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키

 

그리스어: Θεσσαλονίκη
라틴어: Thessaloniki
영어: Thessalonica
터키어: Selanik
불가리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 Солу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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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와 그 주변
1. 개요
2. 역사
3. 문화유산
4. 기타


1. 개요



그리스 중앙마케도니아 주의 주도이자 제2의 도시이다. 테살리아 자방으로 불리는 그리스 북부의 중심지이다. 살로니키(Σαλονίκη)로 불리는 경우도 있고, 라틴어 명칭인 테살로니카(Thessalonica)나 살로니카(Salonica)로 불리기도 한다. 의미는 테살로스의 승리.
현대 그리스어 발음으로는 '세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 '테살로니키'는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표기이며 이는 코이네 그리스어의 발음을 따른 것이다.[1]
별칭은 공동 수도(the co-capital, Συμπρωτεύουσα, 심브로테부사)이다. 테살로니키가 동로마 제국 시대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제국 공동 수도(Συμβασιλεύουσα, 심바실레부사)라는 별칭이 있었는데, 현대 그리스 공화국에서도 수도 아테네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수도인 아테네처럼 광역 행정구역인 테살로니키 도시권(Thessaloniki Urban Area)과 시급 행정구역인 테살로니키 시(Municipality of Thessaloniki)가 있다. 2011년 기준으로 테살로니키 시의 면적과 인구는 19㎢, 32만 명이고 테살로니키 도시권의 면적과 인구는 112㎢, 79만 명이다. 보통 테살로니키 시라고 하면 테살로니키 도시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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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가 있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위치
테살로니키 자체만 본다면 국경선에 가까운 데다가 그리스 북동부에 너무 치우친 감이 있어서 중심지가 된 것이 신기할 수 있지만, 지정학적으로 발칸 반도 남부에 위치한 국가들이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치지 않고 직접 지중해로 선박을 보내기 딱 좋은 곳이라서 그리스의 항구이지만 다른 나라들의 화물이 집중되는 곳이다. 그래서 국제 항구의 성격을 갖고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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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15년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지배하던 카산드로스가 처음 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이자 자신의 부인이었던 테살로니케(테살로니키의 고대 발음)의 이름을 붙였다. 그 뒤 중요한 항구 도시로 성장했으며,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고대 로마에 의해 마케도니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라틴어로 테살로니카라고 불렸으며, 이탈리아에서 제국 동방으로 가는 중요한 도로인 에그나티아 가도의 중간 기착지 중 하나였다.
동로마 제국이 서기 7세기에 거대도시인 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를 잃고, 에게 해 연안의 주요 대도시들이었던 에페소스, 스미르니, 아테네 등이 쇠락하면서 테살로니키가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중세 초기 인구는 대략 수만 명, 중기와 말기에는 대략 10만~1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구 30만~50만으로 추정되는 초거대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중세 테살로니키는 그리스-발칸 반도 지역의 육로와 에게해로 통하는 해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이 때문에 앞서 개요에서 언급된 제국 공동 수도라는 별칭도 생겼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크기와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그냥 도시(Η πολή, 이 폴리)라고 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다른 도시들은 모조리 마을(η χώρα, 이 호라)로 불렸으며 테살로니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안나 콤니니는 그의 저서 알렉시아스에서 테살리아(θεσσάλια)의 마을(χώρα)이라는 표현을 썼다.
1204년 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아 테살로니키도 함락되었으며, 십자군 봉건 국가 라틴 제국의 봉신 영지인 테살로니카 왕국이 되었다가 1242년 니케아 제국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면서 다시 제국 제 2의 도시가 되었지만, 제국의 국력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1342년에는 열심당원(Zealot)이라고 자칭한 도시 하층민들의 반란으로 공화정부가 수립되어 8년 동안 독립을 유지하다가 패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1389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고, 이후 동로마와 오스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1423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양도되었다. 베네치아의 힘으로 그나마 좀 더 버텨 보려는 심산이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1430년 무라드 2세의 군대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복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셀라니크(Selanik)라고 불렸는데, 테살로니키를 살로니키라고 줄여 부르던 것이 터키식 발음으로 변형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같은 지역을 중심지로 삼은 지정학적 후계 국가인 만큼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번영하는 주요 대도시 중 하나로 남았다. 16세기에는 스페인에서 레콩키스타 종료 이후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입되어 1519년에는 유대인 인구 비중이 절반을 넘길 정도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철도, 전등, 전차가 도입되는 등 근대화되었으며, 그리스와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20세기 초반까지도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계속 남아있었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이 여기서 발발했으며, 터키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 아타튀르크도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대표적인 대서방 교역창으로서 국제적이고 근대 문물로 가득했던 이 도시를 깊게 사랑했으며, 훗날 젊은 장교 시절 테살로니키가 그리스로 넘어가자 동료 장교들을 다그칠 때 "우리의 고향 셀라니크가 적에게 넘어갔는데 아직도 술탄의 녹을 먹고 있는 자네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가?" 라는 식으로 책망하곤 했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터지면서 그리스불가리아는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그리스 수상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진격하는 그리스군이 테살로니키와 마나스티르[2] 중 어느 도시로 진격할 것인지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해오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라!(Θεσσαλονίκη με κάθε κόστος!)"고 지시했다. 1912년 11월 8일 결국 그리스군이 입성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항복을 받았고[3], 1913년 3월 국왕 요르요스 1세(Γεώργιος Αʹ)가 이 곳을 방문했다가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같은 해 8월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완전히 그리스 영토가 되었다.
1912년 전쟁으로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 크레타가 새로 그리스 왕국으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아테네 등 중남부 지역과는 이미 80년이나 다른 나라로 살아온터라 그리스는 테살로니키에 마케도니아 총독부를 설치했고, 1955년 북부그리스부(部)로 개편될 때까지 총독부가 남아있었다. 이 부서는 지금도 그리스 내무부 산하 부처로 격하되어 존재한다.홈페이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연합군불가리아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가 돼서 50만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군대가 모인 적도 있었다. 비록 진격 자체는 전쟁 끝에 가서야 제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1917년에는 대화재로 도시 중심부가 홀랑 타버리기도 했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때는 16만이 넘는 피난민을 받아들였다. 반면 터키로 떠난 무슬림은 2만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폭격을 받았으며, 뒤이어 개입한 나치 독일그리스 침공을 맞은 그리스가 이 도시와 주변 지역을 포기할 수 없어서 이 도시와 동부 영토를 보호하는 메탁사스 방어선에 상당한 병력을 투입했고, 결국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방어선을 지키려다가 독일군이 방어선의 빈틈을 노리고 파쇄공격을 하는 통에 순식간에 함락(1941년 4월 8일)된 역사도 있다. 이 당시만 해도 테살로니키는 유대인이 많은 도시였지만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수용소로 끌고 갔다.

3. 문화유산



역사가 오랜 도시인만큼 유적도 많다. 고대 로마 유적으로는 포룸(Forum=아고라), 갈레리우스 개선문 등이 있다.
특히 테살로니키의 초기 기독교 및 동로마 양식 건축물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들인데, 아야 소피아,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아야 에카테리니, 나오스 프로피티 일리아 등의 성당들과 테살로니키 성벽, 동로마 시대 목욕장 등이 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시절의 건물로는 도시의 상징인 백탑(Λευκός Πύργος)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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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 항구를 위한 요새인 백탑. 12세기부터 요새가 있던 곳에 오스만 제국 때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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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리우스 개선문. 갈레리우스 황제가 사산 제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마찬가지로 테살로니키 내에 있는 로톤다(Ροτόντα)와 더불어 세웠다. 로톤다는 원래 갈레리우스의 무덤으로 쓰려고 지어졌으나 빈 공간으로 방치되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오스만 제국 시기 모스크로 쓰였고 미나레트가 덧붙여졌다. 그 후 1912년 테살로니키 수복을 계기로 다시 성당으로 복구되었지만 미나레트는 철거하지 않은 채 오늘날로 이어지고 있다. 내부에는 동로마 시절의 모자이크가 일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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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와 이름이 같은 아야 소피아. 원래 성당이 있던 자리에 8세기에 지어진 복제품이다. 4차 십자군에 의해서는 가톨릭 성당으로,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던 역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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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자 터키 독립전쟁의 영웅인 아타튀르크의 생가. 주 테살로니키 터키 영사관 바로 옆에 있으며 그리스 땅에 있는 터키의 양외지(讓外地)이다.[4] 1881년에 아타튀르크가 이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아타튀르크의 가족들은 1912년까지 이 집에서 거주하다가 테살로니키 함락 이후 추방되어 한동안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다가 터키와 그리스가 우호협정을 맺은 1933년, 테살로니키 시에서 이 집앞에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붙인 것을 계기로 테살로니키 시가 이 집을 구입해 1937년에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다. 아타튀르크는 다른 터키인에 비해 어려서부터 서구 근대 문물과 접촉하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준 고향 셀라니크의 국제적인 분위기를 깊게 사랑했고, 여기가 그리스에게 넘어간 걸 큰 한으로 삼으며 졸지에 실향민이 된 이후에도 방문하고 싶어 했다. 정작 아타튀르크는 이 집에 정말로 가보고 싶어했지만 1938년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3년에 터키 정부가 아타튀르크의 여동생인 마크불레 아타단(Makbule Atadan, 1885-1956) - 그녀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 의 자문을 받아 아타튀르크가 살던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해 박물관으로 열었다. 현재 이 집은 터키 의회 소유로 터키 정부가 관할하고 있으며, 내부 직원들도 그리스인과 터키인으로 되어있어 터키어도 잘 통한다. 테살로니키를 찾는 터키인 관광객들은 거의 무조건 들른다.
아타튀르크 시절 그리스와 신생 터키 공화국은 서로 치열한 전쟁도 많이 치루고, 현대까지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되는 사건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아타튀르크 본인과 그의 그리스 측 라이벌격이었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서로 깊이 존경하는 사이였다. 양쪽 모두 혼란스러운 오스만 제국 말기에 태어나[5] 자국의 후진성을 한탄하며 반동적인 자국 내 종교 세력과 크게 싸워야 했고, 근대 민족 국가의 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 경력을 펼쳤으니 국가 대 국가라는 입장을 벗어나 개인으로서는 충분히 동질감을 느낄만도 했다. 베니젤로스가 그리스 정계에서 몰락하는 30년대 쯤에는 아예 두 나라가 모두 인구 교환 등을 통해 형식적으로 분쟁 거리를 청산한 이후 상호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두 나라 정가에 한동안 화해 무드가 감돌았으며, 1934년 베니젤로스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서 아타튀르크를 추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둘 다 당장은 근대 민족 국가로서 그리스와 터키의 성장을 지상과제로 두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그리스와 아나톨리아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는 운명 공동체로서 다시 하나의 나라 로 통합 될 것이란 믿음을 공유하기도 했다.[6] 역사적 배경이 이러하니 그리스와 터키 간의 악감정은 별개로 아타튀르크 같은 경우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인정하고 그와 관련된 유물을 보존할 만한 여건이 됐던 것이다.

4. 기타


  • 불가리아도 여기를 테살로니카가 아닌 솔룬(Солун)이라 부른다. 사실 솔룬이나 셀라니크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어 Σαλονίκη에서 유래되었으므로 그리스에서는 별로 신경 안쓸지도 모른다(...).
  • 유고슬라비아는 국가가 성립할 때부터 해체될 때까지 테살로니키를 지중해로 나가는 무역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 2010년부터 부산광역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 신약성경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 나오는 "데살로니가" 라는 지명이 현재의 테살로니키이다. 개신교의 성서는 보통 그리스어 음역을 거센소리를 잘 안 쓰고 예삿소리로 표기하기에 이렇게 되었다.
  • 이 곳을 연고로 하는 축구 구단으로 PAOK FC가 있다.
  •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축구종목에서 한국올림픽축구대표팀이 그리스와 조별예선 첫 경기를 이곳에서 벌였다. 결과는 2:2 무승부.
  •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가 유명하다.
  • 테살로니키 지하철이 2006년 착공하여 2018년 완공예정(18개 역)이다. 장기적으로는 35개 역을 운용할 예정. 그리스 재정이 좀 힘들긴 하지만 테살로니키의 교통문제가 심각한만큼 긴축정책에도 예산이 꾸준히 배당되고 있는 상황이라 2020년에는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 그리스의 대통령인 에카테리나 사켈라로풀루가 태어난 곳이다.

[1]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θ가 무성 치 마찰음(/θ/)이 아닌 유기음(/tʰ/)였으며 중세를 거치며 /θ/로 변해갔다.[2]북마케도니아의 도시 비톨라. 테살로니키와 더불어 마케도니아 지방을 대표하는 양대 도시였다. 여기는 세르비아군이 점령했다.[3] 불가리아군은 11월 9일, 테살로니키가 그리스군에게 항복한 '''그 다음 날'''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작 하루 차이로 테살로니키가 그리스에게 넘어간 것에 대해 허탈해 한 불가리아군 인사들에게 테살로니키를 방어하던 오스만군 사령관이 한 발언이 일품인데 "미안하오만 내겐 테살로니키가 하나 밖에 없었다오."[4] 양외지는 그 나라의 정부가 다른 나라 부동산의 소유주로서 소유한 것이라서 영유권을 넘겨 받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양외지를 소유한 나라의 정부가 양외지의 영유권을 가진 나라에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물론 양외지는 역사적인 이유로 다른 나라가 소유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그 나라 정부로부터 면세 등의 특혜를 받는 경우가 많다.[5]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섬의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으로 유년기 벌어진 1866년 반오스만 봉기의 실패 이후 그리스 본토로 망명을 갔다.[6] 이상의 내용은 그리스 출신 터키학자이자 그리스-터키 연합주의 사상가인 드미트리스 키치키스(Δημήτρης Κιτσίκης)의 칼럼에서 발췌해 온 것이다. 실제로 고대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은 동로마 제국 말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사방을 오스만 세력에 둘러싼 월경지가 된 시절 같은 일시적인 정치적 혼란을 제외하면 한번도 정치적인 경계지였던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