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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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킵차크 칸국이란 몽골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 설립된 4대 칸국 가운데 하나이다. 표제어인 킵차크 칸국은 몽골이 튀르크와 함께 이 곳에 오기 전 이전 이 지역을 지배하던 중세 튀르크계 민족인 킵차크인에서 따온 것이다. 킵차크인들이 살게 된 이후 이 지역을 킵차크 초원이라고 불렀으므로 몽골인들이 세운 왕국 역시 킵차크 칸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 金帳汗國, Золотая Орда)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이는데, 이는 킵차크 칸국이 망하고 난 후인 16세기에 러시아인들이 몽골인들의 황금 천막에 붙인 별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부르는 킵차크 칸국이나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이란 명칭은 당시 몽골인들이 사용한 명칭이 아닌 외부 세계에서 호칭한 것에 불과하다.''' 킵차크 칸국과 다른 칸국들의 몽골인 지배층들은 왕조의 창립자인 바투 칸이 칭기스 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주치인 울루스'''(주치 씨족의 영지)라고 불렀다.
몽골인들이 왕족으로 최고 계급이었고 튀르크계들이 관료나 상인등으로 중간계급으로 나머지 슬라브인들을 지배하였다. 국교는 건국 초기부터 피지배계층인 슬라브인들의 정교회를 배제하고 튀르크인들의 수니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였고 몽골인들도 이슬람화하였다. 오늘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등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 국가들의 전신이 된 나라이다.
2. 구성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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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학자들의 견해에 따른 위치설정, '''실제론 서부가 백장 칸국, 동부가 청장 칸국'''
킵차크 칸국은 크게 동부의 청장 칸국과 서부의 백장 칸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청장 칸국은 주치의 장남인 오르다 칸이 주치가 최초로 분봉받았던 지역에서 건국한 칸국이다. 백장 칸국은 주치의 차남이자 오르다 칸의 동생인 바투 칸이 러시아등 서방을 원정해 점령한 지역을 바탕으로 건국한 칸국이다. 즉 '''주치가의 본가는 청장 칸국이고 분가가 백장 칸국인데 정작 킵차크 칸국 즉 주치인 울루스의 대칸은 백장 칸국의 칸이 대체로 겸직했다'''.[3] 이렇게 된 이유는 주치 사후 주치의 여러 아들들 중 가장 능력있고 세력이 강한 '''바투가 주치인 울루스의 통치권을 계승했기 때문이다.'''[4] 이때 주치의 장남이던 오르다 역시 자신의 몸이 원래 약한 이유를 들어 바투가 계승하는 것을 지지했다. 러시아 등 서방 원정도 오르다가 몸이 약해서 바투가 주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칭기즈칸의 장남이던 주치가 몽골 초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킵차크에 자리를 잡았을까? 그 이유는 '''원래 몽골의 전통에 따르면 장자는 아버지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땅을 물려받는 것이다.''' (유목민들의 말자 상속제 참고)따라서 칭기즈 칸의 장자인 주치가 러시아 초원 일대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따라서 원래는 장자인 오르다가 자기 땅을 가지기 위해서 서방 원정을 해야하지만 몸이 약한 관계로 오르다는 아버지 주치의 원래 분봉지에 남고 차남인 바투가 서방 원정을 단행해 자기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주의할 점은 금장 칸국처럼 청장 칸국 백장 칸국의 명칭도 몽골의 러시아 지배 시에는 사용되지 않고 정작 킵차크 칸국이 멸망한 16세기 이후에나 사용된 용어란 점이다. 킵차크 칸국이나 다른 칸국등 몽골인들은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과 오르다 칸의 지배 영역을 '''주치인 울루스'''라고 호칭했다. 즉 '''청장 칸국이든 백장 칸국이든 모두 주치인 울루스이고 울루스 내부에서 주치가의 서열에 따라 영지가 분봉된 것뿐이다.'''
'''문제는 위의 지도에는 청장 칸국과 백장 칸국의 위치가 앞의 설명과는 다르게 청장 칸국이 서부이고 백장 칸국이 동부에 위치해 있다는점이다'''.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것은 러시아 연대기 등 러시아 측에서는 자신들을 지배하고 타타르의 멍에를 씌운 바투의 칸국 즉 서부 지역을 백장 칸국이라 칭하고 그 동부를 청장 칸국으로 칭했다는 점이다. 반면에 서방 학자들은 러시아의 기록들과는 반대로 서부를 청장 칸국. 동부는 백장 칸국으로 명명했다. '''보통 알려진 청장 칸국, 백장 칸국의 위치는 서방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기술되고 있다.''' 위키백과에도 서방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문서가 작성되어 있다.
그러면 '''러시아와 서방 학자들의 견해 중 어느 견해가 맞느냐면 러시아 측의 위치 비정이 옳다고 할 것이다.'''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았던 러시아 측의 역사 서술이 더 정확할 것이며, 5번 항목의 킵차크 칸국의 계승국가 표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유명한 크림 칸국등이 백장 칸국의 계승국가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우즈베크 칸국 등이 청장 칸국의 계승국가로 나와 있는데 이 표의 출처는 위키백과의 청장 칸국과 백장 칸국 문서로 본문에는 바투 칸이 (서방 학자들이 주장하는 서부) 청장 칸국을, 오르다 칸이 (서방 학자들이 주장하는 동부) 백장 칸국을 건국한 것으로 기술해 놓았는데 막상 각주의 킵차크 칸국의 계승국에서는 서부 지역에 위치하는 크림 칸국등을 백장 칸국의 계승국으로, 우즈베크 칸국등 동부에 위치하는 칸국들을 청장 칸국의 계승국으로 서술했는데 본문과 각주의 내용이 정반대로 작성된 모순을 범하고 있다.청장 칸국백장 칸국 당연히 각주의 내용이 옳다.
서방 학자들이 서부를 청장 칸국, 동부를 백장 칸국으로 오해한 것은 러시아 연대기에서 청장 칸국을 왼쪽 날개. 백장 칸국을 오른 쪽 날개로, 몽골(일 칸국)의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 자료에서는 청장 칸국을 왼손으로,백장 칸국을 오른손으로 호칭한 것을 서양의 방위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즉 '''서양에서는 왼쪽이 서쪽, 오른쪽이 동쪽'''이다. 하지만 '''몽골인의 관점에서는 왼쪽 날개.왼손 즉 왼쪽은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기준으로 동쪽을, 오른 날개.오른손 즉 오른쪽은 서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왼쪽 날개.왼손으로 표현된 청장 칸국은 동부에 위치하고, 오른쪽 날개.오른손으로 표현된 백장 칸국은 서부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 연대기나 페르시아 자료는 모두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저술된 자료라서 몽골인의 지리개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5]
3. 역사
3.1. 건국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의 영지가 모태가 되며, 주치의 아들 바투가 유라시아 서부 초원 지대를 휩쓸고 다니면서 사실상 킵차크 칸국의 기틀을 닦았다. 전성기 영토는 서쪽으로 현재의 몰도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북쪽으로는 현재의 러시아, 남쪽으로는 흑해 연안까지 이르렀던 국가다.
킵차크 칸국이 러시아 남부 스텝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루스인(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들이 그동안 몇 세기에 걸쳐 터전을 닦아 놓은 가장 좋은 토지의 대부분을 뺏겼다는 뜻이었다. 이후 루스의 인구와 경제 활동, 정치적 중심은 모스크바와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러시아 북동부로 이동하게 된다. 키예프 루스국의 전성기가 끝난 후 각 대공들간의 소모전으로 인해 쇠락한 경제가 미처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몽골-킵차크인들이 강제 징수를 일삼자 루스인들은 무거운 부담을 안고 말았다.
3.2. 통치
킵차크 칸국의 기반을 이룬 주치와 바투의 군대는 몽골인이 적고 튀르크인 지배자들이 많았다. 특히 타타르인들의 조상인 튀르크계 킵차크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킵차크 칸국과 그 후계 국가를 타타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획득한 영지도 원래 킵차크인의 거주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초기부터 튀르크족의 영향을 짙게 받아 몽골과 튀르크의 문화가 섞였다. 국가 초기부터 지배자였던 튀르크들이 믿고 있던 이슬람을 몽골인들이 받아들이고, 우즈베크 칸이 즉위한 이후로는 사실상 '''튀르크족의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칸의 후예답게 기존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 매우 관대하였다. 심지어 우즈베크 칸은 교황으로부터 관대한 기독교 정책에 대한 감사편지를 받았고 우즈베크 칸 또한 교황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의 아들 자니베크 칸이 정교회의 모스크바 대주교를 불러 자기 아내의 병을 치료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킵차크 칸국은 루스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국들을 칸국의 속국으로 편입하였다. 루스인들은 일정 부분 자치를 인정 받은 대가로 종주국인 킵차크 칸국에게 의무적으로 공물을 납부해야 했으며, 칸이 요구하면 군대까지 지원해야 했다. 이렇게 1240년부터 1480년까지 칸국의 지배를 받은 기간을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몽골-타타르의 멍에[6] 라고 부른다. 원나라를 비롯한 다른 칸국들과 달리 킵차크 칸국은 루스인들과 동일한 지역에 거주하지도 않고 동화되지도 않았기에 정복 이후에도 루스인과 몽골인은 문화적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킵차크 칸국이 제대로 정착한 이후에는 동유럽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남쪽의 일 칸국과 티격태격해댔다. 여기에는 일 칸국이 들어선 영역이 몽골의 전통으로는 칭기스 칸의 장자 주치의 땅, 곧 '주치인 울루스'로 여겨졌던 탓도 있다. 초창기 칸들이 오고타이 칸국을 지원하면서 원나라와는 긴장관계를 유지했지만, 카이두 사후 그럭저럭 원의 권위를 인정하고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크림 반도의 제노바인과 제휴하여 크림 반도에서 볼가강 하류,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교역 루트를 장악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는데, 당시 융성한 모습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 베르케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묘사에 잘 드러나 있다.
몽케 칸을 찾아간 뤼브룩의 기욤이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특사 카르피니도 이 루트를 통해 카라코룸에 도착했다.
킵차크의 칸들은 루스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루스 도시 지배자들과의 알력을 이용하였다. 이 중 가장 충실한 심복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이반 1세부터 본격적인 대공의 지위를 받아 징세관 역할을 수행하였다.[7] 때로 모스크바 대공들은 자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도시들이 칸을 섬기지 않는다며 칸에게 밀고했고 그때마다 킵차크 칸들은 징벌 원정을 통해 도시들을 황폐화시키고 종주권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모스크바 대공이 칸에게 호출당했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기도 했다.
3.3. 쇠퇴와 멸망
킵차크 칸국은 흑사병의 유행과 더불어 우즈베크 칸의 후계자 자니베크 칸이 1357년 암살당하면서 삐끗하기 시작했으며, 마마이 칸 재위 시절에 벌어진 쿨리코보 전투(1380)에서 모스크바 공작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러시아 제후 연합군에게 패전하면서 체면을 구겼다.[8] 모스크바 공국에서 승전 결과를 과장해서 퍼트리자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치던 루테니아 일대 공국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 결국 패배한 마마이 칸은 처형되고,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치던 동유럽 내 여러 공국들이 당시 상승일로에 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 쪽으로 붙어버렸다.[9] 그 뒤를 이은 토크타미쉬 칸이 즉위하여 모스크바를 털면서 간신히 체면을 세웠고 러시아에 대한 종주권은 다시 인정받았지만, 과거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동맹 관계에 있던 티무르 제국이 손에 넣은 페르시아를 탐내 타브리즈를 약탈한 것을 계기로 동맹은 결렬됐고, 여기저기에서 티무르에게 갈리다가 결국 수도 사라이 베르케까지 털렸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티무르 제국으로 끌려간 것을 계기로 킵차크 칸국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킵차크 칸국이 전통적으로 일 칸국의 영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것을 감안하면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인간흉기 티무르에게 도전한 대가는 실로 가혹했다. 킵차크 칸국의 권위는 와해되고 영내 여러 부족과 토후들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후 칸에서 쫒겨난 토크타미쉬는 예전부터 킵차크 칸국과 키예프 루스 등 우크라이나 일대를 놓고 경쟁해오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망명해서,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과 함께 킵차크 칸국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의 팽창은 1399년 보르스클라 강 대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이 궤멸되면서 멈췄지만, 이미 킵차크는 리투아니아에게 우크라이나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겼고 리투아니아의 흑해 진출을 허용했다. 이후 주치의 첫째 아들 오르다의 후손과 토크타미쉬의 자손들이 번갈아 각축을 벌이며 킵차크 칸국은 소리 없이 무너져 갔다. 결국 1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우즈베크 칸국[10] , 카자흐 칸국[11] 으로 분리되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 칸국들이 떨어져가고 남은 킵차크 칸국을 이흐 칸국이라고도 한다.
마침내 아흐메트 칸 재위시절인 1480년 러시아 제후국들을 하나씩 통합하고 있던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크림 칸국과 제휴하여 종주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240년에 달하는 몽골-타타르의 지배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아흐메트 칸은 이를 응징하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 대공국 및 크림 칸국을 압박하였지만, 아흐메트 칸이 사망하고 그 아들이 물려받은 시기에는 모스크바와 크림 칸국의 공세에 밀리게 되어 결국 1502년 크림 칸국과 모스크바 공국에게 정복당한다.
4. 역대 칸 목록
- 바투 칸(Батый) (1237-1255)
- 사르타크 칸 (1255-1256)
- 울락치 칸 (1256?)
- 베르케 칸(Берке) (1256?-1266)
- 멩구티무르 칸(Менгу-Тимур) (1266-1282)
- 투다멩구 칸(Туда-Менгу) (1282-1287)
- 탈라부가 칸(Талабуга) (1287-1291)
- 토흐타 칸(Тохта) (1291-1312)
- 우즈베크 칸(Узбек) (1312-1341)
- 티니베크 칸 (1341-1342)
- 자니베크 칸(Джанибек) (1342-1357)
- 베르디베크 칸(Бердибек) (1357-1359)
- 이후 약 20년간 킵차크 칸국은 약 20명의 칸들이 쟁탈전을 벌인다.
- 마마이 칸(Мамай) (1362-1380)
- 토크타미쉬 칸(Тохтамыш) (1380-1395)
- 테무르 콰틀루크 칸(1395-1401)
- 샤디 베그 칸(Shadi Beg) (1401-1407)
- 푸라드 칸(Pulad) (1407-1410)
- 테무르 칸(Temür) (1410-1412)
- 잘랄 앗딘 칸(Jalal ad-Din) (1412)
- 카림 베르디 칸(Karim Berdi) (1412-1414)
- 케베크 칸(Kebek) (1414-1417)
- 자바르 베르디 칸(Jabbar Berdi) (1417-1419)
- 울루그 무한마드 칸(Ulugh Muhammad) (1419–1421, 1428–1433) 카잔 칸국 시조
- 데브레 베르디 칸(Dawlat Berdi) (1421–1422)
- 바라크 칸(Baraq) (1422-1428)
- 셰이드 마흐메드 칸 (1433-1435)
- 쿠춤 무한마드 칸(Küchük Muhammad) (1435–1459)
- 마흐무드 칸(1459-1465)
- 아흐메트 (1465년~1481년) 모스크바 독립
- 샤이크 아흐메트 (1481년~1498년, 1499년~1502년)
- 무르타다 (1498년~1499년)
5. 멸망 이후
6. 역사보기 틀 모음
[1] 라시드 앗딘의 집사(集史) 표기[2] 타타르어, 카자흐어, 노가이어 등의 조상어뻘이 된다.[3] 단 예외적으로 청장 칸국의 칸이 킵차크 칸국의 대칸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티무르의 라이벌로 유명했던 토크타미쉬 칸이 이에 해당된다[4] 장자 우선이 없는 유목민족의 특성 중 하나이다. 이후 만주족이 후금을 세웠을 때도 같은 이유로 홍타이지가 만주의 칸이 되었다.[5] 몽골인들이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기준으로 동서를 구분하는 것은 몽골인들의 시선이 언제나 풍요로운 정주문명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몽골 북쪽은 항상 황량하고 더럽게 추운 시베리아다. 당연히 몽골인들의 시선은 언제나 남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들의 지리개념도 이에 따른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 정주문명권에서도 중국의 오방색의 개념으로 왼쪽을 동쪽, 오른쪽을 서쪽으로 보았다. 오방색에 따르면 동쪽은 푸른색, 서쪽은 흰색인데 이는 청장과 백장의 구분이 오방색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이유는 다르지만 몽골 등 유목민족이나 중국등 정주 문명 모두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이다. 튀르크인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방위개념이 동일하다.[6] 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 간단하게 몽골의 멍에, 혹은 타타르의 멍에라고도 부른다.[7] 사실상 모스크바가 하나의 도시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가 이 시대에 본격적으로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8] 평소대로라면 모스크바가 어느 정도 커졌을 때 짓밟아 이 지역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킵차크 칸국의 기본적인 전략이었지만, 1360년대의 내분이 이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었고 이후에는 모스크바가 지나치게 강성해져버린다.[9] 그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우리는 옛 것을 바꾸지도 않고 새로운 것을 가지고 오지도 않는다."라는 말로 루테니아 지역 유지들을 안심시킨 뒤 포섭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치던 공국 중 상당수가 리투아니아에 무혈 점령되었다.[10] 티무르 왕조를 중앙아시아에서 쫓아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모태.[11] 우즈베크에서 갈라져 나온 무리다. 현재 카자흐스탄의 모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