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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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시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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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센쿄
고후시 소개
1. 개요
일본 야마나시현의 최대 도시이자 현청 소재지. 그러나 현청 소재지 중에서 가장 인구가 적다.[2] 카이시, 야마나시시, 후에후키시, 호쿠토시, 주오시, 나카코마군 쇼와초, 미나미츠루군 후지카와구치코마치, 니시야츠시로군 이치카와미사토초, 미나미코마군 미노부초, 나가노현 미나미사쿠군 카와카미무라와 인접해 있다. 유래는 카이국의 관청('''甲'''斐国の'''府'''中)의 약칭에서 따왔다고 한다.[3]
시 구역은 고후 분지 중앙쪽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형식에 위치해 있으며 주위를 오쿠치치부산, 미사카 산지, 미나미알프스 등 360도로 둘러 싸여 있다. 시가지 중심부 표고는 250미터에서 300미터이지만 전체 시의 표준차는 크고 가장 낮은 지역은 남부 후에후키 강 부근에 있는 표준 245미터, 가장 높은 곳은 시 최북단, 나가노현 카와카미무라와 경계에 있는 킨푸산의 표고 2,599미터와 매우 2,350미터의 표준차에 달한다. 시 북쪽 절반은 치치부타마카이 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기암과 계곡미로 알려진 쇼센쿄는 현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2000년 11월 1일에 특례시가 되었다가 이후 특례시 제도가 폐지되면서 2019년 4월 1일에 중핵시로 승격되었다.
2. 역사
2.1. 선사
구석기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이카와 강바닥에 현내에서 두번째로 나우만코끼리의 어금니 화석이 발견되었다.
승석문 시대의 유적은 아라카와 상류역에 해당되는 북부 산간 지역과 중부에 있는 충적된 평야에 걸쳐 산재하고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유역은 산간 지방인 하야카와 유역과 아시가와 유역이 있다. 야마나시현에서는 승석문 시대 조기 때부터 유적이 분지 남부에 있는 소네구릉과 야츠가타케 산기슭과 같은 산기슭과 구릉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구릉 지형이 발달되지 못한 구역에는 승석기 시대 유적이 적었지만, 북부 산간 지역에서는 빠른 시기 때부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야요 시대 중반기 때 나온 타카마치 유적은 같은 시기 때 특징적인 촌락 유적으로 제사나 유물, 묘역 등이 발견되지 못하고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한 작은 규모의 촌락 유적이 분포되는 특징을 지녔다. 고후 남부의 낮은 지대에는 오랜 세월동안 홍수가 나면서 토사 퇴적물과 유적지를 분포하는 것이 충분하지 못했지만, 카미이시다에 있는 유적지는 안정된 정착 흔적이 발견되었고, 내륙 하천,호수, 늪에서 어업으로 사용된 토기 추 등이 출토되었다.
야요 시대 유적 중에서는 인접한 카이시 오시모죠에 야요 시대 중반기부터 후반기에 카나노오 유적이 소재되어 현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대규모 야요 촌락지로 알려져 있다. 고후에서는 야요 시대 잔존물들이 부족하고, 단편적으로 발견되어 있는 유물이 중심이었다. 야요 후반기 때는 아라카와 선상지에 있는 에노키다 유적지가 같은 시기 때 나온 촌락 유적지로 알려졌고, 주거지 등이 검출되었다. 에노키다 유적지의 유물은 자연적인 뚝 등에 분포되어 도카이나 호쿠리쿠 지역 등 다양한 특색을 지닌 토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많은 경로로 도입되었다고 본다. 또 에노키다 유적지에서 논 유적 등이 검출되어 있지 않았지만, 마스츠보 유적에서 탄화 쌀이 발견되었다.
고분의 축조는 4세기에 시작되어 소네 언덕에서 유력한 집단층의 고분이 나타났고, 후반에는 다섯개 지역이 야마토 왕권의 영향을 받은 전방 후원분 카이쵸시즈카 고분을 최대한 중반기까지 번성한 중도 세력이 등장했다. 5세기 때 중도 세력이 쇠퇴하자 고분의 축조는 각 분지에 널리 보급되어 피장자층이 확대되었고, 6세기 때는 고후를 포함한 분지 북부 등 각 지역에서 중소규모의 고분이 축조되어 땅굴식 돌 무덤도 나타났다.
분지 북부에서는 출토 유물의 특징으로 야요 시대 이후에 진행된 주오 고지 특유의 토기와 도카이 지방 특유의 S자 모양으로 섞여 있는 옹기가 발견되었고, 4세기 때 전반기에 나온 고분이 와도마치에 소재되어 있었던 비와즈카 고분이 알려져 있었으며 고분 때 현존하지 않았지만 구리 거울이 출토된 고분 형식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밖의 전반기 고분은 부족하고, 본격적으로 고분이 나타나는 시기는 후반기 때였다.
6세기 때는 유무라에 있는 만주모리 고분이 후에후키의 쇼즈카 고분과 함께 가장 오래된 땅굴식 돌 무덤을 지닌 원분으로 알려졌고, 사토가키 및 코운 지구나 유무라 및 치즈카 등 산기슭을 중심으로 군중분이 분포되어 있다. 이 무렵에는 분지 북서부 지역에서 카이시의 아카사카다이 고분군 등의 분지 북서부 세력들이 등장했지만 치즈카의 카무나즈카 고분은 분지 북서부 세력들이 가지고 있었으며, 6세기 후반대에는 고후 분지에서 북서부 세력들과 우바즈카 고분을 개인 것으로 만든 야요 세력들의 대립구조가 예상되어 있었다.
2.2. 고대
율령제 때는 코마군과 야마나시군에 속하게 되었다. 고대 카이국의 유력한 호족은 일찌감치 기내 왕권과의 관여를 지니며 고후 분지 동부 지역에서 불교 문화를 도입했다. 카와다 기와가마 유적지와 사쿠라이초 카미 토기 유적 등 삼림 자원을 살린 토기나 기와를 생산했던 시설이 있었고, 카이코쿠분지를 시작으로 분지 동부에 있는 고대 사찰에 지붕 기와가 공급되어 있었다.
와도마치에 있는 사쿠라이바타 유적지에는 8~9세기 작은 규모의 사찰 유적이 발견되었고, 분지 서부에도 불교 문화가 침투되어 있었다. 또 영산으로 알려진 킨푸산에 신앙을 나타내는 유적이 있으며, 헤이안 시대 중반기에는 말법 사상의 영향으로부터 카미세키스이지마치에 있는 이치노모리 산 정상 등에서 무덤 조영을 진행했다.
2.3. 중세
헤이안 시대 후반기 때는 히타치국에서 유배되었던 미나모토노 키요미츠의 자손이 카이 분지 각 지역에 진출하면서, 그 일족은 카이겐 가문으로 발전했다. 이타가키 마을에 거점을 둔 이타가키 가문과 이치죠 가문에 거점을 둔 카이이치죠 가문과 이이다, 시오베, 코마츠 등 모든 세력 가문들이 터전을 잡았다.[4]
헤이안 후반기 때 각 분지에서 장원 제도가 성립되었으며, 그 중 이나미 장원에는 가이겐 가문의 일족인 카가미 가문이나 오가사와라 가문 등이 진출하게 되었다. 중세기 때는 남부 지방에서 목초지 개발이 진행되었다.
전국 시대 때는 카이국 등의 나라가 어지러워진 상태였지만, 다케다 가문의 통일이 진행되면서 노부마사는 카와다 저택을 꾸미고, 후에후키 강 옛 물길 사이에 두어 있던 건너편 강가 쪽에 이사와슈쿠가 있었다.
1519년 다케다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가 고후 분지 중앙북부에 위치한 아이카와 선상지에 신겐의 어머니인 오이노가타와 함께 츠츠지가사키야카타로 옮겨 살았다. 이후 가신과 토착 무사들을 저택 주변에 모이게 하고 절과 신사를 창건하거나 시장 개설, 상인들의 마을을 정비하는 등 대규모적인 도읍지 건설에도 착수했다.
1521년 2월에는 스루가국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인 쿠시마 마사시게가 슨슈 가도에서 카이로 침공한 쿠시마 난입사건이 일어났다. 쿠시마의 세력은 토다성을 함락시키고 고후로 침공했지만, 노부토라는 10월 16일 이다가와라 전투와 11월 23일 카미죠가와라 전투에서 쿠시마 세력을 무너뜨리고 카이에서 내쫓았다.
1581년 다케다 카츠요리가 니라사키에 신푸성을 짓고 관청 이전을 시도해 보았지만, 1582년 3월 오다 및 도쿠가와 연합군의 다케다 영토 침공으로 인하여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게 되었다. 이후 카이국과 시나노스와군은 오다 가문의 가신인 카와지리 히데타카가 카이국을 통치했고, 그 본거지를 이와쿠보에 두게 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면서 히데타카는 무장 봉기를 일으키다 죽었고, 다케다의 영지를 에워 싼 덴쇼임오의 난이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미카와국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가미국의 호죠 우지나오가 카이를 침공하게 되자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손타이지와 이치죠 노부타츠의 저택에 본거지를 두고, 그 뒤 본거지를 신푸성으로 옮겼다가 야츠가타케와 시치리이와에서 고호죠 가문과 대립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도쿠가와 및 호죠 동맹이 성립되자 카이에서 고호죠 가문을 철군시킨 이에야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2.4. 근세
고후 성이 지어지자 도쿠가와 가문은 칸토 지방으로 옮기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영주였던 가토 가문과 아사노 가문이 이어받게 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도읍지도 건설하면서 새로운 관청이 형성되는데, 내곽은 무사들이 집주하게 되고, 외곽은 평민들의 땅이 되었다.
에도 시대 때는 이에야스의 아홉째 아들인 요시나오, 이에미츠의 동생인 타다나가와 셋째 아들인 츠나시게, 6대 쇼군인 이에노부 등 도쿠가와 가문의 일족이 영주가 되었고, 이후 5대 쇼군 츠나요시의 소임인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와 요시사토 부자가 영주가 되었다. 고후는 각 지배자에 의해 정비된 도읍지로 발전하지만, 1724년 쇼군 요시무네가 주도한 쿄호[5] 개혁의 일환으로 카이 일국에서 막부직할영역화가 실시되면서 교대 근무로 성을 지키고 도읍의 정무를 떠맡게 되자 무사 가문의 인구가 저하되었거나 늘어난 농촌 경제의 영향을 받았고, 중반기에는 인구 수가 감소되었다.
1889년 7월 1일, 전국에서 34번째로 칸토 지역에서는 요코하마, 미토, 도쿄 다음으로 4번째로 지방자치단체를 시행하였다.
2.5. 근현대
메이지 시대 때 초대 민선 지사로 부임한 후지무라 시로가 생산물을 늘리고 시가지 개발을 진행해 제사장을 시작으로 후지무라식 건축으로 불리우는 서양식을 모방하여 세운 건축물로 통일된 모든 시설이 정비되었다.
1945년 7월 6일부터 7월 7일 사이에 이 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미군 폭격기 B-29로 인한 대규모 공습을 받아 74%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공업단지 조성을 진행했으며 고도 경제 성장기 때인 1971년에 추오선의 복선화와 1982년에는 추오자동차도의 모든 전선이 개통하였고 자동차의 보급 사회에 대응한 국가 계획 사업으로 교통 정비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첨단 기술산업이 입지한 기계공업단지를 중심으로 산업경제 활성화 등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며, 중택시로서의 발전을 이루었다.
3. 교통
에도 시대 때는 코슈 가도로 에도와 교토를 연결하는 내륙 간선 중 하나였다. 또 후지산 남부 기슭에 해당되는 스루가국으로 가는 통행로 슨슈 가도나 나카미치 가도, 와카히코 도로가, 시나노국으로 가는 가도는 사쿠 가도와 스와 가도가 분기되어있다.
현내에는 공항이 없기 때문에 시와 왕래하기 위해 정기 항공편을 이용할 경우에는 가까운 현내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코후역에서 공공 교통 기관을 쓸 경우, 공항 버스가 직통하는 하네다 공항과 나리타 공항, 직통하는 교통 기관이 없지만 철도에서 공항 버스로 1번 환승을 할 수 있는 신슈 마츠모토 공항이나 후지산 시즈오카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3.1. 철도
3.2. 도로
3.2.1. 고속도로
3.2.2. 국도
3.2.3. 현도
4. 명물 또는 랜드마크
- 아타고 산 (愛宕山)
- 사카오리미야(酒折宮)
- 카이젠코지(甲斐善光寺) - 나가노의 젠코지와 비교하기 위해, 카이젠코지(甲斐善光寺), 코슈젠코지(甲州善光寺), 고후젠코지(甲府善光寺) 등등으로 부른다.
- 츠츠지가사키야카타(躑躅ヶ崎館) - 전국 시대의 영주 타케다 씨의 영국경영의 중심이었던 저택이다.
- 쇼센쿄(昇仙峡) - 후지카와 강의 지류인 아라카와 강의 상류에 위치한 계곡,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 후에후키가와 과일 공원(山梨県笛吹川フルーツ公園) - 과일을 테마로 만든 공원으로 고후시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5. 출신 인물
6. 기타
1993년 고후 OL 유괴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의 청주시와 2002년 9월 26일 자매결연을 맺었다. 재밌는 사실은 두 도시가 속해 있는 도/현 모두 내륙이라는 것이다. 또, 야마나시현 전체 인구가 청주시 인구와 비슷하다.
7. 둘러보기
[1] 주민기본대장, 2020년 1월 1일[2] 뒤에서 2등인 야마구치시보다 인구가 약간 적은데 그래도 야마구치에 비하면 확실히 도시다. 이는 코후는 시 자체 면적이 좁고 주변 도시와 연담이 되어 있어 근교도시에 사는 사람이 더 많은데 야마구치는 연담된 도시도 없고 주변 도시라 해봐야 호후시 정도이기 때문이다. 코후 도시권의 인구는 60만대, 야마구치 도시권의 인구는 30만대이다.[3] 다만 관청이라는 뜻은 국가 중심도시라는 정도인데, 율령제 때 의거한 행정 구역 소재지는 여기가 아니라 후에후키였다고 한다.[4] 이치죠나 이타가키 등의 카이겐 가문 일족들은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군사를 일으키는 호응에도 활동했으나 그로 인해 척화된 세력은 쇠퇴와 동시에 멸망해 버렸다.[5] 享保. 일본의 연호 중 하나이다.[6] 일부 출입로는 이 시와 관련되어 있고, 카이시 만자이에도 인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