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당나라의 후궁
貴妃 楊氏 | 귀비 양씨
'''
'''성씨'''
양(楊)
'''아명'''
옥환(玉環)[1]
'''생년'''
719년
'''몰년'''
756년
'''부군'''
당현종 이융기
'''가족 관계'''
부친 양현염(楊玄琰), 언니 한국부인 양옥패(楊玉佩), 괵국부인 양옥쟁(楊玉瑤), 진국부인 양옥차(楊玉?), 6촌 오빠 양국충
1. 개요
2. 대중매체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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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2]라는 직함이 붙은 것이다.[3] 그러니까 귀비 양씨. 정사에서는 양귀비의 본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야사 <명황잡록(明皇雜錄)>에서는 양귀비의 아명이 '''옥환(玉環)'''(소설)이라고 나와있기 때문에 양옥환(楊玉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4]이며 용주(容州)[5]에서 출생했다. 17살 때 현종의 제18황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하였다.[6] 당시 현종은 56세, 양귀비는 22세로 둘의 나이차는 무려 '''34살 차이'''.(...) 27살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7]로 책립되었다. 이게 막장이라면 막장인데, 왜냐하면 수왕의 생모가 무혜비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 총비였던 시어머니가 죽자 며느리가 그 자리를 계승한 꼴. 참고로 전남편 수왕 이모는 천보 4년(745년) 경에 위소훈(韋昭訓)의 셋째 딸인 위(韋)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였고 전처인 양씨와의 사이에서는 두지 못했던 자녀를 후처인 그녀나 다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많이[8]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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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년 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양귀비는 물론 자매와 친족에게까지 현종이 후대하니, 이런 상황을 백거이가 쓴 장한가에 묘사했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 3천 미녀가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3천 명분 총애가 한 사람에 내리네

遂令天下父母心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네

양귀비의 자매가 누린 부귀영화로 친척 오빠인 양국충(楊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대작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양귀비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9])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당시 양귀비의 옷을 만드는 전문인력만 700명이 넘었다고 하니 나라가 기울지 않을 리가 없다.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게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에게도 죽음을 강요했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중국 4대 미인,[10] 또는 5대 미인의 한 명으로 정사(正史)에선 양귀비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적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소리다. 요즘 같은 시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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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벽화나 그림을 보면 미인상은 통통하거나 육덕지게 살집이 있는 모습이 미인상이었다. 왜냐면 당시 음식이 귀해서 살이 찔 수 있는 사람들은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통통할수록 미인으로 보았다.[11] 현대는 지방이 거의 없는 마른 체형이 미의 기준이지만, 매비가 양귀비를 욕한 것은 양귀비에 대한 질투에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당나라는 당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주해 살던, 지금으로 치면 미국 같은 다문화 국가였기 때문에 유럽이나 중동의 영향을 받아 육덕 체형의 미인이 인기가 있었다.[12]
양귀비는 가무(歌舞)에도 뛰어나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양귀비의 별명인 해어화(解語花)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 얼굴만 예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지적인 여자라는 의미로, 동시대의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장한가(長恨歌)》를 노래하여 양귀비는 중국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여주인공이 되었다. 진홍(陳鴻)의《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정작 양귀비 자신은 정치나 권력 투쟁에는 관심이 없이 현종과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생활에 만족한 편이었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오빠 양국충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록산이 장안을 방문했을 때,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그의 외모를 재미있게 여겨 홀딱 벗겨 목욕시켜 아기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훗날 안록산이 간신(양국충)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키고 양귀비가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중국에서는 이때 양귀비와 안록산이 '''사랑에 빠져''' 안록산이 양귀비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희곡도 있지만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인기인이라 양귀비, 양귀비비사, 대당부용원 등 양귀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여러 편 만들어졌다.
야사지만 양귀비는 겨드랑이 냄새(암내)가 심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시종이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닐 정도라, 양귀비는 항상 향이 나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 현종은 고질적인 축농증이 있어 양귀비의 암내를 몰랐다고 한다.
마약에 쓰이는 꽃인 양귀비는 당연히 여기서 따온 이름인데, 마치 마약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것처럼 양귀비에게 빠져서 나라를 피폐시킨 당 현종의 모습이 매우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13]

2.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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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영화 <양귀비: 왕조의 여인>에서 양귀비를 맡은 판빙빙. 문화적, 경제적으로 융성했던 당나라가 한 여인에 의해 파멸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담았다. 판빙빙은 이에 앞서 대당부용원에서도 양귀비를 맡았는데, 여기서의 양귀비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활발하며 당현종과는 서로의 예술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지음의 관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2010년 방영되었던 양귀비비사의 양귀비役 은도가 OST를 직접 부르는 등, 마치 한국의 장희빈처럼 영상화될 때마다 진정한 양귀비 재현에 힘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각각 일본과 한국에서도 영화화한 적이 있는데, 1955년 쿄 마치코(京マチ子) 주연으로 다이에이와 쇼브라더스 합작 영화 하나, 1962년 김지미 주연의 양귀비와 도금봉 주연의 천하일색 양귀비가 있다. 제작 밑 상영 당시 양귀비와 천하일색 양귀비 모두 스타성 겨루기로 유명했는데, 양귀비 측에서 김지미의 목욕신을 홍보하며 이목을 끌자 천하일색 양귀비 측 역시 서둘러 도금봉의 목욕신을 찍었다는 뒷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국 둘다 흥행실패를 해 무승부로 싱겁게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소설 음양사 시리즈로 유명한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 사문공해 당나라에서 귀신과 연회하다1~4(沙門空海唐の国にて鬼と宴す)를 원작으로 하여 패왕별희의 첸카이커 감독이 제작한 중일합작 영화 요묘전: 레전드 오브 더 데몬 캣 에서는 장용용이 분했으며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절세미녀이며 경국지색으로 당연히 나오는데 영화속 당명황 이융기의 성당시대의 또다른 주인공으로 나오고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차마 황제를 죽일수는 없었기에 희생양으로 먼저 나라를 망친 양귀비의 6촌 당형이자 사공이고 황실과 같이 피난행렬에 있었던 양국충과 일족들을 모두 죽이고 양귀비도 죽이려고 하자 현종이 도술가 황학에게 부탁을 하여 수면상태로 만들고 전란이 끝나기를 기다리게 되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49년뒤의 장안성을 뒤흔들게 되는 사건들의 원인이 되는 인물로 나온다.
아직까지도 근거는 크진 않지만 일본의 가수인 불세출의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가 양귀비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조차도 언론에서 이렇게 주장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자기 성은 원래 양씨라며 족보까지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계인 손정의가 자신의 성씨를 들어 조상 중에 중국계 혈통도 섞였다는 립서비스를 한 바 있었던 것처럼 조선시대 일부 양반들이 족보에서 성씨의 시조를 이름 있는 중국계 인사들로 하던 유행에 맞물려 있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썼다는 설이 약간 더 타당하다.
원래 불타 죽은 사람은 양귀비가 아닌 시녀였으며, 양귀비가 도주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도망간 곳이 다름 아닌 일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양귀비는 돛 없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륙하여 땅에 쓰러졌는데, 야마구치현 주민들이 양귀비를 발견해서 거기서 더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후손을 남겼다고 하지만 이것은 신빙성이 아예 없다. 백거이의 유명한 시 장한가는 양귀비와 당현종의 사랑을 소재로 한 시다.
Fate/Grand Order에서 포리너 클래스의 서번트로 데뷔했다. 해당 항목 참조.

3. 둘러보기




[1] 당나라 시대의 야사 '명황잡록(明皇雜錄)'에 기록되어 있다.[2] 황후 다음 서열의 후궁.[3] 비슷한 예시로 희빈 장씨가 있다. 더군다나 오빠 이름이 장희재라서 희자 돌림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4]산서성 융지시(永濟市) 지역.[5] 광서성 지역.[6] 도사가 되면 과거의 자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 즉 수왕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도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7] 측천무후 이후 사라졌던 작위다. 당현종 당시에는 황후 아래에 혜비, 여비, 화비가 있었는데, 그는 양귀비만을 위해 세 비를 초월하는 귀비 작위를 부활시켰다. 양귀비에 대한 당현종의 사랑을 알 수 있다.[8] 무려 5남 22녀[9] 요즘 음료수로도 나오는 '리치'.[10] 서시, 왕소군, 초선.[11] 단 이 통통하다, 뚱뚱하다에 대해 오해가 있는 편인데 비만 체형이 아니라 적당히 통통하거나 살집이 있으면서 어느 정도 날씬해야 했다. 첨부된 미인도만 아닌 아프로디테의 탄생 그림만 봐도 통통하거나 살집이 있긴 하지만 비만 체형은 아니다.[12] 사실 중국 역사에서 미인의 기준이 되는 체형은 꽤 다양하며, 오히려 호리호리하고 갸냘픈 것이 미의 기준이었던 적이 더 많다. 그 단적인 예가 조비연.[13] 당 현종의 몰락이 양귀비 한 명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이유들이 겹쳤지만 양귀비 역시 원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