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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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재위 741년
2차 재위 743년 11월 ~ 775년 9월 14일
1. 개요
2. 치세
2.1. 즉위, 찬탈과 복위
2.2. 전염병 (페스트)
2.3. 영토 : 일희일비
2.3.1. 동방에서의 손쉬운 승리
2.3.2. 라벤나 상실 (751년)
2.4. 강력한 성상 파괴주의
2.5. 대 불가리아 전쟁
3. 참고자료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ῖνος Ε΄, Kōnstantinos v
생몰 718년 7월 ~ 775년 9월 14일

1. 개요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히샴과 대결하던 중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르타바스도스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였지만 아나톨리아 테마의 도움으로 복위에 성공하였다. 그는 이후 성상파괴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후 3차 무슬림 내전 (피트나)를 틈타 동방의 실지를 회복해 나갔다. 하지만 아나톨리아에 치중하는 동안 이탈리아의 거점인 라벤나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뺏기고 말았다. (751년) 다만 불가르 족과의 전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트라키아를 보전해내었다. 그는 비록 성성 파괴를 강화하여 미움을 샀지만 30여년의 기나긴 통치기간 동안 국경을 안정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2. 치세



2.1. 즉위, 찬탈과 복위


741년에 즉위한 콘스탄티누스 5세는 그 해에 아르메니콘 테마의 사령관이자 본인의 매부였던 아르타바스도스에게 당시 3차 피트나로 어지럽던 우마이야를 공격하여 고토를 수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국경을 향하던 그는 수도로 회군하여 황위를 찬탈하였다. 콘스탄티노스는 부친 레오 3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론자였으나 아르타바스도스는 성상 옹호론자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성상 파괴 진영은 아나톨리콘 테마와 트라케시안 테마로 구성되었고 아르타바스도스의 성상 옹호 진영은 아르테미콘 테마와 옵시키온 테마가 중심이었다. 743년 11월, 두 세력은 소아시아의 사르데스에서 격돌하였는데 성상 파괴 진영이 승리하여 콘스탄티누스 5세는 복위에 성공하였다. 아르타바스도스와 그 아들은 원형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실명되었고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는 곤장을 맞은 후 벌거벗은 채로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경기장을 한바퀴 도는 수모를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총대주교 직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총대주교의 힘을 누르고 황권을 드높이려는 콘스탄티노스 5세의 속셈이었다.

2.2. 전염병 (페스트)


745년 ~ 747년간 제국 내에 유행한 흑사병은 인구의 1/3을 앗어가며 541년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래로 제국의 가장 많은 인구 손실을 유발하였다. 7세기부터 이어진 전쟁에 전염병까지 겹치자 고대 로마부터 내려오던 귀족 계급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콘스탄티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 부족을 에게 해의 여러 섬의 인구를 이주시켜 채웠다고 한다. 다만 아나톨리아의 인구 부족은 달리 대처할 수 없었다.

2.3. 영토 : 일희일비



2.3.1. 동방에서의 손쉬운 승리


3차 피트나로 아랍 인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리고 압바스 왕조가 탈라스 전투 등 중앙아시아에 신경쓰는 동안 동로마 군대는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게르마니케아를 점령하였다. (746년) 그리고 트라키아의 주민들이 이주되어 도시를 방어하게 했다. 747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진한 아랍 함대를 그리스의 불로 격파하였고 아르메니아, 더 나아가 (무려 백년만에) 메소포타미아까지 공격하는 위엄을 보였다.

2.3.2. 라벤나 상실 (751년)


동방에서의 활약과는 달리, 서방에서는 제국의 위세가 약화되었다. 라벤나 시민들은 성상 파괴주의를 밀어붙이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고,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이스툴프가 라벤나를 점령했다. 이로서 제국의 북이탈리아 거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라벤나 뿐만 아니라 안코나, 리미니 등 펜타폴리스 일대, 페루자도 랑고바르드 왕국에 빼앗겼다. 다만 755-6년에 걸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축출했고, 피핀 3세는 로마 교황에게 이 영토를 헌납함으로서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피핀의 기증)

2.4. 강력한 성상 파괴주의


754년 2월 10일, 콘스탄티노스 5세는 칼케돈 동남쪽의 도시인 히에리아에서 종교 회의를 열었다. 5대 총대주교가 모두 부재한 상황에서 티베리오스 2세의 아들이자 에페수스의 주교였던 태오도시오스가 사회를 맡았고, 몇달에 걸친 회의 끝에 그해 8월 29일에 결론이 공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은 명확히 규정할 수 없으므로 유한한 공간의 형상 (이콘)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성모/성인을 표현한 성상은 우상숭배로 간주된다는 것이었다.

2.4.1. 수도원 탄압


레오 3세 때에 성상파괴운동이 시작되며 성상과 성유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던 수도원은 탄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5세 시기에 그 강도는 이전과 바교할 수 없을만큼 강해졌는데, 바로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직접적인 억압이 미친 것이다. 그에 강력히 반발하던 비티니아의 대수도원장 스테파누스는 투석형으로 죽었고 트라키아에서는 수백명의 수사(남성 수도자), 수녀(여성 수도자)들이 공개적인 모욕, 신체 절단, 심한 경우에는 처형까지 받았다. 트라키시온 테마의 총독은 남녀 수도자들을 모아놓고 결혼을 강요하고 거부하자 수염에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런 식으로 제국 각지에서 수도원의 성물과 보석으로 장식된 그 보관함이 매각되어 황제의 금고로 들어갔으며 그 토지 역시 몰수되었다. 다만 이러한 수도원 파괴 운동의 와중에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고문서들이 파괴되어 8세기의 동로마 역사를 암흑의 시대로 기록되게 하였다. 수도원 억압으로 인해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후, 대부분 수도원 출신이던...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1] 하지만 그를 변호해 보자면, 연속된 전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위안을 찾아 수도원으로 몰려들었고, 그로싸 수도원의 재산과 규모는 늘어났는데 반해 농촌 인구와 농업 생산성, 군인의 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제국의 경제와 국방력에 큰 손실이 되어 콘스탄티노스는 중흥기를 준비할 인력과 재산을 창출해내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2.5. 대 불가리아 전쟁


740년대 후반의 승리로 시리아, 아르메니아 인들이 제국에 투항하였는데 콘스탄티노스는 게르마니케아로의 이주로 빈 땅이 생긴 트라키아 북부에 그들을 정착시켰고 새로운 성을 쌓았다. 이에 불가르 측은 716년의 협약 (비무장지대 설정) 위반이라 주장하며 텔레츠 왕의 지휘 하에 남하하였다. (756년) 이후 전쟁은 매년 이어졌고 763년 6월 30일에 큰 전투가 일어났는데, 콘스탄티노스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친정하여 하루종일 벌어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오랜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개선식과 그를 기념하는 경기가 열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황제로 동로마인의 집단의식에 강하게 각인되었는지, Sergio Bertelli의 'The King's Body; Sacred Rituals of Power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Europe'의 30p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수십 년 뒤인 812년, 니키포로스 1세가 이끄는 로마군이 그 전 해 811년에 플리스카에서 크룸의 매복에 걸려서 황제 본인까지 전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 목전까지 역공해 온 불가리아군의 위협에 맞닥뜨리게 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묘역에 몰려가서 석관에서 '''시신을 끌고 나온 후''' 시신을 향해서 "깨어나서 위험에 처한 그대의 신민들을 구해주시옵소서"하고 외쳤다고 한다.[2]
전쟁은 773년에도 일어났고 775년 8월에 재차 친정에 나선 콘스탄티노스는 폭염으로 다리가 붓자 아르카디오폴리스를 거쳐 화군하였는데, 수도를 목전에 두고 배 위에서 죽었다.(9월 14일) 향년 57세였다.

3.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별명인 코프로니무스는 똥싸개라는 뜻이다(...). [2] 원문: At the time of the siege of Constantinople by the Bulgars, in 812, the crowd broke down the gates that led to the imperial tombs and dragged the body of Constantine V from its sarcophagus, crying: “Arise! Save your endangered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