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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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ver Young... 우주왕복선 첫 발사 25주년 기념 사진.[1]
'''John Watts Young''' (1930년 9월 24일 ~ 2018년 1월 5일)
1. 개요
2. 경력
2.1. 우주비행사가 되기 전
2.2. 제미니 계획
2.3. 아폴로 10호 - 똥이 떠다닌다!
2.4. 달에 내리다
2.5. 우주왕복선의 시대를 열다
2.6. 최후의 비행
2.7. 은퇴 이후
3. 기타


1. 개요


미국 NASA우주 비행사. 제미니, 아폴로, 우주왕복선 시대를 모두 거치며 제미니 3호(1965)에서 STS-9(1983)까지 근 20년에 걸쳐 총 6회의 우주비행을 수행하였으며, 디크 슬레이튼(초대)-앨런 셰퍼드(2대, 4대)-토머스 스태퍼드(3대)에 이은 5대 수석 우주비행사로 역대 최장수 재임 기록(1974-1987)을 세웠고, 우주 명예 훈장 수훈자이기도 한 전설 중의 전설이다.

2. 경력



2.1. 우주비행사가 되기 전


미국 캘리포니아샌프란시스코에서 1930년 태어난 존 영은 대공황으로 인해 어릴 적 조지아플로리다에서 살았다. 1952년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항공공학 전공으로 졸업한 뒤, 미합중국 해군에 입대했다. 초기에는 구축함에서 근무하며 6.25 전쟁에도 참전했지만, 자신의 전공이자 로망이었던 항공조종장교를 지원하여 파일럿 교육을 수료하였다. F-9 쿠거, F-8 크루세이더 등의 항공기를 조종하고 최초의 수퍼캐리어 USS 포레스탈에서 근무했다.
이후 해군 테스트 파일럿 스쿨에 지원하여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수많은 항공기를 조종했는데, F-4 팬텀Ⅱ를 조종하면서는 기종의 최고 고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사실 우주 비행사 커리어를 제외한 테스트 파일럿으로서의 기록도 눈부시다. 프롭기, 제트기, 헬리콥터, 로켓 제트, 등등 갖가지 기괴한 기종들을 조종한 비행 시간 누적 기록이 15,275시간, NASA에서도 T-38과 우주선 등을 조종한 것이 9,200시간에 우주 체류 기록 835시간이나 된다...
특이한 사건이라면, '''알레이 버크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전보를 보내 갈궜던 적이 있었는데 내용은...

'''"네가 F-4로 소닉붐 작렬해서 동네 창문 다 박살냈는데 어쩔 거냐?"'''

동부의 체사피크 만 근해에서 F-4의 테스트 비행 중 초음속 비행으로 해안가의 동네 창문을 죄다 박살냈다고 한다.

2.2. 제미니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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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니 계획 시절
이후 제미니 계획이 시작되며 NASA 우주인단의 2기로 기록된 1962년 "The New Nine, The Next Nine, The Nifty Nine" 클래스에서 선발되었고, 그의 NASA 커리어가 시작된다.
제미니의 첫 유인 미션인 제미니 3호가 앨런 셰퍼드/토머스 스태퍼드의 미션으로 예정되었지만 셰퍼드가 메니에르병 진단을 받으며 그라운딩 조치를 당하자 사령관 거스 그리섬과 함께 제미니 3호의 파일럿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처음 우주에 나간 것이 1965년.
다만 이때 우주 식량이 너무 맛이 없다는 이유로 샌드위치를 우주선에 숨겨올라가서 쳐묵쳐묵(...)했다가 들켜서[2] 귀환한 뒤에 NASA에서 혼쭐이 났다. 샌드위치의 빵가루가 기계에 끼면 우주선이 고장날 수 있어서다.
샌드위치 사건 이후 존 영은 NASA에 찍힌 몸이 되었지만, 그래도 기량이 일품이었던지라 제미니 10호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 훗날 아폴로 11호의 사령선 조종사가 되는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우주에 다시 한번 올라갔다.

2.3. 아폴로 10호 - 똥이 떠다닌다!


존 영은 토머스 스태퍼드, 유진 서넌[3]과 함께 아폴로 첫 유인 미션의 백업으로 선정되었...지만 '''아폴로 1호 화재 참사'''로 NASA의 계획이 다 헝클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팀으로 유지되어 아폴로 7호의 백업이 되었고, 1969년 아폴로 10호의 정규멤버로서 달에 가게 되었다. 당시 미션은 11호의 리허설 성격이라 달 착륙선을 타고 달을 돌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당시 사령선 조종사였던 존 영은 처음으로 아폴로 사령선을 단독으로 조종하여 달 궤도를 돈 인물이 되었다.[4]
하지만 스태퍼드와 서넌과 함께 아폴로에서 똥이 둥둥 떠다닌 사건의 용의자 선상에 오르기도 했다.

2.4. 달에 내리다


이후 찰스 듀크, 잭 스와이거트와 팀을 이뤄 아폴로 13호의 백업으로 활동했는데... 갑자기 찰스 듀크가 홍역에 걸렸고 아폴로 13호의 사령선 조종사 켄 매팅리가 홍역 면역이 안 되어있다고 스와이거트와 교대하는 안습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런데 그 아폴로 13호는... Aㅏ... 망했어요. 때문에 매팅리, 듀크와 존 영은 지상에서 아폴로 13호의 테스트 모듈을 갖고 밤낮으로 씨름해야 했다. 그래도 이 멤버가 그대로 유지되어 아폴로 16호의 사령관으로서 달에 다시, 그것도 이번에는 달을 밟으러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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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고원에서의 인증샷. 잘 보면 '''팡팡 뛰고 있다!''' 이전까지 문외한이었던 지질학에 대한 공부를 하느라 고생했지만 그런 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다. 월면차 최고 속력 기록도 세웠고.
그리고 16호에서 돌아왔는데, 갑자기 또 17호의 백업 사령관으로 배정되었다. 무슨 일인고 하니, 유진 서넌이 소프트볼을 하다가 무릎을 다치며 회복 속도가 늦어질 경우 새로 사령관을 뽑아야 하는데 이왕이면 베테랑 중에 백업을 고른 것.[5][6] 까딱하면 달을 두번 밟는 초유의 기록을 세울 뻔 했다.
아폴로 시대가 종언을 고한 후, 존 영은 스카이랩 미션에서는 지상근무를 하는 수석 우주비행사(Chief Astronaut)로 임명되었고, 새로 뽑힌 신참내기들[7]을 휘어잡으며 우주비행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 시기 해군에서도 대령으로 전역.

2.5. 우주왕복선의 시대를 열다


존 영은 아폴로 프로그램이 종료된 후, 스카이랩 대신 우주왕복선 연구에 투신했다. 우주인단 내에서 유일하게 제미니, 아폴로를 모두 경험한 인물[8]이었기 때문에 우주왕복선의 시뮬레이터 개발을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덕에 영은 시대가 막을 올리는 상징적인 미션인 STS-1의 컬럼비아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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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S-1의 멤버. 우측은 로버트 크리펀. 이 우주복은 U-2SR-71 조종사들의 여압복을 개량한 것으로, 셔틀용 우주복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 우주왕복선 테스트 미션에서 쓰였다.
STS-1 미션은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가히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테스트 비행'''이라 회자될 정도. 이건 다 우주왕복선 발사는 이게 처음이어서다. 이 시절에는 초음속 공기역학 연구가 매우 지지부진해서 에임스 리서치 센터(Ames Research Center)의 세계 최대 풍동에서 셔틀의 발사, 재돌입 시뮬레이션을 아무리 해봐도 유인 발사만 못했기 때문. 소련부란과 달리 미국 셔틀은 끽해야 엔터프라이즈로 활강 테스트만 했지 무인 궤도비행 점검이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어딘가에 결함이 있을 경우 비극으로 막을 내릴 위험이 매우 컸지만, 어쨌든 별 탈 없이 성공했다. 한편으로, 원래 4월 10일에 발사하려던 일정이 수포로 돌아가고 재차 시도하여 성공적으로 발사된 날짜가 '''1981년 4월 12일'''이다. 바로 '''유리 가가린의 인류 최초 우주비행 20주년'''이 된 것. 이 덕에 냉전 이후 4월 12일에는 러시아와 미국의 우주개발 관계자들이 서로 이런저런 행사를 열며 화합의 날이 되기도 했다.
이 미션에 대한 NASA의 정신나간 비화가 전해진다. NASA 셔틀 프로그램의 야심작(?)인 RTLS[10]를 '''일부러 시도하려 했다(...)''' 영이 미친 거 아니냐고 까자 비행기 알지도 못하면서 책상놀음 시뮬레이터 놀음이나 하던 엔지니어들은 데꿀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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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부터는 연세가 연세인지라 안경을 썼다. 그런데 외모가 원체 상당한 수준이라 지적인 인상의 미중년으로 진화...

2.6. 최후의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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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S-9의 멤버들은, 아폴로 시절에 비해서도 매우 많다. 우주왕복선 초창기만 해도 두 조종사만이 타고 다녔지만 이후에는 완전한 미션 수행이 가능함이 증명되어 미션 스페셜리스트들을 많이 데려갔다. 앉아있는 순서대로 오웬 개리엇(미션 스페셜리스트)[11], 브루스터 쇼(파일럿), 존 영(사령관), 로버트 파커(미션 스페셜리스트). 그리고 뒷줄에 서있는 이들은 최초의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로 기록된 바이런 릭텐버그와 울프 메르볼트.[12] 이 미션은 유럽과 공동으로 개발한 재활용 가능 우주 정거장 스페이스랩 미션이었다. '''1983년 11월 28일 발사되어 12월 8일 귀환한 STS-9 미션을 끝으로 존 영의 우주 여행은 마침표를 찍는다. 제미니/아폴로/우주왕복선 각각 2회씩, 총 6회'''[13]'''의 우주 비행은 불멸의 기록으로 남았다.'''
사실 1986년에도 허블 우주 망원경 궤도 전개를 위해 또 STS-61-J 아틀란티스 사령관으로 불려나갈 예정이었다. STS-51-L 챌린저 참사로 우주왕복선 미션이 싸그리 취소되었고, 존 영은 챌린저 이전까지 쌓이고 쌓였던 NASA의 문제점들을 까발리고 비난하다가 높으신 분들과 척을 지게 되었다. 결국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STS-31로 다시 재편성되는 이 미션의 사령관은 로렌 슈라이버로 교체, 존 영의 우주비행사 커리어가 마감되었다.
그런데 STS-9 임무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비행 중에 우주왕복선의 컴퓨터가 고장나기도 했고, 이때는 "이래서 우리한테 연봉을 많이 주는 거야"라며 쿨하게 넘어갔지만 착륙하던 도중 우주왕복선의 유압계통이 고장나는 사고를 만난다. 다행히도 바퀴가 활주로에 닿기까지는 유압계통이 버텨주었으나, 그 직후에 유압계통이 모두 터졌다. 조금만 빨리 터졌으면 우주왕복선은 조종불능이 되어 추락했을 거라고(...)

2.7. 은퇴 이후


이후 NASA에서 우주 비행사로서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NASA에서는 오랫동안 고위급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2004년 12월 31일'''까지 근무한다. 그야말로 NASA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만한 커리어를 썼다. 자신이 근무하는 동안 아폴로 1호의 참사도 겪었고, 이런저런 잦은 사고로 여러 동료들이 숨졌으며, STS-51-LSTS-107이라는 NASA 우주왕복선 시대의 양대 참사를 일선에서 겪었다. NASA의 찬란했던 문레이스 시절부터 우주왕복선의 태동기와 챌린저, 컬럼비아 두 우주왕복선의 사고까지, 존 영은 NASA의 역사와 함께했다. 당연히 의회 우주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우주덕들과 NASA의 직원들, 특히 우주비행사들 사이에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회자되고 있다. NASA에서 공식적으로는 은퇴했지만, 지금도 월면 기지와 화성으로 떠날 유인 우주선 등에 대하여 정력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2012년 출간한 자서전의 제목이 그의 삶을 말해준다. '''Forever Young'''.[14]
이후 자서전 출간 외에는 별다른 대외 활동을 하지 않다가 2018년 1월 6일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테리 버츠의 트윗)

3. 기타


후일 NASA 국장을 지내는 후배 찰스 볼든 역시 자신이 만난 선후배 우주 비행사들 중 파일럿으로서의 기량은 로버트 깁슨[15]존 영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였다고 인정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게 아니라 입었다고 한다'''(...)[원문] 볼든은 영이 사령관을 맡을 예정이었던 허블 미션의 파일럿으로 함께 훈련을 경험했는데 그 때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
첫 부인 바버라 화이트와의 사이에서 딸 산드라와 아들 존 2세를 낳았다. 바버라와는 1972년 이혼[16]했고, 이후 두번째 아내 수지 펠드먼과 결혼하여 사망할 때까지 휴스턴 근교에서 살았다.
[1] 이런저런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터틀넥 매니아다. 사진을 검색해보면 우주복, 비행복, 군복 외의 사복들은 대개 폴라티 차림이다.[2] 빵부스러기가 구름을 만들 정도로 많이 생겼기 때문에 안 들킬래야 안 들킬 수가 없었다. 지상에서라면 그냥 바닥에 떨어져서 표가 안 나겠지만..[3] (현재까지) 달에 발자국을 남긴 마지막 인류로 기록된 아폴로 17호 사령관이다.[4] 제미니 시절 미션 사령관 경력이 있음에도 아폴로에서 스스로 2인자로 내려앉은 유이한 인물이다. 나머지 한 명은 제미니 마지막 미션인 12호의 사령관이었지만 아폴로 8호에서 사령선 조종사를 맡았던 짐 러블. 아폴로 11호 이전의 미션들은 이처럼 미션 사령관을 맡을 만한 베테랑을 여럿 투입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미션들이었다.[5] 원래대로라면 14호의 멤버들을 주축으로 17호 백업팀이 구성되었겠으나, 14호 멤버들은 20호가 취소된 마당에 백업으로 훈련은 훈련대로 하고 달에는 가지도 못하는 안습한 신세를 거부했다. 결국 고도의 지질학적 지식이나 월면차 운용 경험 등이 있는 15호에서 갔다온 데이비드 스콧의 팀이 백업을 맡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복귀 후에 몰래 달에 우표를 가져갔다가 우표 업자에게 넘겼고 그것이 비싼 값에 팔린 일로 이슈가 되자 달 탐사의 상업성 논란 때문에 디크 슬레이튼이 이들의 비행자격을 박탈했다. 때문에 17호의 백업을 할만한 양반이 존 영과 찰스 듀크, 그리고 14호 사령선 조종사 스튜어트 루사 뿐이었다. 그나마 루사도 매팅리가 해군에게 복귀 제의를 받고 썸을 타느라 애가 탔던 NASA 측에서 억지로 시킨 것.[6] 이런 개말년(...) 증상은 2010년대 전후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마감될 때도 나타난다. 스티브 보언은 STS-132 미션 수행 후 STS-133 수행에 바로 재투입되어 양 미션에서 연속으로 12시간 이상의 EVA까지 수행하는 유리 가가린 이래 유례없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7] 이 신참내기들도 보통이 아닌게, 대부분의 군 출신자들은 베트남 전쟁에 갔다온 참전용사들이었다. 민간 출신자들도 선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학력의 먼치킨들이었다. 하지만 제미니 초도비행을 하고 달에 두번이나 갔다온 존 영의 위엄 앞에 데꿀멍.[8] 셔틀 개발 시기 우주인들 중 달에 갔다온 우주인은 영, 켄 매팅리, 프레드 헤이즈 뿐이었으며, 아폴로-새턴을 타본 우주인들도 스카이랩에서 활동한 폴 와이츠, 오웬 개리엇, 잭 라우즈마,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의 밴스 브랜드 외엔 전부 퇴직하거나 우주비행 경험이 없는 초짜들 뿐이었다. 그나마도 다른 이들은 스카이랩 등 여러 다른 미션을 뛰고나서 셔틀 팀에 합류했기 때문에 셔틀 개발진이 처음부터 부려먹을 수 있는 우주인은 영, 매팅리, 헤이즈 뿐.[9] 참고로 이 시기 존 영은 수석 우주비행사를 겸임하고 있었던 터라 아폴로 12호의 앨 빈이 STS-1 기간동안 수석 우주비행사 직무를 대행했다.[10] 리턴 투 론치 사이트, 문제가 생긴 우주왕복선을 케네디 우주센터로 활공하여 귀환하기(우주왕복선 항목 참조) 수많은 파일럿들이 이걸 배우면서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냈다(...)[11] 리처드 개리엇의 아버지다.[12] 동독에서 태어나 베를린 장벽이 지어지기 전 서독으로 탈출한 ESA 우주 비행사로, 미국 우주선에 탑승한 최초의 외국인이다. 릭텐버그는 이 미션과 STS-45에서만 MIT 출신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로서 활동했지만, 메르볼트는 이후에도 ESA-러시아 합동 미션에서도 활동하는등 정규직 우주비행사로 활동하며 여러차례 우주를 들락거리게 된다.[13] 정확히 말하자면, 달에서의 발사를 포함하여 '''7회'''라 할 수 있다. 역사상 7회의 우주비행을 수행한 인물은 영을 제외하면 제리 로스프랭클린 창-디아즈 뿐이다.[14] 다만 책 내용이 우주비행사의 자서전이라기보다는 테스트 파일럿의 자서전에 가까운데다 전문용어도 좀 많이 등장하는지라 독자들은 좀 당황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밀덕후가 아닌 우주덕들은 F-4, F-8나 우주선 제작과정 같은 시시콜콜한 것보다는 '''달에 착륙해서 월면차 붕붕거린''' 그런 얘기들을 좋아하는지라...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을 주워들어본 경험이 있는 밀덕 겸 우주덕이라면 충분히 재밌게 읽을만한 내용이다.[15] 일명 후트(Hoot). 이 사람도 굉장히 깡패스러운 파일럿이었다. 가히 고든 쿠퍼 이후 최고의 날라리라 할 수 있을 정도. 미션 앞두고 객기를 부려 경주 비행에 참가했다가 다리몽댕이가 분질러져 돌아온 뒤 높으신 분들에게 호되게 혼나고 퇴출 위기까지 간 적도 있다(...)[원문] Never met two people like them. Everyone else gets into an airplane; John and Hoot wear their airplane. They're just awesome.[16] 아폴로 시절의 우주비행사 중 상당수가 결혼생활에서 파국을 맞았다. 우주비행사를 내조해야 했던 아내의 삶에 대해서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11화에 잘 나와 있다. 극의 최후반부에 바버라가 남편이 달로 떠나는 발사 장면을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바라보는 표정을 보면 그간의 노고가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는 대견함, 자랑스러움, 그리고 곧 있으면 다 끝나는구나(...) 하는 안도감이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