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즈데게르드 3세
사산 왕조의 제44대 마지막 황제. 재위기간 632 - 651년
1. 혈통
호르미즈드 6세의 참칭으로 제국은 결국 분열기를 맞이하였는데, 아버지인 샤흐리아르 또한 그중 한명이였으며, 어머니는 동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의 딸이다. 한마디로 동로마 제국에서 샤흐리아르를 정통으로 간주하여 정략결혼을 했기에 샤흐리아르 사후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2. 생애
야즈데게르드 3세는 어려서 집권하였으며, 야즈데게르드의 통치가 시작되는 첫 해에 이슬람 세력의 페르시아 정복이 시작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헤라클리우스와 동맹을 맺었다. 헤라클리우스 입장에서도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하면 껄끄러울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은 페르시아의 크테시폰을 점령하여 사산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로서 사산 왕조는 멸망하였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쪽으로 도망가지만 도중에 메르브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총독에게 살해당한다. 능력은 있었으나 선조들의 잘못으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르완 2세와 비슷하다.
3. 후손과 망명자들
그의 아들이였던 페로즈가 당나라로 도망쳐서 권토중래를 노리려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고[1] 나머지 딸들은 이슬람 세력유력자들의 첩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야즈데게르드 3세의 딸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아들 후세인 이븐 알리와 결혼했고 시아파 이맘의 혈통에는 페르시아 황실의 혈통도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앙아시아로 도망쳐 정착한 귀족들은 이 지역에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전파하였다. 또한 이들은 차후 아랍에서 독립하는 사만 왕조에 기여하였으며, 이슬람의 영향 아래서도 사산 왕조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인도로 도망 가 후에 무굴 왕조에 대립 하게 되는 조로아스터 교도들도 존재하는데 인도의 타타가 유명하다. 또한 처용 설화에 나오는 처용이 이 망명자들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사용하는 종교력 중에서 야즈데게르드 3세의 즉위년인 632년을 0년으로 한 종교력이 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