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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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圭洪
1879년 4월 10일 ~ 1911년 5월 5일
대한제국 말기 정미의병 때 활약했던 의병장. 별명은 '안담사리' 내지 '안담살이'. 본관은 (신)죽산(竹山).[1] 호는 담산(澹山).
1. 출생
2. 의병 결성
3. 의병 활동
4. 일제의 의병 토벌
5. 그 외


1. 출생


1879년 4월 10일 현재의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2]에서 태어났다.
안규홍의 집안은 원래 양반 가문이었지만[3] 오래 전에 몰락해 가계가 궁핍하였고 4살 때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자 먼 친척에게 맡겨져 어린 나이부터 머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4] 그리하여 세간에서 '담사리'라고 불렸는데, '담사리'란 이 지역 사투리로 풀을 베어다 소를 먹이는 머슴 아이를 말한다. 호인 '담산'도 '담사리'에서 유래했다. 다만 하라는 머슴 일은 안 하고 나무몽둥이를 들고 동네에서 대장 노릇을 했던 듯 하다. 동네에 세금 걷는 관리가 찾아와 행패를 부리자 크게 꾸짖고 혼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2. 의병 결성


1907년에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정미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때 의병을 가장한 도적떼들도 성행하여 민간에서도 방도(防盜) 조직을 만들어 맞서싸웠다. 안규홍은 이것을 바탕으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안규홍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머슴, 빈농 등의 빈곤층이라 변변한 무기가 없었다. 이에 안규홍은 양반 유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양반들은 안규홍과 같이 거의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거절하였다. 그러자 안규홍은 자신을 따르는 빈민들을 데리고 강용언의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부(副)장군이 되었다. 강용언은 원래 강원도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전라도로 건너와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용언이 주민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자 안규홍 무리는 강용언을 숙청해버리고, 1908년 4월 안규홍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안규홍의 의병 부대는 아직 사람이 부족했으며, 전술에 뛰어난 전략가도 필요했다. 그래서 주변 시장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설득하여 의병에 가담시켰으며, 오주일 등 해산 군인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안규홍 부대는 보성 출신의 머슴과 소작농을 근간으로 하는 토착 농민, 시장을 순회하면서 확보한 인근 지방의 농어민, 강용언이 데리고 온 관동 지방 의병, 해산 군인 등으로 조직이 확대되어 세력이 커졌다. 토착 농어민은 지리에 밝고 지역 주민과 밀접한 연고를 맺고 있었으며, 관동 의병은 전투 경험이 풍부하였고, 해산 군인이었던 오주일 등은 전략 전술의 이론과 실제를 두루 갖추고 있어 의병 활동에 필요한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염인서를 부장군, 이관회를 선봉장, 임병국·손덕호·정기찬·장재모·송경회를 좌우익장, 안택환·소휘천을 한후장(捍後將), 오주일·나창운을 참모장, 임정현을 서기, 그리고 박제현을 운량관으로 삼아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문덕면과 율어면의 경계인 동소산에서 항일 투쟁의 시작을 외쳤다.

3. 의병 활동


안규홍 부대의 활동 방향은 일본 세력 구축, 친일파 제거, 탐관오리 근절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일본 뿐만 아니라 친일파, 탐관오리 등도 국가 근본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판단한 것이다.
안규홍 부대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을 공격하고, 일부 악덕 토호들의 재물도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눠주어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자금도 확보했다.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일진회 회원들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투쟁을 시작한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수십 차례의 투쟁을 전개하여 무려 26차례나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다.
안규홍 부대의 활동 무대는 보성에서 순천에 이르렀으며, 후에는 광양 백운산까지도 건너가 투쟁하였다.
투쟁 초기에는 무기라고는 직접 만든 칼, 창 혹은 화승총이 전부였다. 그러나 항일 투쟁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구입하거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나 30년식 보병총과 양식총, 그리고 화승총을 개조한 천보총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신무기를 확보하여 화력이 크게 올라갔으며, 지리와 지형지물에 익숙한 이점을 살린 전술의 운용, 강용언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하는 엄격한 군기 등으로 안규홍 부대는 일제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4. 일제의 의병 토벌


일제도 다양한 방법으로 안규홍 부대를 탄압하였다. 1909년 4월 안규홍 부대를 진압할 목적으로 광주와 남원의 일본군 2개 수비 대대를 차출하여 토벌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토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남 지역 의병 부대에게 심각한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안규홍 부대는 유생 의병장인 전해산, 심남일 부대 등과 연합해 전남 의병 연합 부대를 구성하고, 나주 남평과 영산강 일대에서 합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 수십명을 살상하고, 일본 화물선을 불태우는 등의 전적을 거뒀다. 그러자 일제는 1909년 6월에 이르러 주요 의병 부대의 소재와 근거지를 파악하기 위한 변장 정찰대를 편성하였으며, 주요 의병의 근거지가 어느 정도 파악되자 전남 의병 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남한 대토벌 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 기선 1척, 기정 약간, 그리고 해군 11함대 등 대규모의 병력이 한꺼번에 투입되었다. 그리하여 육지는 물론 해상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포위선을 구축하여 토끼몰이식으로 전남 의병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전개된 이 작전으로 일본군의 거미줄 같은 포위망이 안규홍 부대를 압박하자, 그 동안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해 왔던 안규홍 부대도 동요하였다. 9월 18일 ~ 19일 사이에 약 60여 명의 부하 의병들이 투항하자, 안규홍은 의병 해산을 명령한다. 후일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9월 25일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며, 1910년 6월 22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5. 그 외


당시 사람들이 많은 성금을 모아 비석을 세워주었다.
1963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16년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이라는 연극이 개봉되어 광주 빛고을 시민 문화관에서 공연을 했으며 보성군 문화 예술 회관과 서울 강남 구민 회관에서도 공연할 것이라 한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 하지 마라'라는 말이 생긴 이유가 사실은 벌교에 조폭이 많아서가 아니라 의병장 안규홍이 벌교에서 항일 운동을 해서라고 한다. 안규홍이 벌교에서 일본 순사를 때려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왔다. 1908년 10월에 낙안군이 없어지고 벌교 지역이 보성군으로 편입된 것도 안규홍의 의병 활동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의조상인 안방준 역시 의병장으로 임진왜란시기 일본군과 싸웠다.


[1] 21세손 규(圭)口 기(基)口 항렬[2] 신 죽산 안씨 집성촌이다.[3]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 처가가 을묘왜변에서 승전을 이끈 장인에 이순신 휘하에서 자원하여 도움을 준 처남들이 있는 안방준이 그의 조상이다. 안방준이 살았던 보성 지역에는 그의 가문인 신 죽산 안씨가 비교적 많이 분포하고 있다.[4] 원래 서자로서 천한 신분이었는지라, 누나가 시집갈 때 같이 따라가서 머슴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