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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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어지는 무언 전화
3. 납북의 가능성
4. 실종 뒤 발견된 시체
5. 의문의 조사
6. 미호의 행방


1. 개요


일본의 미해결 실종사건.
1984년 6월 4일 오전 10시, 20살 야마모토 미호(山本 美保)가 야마나시현 고후시 나가마츠데라쵸에 있는 자택에서 "도서관에 갈게."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뒤 행방불명되었다.
미호는 1964년 3월 3일생으로, 살아있다면 현재 60세이다.
미호의 가정은 경찰관 부친과 자영업자 모친, 장남 카즈오, 쌍둥이인 미호&미사까지 5인 가족이었으나, 장남 카즈오가 대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 가족 전체가 슬픔에 잠긴 채였다. 이 와중에 미호마저 실종된 것.
사건 이틀 뒤인 6월 6일 미호가 가져간 미니 바이크가 고후역 앞에 놓인 채로 발견되었고, 8일에는 니가타현 카시와자키시내 아라하마 해안가에서 손가방이 발견되었는데, 가방 안에는 면허증과 지갑이 있었지만 도난품은 없었다.

2. 이어지는 무언 전화


실종 반 년이 지난 무렵부터 4년간 무언전화가 이어졌다. 전화 대부분은 수 초 만에 끊어졌으나, 실종 후 3년 4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걸려온 전화 2번은 10~15분 정도 이어졌고 전화를 건 상대방은 가만히 듣고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얼마 후 10월 18일 전화에서는 흐느껴 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사: "미호지?잘 있어?"

라는 동생의 물음에

'''"...잘 있어(・・・げんき・・・)"라고 대답.'''

'''모친: "잘 있니? 잘 있어?어서 돌아와"

'''"......"(TV소리만이 커진다)'''

얼마 안 가 전화가 끊겼지만 재차 전화가 걸려왔다. 미사가 카시와자키에 갔다고 말했지만 또 끊겼다. 다시 또 전화가 걸려와 미사가 "빨리 돌아와."라고 얘기하니 끊겼다. 10분 정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3. 납북의 가능성


1970년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에 일본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자들이 소리소문 없이 생겨났지만, 이것이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북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방북하여 북일 정상 회담을 하면서부터였다. 미호 실종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일본에선 '''납치'''라는 인식은 없었다. 미호의 가족들은 마음 가는 곳이 없는 채로 18년간 귀가만을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2000년대에 들어 상기한 일본인 납북 문제가 크게 대두되자 납북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2002년 3월,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일시 귀국한 하스이케 카오루(蓮池 薰) 부부[1]납북문제 보도에서 몇 번이고 '카시와자키(柏崎)'라는 지명이 나온 것이었다.
카시와자키는 미호가 실종된 날 들고 간 손가방이 발견된 장소였다. 미호 가족들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고, 동생 미사는 '납북 문제가 명확해진 지금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평생 미호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다.
동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고, 야마나시현 경찰이 가족들의 사정을 듣고 싶다고 연락했다. 그 후 실종 당시 상황이나 여러 가지 입장을 토대로, 미호의 이름을 납북 가능성이 있는 특정 실종자 조사회에 올렸다. 미호 구출을 위한 움직임도 조직적으로 일어나, 서명 활동도 열려 약 1년간 20만 명의 서명을 모아 일본 정부나 경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 속에 부친 미츠오가 병으로 타계하여 세간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4. 실종 뒤 발견된 시체


미호씨가 특정 실종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지 1년이 넘은 2004년, 야마가타현의 유사마치(遊佐町) 해안에서 발견되었던 익사체 DNA가 미호의 쌍둥이 자매 미사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20년 전에 발견된 행방불명자의 시체가 미호라는 것이었다.
미호가 실종되고 2주밖에 지나지 않은 1984년 6월 21일, 일부 백골화된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 와 관광객이 발견하고 신고했다. 해당 사체가 일란성 쌍둥이 미사와 DNA가 일치하였기 때문에 야마모토 미호와 동일인물이라고 판명했다고 하였다. 사인은 자살에 의한 익사였다.
갑작스런 경찰의 연락에 가족들은 엄청난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갑작스럽다.'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5. 의문의 조사


이 DNA 조사는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먼저,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DNA 감정을 실시한 것이었다.
이에 야마나시현 경찰은 '미호 씨로 추정되는 시체가 2구 있었는데 1구는 DNA감정이 가능하므로 해보자.'고 2004년 4월 26일에 전했다고 한다. 다른 날에도 감정하겠다고 가족들에게 4번이나 전했다 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일체 듣지 못했다. '미호로 추정되는 시체가 2구 나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흘려들을 리 없을 뿐더러, 4번이나 전달했는데 가족들이 듣지 못했다니 납득할 수 없었기에 경찰들 주장은 거짓말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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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더욱 이상한 점은 20년 전 발견되었다는 시체였는데, 경찰이 발표하던 DNA 감정 이외에는 '''키, 체형, 복장, 속옷 사이즈, 그 외 모든 것이 미호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이에 대한 질문에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지 못했으며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려 했다.
또한, 시체가 발견된 때는 미호 실종 17일 뒤였는데 그렇게 빠르게 시체가 백골화하는지, 시체에서 치아가 13개가 빠져 있었는데 20살이었던 미호씨의 치아가 단기간에 빠질 수 있는지 등등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6. 미호의 행방


한편 특정 실종자 조사회는 납북 피해자로 접수한 미호를 두고 '''납북당하려다가 실패한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북한 공작원이었던 안명진[2]의 말에 따르면 납치한 사람이 저항하면 강렬히 구타하여 죽인 경우도 있었기 때문. 그런 이유로 사망하여 공작원들의 주요 상륙 루트였던 유사마치 해안가에 유기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 또는, 북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권혁(権革)이 1994년 북한에서 봤던 여성이 미호와 빼닮았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납북당했다면 북한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미호의 가족들은 현재도 일본에서 납북 피해자들을 위해 북한까지 전파를 보내는 라디오 단파방송시오카제에 메시지를 보내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래는 가족들이 남긴 말.

'''우리들은 진실이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 만약 시체가 미호가 맞다면 당장이라도 아빠와 오빠의 묘에 안치해서 쉬게 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체의 자료와 유류품 사진 속에 미호를 나타내는 건 무엇 하나 없습니다.

[1] 1978년 니가타현에서 납북되었다.[2] 요코다 메구미의 피랍 문제를 알린 북한 공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