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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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우마이야 왕조는 초창기 무아위야 1세 시기에 이미 두 차례(668 ~ 669년, 673 ~ 67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두 포위가 실패한 후 30년의 강화 조약을 체결한 무아위야 1세는 화병에 걸려 죽었고 680년 이후 2차 이슬람 내전을 겪으며 동로마 제국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내전은 아브드 알 말리크의 치세인 692년에야 진정되었고 우마이야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여 내전기에 상실하였던 아르메니아를 회복하였고, 698년에 카르타고를 함락하여 북아프리카를 평정하였다. 말리크의 뒤를 이은 왈리드 1세 시기에는 이베리아 반도[1] 와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신드 지방이 정복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승천을 경계하던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 715년 2월, 왈리드가 사망하고 술라이만이 뒤를 잇자 아나스타시오스는 정권 교체기를 노려 시리아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출정 명령을 받은 옵시키온 테마가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고 6개월 간의 포위 공격 끝에 아나스타시오스를 폐위하여 옵시키온 테마의 세금 징수원을 테오도시오스 3세로 즉위시켰다(715년 11월). 한편,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지켜보던 우마이야의 신임 칼리파 술라이만은 무아위야 1세 때에 이루지 못하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미 이슬람은 서쪽의 스페인에서부터 동쪽의 트란스옥시아나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황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핵심부인 시리아에서 가장 가까운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은 필연적인 순서였다.
1.1. 동로마 제국의 혼란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이후 2차 내전을 겪으며 우마이야 왕조는 십수년간 혼란을 겪었다. 686년부터 이슬람이 동로마 제국에 조공을 바치기까지 했다. 이후 아브드 알 말리크와 왈리드 1세의 치세를 겪으며 우마이야 왕조는 국력을 회복하였다. 692년의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이슬람군이 슬라브인들을 매수하여 동로마군을 격파한 것으로 평화는 끝났다. 그리고 695년에 세바스토폴리스의 패장인 레온티오스가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유배시키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를 틈타 말리크는 698년에 카르타고를 공격하였는데 레온티오스가 파견한 함대를 격퇴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이때 처벌을 두려워한 패잔병들이 게르만계 장수인 아프시마르를 옹립하곤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티베리오스 3세로 즉위시켰다.
티베리오스 3세는 동생 이라클리오스를 아나톨리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을 모두 격퇴하고 703년부터는 오히려 마슬라마의 관할인 시리아 북부와 아르메니아를 약탈하였다. 이에 말리크가 킬리키아를 공격했지만 그 역시 격퇴되었고 티베리오스는 키프로스에 동로마 군대를 주둔시켜 시리아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704년에 유배지를 탈출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불가르 칸국의 군대를 빌려 705년 초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고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오스 3세는 처형되었다. 그해 10월, 시리아에선 말리크가 죽고 왈리드가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복위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막 즉위한 왈리드는 처음엔 우호 관계를 맺었다. 유스티니아노스가 무슬림 포로 6천명과 건축가들을 보내주자 왈리드는 후추와 보물로 보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707년부터 왈리드는 이복동생 마슬라마를 앞세워 아나톨리아 지역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마슬라마는 708년에 티아나, 709년에 아모리움과 이사우리아 일대를 점령하며 아나톨리아 중서부까지 진출했다. 그 공으로 마슬라마는 킨나스린 (북 시리아) 총독에서 아르메니아 총독을 겸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불가르 칸국을 배신했다가 그들에게 대패하였고 로마 교황을 강제로 폐위시키며 인망을 잃었다.
711년, 크림 반도의 케르손에서 유스티니아노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기존에 반란을 일으켜 그곳에 유배되어 있던 바르다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였다. 필리피코스로 개명한 바르다네스는 유스티니아노스와 그 일가를 처형하고 제위를 찬탈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복위를 도왔던 불가르 칸국이 그의 복수를 꾀한다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였는데, 이에 필리피코스는 옵시키온 테마에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필리피코스를 장님으로 만들고 폐위시켰다. 713년 6월, 옵시키온 테마는 시민의 의견대로 관료이던 아르테미우스를 아나스타시오스 2세로 옹립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3년간 2번의 쿠데타를 겪자 마슬라마는 712년에 아마시아를 약탈하였고 714년에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동로마 거점이던 말라티야를 함락하였다. 칼리파 왈리드의 아들 압바스가 712년에 세바스티아폴리스, 713년에 피시디아 등 아나톨리아 남부를 지속적으로 약탈하였다. 714년 경에 타우루스 산맥 방어선은 이미 붕괴되었고 앙카라 일대가 실질적인 국경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영토를 모두 잃을 위기에 처하였다. 다만 이때부터 하자르 칸국이 우마이야 지배 하의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2년간 마슬라마를 붙잡아 두면서 이슬람의 공세는 둔화되었다.
또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유능한 황제였다. 그는 자신을 옹립한 옵시키온 테마의 장교들을 숙청했고 단의론을 철폐하며 종교적 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왈리드의 치세에 우마이야 군대는 마그레브를 평정했고 이베리아 반도와 북서 인도, 트란스옥시아나 등지를 정복하였다. 이에 이슬람의 다음 목표가 동로마 제국이 될 것을 예상한 아나스타시오스는 티베리오스 3세에 이어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을 보수하였고 3년치 식량을 비축해두었다. 한편, 동쪽에서 페르가나 정복이 끝나가던 715년 2월에 우미이야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칼리파 왈리드가 죽고 동생 술라이만이 뒤를 이었다.
2. 전개
2.1. 동로마 제국의 내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요새화 해놓은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술라이만이 신임 칼리파로 즉위하자 이를 기회라 여기고 선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 레온에게 시리아를, 해군에게 로도스를 공격하게 한 후 옵시키온 테마와 합류하여 시리아 공격에 동참하게 하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옹립한 황제에게 숙청된 경험이 있던 옵시키온 테마는 로도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세금 징수원 테오도시오스 3세를 옹립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이슬람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보강한 성벽을 같은 동로마 군대가 공격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 군대가 공격하기 전부터 옵시키온 테마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가 한창이던 715년 9월, 이븐 무아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군대가 아나톨리아를 습격하였다. 두달 후에 아나스타시오스가 테살로니카의 수도원으로 피신하며 테오도시오스 3세가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나톨리콘 테마의 레온과 아르메니콘 테마의 아르타바스도스는 신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며 이에 칼리파 술레이만은 동로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결심하였다.
2.2. 레온 3세의 즉위
1차 공격 이후 킬리키아에서 월동을 한 무아드의 육군은 716년 봄에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아나톨리콘 테마의 주도인 아모리움을 공격하였다. 동시에 우마르 이븐 후바이라의 해군은 킬리키아 해안을 따라 북상하였으며 총사령관인 마슬라마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의 주력 군대는 시리아에 집결하고 있었다. 한편, 이때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 레온과 마슬라마 사이의 계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레온은 아모리움에 소수의 지원군만을 보냈고 보급품이 떨어진 이븐 무아드가 철수했음에도 그를 추격하지 않았다.
716년 여름, 레온은 아르타바스도스의 추대로 황제를 칭하였고 옵시키온 테마로 진격하여 니코메디아를 함락, 테오도시오스 3세의 아들을 생포하였다. 동시에 마슬라마는 이븐 무아드와 합류하여 페르가몬과 사르디스를 약탈하고 에게 해 연안에서 월동하였다. 해가 바뀐 717년 3월 말, 레온의 군대는 별 저항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였고 수도원으로 은퇴한 테오도시오스 3세의 양위를 받아 레온 3세로 즉위한다. 이때 테오도시오스 3세는 그의 치세에서 추후 제국을 구원하게 될 일을 하나 하는데, 바로 불가르 칸국과 평화 조약을 맺은 것이다.(716년)
2.3. 그리스의 불
황제로 즉위한 레온 3세는 마슬라마와의 밀약은 지켜지 않았다. 717년 6월, 마슬라마는 수만의 병사들을 태운 전함과 함께 다르다넬스를 지나 8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성을 쌓아 장기 주둔을 준비하였고 9월 초에 보스포러스 해협에 상륙한 이븐 무아드의 군대가 합류하였다.
하지만 해군은 40년 전의 포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불에 막혀 패퇴하였다. 따라서 동로마 해군은 여전히 흑해의 곡창 지대[2] 로부터 밀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한편, 717년 10월에 술라이만이 죽고 그의 사촌 우마르 2세가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2.4. 본격적인 포위
718년 봄, 우마이야 왕조의 증원 함대가 마르마라 해에 진입하며 본격적인 포위가 시작되었다. 8세기의 아랍 연대기는 무슬림 전사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고 10세기의 연대기는 그 숫자가 12만 ~ 2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동로마의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는 이슬람 함대가 1,800여 척에 달했다고 기록하였다. 그 해 6월 경, 마슬라마의 군대도 프리기아를 점령한 후 헬레스폰트 (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넜고 (워낙 대군이었기에) 7-8월의 두 달에 걸쳐서야 1년 전에 와있던 선발대와 합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바깥에 포위망을 구축한 이슬람군은 앞뒤로 성벽을 쌓아 동로마군의 후방 습격에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여담으로 이는 갈리아 전쟁 시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보여주었던 이중 포위망과 유사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레온 3세는 마슬라마에게 수도의 시민 전체 몫에 해당하는 금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마슬라마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슬람 수비대를 조직하는 등 승리를 확신한 상태라 패자와의 평화는 없다며 콧방귀를 꼈다.
9월 3일에는 헵도몬에 정박 중이던 술레이만 이븐 마우드의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나타나는 등 동로마 측에는 더욱 악재가 쌓여갔다. 술레이만의 함대는 갈라타와 칼케돈 인근에 정박하였고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흑해와의 항로도 이용하기 힘들어졌다.
2.4.1. 뜻밖의 승리
처음에는 우세를 점한 이슬람군이지만 동로마 해군을 격파하지 못한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봉쇄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투는 지구전 양상으로 흘러갔는데 혹독한 겨울을 보내던 이슬람군은 기아에 시달렸고 전염병까지 창궐하며 큰 피해를 입는다.[3]
새로 칼리프가 된 우마르 2세는 이집트와 키레나이카에서 새로 편성한 병력을 2개 함개로 나누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지원군은 그리스의 불을 피해 니코미디아와 칼케돈에 각각 상륙했지만 많은 수가 이집트 출신 기독교인이던 이 병력은 상당수의 탈영병이 속출했고 그에 힘입은 레온 3세는 다시금 해전에서 승리하여 이슬람군의 보급품을 빼앗았다.
여기에 불가르의 기습까지 당하자 칼리프 우마르는 더 이상 공성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포위 13개월 째에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하필 이슬람군이 철수하는 도중에 산토리니 분화가 겹쳐 오직 5척의 배만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이슬람측 기록으로만 15만 명의 무슬림이 사망했다고 기록할 정도의 대참패였다.
여담으로 719년, 폐위되었던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불가르 칸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후 처형되었다.
3. 결과
이슬람의 함대와 병력 피해는 심각했다. 이 실패로 이슬람의 진출은 저지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와 시칠리아를 회복하는 등 위태롭던 상황을 극복하고 역으로 공세에 나섰지만 그때까지의 열세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나다. 우마이야 왕조는 2년 뒤 재차 동로마 제국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이는 20년 뒤에 아크로니온에서 동로마 제국이 승리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크게 패배한 우마이야 칼리프는 큰 타격을 입고 이슬람의 유럽진출이 사실상 좌절된다. 이후 732년의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까지 대패한 우마이야 왕조는 반란으로 인해 서쪽으로 몽진하고, 아바스 왕조가 세워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