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뇌

 







1. 개요
2. 명칭
3. 역사
4. 기타



1. 개요


을 사람의 힘으로 당기지 않고 고정틀에 물리고 화살을 올려 발사장치를 통해 쏘는 기계식 활.
흔히 석궁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석궁은 오역이다. 이에 대해서는 석궁 문서 참조. 석궁 문서에서 일반적인 사항을, 이 문서에서는 한국사의 전통 무기를 다룬다.

2. 명칭


'쇠뇌'라는 이름은 대응하는 한자가 없다. 번역소학(1518년)과 훈몽자회(1527년)에서는 '''소니'''라고 했다. 순우리말일 가능성도 있고, 한편으로는 1729년(영조 5년)에 출간된 쇠뇌의 제작 방법을 수록한 노해(弩解)에 따르면 쇠뇌를 크기에 따라 소노(小弩), 중노(中弩), 강노(強弩)라고 나눠 불렀고 그 중 현재 손으로 쏘는 정도 크기의 쇠뇌를 소노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소노(小弩)라는 한자어에서 변형된 말일 수도 있다.

3. 역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쇠뇌 관련 유물은 청동기 시대 출토된 단발식 쇠뇌의 방아틀 뭉치이다. 이 외에 고분벽화의 그림, 신라 시대에는 구진천이 개발한, 천 걸음이나 화살이 날아가는 쇠뇌인 천보노(千步弩)가 있었다고 한다.[1] 또한 신라는 아예 쇠뇌만 다루는 전문부대인 노당(弩幢)을 따로 만들 정도였다. 662년에 평양을 포위했다가 군량이 끊어진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주고 오던 김유신이 도중에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 '''수많은 쇠뇌를 한 번에 쏘는''' 전법으로 추격해오던 고구려군을 거꾸로 궤멸시키는 전과를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가 관문에 항상 노사(弩士) 수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는 노를 신라를 대표하는 무기로 봤던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천보노를 만드는 장인 구진천을 끌고 갔다는 기록도 있다.[2] 당시 신라는 고구려 멸망 후 나당전쟁 개전을 몰래 준비하는 중이었기에 당나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순순히 따랐다. 다만 구진천은 일부러 재료가 중국 것은 안 좋다느니, 신라에서 배에 실어서 갖고 온 재료가 습기가 차서 못 쓴다느니 핑계를 대면서 당고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내 제대로 된 천보노를 만들지 않았다. 처음 만든 것은 30보 남짓, 신라에서 목재를 가져와 만든 것은 60보 남짓 날아갔다고.[3]
고려시대에도 수질노, 수질구궁노, 팔우노 등 다양한 쇠뇌들을 제작해서 사용했다. 북계에 주둔했던 주진군 중에는 쇠뇌를 다루는 노병이 좌군에 편성되어 주둔했으며 별무반 편성 당시 쇠뇌를 다루는 정노군이란 부대를 신설하기도 했다. 예종이 정예부대인 정노반을 사열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고려시대에도 쇠뇌는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쇠뇌 제조법은 잊혀져서 조선 초기에 들어서면 쇠뇌를 만들 줄 아는 이가 없어 왕궁에 있는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참조해서 쇠뇌를 만드는 지경까지 갔었다고 한다.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5월 17일 경진 7번째기사/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병조에서 아뢰기를, "길주 사람 주천경(朱天景)이 스스로 노궁(弩弓)과 상양포(相陽砲)의 법을 자세히 안다고 말하니, 본인을 군기감(軍器監)에 >보내어 작게 모양을 만들어서 시험하게 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였다. 내장(內裝)에 마침 제용 부정(濟用副正) 구강(具綱)이 바친 자청준(磁靑樽)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준(樽)의 배에 그린 그림에는 손빈(孫臏) 이 나무를 깎아 흰 곳에 쓰기를, 방연(龐涓) 이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고 하였는데, 연이 와서 보자, 1만의 노궁(弩弓)이 함께 발사하는 모양을 그렸다. 군기 제조 총제 이천(李蕆)에게 내어 보이고, 인해 전교하기를, "이 노궁의 제도를 살펴보고 천경의 말을 참작하여 만들도록 하라."하였다.

문제의 실록 기사. 노궁(쇠뇌)가 그려진 준(樽)이라는 것은 술항아리다.
이때부터는 군의 주력 투사무기가 국궁, 조선 중기 이후로는 화승총으로 넘어간다. 그래도 민간에서는 쓰였는지, 성종 때에는 쇠뇌로 호랑이 '''40마리'''를 잡았다는 용자가 왕에게 포상을 받기도 했다. 또 왜변과 여진족의 침공에서 쇠뇌는 상당히 자주 등장하며 조선 초기에도 북방에 대한 방어에 쇠뇌의 가치를 높게 보는 서술이 나타난다. 성종대엔 아예 새로 만들어서 다시 꽤 사용되었다고.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탄력을 강화한 국궁에다가 기계틀을 달아서 완성했다. 보통 은 활대가 1M를 넘기거나, 합성으로 강화한 쇠뇌를 주력으로 취급했다. 활대가 1m가 안되는 작은 쇠뇌는 보통 연노로 만들어서 독을 바르거나 상인들의 호신용으로 사용하거나 사냥용 덫으로 활용하거나 했다. 활길이가 2M에 달하면, 강노로 취급하여 개인용 발리스타에 가깝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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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용두삼시수노. 3발씩 쏘는 연노이며 군용으로서 대형인 것도 있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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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궐장노. 전통적인 국궁과 동아시아의 전투용 쇠뇌를 조합한 형상이다. 활 길이 127cm.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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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소노. 주로 매복시켜 놓고 줄을 당기면 발사되는 사냥용 함정이었다. 10개, 20개씩 묶어서 한꺼번에 발사되는 무기였다. 쇠뇌의 사용폭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참고 자료

4. 기타


무협이나 지나가는 선비 같은 설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투사무기로 활을 사용하지 쇠뇌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작가가 잘 몰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람의 숙련도, 실력보다 기계적 장치의 정밀성이 부각되고 초심자가 쓰기에 쉬운 쇠뇌의 특성상, 이런 이야기의 인물들이 쓰기엔 모양이 빠지는 감이 있기 때문.

[1] 미터로 환산하면 '''1386 미터.'''[2]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는 끌려간 것이 아니라 당의 사신이 황제의 조서를 전하러 왔고, 구진천을 데리고 함께 돌아갔던 것이라고 기록한다.[3] 역으로 말하자면 쇠뇌의 위력마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의 쇠뇌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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