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4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Antiochus I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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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기원전 215년 ~ 기원전 164년
'''출생지'''
페르시아 수사
'''사망지'''
페르시아 이스파한
'''지위'''
메가스 바실레우스
'''국가'''
셀레우코스 제국
'''가족'''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아버지)
라오디케 3세(어머니)
안티오코스(큰형)
셀레우코스 4세 필리파토르(형)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장남)

'''참전'''
펠루시움 전투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왕
페르시아메디아의 왕
재위
기원전 175년 ~ 기원전 164년
1. 개요
2. 통치
2.1. 초반기
2.2. 왕권강화
2.3. 외치
2.4. 내치


1. 개요


'''비천한 왕, 뻔뻔하고 속임수에 능한 왕'''
'''적그리스도의 예표'''
안티오코스 4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8대 왕이다.

2. 통치



2.1. 초반기


선왕인 셀레우코스 4세가 암살당하고 원래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지만, 여러 속임수로 왕위에 오른 그는 우선 선왕을 암살한 헬리오 도루스를 처벌한 후 반란군을 진압하여 국정을 안정시킨다.

2.2. 왕권강화


또한 그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는데,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며, 한발 더 나아가 제국 전역에 그리스 문화를 안티오코스 3세보다도 더욱 쎄게 강요한다.

2.3. 외치


그가 힘써야 했던 문제는 역시 배상금 문제였는데, 그는 로마에서 포로생활을 한 경험이 있기에 로마의 힘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즉위하자마자 로마에 경탄하는 태도를 가진다. 또한 그는 안티오코스가 처리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지녀 팔레스타인의 회복을 주장하던 이집트가 로마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로마가 거부하면서 안티오코스는 팔레스타인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한다.
BC 173년, 안티오코스는 드디어 로마의 배상금을 전부 갚는다. 배상금을 다 갚고 나자 그는 제국의 제정 확충에 힘썼는데, 또한 이집트를 공격해 펠루시움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대파해 이집트의 관문인 펠루시움을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시킨다. 이집트를 점령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로마의 눈치를 봤는지 이집트의 보호자이자 섭정이란 칭호를 부여하고는 그냥 놔둔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집트가 로마에게 자꾸만 원조를 요청하자 BC.168년 이집트를 침공해 펠루시움과 키프로스의 할양을 강요한다. 로마는 당시 마케도니아와 전쟁중이었던 데다가 이쪽에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기에 이집트에 관여를 하지 않았고 덕분에 안티오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원조 요청까지 뿌리치면서) 이집트를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다(...)
그는 군대를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주둔하고 그곳을 아예 함락시키려 하였으나,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로마가 강경한 대응으로 나왔다. 로마의 사절인 포필리우스 라에나스에게 원 안에서 나오기까지 대답을 강요당하는 엄청난 치욕을 겪고(...) 이집트에서 철군했다. 그러나 로마가 팔레스타인은 지켜주었기에 팔레스타인은 보전할수 있었다. 어쨌든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보존시켜 준 것은, 마케도니아가 자꾸 후방을 찌르고, 강국으로 다시 부상한 셀레우코스와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체면은 세워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으로 안티오코스는 동시에 뼈저린 타격 하나를 입게 되는데, 후방에서 든든한(?) 맹우였던 마케도니아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집트는 더이상 힘을 못 쓰니 그렇다 쳐도, 제국에 신뢰적이였던 강대국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2.4. 내치


안티오코스는 다인종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 문화를 아버지보다도 더욱 강하게 강요했다. 그 정책의 일환이 유대인 탄압이었는데, 원래 예루살렘은 이집트로 통하는 전초기지 역할도 했기 때문에 전대에 특권 도시가 되어 있었다. [1] 유대인들 역시 안티오코스가 탄압하기 전까진 그리스식 옷을 입고 그리스어를 하며 제국에 충성한 유대인들이 대다수였는데, BC.169년 사제단은 제국이 이들의 문화를 탄압하자 이에 반발해 제국이 임명한 대제사장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다.[2]
안티오코스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해 이들을 강습하였고, 예루살렘은 특권을 박탈당하고 시리아군이 주둔한다. 그 후 안티오코스는 유대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제국군에 겁먹어 반발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BC 165년 유대 마카베오가 제국군이 더럽힌 신전을 정화하자 반란에 가속도가 붙는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이때 여기 없었고 페르시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스파한 근처에 있었는데 BC.164년, 병에 걸려 사망한다. 재위는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5세로 넘어간다.

[1] 안티오코스 3세는 부유한 유대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유대교도 허락하고 특권도 주었다.[2] 이때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핍박하고 유대인들한테 제우스 신앙을 숭배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에, 그는 유대인들이 쓴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에서 신을 모독하는 사악한 짐승으로 묘사되어,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한테 욕을 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