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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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علي بن أبي طالب'''
'''ʿAlī ibn Abī Ṭālib'''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598~600)~661, 재위 656~661
1. 개요
이슬람의 제4대 정통 칼리파. '''이슬람이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되는 계기가 된 인물.''''''그대는 현세와 다가올 내세에서 나의 형제라.'''
ㅡ 사도 무함마드
2. 최초의 남자 무슬림
조실부모한 선지자 무함마드를 입양해 키운 무함마드의 삼촌 아부 탈리브의 아들로서 어린 시절부터 무함마드와 형제처럼 어울리며 성장했고, 둘의 나이 차이는 30에 가까웠기에 당시 관습[1] 에 의해 거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였으며,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이후 무함마드 아내 카디자에 이어 이슬람으로 개종함으로써 첫 번째 남자 무슬림이 된다.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610년 당시 알리의 나이는 고작 10살 무렵에 불과했지만[2] 누구보다도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바치며 적들과 당당히 맞서 싸웠다.
622년 무함마드가 위험을 피해 메디나의 중재 요청을 받아들여 메카를 떠나던 날(헤지라) 지금이라도 무함마드를 살해하고자 하던 암살자들이 몰려왔을 때, 무함마드를 대신하여 그의 침대에 누워있던 것도 알리였으며,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 및 이슬람 세력을 박멸하고자 쿠라이시 부족을 주축으로 한 메카 세력이 군사적 압박을 가할 때 가장 맹렬히 저항한 이도 알리였다. 특히 당시 풍습으로 전투에 앞서 사기 진작을 위해 각 진영의 대표자를 뽑아 일기토를 벌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이슬람 세력에서는 언제나 알리가 대표로 뽑혀 나가 승리를 쟁취함으로 용맹을 과시했다.
또한 이슬람 세력이 참패하고 무함마드마저 전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훗날 3대 정통 칼리파로 즉위하는 우스만 이븐 아판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마저 도망치는 위기 속에서도 군대를 수습하고 무함마드를 보호한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런 공적을 쌓아가며 알리는 움마내에서도 전설적인 명성과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무함마드도 주변사람들에게 “여러분 중 나를 수호자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알리를 당신의 수호자로 여겨야 한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알리를 극진히 아끼었다. 게다가 무함마드의 유일한 남자 후손은 알리에게 시집을 간 무함마드의 첫 번째 딸 파티마가 낳은 하산 이븐 알리와 후세인 이븐 알리 둘뿐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움마 내에서도 알리를 무함마드의 정식 후계자로 보는 시선이 강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알리 자신도 내심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3. 칼리파 직위를 향하여
3.1.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 선정과 이슬람 세계의 분열
그러나 이런 유력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알리는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 경쟁에서 아부 바크르에게 밀려나고 말았는데, 특히 이 선정은 알리가 이제 막 사망한 무함마드의 유해를 수습하느라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 동안 '''기습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분열을 야기했다.'''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생전 무함마드의 언행과 알리의 공적,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유일한 손자들의 아버지인 알리의 정통성은 다른 후보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고 무함마드에게서 발산되던 권위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알리에게서도 느껴진다고 주장하였으며, 최소한 회의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고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에야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것보다는 훨씬 존경받고 배려 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반면 아부 바크르를 지지하는 세력은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이슬람의 지도자는 혈연 따위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점이야 말로 무함마드가 그토록 비난하던 특권층의 세속왕조의 혈연계승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신의 마지막 사도’ 이므로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이 주장하는 알리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한 느낌이란 그저 느낌일 뿐이며, 역으로 알리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무함마드와 알리와의 혈연관계나 개인적 카리스마 같은 요소는 알리가 세속 군주처럼 군림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즉 지금까지 알리의 강점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무함마드의 사후에는 알리가 무함마드의 후계자 지위에 올라서는 안 되는 이유들이 되었으며, 알리의 입장을 축소시키는 사항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에 아라비아의 부족 지도자를 뜻하는 ‘셰이크’ 라는 단어는 ‘나이 든 남자’ 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당시 60에 가까운 아부 바크르와 달리 알리는 이제 막 30을 넘은 시점이었고 이런 나이 차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보다는 아부 바크르의 지지세력의 주장에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고 논쟁이 시작되면서 분열은 점점 깊어졌고, 이 와중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가 유산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양 진영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다다른다. 그리고 이런 분열의 양상을 통해 아부 바크르의 지지자와 알리의 지지자는 각기 다른 정체성을 품기 시작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시초가 된다.[3]
3.2. 아부 바크르 체제에의 승복과 우마르 지지
그러나 이런 분열은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 취임 반년 후 끝을 보게 된다. 이는 무함마드의 사망을 계기로 아라비아 반도 각지에서 무함마드 이후의 사도는 자신들이라 주장하는 세력들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세에 위기감을 느낀 양측은 상호 타협해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 직위를 인정하게 되며, 이후 곧장 아라비아 반도 내의 반란 움직임을 타도하는 군사 활동에 돌입한다.
얼마 후 애초부터 나이가 많았던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 취임 2년 만에 사경을 해매게 된다. 그러자 자신의 죽음으로 생겨날 혼란을 우려한 아부 바크르는 자신의 후계자로 우마르를 추천한다. 그러나 당시 '''오만함과 거만함, 사나움으로 악명 높았던 우마르가 인자함과 자상함으로 유명한 아부 바크르의 후계자가 된다는 사실에''' 떨떠름해 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 때문에 아부 바크르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우마르의 칼리파 즉위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랍게도 다른 유력 후보였던 알리가 우마르의 칼리파 직위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면서 결정적으로 의견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우마르는 무사히 칼리파 직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던 알리의 존재감을 생각했을 때, 의견을 조금만 틀거나 논란이 길어진다면 그를 후계자로 선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알리의 경쟁상대인 우마르는 자상함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던 아부 바크르와 달리 그간 보여준 오만함과 폭력성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버티기만 하면 차기 칼리파의 직위는 알리의 것이 될 가능성이 컸으나, 놀랍게도 알리는 우마르를 지지하며 스스로 차기 칼리파의 직위를 포기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당시 알리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4] 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는 강직하고 이슬람에 대해 진심으로 열정을 바쳤던 알리가 자신이 칼리파 직위에 오를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충돌과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사실 정황을 둘러보자면 이런 의견은 높은 설득력을 가진다. 당장 반년 전까지도 이슬람 세력은 아부 바크르와 알리의 분열의 여파로 발생한 권력 공백을 틈탄 반란을 진압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반년 만에 칼리파 선정으로 다시 분열이 발생할 경우 이번에야말로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몰락할 것이라는 우려를 할 법 하다. 게다가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은 아리비아 반도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고자 군사적 팽창을 시도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리는 자신의 세력을 억누르고 다른 유력 후보자를 지지함으로써 이슬람의 화합을 꾀할 수 있었고, 우마르는 알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데 충분한 공적을 보여준다.
3.3. 삐걱대는 우스만 이븐 아판의 시대
2대 정통 칼리파인 우마르가 암살당하고, 그가 창설한 슈라들에 의해 차기 계승자가 뽑혀지게 되는 데,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우스만 이븐 아판과 알리였다. 그리고 둘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슈라가 둘에게 각자 칼리파에 즉위한 이후의 정책에 대해 묻자 알리는 “초기 이슬람 세계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범으로 삼으며, 이전 칼리파들의 행적을 존중하겠으나 나에게는 나만의 생각이 있으므로 변혁을 추구하겠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대답은 알리의 칼리파 즉위를 결정적으로 그르치게 만들었다. '''전임 칼리파였던 우마르가 크게 우려했던 이슬람의 세속화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되어 이슬람 세력의 상류층은 변혁보다는 안정을 원했기 때문이다.'''[5]
따라서 애당초 자신들과 비슷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우스만에게 호감을 느끼던 슈라들은 “나는 전임자들의 행적을 따르겠다.”는 우스만의 대답에 우스만의 칼리파 즉위를 선언한다. 알리는 이에 내심 불만을 품었던 것 같지만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고, 이렇듯 알리가 숭상하는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은 점차 그를 강하게 옥죄고 있었다.
칼리파 자리에 오른 우스만은 지금까지 대단히 어설펐던 이슬람 세력의 재정문제를 대대적으로 계혁함으로서 재정 문제를 합리화 시키고,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이슬람 세력의 축재를 막아왔던 여러 조항들을 폐지시킨다. 이런 개혁은 분명 국가의 부를 증대시켰으나 동시에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막대한 세금부담을 지게 만들었다. 동시에 우스만은 과도한 친족 편애로 친족에게 엄청난 액수의 보수와 권력을 하사했고, 특히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본래의 영토에 메소포타미아 지방 및 이집트의 경계까지 그의 영토로 하사받으며 개인 세력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결국 세금 부담을 견디다 못 한 이집트[6] 시민들은 그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칼리파에게 보냄으로써 부당함을 호소했고, 이에 당황한 우스만은 알리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스만이 벌인 일을 좋게 보지 않은 알리는 우스만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우스만이 살해당하고, 우스만을 살해한 폭도들의 추대에 의해 알리는 내심 바라면서도 연을 맺지 못하던 칼리파의 직위에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등극하게 된다.
4. 이슬람의 분열
4.1. 4대 정통 칼리파 등극과 쿠라이시 가문의 알리 반대 운동
알리는 칼리파 등극 직후부터 터져나오는 반대 세력들의 반란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던 것이 우스만 시대 각종 우대를 받던 쿠라이시 부족의 세력이었다. 그들은 알리가 우스만의 중재 요청을 거절한 것은 애초부터 우스만을 암살하기 위한 계책이었다고 주장하며, 알리의 칼리파 즉위를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이 것은 어디까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알리의 성향상 우스만 시대의 방만한 재정운용은 중지될 것이 뻔하고, 그럼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세력은 우스만 시대 온갖 특혜를 누리던 쿠라이시 부족이다.
이런 사태를 경험하며 알리는 무함마드 사망 이후 이렇게 짧은 기간내에 움마의 기강이 흐트러 진 것을 탄식하며, 자신은 기강을 회복시키려 노력할 것이라 선언한다. 하지만 쿠라이시 부족은 계속해서 알리 반대 운동을 진행하며 알리의 지위를 위협하고 특히 우스만을 살해한 이들의 처형할 것을 요구하는데, 알리는 폭도들이 메디나를 장악하고 있는 그 상황에서는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쿠라이시 부족은 알리의 권위를 손상하고자 더욱 적극적으로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런 난국을 타파하고자 단호하게 국면을 전환시키기로 마음먹은 알리는 이제까지의 수도 메디나에서 메소포타미아 중류의 쿠파로 천도하여 개혁을 진행하나 이미 우스만 시대 권력과 독점의 단맛을 본 상류층은 알리가 주장하는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알리는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를 위협하는 위험분자일 뿐이었으며, 반면 쿠라이시 부족은 알리에 맞서서 자신들을 보호해줄 정당한 수호자였다.
4.2. 아이샤와의 충돌
알리는 우스만이 임명한 부패한 총독들을 모조리 해임하나 놀랍게도 모든 총독들은 반발하며 알리의 명령에 거부하면서 이슬람의 내전이 시작된다. 유일하게 '''예멘 총독만이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그는 모든 재산과 국고를 빼돌림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타락을 여실히 보여주게 된다.''' 게다가 이 예멘 총독은 알리를 극도로 혐오하던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에게 접근하여 반란을 선동하고, 이전부터 쿠라이시 부족과 협력하던 아이샤는 예멘 총독의 자금 지원을 받아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자 알리는 지하드를 선언하고 아이샤를 처단하고자 군대를 일으키는데, 아이샤 측도 지하드를 선언한 상태였으므로 이슬람 세계는 서로를 처단하기 위해 지하드를 선언하는 웃지 못할 비극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군대를 마주친 두 사람은 사적인 불화를 젖혀두고 공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협상을 통해 상호간의 의견을 조율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알리와 아이샤는 지금 자신들의 행동이 이슬람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며, 우스만을 암살하고 이슬람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진짜 악인들이 도피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라는 합의를 도출해 상호간의 협력을 통하여 지금의 혼란을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이 일은 알리나 아이샤 같은 초창기 이슬람 인물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호불호나 감정보다도 대의를 우선시 하는 초기의 순수성이 건재함을 과시함과 동시에 향후 벌어질 사건의 방향을 극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리와 아이샤가 화해해 버린다면 압도적인 권위와 정통성을 지닌 지도부의 탄생을 통해 알리를 폄하하던 쿠라이시 부족,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 고위층들은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았고, 이미 그들과 접촉하고 있던 알리와 아이샤 세력 내의 내통자들 또한 색출되어 처형될 위험이 생기게 되니 이미 여러 세력의 이해집산이 뒤섞인 아이샤와 알리의 격돌은 두 사람의 타협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양측 군대에 속해 있던 여러 이해집산의 세력들이 사령관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적군을 향해 돌격함으로 예정에 없던 낙타 전투[7] 가 시작된다. 알리는 아이샤가, 아이샤는 알리가 배신했다 여겼기에 협상은 결렬되었고 분노한 양측이 격렬하게 충돌했는데, 알리는 격렬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고 아이샤는 포로가 되어 메디나로 보내져 감금된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이슬람을 구할지도 모를 희망찬 타협 대신 무슬림이 서로를 죽였다는 가슴 아픈 승리였다.
4.3.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의 반란
어떻게든 아이샤의 세력을 제압한 알리는 숨돌릴 여유조차 없이 또 다른 반란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시리아의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의 도전이었다.
무아위야는 우스만이 암살 당한 그 시점부터 자신의 영지내에서 우스만이 암살 당할 때 입은 피 묻은 옷(이라고 무아위야가 주장하는 물건)과 이야기꾼들을 대동하고 다니며 우스만이 당한 억울함을 끊임 없이 주장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군사력과 자금력을 강화하고 우스만의 우대 정책을 통해 각지의 총독 및 재력가로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자신의 친족 세력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알리에 대한 반대 운동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가 아이샤를 격파한 무렵 무아위야는 공식적으로 알리의 권위를 거부하며 자기 자신을 새로운 칼리파로 선언했고, 분노한 알리는 이를 진압하려고 무아위야와 격돌(시핀전투)하나 양측 모두 승기를 잡는데 실패하여 지지부진한 전황을 이어나간다. 그러자 서로의 지휘관들과 자신들의 피해에 염증을 느낀 양측의 병사들을 중심으로 대표자들의 1:1 결투를 통해 승패를 가리라는 의견이 거세게 분출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항상 이슬람의 결투 대표자로 임명되었던 알리는 그러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최소한의 피해로 혼란을 끝낼 수 있음을 기뻐하나, 알리와 비슷한 나이지만 사치스런 생활에 절어있던 무아위야는 결투에서의 승패를 장담하지 못했기에 병사들의 요구를 거부한다.
결국 사기가 떨어진 무아위야의 군대는 알리가 진두지휘하는 적의 맹공에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전황은 곧 알리의 승리로 결판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패배 직전의 위기에 처한 무아위야는 병사들에게 무슬림들간의 평화를 위해 협상을 하라고 요구하는 낭송 전문가 뒤에서 창끝에 쿠란의 낱장을 붙이고 꾸란의 시구를 연호하며 알리의 군대를 향해 진군하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적의 피로 쿠란을 더럽혀질 것을 우려한 알리의 군대는 더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그렇게 승리를 눈 앞에 두었던 알리는 무아위야의 요구대로 협상을 하는 데 동의한다.
이 시점에서 전황은 알리가 확실히 우세했기에 알리는 자신이 무아위야의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 쿠라이시 부족 및 우마이야 가문, 무아위야가 누리던 특권을 축소하고 그들이 알리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수준에서 협상이 채결되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알리의 그런 순진한 생각과 달리 무아위야는 놀라운 협상능력과 수완을 발휘하여 자신은 시리아와 이집트, 알리는 그 외의 영토를 보유한다는 대등한 결과물을 이끌어 낸다.
이 결과물은 알리와 그의 지지자들이 예상한 결과물이 아니었으나, 그들이 협상을 통해 합의된 내용을 지키지 않는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자 알리에게 충성을 다하던 가장 젊고 급진적인 사람들은 반발했고 알리에게 실망을 금치 못하며[8] 알리에게서 이탈해 나가 카와리지파가 되며, 알리 스스로가 신이 내린 사명을 저버렸으니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 또한 강해지게 된다. 그러나 알리는 하야를 거부했고, 결국 그런 알리의 행동에 분노한 급진적인 카와리지파에게 암살된다.
일단의 세력들은 알리의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속해서 자신들을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하지만 수완이 뛰어난 무아위야는 거액의 보수를 제시하며 하산의 하야를 권유하고, 계속되는 분쟁에 지쳐있던 하산은 무아위야의 권유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랍 제국의 권력 쟁탈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미 세속화 돼있던 이슬람 제국은 최후의 가면조차 벗어버린 채 세속 제국인 우마이야 왕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시아파가 되고 기존 권위를 따르는 자들은 수니파라 불림으로써 무슬림 세계는 결정적으로 분열한다.'''
5. 후손
알리의 후손들은 '알리 씨족(العلويين, Alids)'이라고 불린다.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 사이에서 나온 자손들은 무함마드의 후손이기도 하다. 알리와 파티마 사이에서는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와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가 있고, 역사 속에 큼직한 발자취를 남긴 후예들은 대부분 이 둘의 후손이다. 파티마를 통한 무함마드의 후손은 '샤리프(شريف, Sharif)' 또는 '아슈라프(أشراف, Ashraf)'라고 불리는데, 이 호칭은 하산의 후손들에게 자주 붙여진다. 후세인의 후손들은 주로 '사이이드(سيد, Sayyid)'라고 불린다.
6. 이야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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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화가 하코브 호브나타냔(Հակոբ Հովնաթանյան)의 그림.
알리가 사용했다는 전설의 무기로 줄피카르(ذو الفقار)라는 칼이 있었다고 한다. 곡도의 형태에 끝부분의 날이 두 갈래로 되어있는 특이한 생김새를 갖고 있는 무기로 전설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혹은 가브리엘 천사 본인이 "줄피카르보다 예리한 칼은 없으며, 알리만 한 장정도 없도다."라고 말하며 알리에게 내렸다고 하며, 칼도 잘라버릴 만큼 단단한 칼이라 우후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벌인 일기토에서 알리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한다. 한편 모로코 사회학자 파티마 메르니시(Fatema Mernissi)는 이 칼이 날이 두갈래가 아니라, 애초에 칼이 두 자루이며 하나는 알리가 스스로 가지고 있었고, 또 하나는 메카의 장군이었던 사아드 이븐 자이드 알 아쉬할리의 칼로 메카의 여신인 마나트의 신전에서 노획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현재 이란군의 주력전차 줄피카, 소총인 줄피카르 소총은 이 줄피카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사후 시아파에 의해 신격화되어 알리와 무함마드의 이름을 절묘하게 대칭시킨 글씨라든가, 알리의 초상화도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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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피카르를 들고 무릎을 꿇은 알리의 모습을 그린 페르시아 세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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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멈 알리와 에멈 호세인(아기)을 그린 시아파 그림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에서는 무함마드와 함께 사기지옥에 와있는데 이교도라서가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을 야기했다는 이유다.
[1] 당시 아랍의 관습으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과 동생은 형제라기 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로 여겨졌으며,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일부 아랍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큰형이 동생들의 학업문제나 결혼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2] 이를 이용하여 훗날 사파비 왕조를 창설하는 이스마일 1세는 자신의 이미지를 알리와 겹치면서 대대적인 정치공작을 펼쳤다.[3] 다만 수니파에서는 아부 바크르 선출이 누구의 반대도 없는 만장일치였음을 주장하며 애당초 분열의 씨앗은 없었다고 주장한다.[4] 주로 시아파에 의해 주장되는 의견. 이 경우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뒷공작에 의해 알리는 어쩔 수 없이 우마르를 지지했고, 따라서 두 명은 시아파 입장에선 반역도당이다.[5] 비슷하게 소련의 혁명가 트로츠키도 순수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연속혁명론을 주장했지만 일국사회주의 즉 '밥먹고 합시다'를 주장했던 스탈린에게 권력투쟁에서 패했다.[6] 우스만은 그의 재정정책에 반대한 아므르 알 아스를 파직시키고 그의 친족인 압둘라를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했고, 압둘라는 세수입을 두 배로 늘리며 응답한다. 그러나 이런 증가가 시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켰음은 당연한 일이다.[7] 낙타전투라는 명칭은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군대를 지휘했기에 붙어진 명칭이다.[8] 애초부터 이들은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신이 내린 재능인이자 칼리프인 알리가 간악하기 그지없는 반역자 무아위야 따위와 협상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등한 수준으로 알리가 타협을 한다는 것은 이들의 충성심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