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라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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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르칸트의 구 도심.
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사마르칸트 시의 동북쪽 언덕에 위치한 도시 유적을 지칭하는 명칭. 본래 어원은 이란의 영웅서사시에서 침입자 빌런으로 등장하는 투르크계 왕의 이름이다. 국내에서는 매체에 따라 아프라시아브, 아프라시욥, 아프로시압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목초지 상태로 남아있지만 1220년 몽골의 침입 이전에는 사마르칸트의 구 도심이 이곳 아프라시압에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이 아프라시압 유적까지 포함하여 신, 구 사마르칸트 전체를 세계유산 '사마르칸트-문화교차로'로 등재하였다.
북쪽의 높은 언덕에서부터 시작해 남쪽의 평평한 지대까지 모두 성곽으로 둘러싸여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도성 형태를 하고 있다. 2중으로 설치된 내성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국제무역도시로 이름이 높았던 역사를 증명하듯 세계 각국으로 통하는 문(중국 문, 부하라 문, 나우베차르 문, 케슈 문 등)들이 별도의 이름을 갖고 설치되었다.
특히 도성 내의 남동쪽 영역에서 1965년 도로공사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 중 발견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7세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그려져있어 한국에서도 매우 관심이 높다. 한국인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각국의 사절들이 그려져 있어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의 발견은 아프라시압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계기가 되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으로서도 이 아프라시압 유적은 전통적인 세계 중심도시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깊기 때문에 국가적인 시설의 명칭 등으로도 즐겨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고속열차의 이름도 아프라시압 익스프레스이다.
2. 역사
아프라시압 자체가 몽골 침입 이전 사마르칸트의 구 도심이기 때문에 13세기 이전 사마르칸트의 역사가 바로 아프라시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처음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이곳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일부였다가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때 알렉산드리아의 일부가 되며 헬레니즘이 번성하기도 하였다. 당시 명칭은 마라칸다였다. 이후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조로아스터교가 번성한다. 페르시아의 영향을 오랜시간 받은 덕분에 이후 지배 왕조가 여러번 바뀌었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이곳의 주민은 이란계 타지크인들이 절대 다수이다. 기원 후로는 주로 소그드인이라 불리며 도시국가 연합체인 소그디아나를 구성했다. 이 지역은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서 문명의 충돌지이면서 상호가 교류하고 무역하는 허브 도시로 기능했다.
7세기 무렵부터 이 지역은 신당서 등의 중국 기록에 강국(康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투르크(돌궐)와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기의 유적인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서는 총 4벽면 중 서쪽 벽면에 소그디아나의 지배자(바르쿠만Varkhuman, 신당서의 불호만으로 추정)를 접견하기 위해 유라시아 각지에서 찾아온 사절들과, 지배자와 함께 이들을 맞이하는 수많은 투르크(돌궐)인 권력자들이 등장하고, 북쪽 벽면에는 온통 당나라 황실과 관련된 도상들이 등장하며 당서의 책봉 기록과 일치하는 점을 보여준다. 8세기에는 아랍 세력의 침공(그렇다,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가 이 근처에서 이뤄졌다!)으로 중국의 제지술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거점이 되었으며, 이후 완전히 아랍문명권으로 들어서게 된다. 아랍 세력의 지배 아래서도 아프라시압 도성은 국제무역도시로서 눈부시게 번영했지만 13세기 발흥한 몽골의 침략 아래 아프라시압은 이름만 남긴 채 완전한 폐허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완전히 잊혀져 있다가 1950년대 양치기 목동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옛 유물을 통해 구 소련이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아프라시압 도성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전술한 이러한 역사성에 힘입어 아프라시압 도성을 포함한 신, 구 사마르칸트 전체가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마르칸트-문화교차로'로 등재되게 된다.
3.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아프라시압이 유명해진 이유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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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도로 설치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를 하던 중 상부가 잘려나간 벽화 하나가 발견되었다. 전체 발굴 조사 후 드러난 벽화의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7세기 번영했던 소그디아나의 모습을 각 11미터 길이의 4개 벽면에 나눠 그린 총 44미터의 초대형 벽화였기 때문이다. 소그드 시대의 종교, 의례, 정치, 외교, 문화, 신화 등을 담은 이 벽화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던 7세기 소그드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외교를 묘사한 서벽에는 차가니안, 차치, 티벳(추정), 투르크, 당, 고구려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그려져 있어 이 지역이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란듯이 증명했다. 이 중 고구려인의 존재는 한국인들보다도 먼저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이 증명하며 한국 학계와 언론에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려 6000km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나타났으니, 역사학계 뿐 아니라 이 지역과 긴밀한 공조를 원하는 대한민국 정치권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 이후 역대 한국의 대통령이 모두 직접 방문했으며, 2013년과 2014년에는 한국에서 문화 ODA사업을 통해 현지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협업하여 디지털 기술을 통한 벽화와 벽화 궁전의 복원에 성공했다. 10분 분량의 컴퓨터 그래픽 영상과 가상현실(VR), 증강현실로 제작된 복원 결과물은 현지 박물관에서 인기리에 전시되고 있다. 현재 중국 역시도 일대일로 포섭 차원에서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대규모의 예산 지원 및 중국 위주의 4D 콘텐츠 체험관 건설 등 기술지원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질세라 한국도 2019년 4월 20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 이후 35억 규모의 전시환경 개선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등 문화 원조 외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