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단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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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Enrico Dandolo
이탈리아어: Enrico Dandolo
1107(추정)~1205

1. 개요
2. 생애
3. 제4차 십자군 원정
4.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5. 죽음
6. 평가
6.1. 종합
6.2. 베네치아 내치에 관한 평가
6.3. 비판
6.4. 옹호
7. 대중 매체


1. 개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국가원수).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주동자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아버지 비탈레 단돌로는 요직에 있었으며 엔리코 단돌로도 공직 생활을 하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소양을 닦았다. 단돌로 가문 자체가 베네치아의 명문 상인 가문으로, 엔리코 단돌로 이전에도 이후에도 공화국 관련 기록에 종종 등장한다.엔리코 단돌로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을 챙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분노한 마누엘 1세의 의해 실명을 당했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머리에 부상을 입어 서서히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엔리코 단돌로는 시실리와 페레사와 협력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성공했고 두 번이나 시칠리아의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로 파견되어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193년 6월 1일 제38대 도제였던 오리오 마스트로피에로가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엔리코 단돌로는 62세의 늙은 나이로 베네치아 공화국 제39대 도제로 선출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로서 엔리코 단돌로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도제의 권리와 의무를 밝힌 '두카의 언약'을 맹세했다. 그는 또한 형법을 개정하고 화폐를 개혁하고 그로소, 또는 마타판이라고 하는 은화를 발행함으로써 동방무역을 장려하기 위한 전반적 경제정책의 포문을 열었다. 그로소 주화에 나오는 단돌로의 초상은 망토를 걸치고 왼손에는 두카의 언약, 오른손에는 성 마르코의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3. 제4차 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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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4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십자군은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지만 당시 십자군은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이집트로 가는 선단을 빌리기 위해 베네치아와 협상했고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에게 8만 4천 마르크의 은화를 대가로 선단을 빌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기껏 1년 동안 거액의 돈을 들여 열심히 배를 준비해놨건만 출정 때 십자군이 원래 병력의 3분의 1밖에 모이지 않아서 빚을 받지 못했다.
단돌로는 십자군에게 돈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원래 베네치아의 도시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헝가리에 편입된 자라를 재탈환할 것을 제안하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십자군은 자라를 함락시켰고 같은 기독교 도시를 약탈한 것에 분노한 교황은 십자군을 파문했다. 일단 십자군은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파문을 풀었지만 자라를 점령한 것으로부터 얻은 이익으로는 부족했고 그러던 중 망명을 온 동로마의 황태자 알렉시오스 4세가 십자군이 큰아버지에게 왕위를 친탈당한 아버지의 복위를 도와주면 십자군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여 단돌로는 동로마의 지원을 받기 위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4.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에게 이집트로 가는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도록 설득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상륙작전을 펼쳤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난공불락의 도시였으나 엔리코 단돌로는 늙고 앞이 보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전장에서 항상 선두에 섰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는 완전무장을 하고 산 마르코 깃발을 든 채 갤리의 뱃머리에 서서 부하들의 상륙작전을 격려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뒤 엔리코 단돌로는 자기 자신과 후대 베네치아 도제들에게 '제4차 십자군의 맹주이자 로마 제국 3/8의 통치자(DOMINUS QUARTAE PARTIS ET DIMIDIAE TOTIUS IMPERII ROMANIAE, Signor della quarta parte e mezza di tutto l’Imperio di Romàni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십자군이 전리품을 분배할 때 베네치아에 할당한 동로마 제국 영토 크기와 꼭 맞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와 그의 아버지인 이사키오스 2세를 옹립한 후 알렉시오스 4세에게 막대한 돈을 요구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시민들에게 가톨릭교 개종과 돈을 갚기 위한 엄청난 세금을 요구해 시민들의 반란으로 쫓겨났다.
그는 십자군 원정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면서 모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한편 베네치아의 이익을 추구하여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를 양도받았다. 그는 베네치아의 카날레 그란데 대운하 주변에 단돌로 가문의 저택을 짓기 위해 값비싼 대리석을 배에 실어 자기 아들 레니에르 단돌로에게 보냈다. 단돌로 저택이 있었던 베네치아의 산루카 구역이 19세기에 발굴 되었는데 무어 양식의 건축물 유적과 녹색 대리석으로 만든 고대풍 기둥 유적이 나왔다고 한다.

5. 죽음


십자군은 막대한 문화재, 보물, 성유물을 약탈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식 성당으로 마개조해 버렸다. 이러한 일들을 마친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을 이끌고 불가리아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205년 노환 때문에 병을 얻어 자신의 고국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2층 전실의 대리석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 위에는 도제의 모자와 산 마르코의 문장을 새겼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친구이자 비서였던 게오르기 스프란체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투르크인들에게 함락되면서 파헤쳐 졌다고 전해진다. [1][2] 스프란체스에 따르면 엔리코 단돌로의 뼈는 개들이 먹어치웠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투르크인들로서는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무덤 속에 부장품을 노리고 도굴했을 뿐 시신 자체에는 1 밀리 그램의 관심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약탈 과정 중에 시신이 소실된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개에게 먹힌 이야기는... 뭐, 동로마인인 스프란체스가 엔리코 단돌로에게 영 좋지 않은 감정을 갖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니 그냥 이해해 주기로 하자. 현재 하기아 소피아의 동쪽 회랑에 그의 무덤 명판이 존재하긴 하지만,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옛 무덤 자리에 석판을 세운 것에 불과하다.


6. 평가



6.1. 종합


십자군의 기치를 내건 군대에 의해 동방의 그리스도교 제국이 몰락하게 된 것-그리고 그 뒤 500년 동안 유럽 절반무슬림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역사상 보기 드문 아이러니였다. 그 군대를 수송하고, 자극하고, 지휘한 사람은 바로 엔리코 단돌로였으며, '''그의 동기는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베네치아가 그 비극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었다면, 그 늙은 도제는 세계사적 문명 파괴에 대한 주요 책임자라는 낙인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3권 345쪽.

이 두 가지 시선으로 동시에 볼 수 있는 인물이다. 밑의 옹호와 비판을 봐도 알겠지만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뉜다. 이는 가톨릭 세계 전체의 이익과 베네치아 공화국이라는 한 국가의 이익은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 입장에선 애국자라는 평가가 맞는 것일 것이고, 오스만에 시달렸던 다른 유럽 사람들에게는 안좋은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3] 특히 그리스인들에게는 400년간 오스만의 지배하에 놓이게 만든 원흉이자 원수일 것이다. 즉, 평가하려는 사람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당연히 바뀌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래의 비판 항목에 나오듯이, 엔리코 단돌로의 행적이 베네치아 공화국 스스로에게도 과연 긍정적인 영향만 끼쳤는지는 조금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따라서 더욱 평가가 복잡해진다.

6.2. 베네치아 내치에 관한 평가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인물 중 하나로 중세의 베네치아를 빛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엔리코 단돌로가 도제가 되었을 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내외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에 진보적인 민법과 헌법제도를 도입해 내부문제를 해결했으며 아드리아 해와 동방에서 베네치아의 이권을 추구하면서 빈틈없는 상거래를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매장된 것은 베네치아가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는 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엔리코 단돌로의 생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십자군 원정 당시 이미 팔순의 노인에다 장님이 된 상태에서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 당시 가장 부유하고 큰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의 8분의 3을 소유한 영주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았다. 그럼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이 위대한 도제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공화제의 정신에 해가 가는 일은 어떤 일이든 하지 않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전통에 의거한 일이었다.
그의 무덤은 하기아 소피아에 있는데 규모가 작고 평범한 무덤이다. 위의 라틴 제국 제위 문제도 그렇고, 이러한 행보는 엔리코 단돌로가 단순히 물리적, 패권주의적 의미에서의 국익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화적 전통과 이념 자체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수호하려고 했던 인물임을 시사한다.

6.3. 비판


그의 야심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많은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십자군 약탈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게 되었다.[4] 따라서 십자군들을 선동하고 지휘한 엔리코 단돌로는 이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게다가 같은 기독교도 종파로 나누어져 전쟁을 서로 벌이면서 기독교계의 분열을 더 부채질했다. 오죽하면 250년 뒤인 1453년, 오스만 제국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 동로마인들은 '''그래도 이(오스만)들은 250년 전에 단돌로가 이끈 십자가를 든 기독교 악마보단 낫다'''는 평을 남겼을 정도였다. 즉, 동로마정교회에선 '''악마 중 악마''' 단돌로로 악명을 남겼다.
이는 유럽사에서 미증유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출발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의 연설이나, 레반트 성지의 십자군 제후국들이 형식적으로나마 동로마 황제의 봉신 자격으로 다스렸던 것만 보더라도 정치적, 문화적 대립과는 별개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의 관계는 적어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최소한의 공감대는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4차 십자군과 이후 라틴 제국의 삽질로 인하여 정교회와 동로마 세계는 서방을 아예 근본이 다른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다만 같은 종교나 민족끼리도 뒷통수치는게 일상이고 유럽 내에서도 전쟁이 흔히 벌어지던 당대 세계사의 흐름을 생각해 볼때 외국이나 이교에 의한 비난은 큰 비중을 두기 힘들다[5]. 오히려 현대에 와선 엔리코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인한 반달리즘 행위와 그에 따른 문화재 유실로 인해 비판받는다.
정말 엔리코 단돌로의 가장 큰 오점이 있다면 그건 '''유럽의 방파제였던 동로마를 몰락시키고'''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베네치아를 유럽의 방파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실드가 가능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베네치아가 유럽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동로마 제국이 비록 망해 가고 있는 나라이긴 했지만 1204년 이전까지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고, 4차 십자군이 건들지 않았다면 아나톨리아 지역을 기반으로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어느 정도 맞설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멸망과 함께 이슬람의 군대들은 금각만을 넘어 남유럽과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몽골 침공으로 이슬람 세력이 몰락하면서 100여 년간은 별 일 없었지만, 그동안 동로마는 서유럽의 야망에 맞선 생존 투쟁으로 이슬람에 신경 쓸 여력 따윈 사치에 불과하였다. 결국 몽골의 침입에서 회복한 이슬람 세계에 오스만 제국이 들어섰고,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이슬람 해적들과 오스만 군대를 막아내던 동로마는 이제 수도의 방위에 급급하게 되었다. 이는 1453년 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할 군대가 외부에서 들어와야 하는데 그 외부가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완전히 망해 버렸으니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전에 동로마의 권역이였고 이후 베네치아의 상권이 된 남유럽과 동지중해의 방어는 오롯이 베네치아의 책임으로 떨어졌는데 베네치아가 그 권리를 뽑아 먹을 능력은 있어도,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애초에 그리스의 섬 상당 부분과 남유럽의 영지를 통치하며 세입이 프랑스를 상회한다고 해도, 도시국가 하나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이란 한정되어 있다. 초기에는 스페인의, 후기에는 신성동맹 전체의 지원을 받아 가며[6] 오스만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지중해에서 벌어진 해전과 아드리아해 연안의 육전에 국한되었고, 남유럽 내륙으로 밀려들어오는 오스만 육군을 막을 방법도, 의지도 베네치아에겐 없었다.
오직 세르비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같은 정교회권 슬라브-블라흐계 국가들이 산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파도에 저항할 뿐이었지만 이들 가운데 오스만과 같은 강대국은 하나도 없었기에 대국적 관점으로 볼 때 거침 없는 파도의 유속을 잠시 더디게 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 국가들과의 연계에서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자신들의 해외 영토인 스타토 디 마레의 방어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7].
결국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세르비아가 멸망하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헝가리가 오스만의 신하국이 되면서 베네치아는 오스만의 칼을 정면에서 받게 되었고, 베네치아의 부 자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는 동맹으로 삼아 가며 대 오스만 항쟁을 이어 나가야 했다. 더군다나 이슬람의 방파제 역할을 혼자서 수행한 것도 아니고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페인등 오스만 못지않은 국력의 강국들도 나서서 했다.
또한 망한 무역거점 역할 이외는 가치 없는 변방의 작은 바위 덩어리들에서나 깨작거렸을 뿐 베네치아는 본토와 근해는 아무런 침략 위협 없이 연명하는 데 급급하였다. 정작 진정한 '유럽의 방파제'로서 역할을 다 한 국가는, 핵심 영토라 할 수 있는 발칸반도에서 직접 육군 중심의 대륙 세력인 오스만의 대육군을 받아내며 대결전을 펼쳤던 신성로마제국이나 같이 대육군을 파견해서 오스만의 주력군과 싸운 폴란드이다.
결국 1645년부터 1669년까지의 크레타 공방전을 기점으로 베네치아는 동로마에게서 얻어낸 그리스의 영토를 전부 빼앗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지중해의 지배권도, 상권도 빼앗기고, 소모한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끝에 신성로마제국의 꼭두각시로 다뤄지다가 오스트리아의 속국이 되고, 마침내 프랑스에 의해 멸망하기에 이른다. 당대의 베네치아의 영광을 위해 소신했던 엔리코 단돌로의 업적이, 후일의 베네치아의 멸망을 부른 셈이다.
한편 시오노 나나미는 관련 저서들을 통해서 그 시점에서 오스만 제국이 그렇게 성장할 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냐고 열심히 실드를 치지만, 단지 오스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았던 수백년 전부터 이슬람의 파도를 막아 오던 제국의 역할을 당대의 모든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1차 십자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룸 술탄국에 의한 동로마 제국의 압박 때문이었다는 것만 봐도 현재가 아닌 당대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근시안적인 발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할 것이다.
하다못해 1054년 스스로 동로마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한 가톨릭 교회조차도 이슬람 세력은 일단 막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말했을 정도다. 즉, 오스만 제국이라는 특정 국가가 성장할 것을 예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근동의 이슬람 제국이 강력해지면 그 칼끝은 동지중해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동로마 제국, 그리고 그 너머의 동유럽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은 당대에 이미 우마이야 왕조셀주크 제국의 사례로써 증명되어 예측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는 것.
게다가 이건 이슬람 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 제국이 성립하기도 이전의 고대부터 이뤄져 온 것이기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슬람 세력이 몽골 제국 처럼 갑툭한 것도 아니고, 힘이 되는 대로 꾸준하게 동로마 제국을 압박하던 것을 뻔히 보던 시기 사람들이 이걸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며, 오스만 제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아니더라도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를 통일하는 세력이 나오면 동로마가 그 공세를 감당해 줘야 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였다.
동로마 제국과 여러 형태로 알력을 겪었던 프랑크 왕국에서도 우마이야 왕조의 공세를 막아낸 동로마 제국에 축하사절을 보냈고, 1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향한 이슬람의 공세 역량을 분산시키는 데에 공헌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당시 엔리코 단돌로와 베네치아 공화국은 어찌 보면 수백년 전 사람들보다 더 근시안적이었던 셈. 뭐, 근동에서 강력한 이슬람 국가가 탄생할 것을 어떻게 예측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열과 혼란이 정리된 후엔 통일과 단합의 시대가 온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당장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도 아이유브 왕조가 탄생하자 십자군 국가들이 버텨내지 못하는 것을 뻔히 봤을 텐데?
후술되는 옹호 부분도 반박할 여지가 있는 것이, 이 부분은 시오노 나나미의 저술 자체를 통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무역 중심의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의 입장에서는 교역망이 곧 국가의 생명줄이지만, 자급자족이 가능한 영토형 대국 -게다가 정복국가-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국제 교역망의 유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는 것.
당장, 오스만 제국의 팽창기에 그 팽창을 막아내기 위해 고전하기 시작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황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 자신의 저술에서 이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베네치아빠인 시오노 나나미야 '오스만 제국이 교역망의 중요성을 몰랐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지만... 애초에 오스만 제국이 남의 나라 목숨줄을 신경써 줄 이유가 없다.(...) 베네치아의 교역망 위축으로 국제 교역이 감소한다 해도, 이 시대가 현대처럼 경제에서 국제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도 아니었고, 굳이 베네치아의 무역기지를 점령해서 얻는 추가 세수보다 무역기지를 유지하고 연공금을 받는 액수가 더 컸다는 것이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이지만... 동서고금의 수 많은 정복군주들이 보인 정복과 영토확장에 대한 욕망이 꼭 경제적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세수 증가도 좋지만 정복과 승리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얼마간의 세수 손실을 감수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
시오노 나나미는 베네치아의 교역기지들이 가졌던 경제적 가치가 오스만의 정복 이후에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애초에 교역과 경제적 가치를 정복과 영토확장(그리고 종교권의 확장) 보다 우선시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현대인의 사고방식이지 당대 제국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덤으로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의 항쟁에서 자주 보인 사례처럼, 연공금을 받고 싶으면 그냥 도시를 정복해 버린 뒤 계속 내게 해도 된다.(...) 어차피 교역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베네치아는 자신들이 통치하는 교역 기지를 빼앗긴 뒤에도 교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용 지출을 감수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이 점에서, 베네치아가 '이슬람을 배척해야 할 외부인으로 보지 않고, 완전히 척을 지지 않으려고 한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지만 '이슬람을 견제하던 동로마 제국을 무너트리고 이슬람의 팽창을 방치한 것'은 패착일 수 밖에 없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특히 인적 자원)에 한계가 있는 도시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일극이 독주하는 일방체제보다는 상호 견제하에 있는 양극, 다극 체제에서 훨씬 운신의 폭이 넓은 것이 사실인데, 4차 십자군 원정에서 베네치아는 이슬람의 일극을 견제해 줄 수 있는 동로마의 일극을 무너트렸고, 이 때문에 이후 이슬람 제국의 일극 독주를 스스로 막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작 2만의 4차 십자군에 함락당한 동로마가 어떻게 이슬람 제국을 막느냐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당시 동로마의 국방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아나톨리아에 있는 룸 술탄국과의 접경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간과한 해석'''이다. 심지어 위쪽에는 불가리아가 다시 일어서는 등 제국은 다시금 양면전선에 노출된 상황이었는데, 같은편이라고 생각했던 4차 십자군이 한마디로 뒤통수를 친 것과 다름없다.
베네치아가 동로마라는 '수'를 버렸다고 평가하는 것은 당시 동지중해의 정세에서 '동로마 제국이 당연히 베네치아의 편을 들어줄 것'을 전제로 한 주장이 아니다. 물론 비잔티움 제국 역시 베네치아의 무역 독점을 탐탁히 보지 않았고, 베네치아의 상업적 세력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베네치아 상인들을 추방했다가 다시 받아들이는 정책등을 반복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동지중해의 1극으로 성장한 오스만 제국 역시 베네치아를 길들이기 위해 같은 수단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영토형 대국과 정면으로 맞서기는 힘든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의 처지에서 '선택지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비잔티움 제국:이슬람 제국:베네치아의 세력비가 4:4:2 정도 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중 한쪽이 자국을 압박하고 위협할 경우 상대 진영을 '선택' 하여 그런 위협을 막아낼 수 있다. 물론 양대 대국을 한꺼번에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동지중해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양극의 입장에서 베네치아의 후원은 언제나 몹시 유용한 것이므로, 정치외교적 노력을 통해 양 극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양극 중 일극이 무너져 버린다면? 도시국가인 베네치아의 한계상 무너진 동로마의 세력을 스스로 흡수하여 오스만 제국과 5:5의 대등한 경쟁자가 되기는 어렵고, 자국의 세력을 확장시킨다 해도 잘해야 3:7 정도로 패권 1극에 밀리는 입장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문제는, 유일한 패권세력이 된 이슬람 제국이 베네치아에 불리한 행동을 취할 때를 대비한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며, 즉 캐스팅 보터의 입장을 잃으면서 정면대결의 가능성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는 차라리 쉽지만 강대국과 정면으로 맞서서 벼텨내기는 훨씬 어려운데... 그 어려운 길 외의 선택지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며, 만약 베네치아가 동로마와 기독교 세력의 편을 들어 동지중해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해 버리는 데 성공했더라도 이와 마찬가지의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비판은 '국체를 전환하지 않은 것이 실수'라는 식의 무리한 비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상인 공화정 도시국가라는 베네치아의 정체성 '''때문에''' 그 사이에서 줄타기할 양극이 유지되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
말하자면, 이슬람 뿐 아니라 비잔티움 역시 적절한 협상과 다툼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거래 상대임을 잊은 것이 실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유럽 세력, 동로마 세력, 이슬람 세력이라는 세 곳을 상대로 수싸움을 벌이다가 힘들어서 동로마 한 곳은 포기하고, 거기서 남는 여력으로 두 곳에서 집을 넓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계가에서는 한 곳의 집을 잃은 탓에 지고 만 격이다. 뭐, 오스만 제국이 정복국가의 야욕을 드러낼 걸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변명할수도 있겠으나... 애초에, 거대 이슬람 제국이 탄생한 뒤 확장주의적 면모를 보이지 않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지 않은가.(...)
또한 엔리코 단돌로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지나쳐서는 안되는게, 12~13세기의 유럽은 절대로 "신앙을 저버리면 어떠냐. 국익만 증대하면 그만이지"라는 논리를 들이댈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다. 베네치아가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벌인 깽판짓은 명백하게 베네치아의 국제적 신임을 추락시켰으며, 이것은 외교적으로 보더라도 희생이 너무 컸다. 물론 중세시대때 세속 통치자와 교황이 멱살 잡은 경우는 많고, 파문을 먹은 통치자도 많다. 하지만 이는 "내가 내 영토의 주교를 임명하는데 교황이 왜 간섭하냐?" 정도의 문제였지, 성전(聖戰)에 내보낸 군사들로 가톨릭 국가를 공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전자 역시도 교황 입장에서 보면 파문을 고려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지만, 베네치아의 트롤짓은 전자의 상황은 가볍게 압살할 정도의 초대형 깽판으로 인식되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통치자가 세속논리로 국익을 추구하는게 왜 문제냐는 소리가 나올 수 있지만, '당대의' 주변국들에게 깽판친 트롤러로 인식되고 국제적 신임을 날려먹는 것은 분명히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엔리코 단돌로를 당대 유럽인 입장에서 보는 시선은, 국익을 위해 인권을 유린한 지도자를 보는 현대인의 시선에 가깝다. 제 아무리 변호를 해준다해도, 최소한 당대인 기준에서 '국익이 있었으니 모조리 OK'는 아닌 것이다.[8] 이를 굳이 현대 감성으로 표현하면 냉전시기에 소련이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직전에 한국이 가까스로 버티는 상황에서 일본이 자국 이득을 취하겠다고 한국 뒤통수를 후리고 한반도를 약탈한 뒤 돌아가버리고 한반도는 소련 손에 들어가버린거다. 이는 냉전시기에 미국이 대가리깨도 이상하지 않을 팩션에 대한 배신행위인데 그것보다 엄격하게 신앙이 사람들의 정신 중심에 자리잡고 영향을 끼치던 시기 유럽인들이 베네치아를 어떻게 봤을까?(...)
요컨대 엔리코 단돌로 자신은 조국을 위해 성심성의껏 자신의 책무를 다한 것은 맞다고 할 수는 있으나, 문제는 그 일련의 행동들이 (상인공화국으로서의 베네치아의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다소 근시안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베네치아 공화국의 쇠락이 온전히 그의 탓인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고, 오히려 당대 베네치아의 입장에서는 위대한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엔리코 단돌로가 신앙을 저버리고 대신 조국에 단기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 행위는, 장기적으로 볼 때 베네치아의 외교적 신용 상실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컨대 ''''강력하지만 신뢰할 수는 없는 장사치'''' 정도의 평판을 얻게 된 것이다. 국가 간 관계에서 신용과 명분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 중요성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더구나 신용이 곧 이익인 상인들의 지도자로서는 다소 경솔한 면이 없지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6.4. 옹호


사실 베네치아는 도제 한 사람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대상인을 비롯한 귀족들이 지배하던 베네치아의 체제는, 여차하면 도제의 잘못을 '''죽음'''으로 추궁할 수도 있었던 나라였다.[9] 즉, 도제는 철저히 정치적인 계산에 의하여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자리였다. 여타 다른 국가들처럼 왕 하나의 명민한 결단이나 혜안으로 독단적 운영이 가능한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즉, 단돌로 본인이 정말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대상인들의 동의가 없으면 정책을 밀어붙이기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네치아의 무역 특혜에 대해 재고하려던 동로마 제국의 움직임은, 베네치아의 근간인 상업 독점을 위협하는 문제였고 베네치아의 권력을 좌우하는 다수 대상인들에게는 이슬람보다 표면으로 다가오는 문제였다.
이들의 투표에 의해 옹립되고, 이들과 권력을 공유하던 도제 단돌로는 당연히 이에 대한 해결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4차 십자군을 동로마 제국으로 돌리게 만든 것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지지기반이자 국가의 기반인 상업 독점을 공고히 만들기 위함으로 해석해야 한다. 물론 미래의 위험을 간과한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나, 베네치아는 상업 독점을 잃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특성상 동로마 제국 문제 처리가 '''당면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내전에 온갖 이권을 약속해가며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나마도 그 약속조차 지킬 여력이 없어 십자군을 자극하고, 크게 대단치도 않은 전력에 자금난에 허덕이고 교황에게 파문까지 당해 명분조차 잃은 십자군에게 그동안은 철벽이었던 수도를 너무나 쉽게 함락당한걸 보면 십자군과 베네치아가 막타를 쳤을 뿐, 제국은 이미 진작에 이슬람의 방파제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국가막장테크를 타고있었고 이것까지 베네치아의 탓을 할 수는 없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한 부분에 대하여 근시안적이라는 비판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고대 로마와 베네치아 등에게 유독 후한 시선을 보내고 편향적인 시각을 보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야기한 부분 중 하나, '베네치아는 이슬람도 교역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슬람의 위협에 대한 간과도 이러한 부분이 반영되었다고 봐야 한다. 베네치아에게 있어서 이슬람은, 로마 제국이 그렇듯 무조건 막아세워야 할 외부인이 아니라 적절한 협상과 다툼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교역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장 교황의 교역 금지령도 씹고서 이슬람과 교역을 계속한 것이 베네치아 상인이었다. 이슬람을 막는다는 기존 기독교 세계의 사명이, 베네치아인들에게는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딜레마나 마찬가지였다 보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극히 베네치아적이었던 단돌로에게 기존 기독교 교회의 사상에 따라 '왜 이슬람을 방치했냐!'라고 비판하는 것도 지나치게 베네치아의 사정을 무시한 평가라고 볼 수도 있다.
새로 덧붙여진 재반론에 대한 부분도 조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재반론을 통해 계속 파고들면 '왜 진작 정복사업이나 내수 발전에 나서지 않았냐.'는 비판을 베네치아 공화국 당사자들에게 제기하는 꼴이 된다. 상술하였듯 베네치아는 상인의 나라인데, 상인더러 자기 장기를 버리고 남의 흉내를 내라고 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패러다임의 변화는 엄청난 출혈과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못한 것이 베네치아의 한계라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이는 베네치아의 자체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세계적인 입장(그러니까, 역사를 배우고 읽는 입장에서 지중해 세계를 전부 보는 현대인의 시선이라든지)으로만 재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잔혹한 처사이다. 역사소설을 보는 독자가 역사소설 속 인물의 행동을 독자의 시선으로만 평가하는 꼴인 것이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라는 수를 포기했다는 비판은, 애초에 동로마 제국도 베네치아의 무역 독점을 탐탁지 않아하고 있음을 근거로 반박이 가능하다. 이전부터 연거푸 상인을 쫓아냈다가 다시 들이는 것이 일상화된 행사임을 생각해야 한다. 이슬람이 팽창 정책으로 베네치아의 상인적 판단을 넘는 일을 벌였다면, 동로마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베네치아 입장에선 이슬람이랑 별 차이 없는 위협으로 있어왔다. 이슬람의 팽창을 경계해서 동로마를 뒀다가, 동로마에 의해 무역은 무역대로 빼앗기고 이슬람은 이슬람대로 팽창하는 '실제 역사보다 더한' 악수가 될 수도 있었다. 따지자면 단돌로는 후술할 표현대로 난죽택 상황에서 그나마 '''늦게 죽을''' 길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국가 체제 변환을 걸고 넘어지자면 위에서 언급한 패러다임 변화의 난점 문제로 돌아오므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베네치아의 멸망 원인을 엔리코 단돌로 한 명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평가이다. 실질적으로는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순수 민족 및 시민국가에서 거대 국가로 진화하기를 스스로 포기한 베네치아라는 국가 자체의 한계를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장 당대 베네치아의 한계를 마키아벨리조차 꿰뚫어 보고 제발 외국인 이민 좀 제대로 받고 사회 혼란도 감수해 보라고 충고해 줬을 정도라면 더욱 그렇다.[10]
또한 다른 반론으로, 애초에 오스만의 지중해 진출이 본격화해서 베네치아와 대립하는 시기는 이미 대항해시대 개막으로 지중해 무역이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할 시점이었다는걸 들 수 있다.[11].
즉, 베네치아는 오히려 엔리코 단돌로의 시대보다 250년 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서부터 대항해시대 개막 초기까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에 이르렀다. 이 어마어마한 번영은 후세에도 널리 전해질 정도였고, 이보다 한참 이른 시기에 동지중해 무역 경쟁자인 제노바를 누르고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베네치아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동지중해 무역의 쇠락과 지나친 베네치아인 순혈주의로 식민지 인들을 지나치게 차별하고 착취하고 이민에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똑같이 도시국가였다가 영토국가로 발전한 로마와는 달리 몸집 불리기 전환이 실패하였다. 오스만에게 도서 식민지들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영토국가 전환에 실패한 이상 쇠퇴는 필연적이었다.
오스만과의 전쟁에 들어간 막대한 전비와 식민지 상실이 몰락을 가속화시켰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애초에 베네치아가 4차 십자군으로 인한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몰락해 버릴 국력과 부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명목상으론 동로마의 신하라던 약점 명분이라든지 경제면에서 전적으로 의존하는 동지중해 무역에 손을 뻗기 위해 동로마에게 엎드려 숙이면서 아부해야 된다는 경제적 약점이든지.
군사적으로도 동로마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던 군사적인 약점으로 인해서 동로마에게 단순히 휘둘리기만 하던 베네치아였다면, 더 강력한 국력을 지녔고.피레네, 알프스 이북의 유럽 국가들의 지중해 무역로로 베네치아 보다 훨씬 높은 입지를 차지했었고, 서지중해 무역로 장악은 기본이고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편승해서 동지중해 무역로까지 어마어마한 세력을 떨치고, 심지어 동로마가 뒤에서 밀어주기까지 하는 제노바에게 형편없이 밀려서 별다른 이름도 없는 듣보 도시국가로 남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동로마에게 합병당해 멸망하는 결말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동로마는 안드로니코스 이후 지방의 신뢰를 잃어 통제조차못하는 상황이다. 거기다가 베네치아는 아직도 여전히 제노바에게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전임 도제 오리오는 그 동로마랑 동맹을 하기도 하였다. 무조건 제노바만 밀어준 것이 아니다 듣보 도시 국가로 남는 다거나 하는 것은 만약의 영역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베네치아의 동로마 제국 길들이기는 그들 입장에선 난죽택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셈이다.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베네치아의 국제적 신임을 명백하게 추락하고 외교적 희생이 너무 컸다는데 그래서 베네치아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쇠퇴기를 맞았나? 쇠퇴기는 커녕 이 때를 기점으로 국력이 날로 커져 제노바 공화국을 몰아내고 건국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베네치아가 몰락한건 대항해시대로 인해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탓이지 외교적으로는 전혀 문제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쇠퇴하는것은 대항해시대로 인한 유럽-아시아간의 무역이 본격화된 17세기 초부터다. 4차십자군으로부터 400년 뒤의 일로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가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전성기이다. 4차 십자군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이 국제적인 신뢰를 잃기는커녕 이 시절이 베네치아가 주도한 유럽 국가간 지중해 무역의 절정기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레반트의 여왕이라 불리던 시기다. 그리고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주도한건 베네치아 공화국이 맞지만, 함께 싸운건 신성로마제국의 귀족들과 프랑스의 귀족들이다. 같이 힘을 합쳐 점령한 사이에 누구의 신뢰를 잃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쇠퇴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점령에는 무려 400년의 간극이 있다. 1200년대 사람한테 1600년대 일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탓하는건 1600년대 사람에게 2000년대 일을 예측못했으니 잘못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당한 소리이다.
애초에 13세기 초에 동로마 제국이 몰락한걸 박수치고 좋아할 나라는 많아도 슬퍼할 나라는 거의 없었다. 물론 이건 동로마 제국의 외교정책이 실패한 탓이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패한 뒤 힘이 없어 교황에게 사정사정해서 십자군을 불러오고는 상황파악 못하고 원정온 서유럽의 왕들에게 충성맹세나 시키고, 가톨릭 신자를 대량으로 학살하는등 서유럽에 어그로란 어그로는 잔뜩 끌어놓고는 힘이 없었으니 그냥 점령당한 것 뿐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 4000명은 이슬람인 룸 술탄국에 노예로 팔렸다. 한때 6만까지 갔던 가톨릭 신자는 이 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실상 소멸한다. 먼저 이런 짓을 벌이고는 무슨 기독교적 공감대를 찾을 수 있을까?[12]
4차 십자군은 무슨 20만 대군을 모아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게 아니다. 왕도 아닌 백작 몇 명이 주축이 되어 간신히 모은 만 명과 베네치아가 제공한 만 명 합계 2만명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이때 동로마는 2만 서유럽군도 못막아 수도까지 내줬는데 노도같은 이슬람 세력을 막아줄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그저 바램이 담긴 만약과 가정일 뿐이다.
위에서 '''룸 술탄국과의 접경지역에 동로마의 주력이 집중되어있다고 하는데 이는 13세기 초의 아나톨리아 역사를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4차 십자군이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을 벌이는 1년전인 1202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1204년까지 룸 술탄국은 동쪽의 조지아 왕국과 치열하게 전쟁중이었다. 당연히 서쪽 국경인 동로마 방면으로 양면전쟁을 벌일만한 여력은 없었다.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한 이 전투에서 룸 술탄국은 완패한다.[13]
룸 술탄국이 조지아 왕국과 치열하게 전쟁중이던 이 와중에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에게 수도가 공격받고 있었다. 룸 술탄국 방면에 동로마의 주력 병력이 남아 있었다면 당연히 일부 경계 병력만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들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하러 가야 할게 아닌가. 무슨 막강한 전력이 남아 있는데 기습적인 뒤치기 한 방에 운 없이 점령당한게 아니다. 게다가 사방을 적국으로 만든것 역시 동로마 제국의 실책일 수 밖에 없다.

7. 대중 매체


코에이 징기스칸 4 시나리오 1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하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정치/전투/지모 순으로 74/66/90에 특기는 상업,건설,외교/공성,복병이고 병과적성은 보/궁/기수 B/C/D/A으로 전반적인 능력치는 괜찮은[14]편이지만 나이가 엄청 많아서 오래 사용할 수 없다. 또 군주인 오리오가 단돌로처럼 나이가 많아서 운이 안 좋으면 오리오 사망 시 단돌로도 사이좋게 같이 사망하기도 한다.(...)
문명 5 BNW에서 베네치아 지도자로 등장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베네치아의 도제로 등장한다. 고증대로 Blind 트레잇을 달고 있다.

[1] 이전에는 한국-그리스 친선협회회장이던 유재원이 쓴 터키 관련 책자인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에 의거해 1261년 라틴 제국이 무너질 당시 동로마인들은 먼저 단돌로의 무덤을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해당 서적의 명백한 오류이다.[2] 부관참시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인들이 왜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을 직접 훼손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인들의 관점으로는 엔리코 단돌로가 죽어서 묻힌 이상 심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 뿐이라는 것. 덧붙여서 이 사람들은 황제를 쫓아내고서도 계율을 지킨답시고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고 눈알을 뽑던(..) 사람들이다.[3] 물론 유럽이라고 해도 모든 유럽 국가가 해당하는 건아니고, 동로마를 멸망시켜서 재건의 기회를 만든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등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제외.[4] 이 사건으로 동방(동유럽)과 서방(서유럽)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파탄'''났으며 둘이 공식적으로 화해하는데는 '''800년'''이 걸렸다. 전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원정에 대해 사과함으로서 화해한 것이다.[5] 다만, 정치사회적으로 종교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현대기준이면 모를까,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전쟁' 인 십자군 원정을 위해 모은 군비로 계속 같은 종교를 공격한 제 4차 십자군의 행태 자체가 부도덕하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상당함은 감안해야 한다.[6] 명목상으로는 서로 동맹이었지만, 정확히는 베네치아의 넘치는 국부로 신성동맹을 용병으로 삼았다에 가깝다.[7] 스컨데르베우가 이끄는 알바니아 저항군을 지원한 적은 있지만 알바니아가 생각보다 훨씬 잘 나간다 싶자 알바니아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고도 했고, 15세기 중엽에 헝가리와 손잡고 오스만에 맞서기도 했지만 당시 베네치아의 지배가 부분적으로 미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의 군사활동에 주력했을 뿐 헝가리를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았다.[8] 또한 이 당시 지도자가 신앙에 충실하는 것이 국익에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이 당시 종교는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었으며, 미시적으로는 국민들의 생활 방침이자 사회의 행동양식까지 정의하곤 했다. 종교는 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뭉치게 했으며 사회 질서에 충실하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권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세속군주는 종교를 부흥시킬 의무가 있었고 또한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행위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군주 개인의 신앙심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세속영주들이 교황의 부름에 충실하고 이교도에 맞서서 뭉쳐서 싸우는 행위가 전적으로 국익에 무관한 신앙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 당시의 종교를 평가한 것이다.[9] 실제로 마리노 팔리에로란 도제는 반역 혐의로 해임 및 처형을 당한 전적도 있다.[10] 로마사 논고 참고.[11] 특히 베네치아가 세력을 뻗힌 동지중해 쪽이 더욱 심했다. 기존의 대 아시아 무역로이던 동지중해의 역할을 대서양이 대체했기 때문.[12] 하지만 베네치아 역시 헝가리 자라를 약탈하여 교황과 헝가리 왕국의 분노하게 만들었다[13] 사료상으로는 룸 술탄국이 4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당시 아나톨리아의 인구와 룸 술탄국의 국력으로 볼때 과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40만은 과장이라도 룸 술탄국이 거의 전 병력을 동원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시 조지아의 국왕이던 타마르 여왕은 현대 조지아의 지폐(50 라리)에도 등장한다.[14] 사실 이 게임에서 70만 넘어도 삼국지 시리즈 80대 이상의 취급을 받지만 게임 시스템 상 상대적으로 지모가 잉여로운 능력치라 이탈리아 반도 에서나 먹히지 유럽 무대만 나와도 그저 그런 수준의 장수로 전락하는 관계로 괜찮은 정도라는 평가 이상은 내리기 힘들다. 물론 저 90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가 전투나 정치로 갔으면 어디에 내놓아도 에이스급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