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이논 전투
1. 개요
740년 아나톨리아 반도의 아크로이논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온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압달라 알 바탈이 이끄는 아랍군을 격파한 전투로, 10여년 후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과 아바스 왕조의 등장에도 큰 영향을 준 전투이며, 프린스턴 대학 비잔티움·그리스학 교수 John Haldon의 'The Empire That Would Not Die: The Paradox of Eastern Roman Survival, 640-740'의 740년은 이 전투의 동로마측의 승리에 의미를 두고 잡은 연도일 정도로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2. 배경
지난 1세기 동안 아랍인들은 지속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를 침략해왔으며, 718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켜내는데 성공한 후에도 이들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히샴이 즉위한 이후로 침략이 더욱 더 격화되었다. 718년 이후로 아랍인들의 목적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영구 정복에서 아나톨리아 농촌 약탈로 변화하였고, 아나톨리아 반도, 특히 동부의 카파도키아는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하자르와의 전쟁으로 우마이야 왕조의 국력이 소모되고, 투르-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우마이야 왕조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점차 아나톨리아에서의 아랍인들의 성공은 줄어들었고, 이 시기의 침략은 아나톨리아의 핵심 지역인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737년 우마이야 왕조가 하자르인들을 크게 격파하면서 우마이야 왕조는 다시 동로마 제국을 향해 전력을 투사할 수 있게되었고, 칼리파 히샴은 아나톨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740년, 히샴은 자신의 아들 술레이만을 대동한 자신의 치세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원정대를 편성하였다.
3. 전투
원정이 시작되고 알 가미르가 이끄는 경무장한 1만명의 병력은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를 공격하러 향했고, 압달라 알 바탈과 압 말리크 이븐 슈에비브가 이끄는 군대가 뒤를 따랐으며, 히샴의 아들 술레이만이 이끄는 군대가 카파도키아를 급습했다. 레온 3세의 군대는 압달라 알 바탈의 군세와 맞서 싸웠는데, 구체적인 전투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레온 3세의 동로마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만여명의 아랍군이 전사했으며, 아랍군의 두 지휘관 모두 전사했다. 나머지 원정군들도 아나톨리아의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요새화된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극심한 굶주림을 겪은 뒤 철수했다. 이때 동로마 제국군은 2만명에 달하는 포로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4. 영향
아크로이논에서의 승리는 2차례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제외한 아랍인들과의 주요 전투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첫 승리라는 의미를 가지며,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이후부터 매우 수세적인 입장이였던 동로마 제국이 아랍인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전환하게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콘스탄티노스 5세 치세 초기의 내란으로 아랍인들의 아나톨리아 침략은 재개되었으나, 침략의 위력은 크게 감소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압박이 약화되는 결과를 불러왔고, 이후 콘스탄티노스 5세는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틈타 이슬람 제국에 공세를 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