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포병
1. 개요
일본 육군의 포병 병과 중 야포를 다루는 병과. 현대의 '포병'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일본군 병과는 야포병, 산포병, 야전중포병이 있었다.
2. 편제
사단 직할으로 야포병 연대를 두었다. 제23사단의 경우 야포병 제13연대가 사단 직할로 있었는데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대대는 38식 75mm 야포 2개 중대, 38식 12cm 곡사포 1개 중대로 구성되었다.[1]
포수는 대포 조작, 마부는 말 조련 (말을 손질하거나 물을 먹임), 관측수는 관측기재 조작, 통신수는 92식 전화기와 6호 무선기 조작을 담당했다.[2]
3. 약했던 이유
일본군의 야포병은 매우 약했다. 따라서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 육군 포병과의 교전에서 패배했으며 2차 대전 중 미군에게도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일본 육군의 야포병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할힌골 전투까지 훈련, 투자, 발전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일본 육군이 러일전쟁 후 군사 강대국과의 전투를 치러본 적이 없다는 점이 컸다.
유럽 국가들은 1차 대전을 겪으면서 참호전에서 포격을 통한 진로 개척에 크게 의존했다. 거기다 참호를 벗어나면 기관총 세례로 인해 관측반을 보내도 끔살당한다. 따라서 주요 강대국들은 관측이나 시험 사격 없이 좌표만으로 정확하게 사격할 수 있도록 실사격 훈련을 했다. 시험 사격을 한 다음에 제원을 수정해서 일제사격을 한다면 적 포병의 대포병 사격에 당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군에서는 시험 사격을 한 다음에 제원을 수정한 뒤 사령부의 지시에 맞춰 일제사격을 하는 것이 야포병의 교리였다. 따라서 충분한 실사격을 해보기도 전에 시험 사격으로 위치가 노출되어 무력화되는 일이 잦았다.
야포병의 요청에 따른 항공 관측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미군은 관측기를 동원해 일본군 야포병에게 화력을 쏟아부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들은 관측기의 성능에 대해 편집증적인 공포심을 갖게 되어 관측기가 뜰 때는 시끄러워서 발각될 지 모른다 싶어서 말 한마디 못 하게 하고, 그런 상황에서 아기가 울면 아기를 죽이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3.1. 수송능력 부족
차량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차량이 있다 한들 석유가 없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석유를 공급해 주던 물주와 전쟁을 벌인 것 자체가 잘못이기도 했다.
따라서 전쟁 내내 말을 이용한 이동이 일반적이었으며, 군마에게 물과 건초를 먹이는 것이 사관후보생의 교육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야포병들은 미군 포병의 재빠른 이동이나 진지 변환에 대해 듣고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말을 구할 수 없을 경우 병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인력으로 끌어야 했다. 이것이 쉬울 리 없었으므로 포를 파괴하고 도망치는 일도 잦았다. 탄약 운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발에 15kg짜리 포탄을 40km 운반한다고 하자. 미군에게 두돈반 트럭이 한 대 있다면 150발을 1시간만에 운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군이 치중병, 징용, 포로, 현지인을 활용해 도수운반한다고 하자. 한 명이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건 한 발 뿐이다. 40km 운반에 편도로 이틀은 걸린다. 미군이 운전수 1명으로 1시간만에 할 일을 일본군은 150명이 동원되어 이틀만에 한다.
군마는 중국의 산악지형에서는 자동차보다 나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글에서는 일본산 군마는 전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열대 지방에 적응하지 못해 금방 쓰러져 버린다.
일본군의 몇몇 야포는 자동차로는 견인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 경우 말이 없어지면 포를 버리거나 인력으로 운반해야 했다.
말을 현지에서 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야포병 포대 하나가 수송선을 타고 필리핀에 파견된다고 하자. 그런데 일본군이 제해권을 빼앗긴 뒤에는 수송선이 한정되어 있다. 수송 담당자가 포병, 포, 탄약을 실어 보내지 않으면 숫자상으로 실적이 부족한 것이 되니까 이것을 실어 보낸다. 그러나 군마, 자동차를 실어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숫자상 실적이 부족해져서 질책을 받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송 담당자는 필리핀은 '''토인'''들이 사는 '''농업국'''이니 현지에서 군마를 징발해서 쓰라고 한다. 야포병 지휘관 역시 필리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토인'''들이 사는 '''농업국'''에서는 쉽게 군마를 징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군말없이 현지로 간다. 하지만 필리핀의 자연환경에는 군마로 쓸 만한 힘센 말이 없다. 관광객 1명을 겨우 등에 태울 만한 조랑말 정도만 있을 뿐이다.[3]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대 일본군의 상식에서는 물소를 쓰는 것을 모색한다. 그러나 물소는 매일 3시간 정도는 흙탕물에서 뛰놀지 않으면 땀을 식히는 데 무리가 와서 금방 죽어버린다. 또 높은 밀도로 보관할 수 있는 건초를 먹는 것이 아니라 길가의 살아있는 풀을 뜯어먹으므로 풀을 공급하기 어렵다. 현지인이 따라다니며 조련한다면 물소를 살려놓을 수는 있겠지만 강제 징용한 현지인은 일본군에게 원한을 갖고 있어서 게릴라와 연합군에게 정보를 제공할 뿐더러, 그런 징용을 피하기 위해 이미 도망쳤다. 따라서 말, 물소, 자동차를 쓸 수 없다면 일본군은 거지꼴이 되어 인력으로 포를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 이런 현지 사정을 본토의 야포병 지휘관이 알 수 있었다면 최우선적으로 군마나 자동차를 포함시키려 하겠지만, 보도관제로 인해 1943년이 되어서도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3.2. 정보력 빈약과 피드백 부재
한편 일본군은 정보력이 빈약했다. 그래서 적을 상대하더라도 적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거기다 군국주의적인 문화로 인해 적 전력을 충분히 알지 못 할 때는 적을 과소평가하려 애썼다. 고위 지휘관들이 적을 과대평가한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군인으로서 기백이 없는 것이라서 지휘관 실격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군의 전력은 과대평가되기 일쑤였으며 일선 부대에서의 요청은 상급 부대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이런 상황에 대한 피드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정보를 갖고 있는 군인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본토 육군성의 작전 수립이나 본토에서의 야포병 훈련에 참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1939년 할힌골 전투의 상황은 3년도 안 되어 어느 정도 피드백이 되었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살아 돌아가 참모나 훈련 교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3년 초에는 탁 트인 평지에서 소련 육군 포병과의 포격전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중심으로 야포병 간부후보생들을 교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미국과 한창 정글전을 하고 있었던 시기라는 게 문제였다. 일본군이 사관학교에서 야포병의 교육을 미국 대상으로 전환한 것은 1943년 4월에 들어서였다. 할힌골 전투나 중일전쟁을 경험한 뒤 교관으로 배치된 베테랑들은 소련군이나 중국군, 추운 지방에서 벌어지는 평야 포격전에 대해서는 실전 경험을 아낌없이 가르칠 수 있었지만 미군이나 정글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동남아에서 패배한 일본군들은 후퇴해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거의 100% 반자이 돌격을 통한 옥쇄를 선택했으므로 왜 패배했는지, 적 전력은 얼마나 되는지 등의 중요한 정보들이 상부에 전해지지 않았다. 설사 살아서 현지의 목소리를 낸다 한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현지인과 문화적, 언어적으로 갈등이 많고 이런 갈등이 심해지면 게릴라에 가담한다, 현지어 통역이 없다, 현지에 말이나 물소가 없어서 인력으로 포를 끌고 다녀야 한다, 트럭으로 견인할 수 없도록 포가 설계되어 있다, 사람이 포를 도수운반하려니까 힘들고 다치기 쉽게 설계되어 있다, 적에 비해 차량화가 안 되어 수송과 진지변환이 힘들다, 적에 비해 화력이 약세다' ... 이런 상황을 본토에 있는 상관에게 말한다면 군기가 빠진 나약한 소리를 하면서 요구사항만 많고 무능함을 변명한다며 구타나 실컷 당했다. 사석에서 이런 불만을 말하고 다닌다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불순분자라고 헌병대가 잡아가서 고문했다. 따라서 구타, 고문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 전투에서 패배하든 말든 적당히 양식만 맞춰서 보고하고, 자신에게 패배가 닥친다면 본국에 있는 처자식이 비국민이라고 학대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퇴 대신 옥쇄한다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3.3. 군인 정신에 입각한 명령과 보고
아래에서는 구타&고문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충 숫자만 맞춰서 가라로 보고한다. 그 보고를 받은 위에서는 그 보고를 진실로 믿고 보고에 맞춘 계획을 세운다. 거짓 보고에 기반한 계획이므로 실행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래에서 항명한다면 총살이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명령을 실행하는 구색만 맞추다가 전멸한다. 이런 현상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12cm 포가 1문 있고 근처에 온전한 탄약고도 있다고 하자. 상부에서 보기에 이 상황은 포병 전력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탄약이 75mm 야포용 탄약이었다면, 혹은 탄약 보관 상태가 나빠서 사용할 수 없었다면, 또는 12cm 포가 고장났다면, 혹은 적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급박하게 후퇴해야 하는데 인력으로 운반해야 한다면 포가 없는 것과 똑같다. 구타로 점철된 일본군의 지휘체계에서 그 포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보고가 진실되게 상부로 올라갈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포를 사용할 수 없다고 보고하는 부하는 덴노가 내린 소중한 무기를 못 쓰게 만든 스파이, 매국노, 비국민, 군인정신이 빠져 있는 놈이라며 상관에게 죽도록 맞다가 권총 자살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하는 그 포가 작동되든 안 되든 '12cm 포가 1문 있다. 탄약고에 탄약도 있다'는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다. 또는 다른 부대에서 필요한 물건을 훔쳐서라도 구색을 맞출 수밖에 없다.
소위 군인 정신, 군기, 정신력이라는 것의 정체는 폭언과 구타를 통한 지원 거부, 그리고 그에 대응한 거짓 보고와 도둑질에 불과했다. 그 결과 명령을 내리면 충실히 수행하고 일체의 항명, 말대꾸, 불복종이 없는 충직하고 강한 군대가 만들어졌다. 한편 고급 장교들 역시 군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 위주로 진급했다. 상급자의 불가능한 명령은 괘씸죄를 사지 않을 정도의 거짓 보고로 스무스하게 대응하며 하급자의 요구는 구타로 찍어눌러서 상급자의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진급했다. 그런 사람들은 실전에서의 작전 계획 역시 투철한 충성심, 임전무퇴의 각오, 용기를 바탕으로 필승의 신념을 약속하면서 수립했다. 이런 연극은 강력한 적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부대가 전멸하는 것으로 결말짓게 되었다.
[1] 참고로 이들이 상대해야 했던 미군 사단 포병은 105mm 야포 3개 대대와 155mm 중곡사포 1개 대대.[2] 이하의 내용은 야마모토 시치헤이,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1976을 참조바람.[3] 현대에도 필리핀 관광을 가면 조랑말 트래킹 코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