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프레드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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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Adolf Friedrich (아돌프 프리드리히)
스웨덴어: Adolf Fredrik (아돌프 프레드릭)
생애: 1710년 5월 14일 ~ 1771년 2월 12일(만 60세)
재위: 1751년 3월 25일 ~ 1771년 2월 12일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스웨덴의 국왕이다. 홀슈타인-고토르프(Holstein-Gottorp) 가문 출신으로, 1727년부터 1750년까지 뤼베크의 영주 주교였고, 1739년 사촌 칼 프레드리크가 사망하자 조카 카를 페터 울리히[1]를 보좌하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1741년 집권한 옐리자베타 여제는 카를 페터 울리히를 차르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프레데리크는 자신이 스웨덴의 차기 국왕이 되는 데 힘을 보태 줄 후원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1741~1743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서 패배한 스웨덴은 1743년 6월 23일 옐리자베타 여제의 요구에 따라 프레데리크를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선출했다. 1744년,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6녀 루이사 울리카(1720년 ~ 1782년)와 결혼했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처남이다. 이 젊은 부부는 처음엔 하타르당을 지지했지만 얼마 후 거리를 두었다.
1751년 3월 25일 프레드리크 1세가 자녀가 없자, 프레드리크는 마침내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옐리자베타 여제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황후의 조언에 따라 스웨덴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하타르당을 견제하기 위해 뫼소르당을 후원했다. 또한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스웨덴 전역을 여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왕의 행보에 의회가 반발하면서, 행정이 거의 마비되었다.
1756년 6월, 국왕 지지파는 권력을 잡기 위한 정변을 계획했으나 실패했고 그들 중 몇 명이 처형되었다. 왕과 왕비는 그들의 왕권 강화 노력을 중단하거나 물러나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결국 프레드리크는 의회가 모든 권력을 쥐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왕위를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가 1768년 차남 구스타프 3세의 도움에 힘입어 의회로부터 왕권을 되찾는데 성공했으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다가 1771년 2월 12일 폭식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구스타프 3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1] 훗날 러시아의 표트르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