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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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Λέων Γ' ο Ίσαυρος
생몰년 : 685년 ~ 741년 6월 18일
재위기간 : 717년 3월 25일 ~ 741년 6월 18일
1. 개요
2. 생애
2.1. 제위에 오르기까지
2.2. 치세


1. 개요


우마이야 왕조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격퇴하고 테마 제도를 정비하여 제국을 구원한 명군이자 동시에 '''성상 파괴령을 내려 이후 한 세기가량 종교적 갈등을 유발한 황제.'''

2. 생애



2.1. 제위에 오르기까지


한미한 농민 출신이었으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복위를 조력하여 출세가도를 걷게 되었다. 이후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아나스타시오스 2세의 치세에는 최중요 테마인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가 되었다.
테오도시오스 3세의 치세에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아르타바스도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 총대주교와 원로원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717년 3월 25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2.2. 치세


재위 내내 이슬람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아내는 성과를 내었다. 당장 제위에 오른 717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치러냈으며, 727년 니케아, 739년 니코폴리에서 아랍인들을 격파하였고 결정적으로 740년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생존을 위해 전력을 다하던 제국은 그의 즉위를 전후하여 개편된 체제가 자리잡아가기 시작하여 중흥의 발판을 닦게되었다.'''
대표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제국의 세제였던 양출제입의 분배세가 현대의 재무제표와 비슷한 서류에 근거한 '''양입제출의 세제'''로 바뀌어가기 시작하였다. 711년 필리피코스 황제의 시대부터 시작되어 802년 니키포로스 1세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되었지만, 그의 치세에 당면한 외침을 극복해내기 위한 급박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실시하고 그 기반을 닦은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편성만 해놓은 채 둔전 지급도 제대로 되지 않고 경계도 불분명하던 테마 제도 역시 그의 치세에 점차 다듬어지기 시작하여 니키포로스 1세의 치세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식으로 행정이 제대로 굴러가자 경제 구조가 개편되고 군사적인 자신감이 붙자 제국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으며, 적극적으로 이민족을 수용하여 인구 성장의 기반도 마련하였다.
그러나...

2.3. 성상 파괴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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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과 반란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내어 지위가 공고해지자 황제는 성상 문제를 공개적으로 건드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저런 조짐을 보이더니 '''726년에 성상파괴령을 내린 것이다.'''
구약에 근거한 우상 숭배 금지는 이전 시대부터 성상을 이용한 포교와 함께 문제가 제기되어 왔으나, 옛날부터 오리엔트 정교회의 영향력이 강력했던 동방 테마들이 우상 숭배 금지를 외치며 성장한 이슬람과 정면으로 맞서게 되자 황제는 해당 지역의 주교들의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대내적인 이유도 있었다. 첫째, 외침이 이어지고 피난민과 이민족이 제국으로 유입되어 사회가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국가의 구심점이 될 국가 종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필요가 있었다. 둘째, 동양의 황제처럼 정교일치가 아니라 종교권력과 영향력을 나눠 경쟁하던 로마의 황제로선 성상을 옹호하던 교회(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대체로 성상 옹호파였다.)를 신학 논쟁으로 공격하여 영향력을 낮출 수 있었다. 셋째, 성상을 옹호하는 주교를 네스토리우스파 등의 이단으로 몰아 교회 재산을 손쉽게 몰수하여 국가 재정에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0여 년 동안의 성상 파괴 운동 끝에 성상 공경은 70여 년 후인 787년의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신앙으로 인정받았으나, 성상 파괴주의가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843년으로 '''100년을 넘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라벤나 총독부와 총독부의 통제를 받던 이탈리아인들은 여전히 성상을 공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정부에 반발했고, 727년에 반란을 일으켜 사실상 제국에서 독립해버렸다. 결국 이는 콘스탄티노스 5세 재위기 라벤나 총독부의 해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상 파괴령에 완강하게 저항했던 교황에 대한 보복으로 종전에는 로마 교구에 속했던 일리리쿰과 현대 그리스의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로 옮긴 것도 레온 3세였다. 그때문에 수백 년간 이루어진 동서 대분열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레온 3세는 741년 6월 18일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