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사마르칸트-문화 교차로
영어
Samarkand – Crossroad of Cultures
러시아어
Самарканд – перекресток культур
프랑스어
Samarkand – carrefour de cultures
국가·위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1년
등재기준
(i)[1], (ii)[2], (iv)[3]
지정번호
603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The Wallpainting of Afrosiab Palace''
*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
*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
1. 개요
2. 아프라시압 궁전
3. 서벽
3.1. 한국인 사절의 해석
4. 북벽
5. 남벽
6. 동벽
7. 한국과의 관계

[clearfix]

1. 개요



1965년 사마르칸트 동북쪽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도성터에서 도로 설치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를 하던 중 상부가 잘려나간 벽화 하나가 발견되었다. 전체 발굴 조사 후 드러난 벽화의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7세기 번영했던 소그디아나의 모습을 각 11미터씩 4개 벽면에 나눠 그린 총 44미터 길이의 초대형 벽화였기 때문이다. 소그드 시대의 종교, 의례, 정치, 외교, 문화, 신화 등을 담은 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던 7세기 소그드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외교를 묘사한 서벽에는 차가니안, 차치, 티벳(추정), 튀르크, 당, 고구려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그려져 있어 이 지역이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란듯이 증명했다. 이 중 고구려인의 존재는 한국인들보다도 먼저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이 증명하며 한국 학계와 언론에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image]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발굴에 참여했던 구소련 고고학자 B. Marshak과 동료들. 뒤로 튀르크인들과 한국인 그림이 보인다.
[image]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박물관 내의 메인 홀에 전시된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현재 수습된 벽화 편들은 아프라시압 박물관 에서 재조립되어 전시되고 있다. 2013년과 2014년, 그리고 2018년에 한국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문화 ODA 사업의 일환으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대한 디지털라이징과 복원을 실시하였고, 복원 결과물은 8개 국어로 된 10분 분량의 컴퓨터 그래픽 영상과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콘텐츠로 제작되어 박물관 내 영상실에서 인기리에 전시되고 있다.

2. 아프라시압 궁전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가 발견된 궁전은 30여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로, 유구의 길이만 80미터에 이른다. 신당서 서역전에는 강국(소그디아나)의 왕이 거처하는 곳을 城左有重樓라고 하여 다층의 높은 누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당시 건축은 토축과 조적방식을 혼용해서 두꺼운 벽체를 세우고 벽체에 화살표 모양의 창을 낸 것이 특징이다. 강수량이 적은 건조한 기후 덕분에 나무로 된 천정에 구멍을 내어 실내 채광을 극대화 하는데, 이 천정은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사각형이 45도씩 회전하며 중첩되는 말각조정 형태로 견고하게 구조화 되어있다. 일본 NHK나 한국의 문화유산기술연구소 등에서 소그드시대의 건축을 디지털 방식으로 복원한 결과물을 보면 전술한 이러한 특징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문화유산기술연구소에서는 이 아프라시압 궁전을 우즈벡과 러시아, 프랑스의 학자들과 함께 디지털방식으로 복원하여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열린 동아시아 문화재보존과학 학회에서 발표한 바 있는데, 외형을 보면 중층의 구조에 외부에 나무 발코니가 설치된 형태로 되어있다.
[image]
아프라시압 궁전 유구(좌)와 복원 후의 모습(우)
[image]
아프라시압 궁전 메인홀 디지털 복원도

3. 서벽


[image]
벽화가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메인 홀의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서벽이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가 바로 이 서벽에 있다. 서벽에는 7세기 당시 이곳의 지배자를 접견하기 위해 많은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부터 차가니안, 차치, 당, 티벳, 튀르크, 한반도 순으로 추정된다. 제일 왼쪽에 있는 차가니안 사절의 경우엔 옷자락에 소그드어로 된 명문이 쓰여져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 벽화가 어떤 상황을 그린것인지 명확히 표현되고 있다.
우나쉬 가문의 후예 바르후만 왕이 다가왔을 때, 그는 말했다. "저는 푸카르자테라 불리는 차가니안의 수석서기입니다. 저는 저의 왕 투란타쉬의 명을 받아 당신께 경의를 표하고, 당신의 영광을 기리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러니 왕이시여, 저에 대한 의심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사마르칸트의 신들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사마르칸트의 문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을 해할 의사가 없습니다. 왕이시여, 위대한 삶을 누리길...", 말을 다 마친후, 우나쉬 가문의 후예 바르후만 왕은 그를 보냈고, 이어서 차치의 수석서기가 연설을 시작했다.
[image]
차가니안 사절 옷자락에 써진 소그드어 명문
이 명문의 내용에 따르면 여기에 그려진 인물들은 소그드 왕 바르후만을 알현하기 위해 차가니안, 차치를 포함해 각국에서 파견된 고위 사절들이다. 명문에서 언급되는 바르후만 왕은 중국 기록인 신당서에서도 나타나는데, ‘당 고종 영휘연간에 그 땅(康國, 소그디아나)을 강거도독부로 삼고, 그곳의 왕 불호만을 도독으로 삼았다’는 서역전 기록의 불호만 왕이 그것이다. 실제 이러한 신당서의 내용을 반영하듯 서벽 사절단의 가장 중심에는 당나라 사절이 그려져있고, 서벽 우측의 북벽에도 도상 전체가 당나라를 주제로 하고 있는 등 소그드 왕의 궁전임에도 당나라에 대한 할애가 상당하다. 물론, 도상에서 튀르크인들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당나라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하다.

3.1. 한국인 사절의 해석


여기서 재밌어지는 것은 서벽 가장 우측에 그려진 고대 한국인 사절의 해석이다. 고구려인인지 신라인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지만 조우관에 삽수(소매 안으로 손을 맞잡는 것)를 하고 환두대도를 찬 그들이 한반도인이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을 처음 한국인으로 추정한 것도 아프라시압 궁전 발굴보고서를 작성한 러시아 학자 알바움이다. 기존에 국내 학계에서는 권영필 교수를 중심으로 이들을 당과 대립하던 시기의 고구려인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특히 역사스페셜 등의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이들을 아예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원교근공의 외교원칙에 따라 당나라 배후의 강국으로 파견된 연개소문의 특사로 다뤘다. 그런데 이 설을 따를 경우, 벽화 전체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당나라인들의 존재가 무색해진다. 이미 고구려는 수나라 때 몰래 튀르크의 계민가한을 찾아가 연합을 시도하다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수양제에게 발각되어 곤란해졌던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사절이 당나라 사절과 나란히 서서 바르후만 왕을 군사적 동맹 목적으로 접견한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때문에 이 사절들을 당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신라 사절들로 보는 시각도 생겨났다. 그러나 신라 사절로 보는 시각 역시 신라가 이 먼 곳까지 올 정치적 경제적 당위성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큰 힘을 얻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기존과 전혀 다른 해석들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인 그림은 고구려인을 묘사한 것이 맞지만 실제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돈황이나 중국 내륙지역에서 발견되는 수, 당대 벽화 등의 여러 도상들을 보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서벽과 유사한 배치의 사절도가 종종 등장하는데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이 공통적으로 최 우측에 나타난다. 이러한 배치의 사절도가 6~7세기 대에 중국을 중심으로 유행한 벽화 주인공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의례적으로 그려졌던 천하 사절단의 도식이었다는 것이고, 한성대 정호섭 교수에 따르면 아프라시압 궁전의 서벽 역시 이러한 예를 차용[4]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프라시압 궁전과 궁전벽화를 디지털복원[5]한 문화유산기술연구소의 김지교 대표 역시 제작 과정에 대한 인터뷰에서 중국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사절 도상들과 함께 튀르크의 퀼테긴 비문과 빌게카간 비문을 언급했는데, 그에 따르면 비문에서 튀르크의 칸의 장례식에 참여한 각국 조문사절 등을 언급할때도 역시 이러한 도상들과 유사한 배치로 세계 여러 국가들에 이어 고구려(발해)를 언급하면서 극동지역의 상징적 존재처럼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즉, 공통적으로 동쪽의 고구려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왕을 위해 동에서 서까지 많은 나라들에서 왔다" 라는 일종의 관용적인 표현인 것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의 서벽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은 튀르크인들이며 실제 상당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이 지역에 행사하고 있었다.

4. 북벽


[image]
북벽에는 당나라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좌측에 보이는 배 위에는 당의 황후로 추정되는 여성을 중심으로 10여명의 시녀와 사공이 타고 있다. 그 아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상의 동물과 오리, 먹이를 주는 어미새와 새끼들, 연꽃 등이 그려져 있다. 배 우측으로는 호위병들이 탄 것으로 보이는 배와, 물소, 몰이꾼들이 묘사되어있고, 뭍 위에는 창으로 맹수를 공격하는 기마인물, 활로 또 다른 맹수를 쏘려고 하는 기마인물 등 수렵 장면들이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벽화 상부가 잘려나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남벽과 마찬가지로 중심이 되는 인물이 유독 큰 크기로 묘사되어 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 인물을 당의 황제(고종)로 보고 있다. [6]

5. 남벽


[image]
남벽에는 벽 전체에 걸쳐 화려한 행렬이 나타나고 있다. 제일 앞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의 하부와 몇몇 사람이 그려져 있고, 그곳을 향하는 행렬 선두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코끼리를 탄 인물이 다가가고 있다. 그 바로 뒤에는 말을 탄 세 인물이 수행하듯이 따라붙고 있으며, 이어서 낙타를 탄 두 인물이 각자 손에 의례용으로 보이는 막대를 들고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뒤에는 거위 네마리와,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말, 그리고 이들을 몰고 있는 마스크를 쓴 인물이 보이고 있다.
남벽의 오른쪽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말을 타고 있는 인물의 하반신이 아주 거대하게 그려져 있는데, 행렬의 주인공인 바르후만 왕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를 수행하는 인물도 뒤에 보인다. 이 행렬은 학자들에 따라 조상묘 참배 행렬로 보기도 하며 결혼 행렬로 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남벽에서 보이는 종교적 요소가 대체로 조로아스터교의 특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7]

6. 동벽


[image]
벽화가 그려진 접견실의 출입문이 위치한 동벽에 그려진 벽화들은, 훼손 정도가 심해 해석이 가장 어려운 벽면이다.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흔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출입문 좌측에는 의자에 앉은채 동그란 물체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 말을 탄 인물 등이 보인다. 출입문의 우측에는 알몸의 아이들과, 물소의 꼬리를 잡고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고 물고기, 오리도 볼 수 있어 물가나 습지의 환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소그디아나 남부의 인도, 혹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천국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8]

7. 한국과의 관계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두 인물 때문에 지속적인 한국의 관심을 받아왔다. 이전 정권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나 현 정권의 한-중앙아시아 전략적 동반자 관계 구축처럼 이 지역과 긴밀한 공조와 경제 협력을 원하는 한국 정부로서는 그 역사적 연원도 찾을 수 있으며 우즈벡과 깊은 유대감도 일으킬 수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2013-2014년에 한국 정부에서는 문화 ODA사업의 일환으로 현지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협업하여 현재는 폐허로 남아있는 아프라시압 궁전과 벽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10분 분량의 컴퓨터 그래픽 영상과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로 제작된 복원 결과물은 현지 박물관에서 인기리에 전시되고 있다. 현재 중국 역시도 일대일로 포섭 차원에서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대규모의 예산 지원 및 중국 위주의 4D 콘텐츠 체험관 건설 등 기술지원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질세라 한국도 다시 2019년 4월 20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 이후 35억 규모의 전시환경 개선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등 우즈벡의 작은 지방 박물관에서 외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인이 실제 간것은 아니었다고 해석하는 근래 국내 학계의 트렌드가 한국정부로서는 달갑지 않을것이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연합뉴스 기사 [5] 문화유산기술연구소 메이킹 [6] 동북아역사재단 설명[7] 동북아역사재단 설명[8] 동북아역사재단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