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왕국'''
'''Königreich Preußen'''

'''독일 연방 가맹국'''
'''북독일 연방, 독일 제국 맹주'''(1866년 ~ 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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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상징'''
'''국가'''
프로이센의 노래
Preußenlied
Borussia
'''위치'''
[image]
[1]
'''1701년 ~ 1918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프로이센 공국'''
'''바이마르 공화국'''[2]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역사'''
'''1701년 왕국 승격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56년 7년 전쟁
1807년 틸지트 조약
1871년 독일 제국 성립
1918년 군주제 폐지'''
'''지리'''
'''위치'''
중부 유럽
'''수도'''
베를린
'''인문환경'''
'''언어'''
독일어
'''종교'''
개신교
'''민족'''
독일인
'''정치'''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3]
'''국가원수'''
[4]
'''주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대왕
빌헬름 1세
'''주요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경제'''
'''통화'''
파피어마르크
1. 개요
2. 역사
3.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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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북쪽의 미약한 약소 왕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로, 독일인의 민족적 특성을 빚어낸 '''현대 독일연방공화국의 모태'''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특유의 군국주의적 성격으로 독일 제국나치 독일의 호전적인 특성이 이 나라에서 기인하는 바도 크다.[5]

2. 역사


왕국으로 승격되기 전 동군연합 시절의 역사는 프로이센 공국 참조.
1701년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하면서 영지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및 동군연합인 프로이센 공국이 통합, 단일 왕국으로 승격하였다. 사실상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위주의 통합 및 승격이었으나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브란덴부르크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 안에 있는 선제후국이었는데 선제후가 독립적인 국가의 칭호인 왕을 사용할 시 보헤미아 왕을 겸임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호칭과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다.[6]그래서 신성 로마 제국 영토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브란덴부르크 왕국이라 하지 못하고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바깥에 있는 프로이센 지역을 사용하여 독립국의 왕이라 칭할 수 있는 프로이센 왕국이라고 칭하였다.(이로 인해 군주를 부르는 명칭도 '프로이센에서의 왕' 이었다. 유럽식 외왕내제로? 프로이센에서나 왕이니 밖에서는 왕도 아니라는 것. 이는 프리드리히 2세가 대왕 칭호를 받을만큼 날뛴 후에야 '프로이센 왕' 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동맹국이자 폴란드 왕국의 귀족 의회인 세임이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가 왕이란 칭호를 쓰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폴란드 국왕이자 작센 선제후인 아우구스트 2세는 찬성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프리드리히 3세)프리드리히 1세의 프로이센 왕위 즉위식 때 폴란드의 아우구스트 2세는 축하 전보를 보냈다.
프로이센 왕국은 동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 클레베-마르크 등 여러 곳으로 떨어져 있는 영토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은 개별적인 법률과 신분제 의회를 갖고 있었으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대에는 절대주의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8만명이라는 거대한 정예 상비군과 세수 중심의 관료기관을 바탕으로 하여 막강한 중앙집권을 이룬 프로이센은 이 때부터 '''북부 유럽의 깡패'''로 돌변하였다.신성 로마 제국의 상비군이 9만명인 것에 비해서는 적었으나 영토 대비 8만명은 많은 숫자였으며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만 정예 병사로 뽑았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도 금방 제압하고 중앙집권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에는 대북방전쟁에 참전, 오데르 강 하구의 주요 항구인 슈테틴을 확보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 때에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해 오스트리아 최고의 꿀땅인 슐레지엔을 장악하였으나, 7년 전쟁에서는 크게 밀리면서 나라가 완전 망할 뻔 했지만 어찌어찌한 덕분에(...) 살아났다. 어쨌든 프로이센은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이 북독일의 강자임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1차 폴란드 분할 때에는 서프로이센을 확보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연결하는 숙원을 달성하였고 프리드리히가 사망한 이후에는 추가로 두 차례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바르샤바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프랑스 혁명전쟁에 참전했다가 가장 먼저 프랑스 혁명정부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마인 강 이북의 영토 점유를 인정받으면서 나폴레옹이 등장한 이후에는 오히려 프랑스 편에 붙어 하노버와 브레멘 등을 합병하는 등 크게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당대의 먼치킨 나폴레옹한테 도전했다가 제4차 대불동맹 전쟁에서 지고 틸지트 조약(1807)으로 그동안 확보한 영토들을 거의 다 잃고 일시적으로 속국이 되기도 하였으나, 나폴레옹이 몰락할 즈음에 다시 동맹군에 가담해 승전국 중 하나가 되었고 빈 회의에서 북부 작센과 베스트팔렌·라인란트 등의 새 영토를 얻었다.
프로이센에서도 산업 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독일 연방에서 북독일 관세 동맹을 체결하고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한 라인란트와 슐레지엔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뒤쳐진 점이 많아 1848년 3월 자유주의/민족주의 혁명이 일어나 의회가 설치되는 등의 진전이 있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귀족이 아닌 민족, 다시 말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려던 자유주의는 프로이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지배 계층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독일 황제(입헌군주제) 추대를 거부하였다(1849).
이후 나타난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정치력으로 무력화시키고서는 아예 수족으로 부려가면서 독일 통일을 위한 대업을 실시, 슐레스비히 전쟁(1864),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에서 승리하여 1871년 연방 형식으로 독일 통일을 완수, 독일 제국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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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은 통일 과정 중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하노버 왕국, 헤센-카셀 선제후령, 나사우 공국 등을 병합하며 세력을 크게 불렸으며 이 세력을 바탕으로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제국의 면적의 66% 정도, 인구의 60% 정도를 차지하며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하였다. 이와 같은 독일·프로이센의 이중 구조는 제국이 멸망하고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프로이센 자유주'라는 형태로 존속하였다.
최초의 중앙집권적 근대 통일 국가를 건설한 국가로서 프로이센은 일견 독일이 가지는 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나라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결과 현재의 독일은 옛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 중 절반 이상이 폴란드와 러시아에 할양된 상태이다. 왕국으로 승격될 당시의 영토로만 한정할 경우 브란덴부르크 정도만 제외하면 독일에 남아있는 영토가 전무하다.[7] 현대 독일에 있어 프로이센은 자신들의 역사의 일부로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는 국가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단절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애초에 사실상 현재의 독일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세 총리들(콘라트 아데나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리 브란트)부터가 반프로이센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고, 과거 프로이센 영토의 대다수는 소련 영향력 하의 동독이 되어 프로이센 물이 많이 빠지게 되었다. 이후 현재에도 독일에서 프로이센에 대한 부정적/비판적 주석이 배제된 긍정 일변도의 서술이나 찬양은 금기시 되고 있고, 두 번의 군국주의/전체주의 독일 제국에 크게 데인 주변국들 또한 현대 독일 내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프로이센과 연관되려는 움직임을 감시하며 개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3. 관련 항목


[1] 진한 초록은 1866년 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최대 영토이고, 연한 초록은 북독일 연방의 구성국이다. 북독일 연방은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로 결성되었고 그 외의 구성국들은 사실상 프로이센의 위성국이었다. 북독일 연방은 보불전쟁 이후 독일 제국으로 이어진다.[2] 프로이센 자유주[3] 말이 입헌군주제이지 국왕의 권한이 강대하여 사실상 전제군주제나 마찬가지였다. 현대 아랍 입헌군주제 왕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1차 대전 말기인 1918년 재상이 된 막시밀리안 폰 바덴이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 하였으나 11월 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우리나라도 대한 제국을 선포할 때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독일식 입헌군주제 사이에서 고민하였으나 전제군주제를 선포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고종은 전제군주국을 선포했다.[4] 프로이센 국왕은 이후 북독일 연방의 의장과 독일 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된다.[5] 모태부터 튜튼 기사단의 국가였던 독일 기사단국, 그 다음 세속화되면서 프로이센 공국에서 왕국으로 커진 국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군국주의로 발전한 부분도 있다. 근대~현대로 이어지는 독일의 스테레오타입이라 할 수 있는 군사적, 수직적인 모습은 여기서부터 이어진 것.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인 소세지와 맥주를 좋아하고 독일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이미지는 역으로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주의 이미지이다.[6]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승격되기 전까지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내에선 왕이라는 직책은 딱 2개만 존재했다. 황제의 후계자가 될 로마 왕(=독일 왕),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겸임하고 있는 선제후인 보헤미아 왕.[7] 그렇다 해도 브란덴부르크는 수도 베를린이 위치해 있는 프로이센 왕국의 실질적인 수도이자 중심지였고 이미 위에서 설명한 대로 사실 '프로이센'이란 명칭은 이름만 따온 간판에 불과했다. 물론 상실한 영토가 커서 엄청난 타격이 가해지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