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15호

 



'''APOLLO 15'''
[image]
'''아폴로 15호 미션 패치'''
'''이름'''
아폴로 15호
'''호출부호'''
사령선: CM-112, 인데버
달 착륙선: LM-10, 팰콘
'''발사일'''
1971년 7월 26일
13시 34분 00초 UTC
케네디 우주센터, 플로리다 LC 39A
'''달 착륙일'''
1971년 7월 30일
22시 16분 29초 UTC
'''월면차'''
LRV-1
'''달 선외 활동'''
18시간 34분 46초
'''달착륙 시간'''
2일 18시간 54분 53초
'''월석 질량'''
77 kg (170 lb)
'''귀환일'''
1971년 8월 7일
20시 45분 53초UTC
'''달궤도 시간'''
6일 1시간 12분 41초
'''미션 기간'''
12일, 07시간 11분 53초
'''우주선'''
사령선 - 엔데버(Endeavour)
달착륙선 - 팰콘(Falcon)[1]
'''사령관(CDR)'''
데이비드 스콧 [CDR백업]
'''사령선 조종사(CMP)'''
알프레드 워든 [CMP백업]
'''달착륙선 조종사(LMP)'''
제임스 어윈 [LMP백업]
1. 개요
2. 과정
2.1. 계획과 훈련
2.2. 하드웨어
2.3. 아폴로 15호 사령선의 SIM 베이
2.4. 발사
2.5. 발사 시의 사고
2.6. 달 주회 궤도에서의 작업
2.7. 지구로의 귀환
3. 우표 스캔들
4. 승무원
5. 기타
6. 미디어매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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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아폴로 15호의 승무원들
왼쪽부터 데이비드 스콧, 알프레드 워든, 제임스 어윈 순[2]
1971년 7월 26일에 발사되었으며, 데이비드 스콧(사령관), 앨프리드 워든(사령선 조종사), 제임스 어윈(달착륙선 조종사)이 탑승했다. 신형 우주복을 사용한 첫 임무이고, 로버(rover)라는 이름의 월면차를 사용한 최초의 달 탐험대이며, 3회의 선외활동을 행한 최초의 미션이다. 아폴로 계획에서 9번째로 발사된 유인우주선이다.

2.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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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위의 제임스 어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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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5호 착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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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5호가 가져온 제네시스 록(Genesis roc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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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수한 아폴로 15호. 낙하산 1개가 펴지지 않은 것이 보인다.
이들의 목적은, 달에 가서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넘어 '''과학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매우 많은 월석을, 그것도 고퀄리티의 레어템들로 골라서 가져왔다.[4]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위 사진에 있는 제네시스 록이다. '창세기의 바위'라는 이름답게 이 돌의 나이는 46억 년으로, 달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돌이 되었다.
처음으로 월면에서 스탠드업 EVA[5]를 실시했고, 달에서 지구까지의 비행 도중 사령선 조종사가 심우주 EVA를 실시한 미션이기도 하다.

2.1. 계획과 훈련


[image]
1971년 3월 19일, 지질학 훈련 중인 데이빗 스콧 선장
아폴로 15호의 승무원은 과거 아폴로 12호의 예비 승무원이었던 멤버이다. 아폴로 12호의 정승무원이 전원 해군 출신자인 한편, 예비 승무원은 전원이 공군 출신으로, 양자간에는 우호적이면서도 경쟁 의식이 있었다.
당초의 계획에서는 아폴로 15호는 아폴로 12호, 아폴로 13호, 아폴로 14호와 같은 「H미션」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폴로 13호 임무 종료 후의 1970년 9월 2일에 NASA는, 당초 예정이었던 아폴로 15호와 아폴로 19호의 임무를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에 수반해 나머지 임무의 성과를 최대한으로 얻기 위해 새롭게 아폴로 15호는 과학 조사 주체의 「J미션」으로서 비행하게 되어, 월면차를 사용한 첫 미션이라고 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계획 변경에 수반해 15호 팀의 훈련에 생긴 변경점의 큰 하나는 지질학의 훈련이었다. 이전의 비행에서도 승무원은 야외 지질학의 훈련을 받고 있었지만, 아폴로 15호에서는 처음으로 이 훈련이 우선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스콧과 어윈은 선캄브리아대를 전문으로 하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지질학자 리 실버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실버는 후에 아폴로 17호에 탑승하는 지질학자 해리슨 슈미트가, 그전까지 NASA가 임용하고 있던 지질학의 강사를 대신해 추천한 인물이었다. 실버는 수많은 실적 중에서 특히, 1950년대 후반에 암석 중의 우라늄의 동위체가 납에 붕괴하는 현상을 이용해 암석의 연대 측정을 행하는 수법의 중요한 개량을 행한 일로 알려져 있었다. 최초로 실버는 보통 야외 지질학의 강의와 같게, 아폴로 15호의 정승무원과 예비 승무원을 여러 가지 지질학적 특징이 있는 장소에 데려갔다. 그러나 발사가 가까워지는 것에 따라 이러한 야외 조사는 점차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승무원들은 달표면에서 사용하는 백 팩의 모형을 짊어져, 텐트에 있는 교신 담당 관제관과 트랜스시버로 통신을 행했다.[6] 임무의 실전에서는 지질학자의 그룹이 교신 담당관이 되어, 우주비행사의 설명에 의지해 조사 지역 상태를 파악하게 된다.
아폴로 15호가 해들리 골짜기 부근에 착륙한다고 하는 결정은 1970년 9월에 확정되었다. 착륙 지점 선정 위원회는 착륙 지점 후보를 해들리 골짜기와 마리우스 크레이터의 2곳으로 좁히고 있었다. 이러한 가까운 곳에는 화산성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낮은 돔상의 지형이 점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폴로 미션에서는 임무 선정에 선장의 의향이 최종결정까진 아니기는 하지만 항상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폴로 15호의 데이빗 스콧의 선택은 명쾌하게 해들리 골짜기를 상세하게 탐사하는 것을 희망했다. 사령선 조종사 알프레드 워든도 지질학의 훈련을 받았지만, 그의 훈련은 약간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집트인인 학자 파르크 엘 바즈와 함께 비행기로 여러 지역을 비행해, 달 주회 궤도상의 사령선에서 보았을 때에 달표면의 지표가 흘러가는 속도를 상정한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에 의해서 그는 눈아래를 통과하는 물체의 관찰에 꽤 숙련되었다.

2.2. 하드웨어


아폴로 15호로 처음으로 사용된 월면차보잉사가 수주해 1969년 5월에 개발되었다.[7] 월면차는 격납시에는 1.5m × 0.5m 의 사이즈로 작게 접을 수 있었다. 무부하시의 중량은 209 kg 로 비행사 2명과 장치류를 탑재했을 경우의 중량은 700 kg 이었다. 각 차 바퀴는 독립 구동으로, 전동 모터에 의해 각 1/4 마력 (200 W)의 출력을 발생시켰다. 차의 조종은 어느 쪽의 비행사도 가능하게 되어 있었지만, 통상은 선장이 조종했다. 이동 속도는 약 10-12km/h 로, 이것에 의해 비행사는 처음으로 착륙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까지 이동할 수 있었고, 게다가 충분한 시간을 과학 조사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폴로 15호를 발사한 새턴 V 로켓은 SA-510으로 불렸고, 10번째의 비행 기체였다.
아폴로 15호의 사령선은 CSM-112로, 캡틴 쿡의 남태평양 탐험의 제1회 항해의 범선 인데버호를 기념하여 호출 부호는 인데버라고 명명되었다. 달착륙선의 호출 부호는 LM-10으로 공군 학교의 마스코트를 기념하여 팰콘이라고 명명되었다. 당초의 계획에 근거하는 H미션으로의 아폴로 15호에는 CSM-111과 LM-9가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션이 변경됨에 따라 CSM-111 사령선은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서 사용되었으며, 달착륙선 LM-9는 미사용인 채 현재는 케네디 우주센터에 전시되고 있다.
월면차 탑재 등으로 탑재물의 하중이 늘어남에 따라, 로켓의 발사 궤도나 새턴 V 로켓 자체에도 변경이 더해지게 되었다. 로켓은 보다 남쪽의 방위(방위각 80-100도)에 발사되게 되어, 지구 주회 궤도는 고도 166 km 까지 인하되었다. 이 2개의 변경에 의해, 하중 500 kg의 여유가 생겼다. 로켓 추진제의 여유분도 삭감되어 제 1단(S-IC)의 역추진 로켓도 8개에서 4개로 줄여졌다. 제 1단의 5기의 엔진 중 먼저 연소가 정지하는 중앙의 1기와 분리 직전까지 연소하는 외측의 4기의 양쪽 모두가 연소시간이 연장되었다. 또 제 2단(S-II)에도 진동을 억제하기 위한 개량이 더해졌다. 달 착륙선에서는 연료와 산화제의 탱크가 하강단과 상승단이 모두 확대되어, 하강단의 엔진도 연장되었다. 또 전력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 배터리와 태양전지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변경에 의해서 달 착륙선의 중량은 약 16,330 kg 이 되어, 이전보다 1,800 kg 증가했다.
게다가 아폴로 15호부터는 우주비행사도 신형의 우주복을 입게 되었다. 이전 아폴로의 비행에서는, 달로 향하지 않았던 비행도 포함해 선장과 달 착륙선 조종사는 생명유지장치와 수냉 장비, 통신케이블의 3개의 연결기가 각각 2열에 일렬로 붙어 있는 A7L 우주복을 입고 있었다. 아폴로 15호에서는 A7L-B 로 불리는 새로운 우주복이 채용되었으며 가장 큰 변경점은 연결기가 2개의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 연결기의 배치 변경과 착용 지퍼의 위치 변경[8]에 의해서, 우주복의 허리에 새롭게 관절을 붙이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이것에 의해서 비행사는 몸을 완전하게 접어 구부리거나 월면차에 앉거나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백 팩도 장시간의 달 표면 보행용으로 개량되었다. 사령선 조종사는 이전에는 EVA를 할 일이 없었으므로 3개의 연결기만 붙은 우주복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아폴로 15호에서는 지구 귀환 궤도상에서 기계선으로부터 필름 카트리지를 회수하는 궤도 승선외 활동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달에 내리는 승무원 용에서 수냉용 연결기만 생략한 연결기 5개의 신형 우주복을 입게 되었다.

2.3. 아폴로 15호 사령선의 SIM 베이


케네디 우주 센터의 기술자는 과학 실험장치 모듈(SIM)베이에 대해 많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SIM 베이는 아폴로 15호에 처음으로 탑재되었지만, 개발 당초부터 문제에 직면했다. 문제는, 이러한 장치가 무중력 환경에서 사용하도록 설계되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1G 환경에서 테스트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질량분석기나 감마선 분광계 등, 7.5 m 의 길이를 늘리는 기기의 시험에서는, 우주 환경을 모의하는 가이드 레일을 이용한 테스트밖에 행하지 못하고, 이러한 조건에서는 잘 동작하지 않았다. 감마선 분광계의 테스트를 행했을 때에는 테스트 장소의 반경 16 km 이내에 있는 모든 엔진을 정지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장비가 새턴 V 로켓에 장착되어, 로켓은 LC-39A 발사대로 이동했다. 1971년 6월 하순부터 7월 초순, 로켓과 이동식 정비탑에는 적어도 4회의 낙뢰가 있었지만 모두 소규모의 피해로 끝났다.

2.4. 발사


아폴로 15호는 1971년 7월 26일 오전 9시 34분 00초(EDT)에 발사되고 나서 달에 도달할 때까지 4일간을 필요로 했다. 지구 주회 궤도에 약 2시간을 체류한 후, 새턴 V 로켓의 제 3단(S-IVB)을 재점화되고 달로 향했다. 사령선의 하부에 격납되고 있는 달 착륙선을 꺼내는 작업 중, 제어 패널의 기계선 추진계의 밸브가 열려, 엔진이 점화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램프가 점등했다. 잠시 후 엔진의 상황 밸브를 제어하는 스위치의 중 한 개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되어, 이것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스콧과 어윈이 달 착륙선을 최초로 점검했을 때에는, 테이프 미터의 유리 커버가 갈라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유리의 파편을 들이 마시지 않게 청소해야 했다. 발사로부터 4일째에 그들은 달 주회 궤도에 들어가, 달 표면 강하의 준비에 들어갔다.

2.5. 발사 시의 사고


발사 시 제 1단 로켓 분리 직후, 제 1단에 탑재되고 있던 계측 장치가 기능을 상실했다. 조사 결과, 이것은 제 2단 로켓의 배기가 제1단을 직격하고 전기 회로가 탔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 판명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아폴로 15호 이전에는 발생한 예가 없었다. 이 사고의 원인은 1단 로켓이 분리되면서 2단에서 충분히 멀어지도록 해주는 역추진 로켓의 수를 8개에서 4개로 줄였기 때문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분리시에 실제로 제 1단과 제 2단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접근하고 있던 것(실제로 약 40피트 거리까지 접근했다)인데, 제 1단에 탑재되고 있는 F-1 엔진의 추진력의 감쇠가 늦었던 일(위의 하드웨어 항목에 나온 것처럼 월면차 탑재를 위해 F-1 엔진의 연소 시간을 이전보다 연장했다)과 역추진 로켓 중 하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에 의해 쌍방의 간섭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오류가 충돌까지 이어졌다면 2단 로켓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폴로 15호는 심각한 비극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폴로 15호 이후의 비행에서는 역추진 로켓은 개발 당초의 8개로 되돌려졌다.자세한 이야기

2.6. 달 주회 궤도에서의 작업


스콧과 어윈이 달 표면에서 3일간에 걸쳐서 탐사를 행하는 동안, 사령선에 남은 워든은 다양한 관측 계획을 수행해냈다. 아폴로 15호는 SIM 베이를 탑재한 첫 미션으로, 이 모듈에는 파노라마 카메라, 감마선 분광기, 매핑 카메라, 레이저 고도계, 질량분석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워든은 카메라의 셔터나 렌즈를 조작하거나 여러 가지 기기의 스위치를 조작해야 했다. 지구 귀환 도중에도, 워든은 선외 활동을 행해 카메라로부터 필름 카세트를 회수했다.

2.7. 지구로의 귀환


달 착륙선 팰콘의 상승단은 달을 떠나 사령선 인데버와의 랑데부를 행했다. 달 표면의 샘플과 관측 기기를 사령선으로 옮긴 후, 팰콘은 분리되었다. 팰콘의 엔진이 분사되어 달 표면에 충돌했다. 달 표면을 떠나는 동안은 미국 공군의 군가인 "Wild Blue Yonder" 가 흘렀다. 아폴로 15호는 이후 달 궤도상에 올라, 워든에 의한 관측이 계속되었다. 손자 위성을 발사한 후, 그들은 기계선의 엔진을 점화해 지구에 귀환하는 궤도에 올랐다. 다음날, 워든은 선외 활동을 실시해, SIM 베이의 카메라로부터 필름 카세트를 회수했다. 임무 제 12일째는 특별한 예정은 없고, 지상의 임무 관제실은 기자 회견을 열어 비행사들이 뉴스 미디어로부터의 질문에 답했다. 13일째와 마지막 날에는 그들은 대기권 재돌입의 준비에 들어갔다. 지구 강하시에는 낙하산의 하나가 펴지지 않아 사령선은 2개의 낙하산으로 착수했다. 사령선은 국립 미국 공군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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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미국 공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령선 엔데버

3. 우표 스캔들


하지만 아폴로 15호의 우주비행사들은 나중에 징계를 받아야했다. NASA의 허가 없이 우표를 몰래 우주선에 숨겨갖고 탔다가 지구 귀환 후 '달에 다녀온 우표'라고 우표 판매업자에게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9] 를 했으나 중개업자와의 분쟁으로 인해 탄로나 버려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외에도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보고하지도 않은 선외활동, 사익 추구 등의 여러 사건사고가 많이 밝혀졌고, 달 탐사의 상업성 논란으로까지 불거질 수 있었기에 이 팀은 디크 슬레이튼에게 혼쭐이 나고 이후의 우주 비행 자격을 박탈당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아폴로 17호의 백업 팀으로 내정될 수 있었지만... 뭐, 나중에 법정에서는 "대원들이 규정을 좀 위반하긴 했는데 무슨 심각한 불법행위는 아니다"는 판결을 받기는 했다.
또한 이 스캔들로 된서리를 맞은 사람이 아폴로 13호잭 스와이거트. 그 역시 문제의 우표 업자와의 거래가 있었고 최대한 그 사실을 숨기려 하였으나 계좌 거래 내역까지 탈탈 턴 NASA 내부 감사에 꼬리가 잡혔다. 당시 스와이거트는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 파일럿으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그의 우주비행사로서의 경력은 파탄이 났다. 이후 NASA를 떠나 미국 하원 과학위원회 사무총장, 몇몇 기업의 임원을 지내다 정계에 투신하여 1982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 해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나 실제 의정 활동은 하지 못하였다.

4. 승무원


7회의 착륙 시도 미션 중 유일하게 미합중국 공군 출신 승무원으로만 꾸려진 팀[10]이다.
달에 갔다왔던 제임스 어윈은, 말 그대로 '''죽을 뻔 했다.''' 달에서부터 그의 심박수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관제센터에서는 심장마비 우려를 표하는 의료진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NASA 우주 프로그램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서의 사망자가 나오는가 하며 NASA 관계자들의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결국 귀환은 다행히 문제 없이 마쳤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윈은 몇달 후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며 사경을 헤매야 했고, 겨우 살아난 이후에는 종교에 귀의하여 선교 활동을 하며[11] 여생을 보냈지만 결국 그 심장질환 때문에 1991년 8월 8일을 일기로 달에 갔다온 우주비행사들 중 가장 일찍 사망하였다.
귀환 당시 우주선 낙하산 하나가 망가져서 여러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기도 했다. 다행히 하나만 나가서 다행이지 하나라도 더 망가졌더라면 아마 물에 떨어질 때 싹 찌그러지고 승무원들도 끔살을 못 면했을 거라고...

5. 기타


또한 의미있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그동안 NASA와 '''소련'''에서 우주 비행사 훈련/임무 수행 도중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고자 이들의 이름이 적힌 알루미늄 판을 해들리 산에다 가져다 놓았다. 거스 그리섬 같은 아폴로 1호 멤버들은 물론이거니와 소련 우주인들도(유리 가가린, 블라디미르 코마로프) 있었다. 다만 소련의 기밀 유지 정책 때문에 아폴로 15호 당시까지 존재가 알려지지 않던 순직 우주인 두명은 이름이 적히지 못했다. 이들의 이름은 발렌틴 본다렌코, 그리고리 넬류보프였으며, 데이비드 스콧은 이후 인터뷰에서 이들의 이름을 뒤늦게야 알았다며 아쉬워했고, 소련도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다만 이 알루미늄 판 역시 제작자와의 마찰이 있어서... 하여간 이래저래 말썽이 많았던 미션이었다.
그밖에 엉뚱하게도 "시계" 매니아들 사이에서 아폴로 15호는 나름 전설적인 이슈와 논란으로 화자되고있다. 이유인 즉 나사에서 우주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지급하는 시계는 수많은 테스트를 끝까지 버텨낸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인데 선장인 스콧의 스피드마스터가 월면 탐사 직전 알수없는 이유로 글라스가 파손되어 어쩔수 없이 개인적으로 가져왔던 백업시계를 착용하여 임무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는데 그 시계가 바로 그 유명한 "부로바"사의 "루나 파일럿". 문제는 현재기준으로 이 두 시계의 가격이 10배가량 차이가 나서 좋은쪽으로든 나쁜쪽으로는 논란이 있다[12]

6. 미디어매체 모습


애플 TV+가 제작하는 대체역사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For All Mankind)에서 이 아폴로 15호가 미국 최초의 여성우주인을 배출하게 된다.

[1] 아폴로 12호 팀과의 경쟁의식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12호의 착륙선 이름은 인트리피드, 즉 범선 이름이자 미 해군 항공모함 이름이었고, 15호의 팰컨은 공군이 좋아하는, 지금도 F-16의 애칭으로 남아있는 맹금류 이름이다.[CDR백업] 리처드 고든 [CMP백업] 밴스 브랜드 [LMP백업] 해리슨 슈미트[2] 월면차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월면차에 탑승하기 편하도록 우주복 정면에 있는 공기/물 공급 호스 커넥터 위치가 이전 미션들의 우주복과 변경된 신형 우주복이 도입되었다. 아래 하드웨어 항목 참조.[3] 아폴로 15호는 복귀하면서 지질학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제네시스 록(Genesis Rock)'''을 가져오는 등 과학적 공헌이 이전에 비해 매우 컸던 미션이다.[4] 지구에서 달까지의 10화에 이들이 겪어야 했던 전혀 새로운 경험이 담겨져 있다. 끽해야 항공공학 공부한 테스트 파일럿이었던 군인들을 교수가 직접 오지 협곡으로 끌고 다니며 지질학적 마인드를 심어준다. 착륙지점에 대해 논쟁이 있을 때도 안전한 곳에 가기보다는 지질구조 연구에 있어 큰 보탬이 될 곳을 고르는등 15호부터 17호까지는 여러모로 대놓고 과학자들이 연구하려고 보낸 미션들이다. 이들에게 지도교수를 소개해줬던 15호 백업 승무원이었던 해리슨 슈미트는 17호에서 정말 달에 가게 되며, 이는 과학자로서는 최초였다. [5] 스콧 혼자서 착륙선 위로 몸을 내밀고 경치를 쭉 둘러보는 것. 해들리 열구의 풍경을 지상에 보고하여 지질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6] 통신은 통상, 우주선 교신 담당관 (Capsule Communicator; CapCom)이 승무원과의 회화를 행하는 유일한 행동이 된다 [7] 보잉은 새턴 V 로켓의 제 2단 로켓 S-II의 개발 기업이기도 했다 [8] 구형에서는 상하로 움직이는 형식이었던 것을 우측 어깨로부터 왼쪽 허리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배치[9] 12년 뒤 NASASTS-8임무에다가 우편봉투 2톤을 우주로 보냈다가 가져올려고 해서 알프레드 워든이 소송을 한 끝에 우편봉투를 돌려받았다.당시 가격은 50만 달러 였다고. [10] 11호의 전업 테스트 파일럿 출신인 닐 암스트롱을 제외하면 피트 콘래드, 짐 러블, 앨런 셰퍼드, 존 영, 유진 서넌은 모두 해군 현역이었다. 해군 테스트 파일럿 출신자들이 아무래도 헬리콥터 같은 VTOL 기종을 조종한 경험이 공군 출신보다 많았기 때문에 달 착륙 연습에 있어서는 해군 출신자들이 좀 더 익숙했다고. 취소된 아폴로 18호 사령관 리처드 고든 역시 해군 출신이며, 19호 사령관으로 예정되었던 프레드 헤이즈 역시 NASA 전업 테스트 파일럿 출신이다.[11] "나는 달에서 걸으며 신의 권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지구를 걷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같은 여러 어록을 남겼다. 다른 우주비행사들의 회고에 나오는 말들과는 좀 이색적인 행적인데, 아무래도 갑자기 몸에 문제가 생기며 목숨이 위태로웠던 입장인지라 심정적으로 신에게 많이 의지했던 듯.[12] 나사 공식 보급품인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를 비롯해 이후 선원들이 개인적으로 가져간 시계들은 롤렉스 데이토나,브라이틀링 네비타이머,태그호이어 까레라등 한화 500만원부터 1000만원 이상급의 내로라 하는 유명 명품시계들인데 부로바의 루나파일럿은 단돈 50만원 내외로 복각품이 나와 저 거물시계들과 동등한 해리티지를 누릴수있는데 이는 문워치 비소유자들 입장에선 최대 장점이지만, 반대로 문워치 보유자 입장에서 우주인 시계라는 격을 실추시켯다는 맹비난을 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