

무예24기 보존회의 쌍수도 시연
한국에서도 무예도보통지 재현의 주요 과목으로 일찍부터 복원이 시도되었다. 그중에서 무예24기 보존회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영조척 기준 쌍수도를 제작 시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 경당은 세법 사이사이에 너무 방방 뛰는 동작을 삽입했지만 무예24기 보존회는 국내의 무예도보통지 단체 중에서 가장 삽화와 유사하고 군더더기없는 시연을 보여준다.



Oldswordplayer
HEMA 유저 Oldswordplayer의 복원. 국립민속박물관의 무예제보 번역본을 바탕으로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 기효신서, 연병실기, 단도법선, 수비록 단도편, 왕오공태극도법, 무예도보통지 쌍수도, 아이슈카게노류 목록 등 한중일의 사료를 종합하여 복원하였으며, 장도, 쌍수도의 차이점이나 도법의 구조를 분해 설명하기도 했다.

3.5. 대중 매체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대호가 조윤을 상대할 때 사용한 거대한 칼이 이것이다. 압도적인 파괴력과 리치로 조윤을 거세게 밀어붙이지만 결국 실력차를 이기지 못하고 반죽음이 된다.

4. 참고 문헌


무비지 (국립민속박물관 번역)
기효신서 (국립민속박물관 번역)
기효신서 상권 (군사편찬연구소 번역)
기효신서 하권 (군사편찬연구소 번역)
무예제보 (국립민속박물관 번역)
조선 후기 무기 고증 재현(국립민속박물관)
단도법선(상)
단도법선(하)
수비록 단도편
무예도보통지

[1] 오랑캐의 칼이라는 의미라면 선도라고 읽었을 지도 모른다.[2] 기효신서 초판본인 18권본에서는 장도가 실려있지 않고,후기에 정리를 거친 개정본 14권본에 실린 것으로 봐서 왜구와 싸우던 시점에선 장도가 제식 채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 무비지에서 연병실기 비장도를 인용함.[4] 효종실록 14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6월 17일(경오) 3번째기사에서는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 잡혀간 사람을 만났는데, 교하(交河)의 사노(私奴) 응상(應祥)이었습니다.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물었더니, 그가 갑군(甲軍)으로서 지난해에 남방의 싸움터에 따라갔는데 남군이 패한 체하고 북군을 유인하여 협격해서 북군이 전멸하고 왕자(王子)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남군은 태반이 보졸(步卒)인데 철갑으로 머리와 몸을 싸고 손에는 큰 칼을 들고 몸을 굽히고 곧바로 달려가 말의 다리만을 찍으며 선봉에는 코끼리를 탄 자가 많이 있었다 합니다." 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5] 사실상 동호인 부분의 절반까지 자루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효신서에 나온 장도의 비율로는 자루의 길이가 검 전체에 비해 너무 짧다보니 균형이 안맞는 면이 있다. 이때문에 쌍수도 재현 시연시에 동호인을 잡고 시연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이기에 당시에도 이점이 단점으로 인식되어 동호인을 줄이고 자루를 길게 개선한 형태가 이순신 장도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명나라에서도 황제 친위대인 어림군(御林軍)의 장도는 기효신서와 같은 104cm칼날이지만 손잡이가 50cm에 달할 정도로 길어진 것이 유물로 확인된다. 심지어 시대가 지날수록 자루의 길이가 길어져 청대에는 자루가 전체 검 길이의 절반을 차지하는 형태도 나온다.[6] 차이점은 와도는 날폭이 32mm정도로 일본도와 같은 대신 조금 더 길고, 배도는 날폭이 넓어 베기에 특화된 대신 조금 더 짧다.[7] 《한중도량형제도사》 중 〈한국도량형제도사편〉의 영조 16년의 척도교정 항목에 기술된 조견표에 의거 20.792cm. 정조 4년(1780년)의 문헌, 《시악화성 도량형보 본조척제(詩樂和聲 度量衡譜 本朝尺制)》에 수록된 주척도본에서는 20.45cm[8] 수표석(水標石)유물의 주척 21.788cm를 감안하여 오차 가능성을 적용함. 경인미술관에서는 청대의 녹영참마도 유물의 길이가 145.44cm였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기효신서의 치수를 적용하면 중국 명대 기효신서 작성 당시의 주척은1척 22cm전후로 측정된다고 한다. 조선 수표석 유물 주척과 유사한 길이.[9] 다만 기효신서 수전편에서 참마도가 창을 이기는 기법으로 평가하는 내용을 보면 원래 창을 상대하는 교육과정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10] 중국검술에서 자주 보이는 동작으로, 왼쪽으로 검을 휘둘렀는데 왼발이 나가면서 마치 허리가 꼬인 듯이 되는 것을 말한다.[11] 상궁세, 외착세는 우정슬도세의 파생형(上弓勢、外看勢,則右定膝之子也)이며, 안호세와 요보단요도세는 좌요도세의 파생, 입동세와 담견세, 단제도세와 단요도세는 우요도세의 파생형이라고 하고 있다.[12] 기사 [13] 특이하게도 왜검 중에서 2인이서 기술을 정해진 대로 주고 받는 "교전"은 둘이서 쌍수검으로 수행했는데, 자꾸 다치자 환도에 칼집을 씌우거나 천을 감아서 썼지만 그래도 다치자 목검에 가죽을 씌워서 했다고 무예신보를 인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