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노조원 평택공장 점거 농성 사건

 


1. 개요
2. 원인
3. 진행과정
4. 결말
5. 그 이후
6. 기타
6.1. 관련 문서
6.2. 관련/참고 자료
6.3. 관련 기사


1. 개요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사측의 구조조정 단행에 반발해 2009년 5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77일간 위험물질이 산재한 평택 쌍용차 공장을 점거하고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며 불법농성을 했던 사건으로, 이에 대해 결국 공권력이 투입되었으며, 동년 8월 6일 강제 해산되어 파업이 종결되었다.

2. 원인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몇 차례 위기를 맞았던 쌍용자동차는 2002년 공적자금을 통해 겨우 위기를 벗었다. 이후 2002년 16만 1.000대 생산으로 정점을 찍었으나 민영화 만능론에 빠진 정부와 채권단이 2004년 10월 중국 기업 상해기차에 쌍용자동차를 매각했다. 하지만 상하이차에 의해 핵심 기술과 핵심연구원들만 빼돌려진 채로 신차 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지 않았고, 계속해서 적자가 발생했다. 이후 2009년 1월 8일 법정관리 신청이 받아들여지고 2월 6일 법원의 회생절차 개시가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쌍용자동차의 중국인 이사의 임기 만료와 법정관리 신청의 시기가 일치해 상하이차의 철수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의혹도 있다. 4월 8일 경영 정상화 방안으로 총 인원의 36%에 달하는 2,646명에 대한 인력감축안을 발표하자 노조원들이 이에 반발하며 사건이 시작되었다.

3. 진행과정


6월 26일 오후 사측 직원 3,200명이 기숙사 문과 철조망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장 안으로 진입하자 노조 측(820명)에서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다음 날까지 사측은 본관 및 정문 주변에서 대기하고 노조 측은 도장 1·2공장 안팎에서 대기하며 사측을 향해 너트와 화염병을 던졌다. 같은 시각 민주노총 등 470명은 정문 우측 주차장에서 구호제창을 하며 노조 지원유세를 벌였다. 당일 22:40경 쌍용차 대표의 철수 성명서 발표 후 사측 직원들은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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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노조원들이 타이어에 불을 붙였다.
7월 20일, 수원지법은 평택공장을 회사측에 인도하라는 강제집행명령을 내렸으며, 경기남부지방경찰청(당시 경기지방경찰청)은 34개 중대 3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10시 10분부터 집행관, 변호사, 사측 직원 등 4명이 강제집행을 위해 3차례에 걸쳐 도장 2공장 앞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노조의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당일 오후 금속노조 등 500여 명은 정문 앞 공터에서 공권력 투입 규탄 기자회견을 빙자하여 구호를 제창하다 경찰의 해산절차가 진행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경찰은 방석막과 대형 그물망을 이용하여 본관 정문 등 3개 장소에 9개 중대를 전진 배치시키고 노조를 압박했다. 한편, 사측 직원 3,500명은 공장으로 진입한 뒤 본관 및 연구동에 대기하면서 정문 출입을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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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원들이 쇠파이프를 든 채 철조망 뒤에서 농성중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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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노조원들이 금속으로 거대 새총을 제작해 대형 볼트를 발사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경찰은 헬기로 공중에서 최루액을 살포했다.
7월 24일, 노조원 600명이 도장공장·복지동 등에서 대기중인 가운데 그 중 170여 명이 도장 2공장과 오·폐수처리장 주변에서 화염병과 볼트를 투척하고 폐타이어를 이용해 방화를 시도하는 등 경찰력 투입에 반발했다. 15시 경 경찰특공대 3개 제대와 4개 기동부대가 로디우스 차체공장에 진입해 그 일대를 장악하자 복지동 옥상에 있던 노조원들이 화염병을 투척했고, 경찰은 화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헬기로 최루액 비닐봉지를 투하하며 대응했다. 17시 경 노조원들이 차체 공장에 접근해 재차 방화를 시도하는 것을 재빨리 소화기로 진화하는 한편 경찰 15개중대를 모든 출입문에 전진 배치시켰다. 한편 사측 직원 1,550여 명은 본관 주변에 대기하며 출근 준비를 했고, 노조원들이 농성을 해제하도록 설득방송을 실시했다.
7월 28일, 경찰은 진입을 포기하고 식량 및 물 반입을 막았다. 노조원 가족들과 몇몇 사회단체 소속 30여명이 물을 전달하려다가 사측 직원에게 가로막히기도 했다. 다음 날인 7월 29일 민주노총에서 물 전달을 위한 행진을 시도하고 경찰은 이를 물대포 등을 사용해 저지했다.
8월 4일 경찰은 노조원이 체류하고 있는 주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26개 기동부대를 동원해 복지동과 조립공장으로의 진입을 시도했으나, 노조 측에서 새총으로 볼트를 발사하고 카이런 차체공장 옥상에 시너를 뿌리고 방화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여 일시 후퇴했고, 밤 늦도록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8월 5일 아침 8시 경 경찰은 크레인에 연결된 컨테이너 박스 3개와 사다리를 이용해 동시에 조립공장 옥상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10시 경에는 경찰특공대[1]와 기동 부대원들이 헬기와 고가 사다리차를 통해 도장 1공장 옥상에 진입했다.
이후 복지동 옥상과 카이런·렉스턴 차체공장을 순차적으로 확보한 가운데 사측 직원 3,000여 명은 도장1공장과 조립공장 자재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한편 12시부터 노·사 대표는 본관 뒤 컨테이너 박스에서 실무교섭을 벌여 20시 경본관 대회의실에서 마침내 ‘노사 합의서’ 조인식을 개최했다.

4. 결말


8월 6일 남아있던 노조원 450여 명은 점거 농성을 풀고 해산했으며, 사측 직원은 정상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462명 무급휴직, 353명 희망퇴직, 165명 정리해고가 이루어졌다.
쌍용자동차 파업은 명백한 불법집회였지만 페인트·시너·엔진오일 등 공장 내 인화물질이 산재해 있었고 노조원들이 새총을 제작해 너트를 발사하는 등 극렬히 저항했던 까닭에 물리적인 강제해산이 이루어질 경우 경찰관·농성자의 부상 및 공장 내 화재등 사고발생이 우려되었기에 경찰은 파업 초기에 안전에 중점을 두고 인내심을 갖고 대응하면서 사후 사법조치를 위한 채증자료 확보에 주력했다.
하지만 6~7월에 있었던 몇 차례 노사협상에서 양자간 입장차를 좁히지 못해 협상이 결렬되었고, 파업의 장기화로 인한 지역 경제 위축으로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면서 경찰은 단계적으로 압박을 강화해 나갔다. 7월 11일 출입문을 확보하고 7월 20일 공장 내에 경찰력을 전진 배치했으며, 7월 24일부터 8월 5일까지 차체공장과 조립공장·도장 1공장을 장악하면서 노·사간협상 타결을 이끌어 내는 등 큰 사고 없이 안전하게 사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찰은 쌍용자동차 노조원 농성과 민주노총 등 외부단체의 지원 집회(총 68회, 63,310명 참여)를 장기간 관리하면서 延 1,708개 경찰 기동대와 39개 특공 제대를 운용했다. 이 과정에서 143명이 부상당했으며, 경찰버스 23대를 비롯한 장비 148점이 파손되었다. 이에 경찰은 불법 폭력시위를 주도한 쌍용자동차 노조를 상대로 경찰의 인적·물적 피해액 총 20억 5,444만원에 대하여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파업 이후 2018년 7월까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가 자살하면서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포함한 총 33명이 목숨을 잃었고, 해고 노동자들은 사측, 경찰, 보험사 등으로부터 손배가압류에 시달리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동종 기업에 재취업마저 못했다.

5. 그 이후


  • 완성차 노조는 완전히 박살났다. 업계 임금은 완전히 동결되었고, 이후 상당수의 해당 노조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파업 당사자인 쌍용차 노조 역시 같은 해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 2010년 11월 10일 정리해고자들 중 156명이 해고무효소송을 제기했다.
  • 2012년 1월 12일, 해고무효소송 1심에서 원고패소판결이 나왔다.
  • 2012년 11월 20일, 해고노동자들의 송전탑 점거 농성이 시작되었다. 이는 171일간 지속되었다.
  • 2014년 2월 7일, 2심에서 서울고등법원은 1심의 판결을 번복하여 해고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 2014년 11월 13일, 대법원에서 쌍용차 정리해고자의 해고무효소송에 대한 최종판단을 내렸다. 해고는 적법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2018년 양승태 대법원장 사법농단 파동으로 해당 판례가 재조명되고 있다.
  • 2015년 12월 30일 해고자 단계복직에 대한 노노사(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쌍용자동차노동조합, 쌍용자동차) 합의를 했고, 단계적으로 복직이 진행되었다.
  • 이 사건은 상해기차의 먹튀 논란과도 연관이 있지만 노조의 산업 시설 점거 파업,공권력 집행에 대한 거부 행위, 파업 과정에서의 저항행위 등이 전국민적 논란을 일으켰다.
  • 2018년 8월 28일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 사실상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직접 경기경찰청장을 건너뛰고 강력진압을 승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민주노총 금속노조와 쌍용자동차 범국민대책위원회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처벌하라는 의견을 강경하게 피력했다. 게다가 경찰은 인터넷 여론을 노조의 잘못으로 몰도록 사이버작전까지 펼쳤다고 한다.
  • 2018년 9월 3일, 기무사가 쌍용자동차 집회 참가자들을 불법사찰한것도 모자라 아예 공장 내부까지 침투해 노조원들을 사찰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이 사태에 국가정보원도 개입했다고 한다.
  • 2020년 5월 4일에 복직자 35명이 쌍용차 평택공장으로 출근했다.#

6. 기타



6.1. 관련 문서



6.2. 관련/참고 자료


  • 경찰측 자료
    • 쌍용자동차사태 백서 - 경기지방경찰청. 2009.

6.3. 관련 기사



[1] 1985, 1987년 대우자동차 파업, 2000년 호텔롯데 총파업에도 투입 이후 4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