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자이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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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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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하는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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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이 돌격(Banzai charge, 万歳 突撃)'''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즐겨 사용한 보병의 대규모 착검돌격을 지칭하는 '''연합군''' 용어다. 즉 총검이나 군도를 갖추고 돌격하여 백병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반자이'라는 말은 만세(萬歲)의 일본 독음이다. 일본군들이 돌격할 때마다 "천황 폐하 만세!"(天皇陛下万歳! / 텐노 헤이카 반자이!)라고 배틀 크라이를 외치며 돌격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 당연히 매번 질리도록 "반자이!" 소리를 들은 미군이 붙였고, 정작 일본군은 반자이 돌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반자이 돌격은 그뒤에도 굉장히 황당한 전술로 두고두고 조롱받고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반자이 돌격에 대해 '옥쇄를 전제한 돌격(玉砕前提の突撃)', '자살적 돌격(自殺的突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バンザイ突撃
2. 돌격의 전술성
'덴노 헤이카 반자이'라는 구호는 일본군 수뇌부가 부족한 화력과 보급을 총검 돌격으로 메꾸기 위해 강구해 낸 방법으로 병사들로 하여금 천황에 대한 광신적 충성으로 두려움을 잊게 해서, 빠르게 적진으로 돌격하기 위해 만들었다. 전장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군은 마약을 군에 널리 퍼트렸다. 그것이 바로 악명높은 히로뽕이다. 반자이 돌격 시에도 이는 요긴하게 쓰였다. 다만, 당시에는 메스암페타민의 위험성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서 연합국 역시 사기 진작 목적으로 상당수를 장병들에게 보급했었다. 나중에서야 부작용이 발견되어 금지된 것.
'''돌격은 엄연히 전술 중의 하나'''이다. 전장식 소총이 주력이던 시절까지 각종 투사 무기에 받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아군의 사기를 고취하고 적의 사기를 깎아내릴 수 있으며, 적의 전열을 돌파하거나 맞돌격을 강요할 수 있었다. 현대전에도 곡사 화기에 더 큰 타격을 입기 전에 빠르게 적에게 접근한다는 발상은 충분히 유효하다. 돌격 전술은 적 포병들을 상당히 난감하게 만든다. 까딱 잘못하다간 아군의 머리 위로 포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좌표값 계산하는데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계속해서 해당 값에 변수가 생기면 제대로 포격 요청도 할 수가 없다. 해당 지역의 아군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진내사격 같은 화력지원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포병의 포격은 사실상 봉쇄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총검이 처음 개발된 시기는 머스켓이 주 무기였던 전열보병 시대다. 이 시절의 머스켓은 연사력이 크게 떨어져 현대의 전투와 달리 백병전이 수시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데[2] 이때 백병전을 보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3] 즉 이 당시만 해도 총이라는 무기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백병전이 빈번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날붙이를 들고 돌격하는 전술은 매우 유용한 전술 중 하나였고, 돌격에 특화된 병력인 기병이 매우 강한 전력으로 중요시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로 총기는 전장식과 수동 장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량이 거듭되었고, 결국 전투 내내 화력을 유지하는 무기가 되었다. 따라서 1명이 상대할 수 있는 적군의 수가 늘어났고 기관총이 나오기 이전에도 이미 후장식 소총으로 병력이 비슷하다면 돌격해오는 적을 모조리 쏴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백병전의 시대는 끝났고, 돌격의 유효성은 크게 줄었다. 기관총이 나온 다음에는 단순한 돌격 전술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그 예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인 솜 전투 당시 독일군은 MG08 중기관총 소대 둘이 십자포화를 퍼부어서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11km를 전진할 수 있었지만 60만명 이상이 죽고 다쳤으며, 막던 독일군도 40~60만명 이상이 죽고 다쳤다.[4] 하지만 아군이 기관총 앞에 허무하게 쓰러지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뒤로는 총검 돌격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5]
하지만 아직도 돌격 전술이 완전히 사장된건 아니다. 총이 다재다능하지만 완전히 만능인건 아니기 때문이다. 총기의 장점 중 가장 중요한건 사거리인데, 바로 그 사거리가 봉쇄되는 근접전에서는 오히려 총이 더 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6.4m 이내에서는 오히려 총을 꺼내는 게 더 시간이 걸린다. 일례로 좁은 실내에서는 길쭉한 총이 거치적거려서 코너 등에서 제대로 활약을 못하고, 그럴바에는 차라리 냉병기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물론 그런 문제를 보강하려고 권총이나 PDW 같은 총기류들이 개발되긴 했지만 이 물건들은 반대로 그런 상황에서만 유용하고 그 외 상황에서는 애매하기 때문에 결국은 주력 총기를 하나 더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건데, 총을 두자루씩 들고 다니는건 곤란하기에 결국 오늘날의 주력 전술은 주력 총기를 소지하고 특수 상황에서의 사용을 목적으로 단검/권총을 소지하는 식으로 타협을 보고 있다. 미군은 공용화기병에게 권총을 지급한다.
문제는 후술할 반자이 돌격은 상황에 맞게 제대로 된 전술이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고 개돌을 찍는 심각하게 무개념한 전술이라는 점이다.
3. 반자이 돌격의 역사
3.1. 초기 화력주의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오히려 원거리 화력에 의존하는 화력을 강조했다. 개항 초기 일본은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 과정에서 '보병은 화력으로 결전한다'라는 당시 독일군 교리를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보신전쟁 당시 구 일본군의 전신이었던 신정부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서 막부군의 발도 돌격을 후장식 소총과 암스트롱포의 화력으로 격퇴한 사례가 많았고 이는 이후 공식적으로 창설된 일본 육군의 성향에 큰 영향을 줬다.
한편, 서남전쟁 때는 원거리 화력에서는 정부군이 우세했으나[6] 막상 사쓰마 군이 발도 돌격을 걸어오면 오히려 정부군이 패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인은 주로 2가지였는데, 첫째는 간략하게 프랑스식 검술을 배운 상비군이 일본식 검술의 달인이었던 사쓰마 무사들에게 근접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7] , 게다가 상비군이던 정부군이 사쓰마군보다 사기 및 전의가 모자랐던 것도 한 몫 했다. 여기에 기관총이 아직 발명되지 못한것도 한 몫 했다.[8]
이에 정부군은 일본도 검법에 적합한 형태의 양손세이버를 도입하거나 검술이 뛰어난 자들을 모아 발도대를 창설하는 등[9] 부족한 근접전 능력을 극복하려 들었고, 아예 전후에는 상비군에게 일본식 검술을 가르치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평생 걸려서 배우는 일본식 검술을 군 복무 기간 안에는 못 익힐게 뻔하니 기각시켰고[10] , 대신에 고질적인 사기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훈련 과정에서 정신교육을 중시하고, 덴노를 일본 제국 육군, 해군의 대원수로 앉혀 군의 사기 고양을 도모했다. 사실 이런 경향은 군대 구조를 징병제 바탕의 상비군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한 다른 근대 서양 열강도 비슷했다. 애국심과 정신력 강화(곧 정훈교육) 및 국가 최고 원수에게 군 통수권을 부여하는 등, 서남전쟁도 근접전에서의 열세를 화력으로 이겨낸 것이므로 오히려 일본군이 채택한 독일식 화력주의에 대한 신뢰는 오히려 강해졌다.
3.2.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발도 돌격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게 된 것은 러일전쟁을 겪은 후였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것이지만, 일본군은 보급 및 근본적 국력 문제로 거의 패전의 위기에 몰렸었다.[11] 일본군은 종래의 반란군이나 청나라 등 한 수 아래인 상대와 달리 러시아 같은 제대로 된 적을 상대하면서 독일식 화력주의는 너무나도 많은 포탄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양 열강은 공업 능력이 뛰어났으므로 포탄을 많이 사용해도 별문제가 없었지만, 산업화 후발 주자였던 일본의 공업 능력으로는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포탄 부족 문제는 강력한 요새를 장기간에 걸쳐 공략한 뤼순 공방전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났다. 오사카 포병 공창의 하루 포탄 생산량이 900발이었다고 하며, 한번 제대로 공성을 하기 위해선 한 달 치 포탄을 모아야만 했다고 한다. 여기에 당시 뤼순 공방전에 참전했던 3군 자체의 실수까지 겹쳐, 만들어진 새 포탄이 도착하는 대로 공격을 감행한 결과, 매달 같은 날에 공격이 진행되었다.[12]
상식적인 국가라면 총력전에 비용이 이렇게 많이 든다는 걸 깨닫고, 지출을 줄이기 위해 팽창 노선에 손을 보거나, 정복전쟁 기조를 유지하더라도 일단은 외교에 신경을 쓰며 기술 개발과 산업 진흥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군부가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군은 전쟁이 산업 능력으로 결정되는 총력전 시대가 왔다는 걸 깨닫고도, 전쟁을 조심스럽게 하자는 결론 대신 서구식 군사 제도로는 미래 전장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13] 그때 마침 열강인 프랑스에서 엘랑 비탈이나 청년학파 같은 교리, 사상들이 있는 것을 본 일본은 그것을 착안하여 교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 요인을 정신력이라고 결론 내리고 본격적으로 무사도 정신[14] 과 군인 정신을 강조하며 이것이 하나의 교리가 된다. 이에 따라 탄생한 일본군 보병 교범인 보병조전(步兵操典, 1909)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리고 1차대전 이후 과학의 진보와 변혁이 전략 전술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고 보면서도 '제국의 장차 작전을 예상해보면 최근의 유럽 전역에서와 동일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실례에 나타난 무기의 위력을 과대평가하여 제국 고유의 공격 정신에 결함을 발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평가[16] 를 내린다.최근의 전쟁(러일전쟁)에서 무형전력 즉 군인정신의 중요성이 입증되어 이로 적을 이기는 것을 증명되었다. 보병은 전투의 중심이며, 승리를 위해선 공격 정신을 고취해야 한다. '''이것의 결정체가 총검 돌격이다. 사격만으로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최후에는 역시 백병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사격은 백병전을 위해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며'''[15]
, 특히 백병전은 일본 전통의 묘기(妙技)이다.
또한, 연합군 지상군의 주력이었던 프랑스군의 군사 교리들을 매우 높게 평가해서 그것들을 자국군에 집어넣으려 했다. 애초에 일본 육군이 독일식 전략 전술을 도입한 이유가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의 육군을 가졌다는 프랑스를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꺾었으므로 육군 최강은 독일'이라는 논리 때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쨌든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으므로 이들의 전략 전술을 도입하자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어느정도 구색이 맞기도 했다. 물론 그 속내는 어떻게든 포탄을 덜 소모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이렇게 모델로 삼고자 한 프랑스군도 가능한 만큼은 화력을 중시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
3.3. 전면적인 오인
여기서 문제는 그 프랑스군의 교리는 일본군이 오인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전통적으로 백병전과 총검술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다. 나폴레옹 전쟁부터 한국전쟁까지 총검술을 애용한 군대가 프랑스군이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으로 돌격만능주의가 아닌, 화력전의 마무리나 최후 수단으로 백병전을 중시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군도 화력전을 중시했고 사격전만으로도 승리를 얻을수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왜냐면 '''자신들이 영국 레드 코트에게 맨날 화력전을 당했기 때문…'''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도 프랑스군은 총검돌격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데 프랑스군도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화력전을 할만한 돈이 없었다…[17] 이런 마당에 당시 최고의 부국으로 심심하면 실탄 훈련을 하면서 정예화된 영국군과 화력전을 한다는 건 미친짓이였고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전투는 초반에 총탄을 주고 받거니 하다가 제자리에 서서 지속적으로 사격을 퍼붓는 영국군을 향해 프랑스군이 쪽수를 믿고 돌격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때문에 프랑스군도 돈이 되는 한은 포병이나 소총 개량에 돈을 투입하며 화력 열세를 극복해보려 했다. 샤스포 소총과 그라 소총 항목을 참조. 그 유명한 에콜 폴리테크니크 도 컴퓨터가 없으니 당연히 계산은 두뇌로 하는게 기본이였던 시대고 포병 병과의 특성상 수학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지 실제 사격은 수치에 맟춰서 실시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들을 보내서 포병장교를 교육하기 위한 기관이였고 포병장교 또한 두뇌 회전이 빠름과 동시에 군인의 기본적인 미덕인 체력, 강인함까지 동시에 지닌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
당장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교가 누구인지, 그가 어느 병과 출신인지를 생각한다면 답이 나온다. 밀덕들이 엘랑 비탈을 들어 비난하는 프랑스군 수뇌부들도 총검보다 화력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고 1차 대전 이전에는 최초의 현대식 화포를, 1차 대전 도중에는 지금도 서구권의 표준이 된 155mm 야포를 개발한다. 즉 프랑스의 공세주의, 정신주의 교리는 보불전쟁 이후로 추월당한 인구와 국력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지 기술력이나 화력을 정신력으로 대체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즉 일본은 전략 차원에서 의지와 정신력을 강조한 프랑스의 사상을 전술 차원에 적용하는 참사를 벌인 것이다.
이와 함께 슐리펜 계획을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섬멸전 개념을 받아들인다.[18] 이것들이 기존 백병전 중시의 일본전 교리와 결합하면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낸다.
- 슐리펜식의 섬멸전, 포위 섬멸, 기동전[19] 을 수용하고 이를 중요한 사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핵심을 속전속결에 둔다. 적보다 먼저, 적이 저항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한 방을 먹이면, 적이 항복하리라는 것인데 여기까진 정상적이지만, 이 강력한 한 방이 압도적인 화력이나 병력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 이와 함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일본군의 공격 정신 즉, 확고한 황군 사상과 필승 불패의 신념이다. 그리고 군비 경쟁에서는 질 수 있지만, 정신력만큼은 결코 질 수 없다면서 잠재적 적성국(중국, 소련, 미국)은 일본보다 정신력이 열등한 군대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강력한 1방은 정신력을 극대화하면서 적의 약점인 정신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총검술, 특히 백병사용에 익숙해야
이번 사변(※제1차 상해사변)에 있어서 아군이 항상 적을 물리치고 도처에 용전분투하며 그 공방 중 언제든, 혹은 탄약 소진시에 불시에 적습을 당한 적이 무수히 많았지만 수배 내지 십수배의 적에게 태연히 적을 지근거리에 끌어들이고 최후에는 총검을 신뢰하여 마침내 이를 격파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는데 실로 아군에 백병전을 벌일 자신이 있는데 반하여 그럴 자신이 없는 적군에게 우월함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偕行社記事第六百九十七号附録』,1932,p.8)
1.근대전과 검술의 관계여하
근대에 있어서 과학병기의 눈부신 발달은 옛날의 일기토(一騎討ち)와 같은 개인적전술을 기계적집단전술로 일변시켜, 그에 의해 일시 검술 등은 경시되는 풍조가 있었으나, 유럽전쟁의 말기즈음에 이르러 다시 중시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공격병기의 놀라운 발달은 오히려 전선의 고착을 유발하여 주간에 양쪽이 거리를 두고 엎드려 사격하게 되었으며 쉽게 적에게 육박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야간이 되면 과연 공격병기도 위력을 줄어드는지라 적과 아군 모두 참호에서 뛰어나와 서로 적진지를 탈취하려 한다. 그리하여 야간의 백병전이 되면 대포나 소총으로는 너무 늦으므로 서로 도검으로 싸우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다시 검술의 중요성이 재확인됨에 이르른 것이다.
그리하여 황군에서도 군의 기계화에 즈음하여 더더욱 검술의 연마에 임하며 우리나라 전통의 무덕을 함양하고 체력을 단련하여 건강한 기력과 담력을 양성하여 드디어 국군만의 독특한 위력이 된 것이다. 만주사변은 특히나 이번 사변에 있어서 수많은 혁혁한 위훈을 발휘한 것은 실로 검술연마의 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옛 무사들의 무용을 잇는 적병 수십명을 베어버린 수훈담이나, 혹은 단신으로 적전차 격파등의 근대과학전에는 볼 수 없는 기적을 낳은 것이다. 이것은 바로 크게 진보한 기계화전쟁에 있어서도, 최후의 승리를 결정하는 비결은 백병전에 있으며, 따라서 백병전의 요결은 무도의 통달에 의한 강건한 기백과 담력의 양성에 의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육군각종병과 모범군인교전 전술』 제 7편 1934
실제로 지금 다음의 지나사변에서는, 적의 사상 원인의 6할이 백병전인 것으로도 그 필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아오키 야스시, 『병기 독본』, 1937, p. 15)
그렇게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먹히지 않을 전술을 태평양 전쟁까지 활용하게 되었다."보병은 타병종과의 협동이 부족하지만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고, 마지막으로 총검으로 재삼재사돌격을 감행하여 적을 섬멸할 의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보병의 본령이다.(사이토 시 히라저, 1941, 『군대 정신교육의 참고』, p.114)
3.4. 정신력 집착
'''" '총알이 없어도, 무기가 없어도, 기합을 넣고 돌격하면 어떻게든 된다!' '''라는 게 사령부의 판단이었지만, '''그건 무리였지요.'''"
- 임팔 작전에 참가한 한 일본군 참모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를 포함한 주요 참전국들도 일본군마냥 참호에 정면 돌파를 시도했던 적은 있다."일본군은 총검술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베르됭 전투에서처럼요. 결과도 베르됭 전투와 같았습니다. '''대학살'''이었죠. 일본 병사들은 테나루강 전투에서 몰살됐습니다."
- NGC 2차 세계 대전 4부 전쟁의 절정 中
물론, 그들은 어마어마한 인명 손실이 일어나자, 경악하여 이를 때려치웠다. 문제는 저 당시에 참호를 돌파할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21] 그리고 이건 프랑스만의 문제도 아니고 독일과 영국도 똑같이 겪은 일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프랑스 군인들은 140만 명, 영국군은 80만 명에, 독일 제국군도 200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4.3%, 전체 청년층의 27%에 이르는 140만명이 전사한 프랑스 쪽의 피해는 200만명을 상실하고도 전체 인구 손실은 3.4% 수준에 그친 독일보다 더 심했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 불린다.[22]
이것은 전쟁 뒤에 프랑스가 다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 데 엄청난 손해를 끼쳤고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의 위협적인 행보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즉, 괜히 공격해서 인명손실 내지 말고 독일군을 실컷 죽인 다음에 밀어붙이자는 심산으로 소극적, 방어적인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이후 라인란트 진군과 그 이후 벌어지는 앉은뱅이 전쟁으로 나타난다.[23]
여기에 대해 일본군이 내린 결론은 먼저 기습을 가해서 참호전이 벌어지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단기 결전 사상이다.
러일전쟁 때부터도 일본군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에 가면 국력이나 자원이 부족한 자국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자고 생각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실제로 그렇게 승리했다. 문제는 이 두 전쟁과는 규모가 완전히 다른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역시 그렇게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많은 일본인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 미국은 개인주의와 향락에 찌든 나약한 자들이라고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부심이 높다. 지상 최대의 군대를 이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실이다. 만약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대아메리카 연방 공화 연합중국은 지금껏 대일본제국, 다이니혼데이코쿠가 결정적으로 만난 적 중에서 가장 막강한 적이 될 것이다.
천황 폐하의 정강인 공모에 미 해군 따위가 감히 폭탄을 떨어트릴 수 있단 말인가?
장교든 부사관이든 병사든 이런 교리가 철저하게 주입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경직화하면서 어떠한 비판, 수정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24] 더욱이 이는 정치적인 선전 문구로도 표방하면서 민간인들 역시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일본군이 세운 작전이라는 것들이 죄다 아군의 승리를 전제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25]미군이 우리 생각대로만 움직여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요!
나카무라 료조
게다가 그걸 사용해 본 결과 당연히 매번 환상이 와장창 깨졌지만, 이미 경직되었기에 작전은 변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패전을 겪어도, 상급 지휘관들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필승 불패의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린 후, 하급 지휘관들에게 최소한의 명예라도 지키라며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면서 화력, 경제력 등에 있어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히려 이 사상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즉, 화력과 경제력으로 이길 수 없으니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일본군은 정신력을 무기보다 위에 올려놓는 어처구니없는 자세가 된다.
일본의 주적인 미군도 유럽 전선에 배치되는 신병을 대상으로 교육영상에서 미국과 독일의 자동화기의 집탄률을 조작한다.[26] 하지만 이는 미, 독의 무기체계, 전술 차이를 간략히 설명하며 병사들을 더 납득시키고, 결론인 "그러니까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지휘관의 지시에 따르며 대응하십시오"를 역설하기 위함이었지 '독일군은 오합지졸 겁쟁이들이니 우리 미군이 우렁차게 포효하며 돌격하면 베를린까지 도망칠거다!' 하고 우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런 과정은 싹 다 생까고 정신력이라는 결과만 강조했다.'''
3.5. 몰락
분명 초기에는 나름 성공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냈다. 만주 침략이나 중일전쟁 초까지 기습 공격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돌격 정신으로 연일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일본은 병력 면에서 열세인 경우는 있었지만, 화력이나 경제력[27] 면에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즉, 일본군이 구상했던, '국력 면에서 열세에 있지만, 순전히 정신력만으로 이겨내는 승전'이라는 건 없었던 셈.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는 진주만 공습, 남방작전 등에서 승기를 잡는 것처럼 보였고 순전히 운과 임전 태세가 좋았을 뿐인 초반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군 군부는 이 교리에 대한 의심이나 이의를 허락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수를 이겨내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을 강조하며[28] ,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견지하다가[29] 최후에는 1억 옥쇄를 운운하며 식민지인과 민간인들에게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다가 수도가 네이팜탄 융단폭격을 맞아 불지옥이 되고도 모자라 역사상 최초로 핵폭탄을 맞은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 정신력이라는 것조차도 없고 무조건 명령만 따르는 드론이라고 해도 자체 성능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있어서 지장이 있으면 당연히 임무수행이 불가능하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육군조차도 아시아에서 가장 잘 먹고 가장 화력이 출중하며 가장 잘 싸운다는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있었고 이 말 자체는 100% 사실이다. 이미 군사력 면에서 일본이 제공권에 우위를 점하고 있고 해군력은 중국이 사들인 철갑선들이 국고가 부족해 포를 못 쏘는 상황까지 갔었던 안습의 결정체의 중국 해군에 비해서 일본 해군은 너무 강력한 나머지 다른 열강들이 제제를 가해서 더 이상 배를 건조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상황까지 갔었던 일본과의 비교는 에초에 무리다.
거기다가 일본군은 전체적인 지휘가 중국보다 훨씬 수월했고, 기본적으로 보병도 전부 소총, 수류탄으로 무장했고 분대마다 기관총이 있었으며, 사단급부터는 차량도 굴려서 기동타격도 독립적으로 가능하고 일부 사단에는 장갑차와 전차도 있었다. 총류탄부터 박격포, 포병의 화력지원 공군의 화력지원까지 가능했다. 현대에는 기초적 사항이다 보니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아시아 군대는 서양식 군대의 기본적인 틀만 갖춰도 지역강국 취급 받았다. 태국이 대표적.
식단도 총력전 이전에는 동양에 이렇게 밥을 잘줬던 군대의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호화식단이었으며, 자연히 영양상태나 사기면에서 적국인 중국군보다 월등했다. 물론 전쟁이 진행될수록 중국군의 장교들도 어느 정도 지휘역량을 갖췄지만 일본은 물량/자질을 동시에 갖춘 전술공군과 화학무기가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사기나 전투력 측면에서 일본군 1명과 중국 국민군이나 공산군 1명을 비교를 할수가 없었다. 지난밤 저녁에 돈까스하고 미소국 먹고 말, 자동차, 정찰기를 적극 이용한 정찰대를 믿고 편히 잔 일본군과 지난 이틀동안 먹을것도 없고 계속 일본군 기동대 야습을 받고 지난밤에는 포격까지 당한 중국군의 싸움은 당연히 일본군이 유리할 수 밖에 없고 이런 요건이 충족되어서 반자이 돌격은 상당한 효과를 봤다. 애초에 적군이 보이기도 전에 전의가 꺾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는 일본군은 개전 초기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압도적인 해군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공군도 역시 연합군이 아시아에 배치한 노후기체와는 비교가 안되고 연합군의 1급 전투기하고 비교해야 겨우 스펙상 동등 또는 부분적 열세였던 상황에서 일본은 확장을 통해 동아시아 거의 전체를 함락시켰다. 역시나 전술적인 우위가 확실한 상황에서의 공세였다. 하지만 미국의 분노를 건드린 대가는 역사상 소련에 분노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견주어 볼 상대도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미국은 말 그대로 구축함을 찍어내기 시작했으며 순양함 전함 항공모함도 일본이 격침시키는 수보다 많이 찍어냈다. 이런 해군을 상대로 야마토급 3척 취역시키는데에도 돈이 부족해서 쩔쩔맸던 일본이 싸운다는 것 조차도 말이 안된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판이 뒤집힌 일본은 그 사실을 인지를 못하고 계속 백병전을 선호했다. 문제는 백병전에서조차 일본군이 우위를 점하기는 무리가 있다는것. 일단 기본적인 보병 무장조차 미국은 반자동 소총을 제식으로 운용하고 있었고 기관총이 소대마다 2대씩이나 있었다. 거기다가 미국인들은 평균적인 신장이 현재 한국군과 맞먹는 172cm인 것에 비해 일본군은 이보다 약 10cm나 작은 161cm이었다. 평균 신장이 10cm 작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불리한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 해군이 열세에 몰리자 군수물자 보급 상황도 나락으로 떨어져 신체적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장비면에서는 그 격차가 더욱 현격한데, 일례로 기갑장비의 경우 M4 셔먼같은 중(中)전차는 말할 것도 없고 M3 스튜어트 '''경전차'''도 일본군 입장에서는 온갖 포들을 동원해서 겨우 잡아내는 형편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조합하면, '''뒤떨어지는 신체조건+수준미달의 전투장비+기약없는 보급'''이 완성된다. 이런 상황에 내몰린 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하게 되고, 결국 모두가 죽는 엔딩으로 흐르게 된다.
4. 우라돌격과의 비교
'''결론부터 말하면 어쨋든 같은 수송기라고 AN-2와 C-17을 비교하는거나 마찬가지다.'''
요점은 '전원 돌격'으로 비슷하지만 작전 수행 과정 및 결과는 전혀 다른 전술로 우라돌격이 있다. 만약 일본이 독소전쟁에 개입했다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진 만세(우라#s-2vs반자이) 돌격을 패색이 짙은 만주 작전때와는 다른 본격적인 빅 매치가 성사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우라돌격은 포병이나 전차부대,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전 병사들이 탄약류나 총기류의 보급을 받는 등의 화력 지원을 동반하여, 단순히 러시아의 제파식 전술의 일환으로 자살 공격처럼 단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병력을 안전하게 끌어올 경로를 미리 확보해둔 상태로 연속적으로 공격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소련군이 대전 초기의 졸전으로, 일본의 행태와 자주 비교당하지만 많이 다르다. 개전 당시 소련은 대숙청으로 지휘 계통이 엉망이 되고 장비도 구식에, 그 수도 부족했다. 또한 전쟁이 스탈린이 생각한 것보다 빨리 발발해[30] 방어선도 미완성인 상태였다. 당연히 전략과 전술, 화력에서 독일군에 비교할 바가 못 되었지만 유일한 강점이라면 그저 병력이 많다는 것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31]
이 상황에서 소련군은 우라돌격을 통해 독일의 강점인 화력을 충분히 쓰지 못하게 만들면서 소련군의 강점인 병력 수의 장점은 극대화하게 된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군과 적군이 뒤섞였기 때문에 독일군은 포병과 항공기로부터 화력지원을 받을 수 없어 화력의 강점이 사라지고, 알보병이 뒤섞여 난전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는 곧 여러모로 체계가 엉망이었던 소련군이 그나마 할 수 있던 최선의 전술 중 하나였다. 이 과정에서 돌격 병력이 적진에 도달할 때까지 적이 이들을 공격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도록 포격이나 항공 폭격으로 훼방을 놓았다. 그리고 돌격 병력은 적과 전투를 시작하면 일본군처럼 총검만 쓰는게 아니라 총기를 포함한 활용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적을 공격하게 된다. 즉 우라돌격은 '적의 화력 투사를 제한하고 병력 수의 이점을 살린다'라는 현대전 돌격 전술의 의미를 잘 살린 전술이다. 전쟁 중반기 부터는 PPSh-41같은 제대로 된 기관단총을 든 지원사수 12명으로 구성된 엄호분대를 꾸리기도 했다.
위에서 얘기했듯 소련군의 전투는 1차대전 당시 프랑스가 사용한 '''철저한 화력전을 통한 적 방어선의 분쇄 및 돌격을 통한 돌파'''의 정석적인 모습 그 자체였고, 그럴 상황이 안되면 돌격대신에 방어선을 꾸려 농성을 하거나 후퇴했고, 포위당해 후퇴마저 불가능하면 보급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다시 농성을 했다. 항복하면 죽인다는 나치의 만행을 아는 이들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서도 자리를 지켜 이들을 계속 포위하기 위해 독일군의 발이 묶인 사례도 있다. 어떻게 보아도, 칼질이나 하려고 뛰어가다가 몰살당하는 반자이 돌격과는 격이 다르다.[32]
본격적으로 방어에 나섰던 전투 중 하나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선 화력 열세를 돌격으로 극복한 모범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소련군에겐 화력지원이 없으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었고, 이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군이 대규모 공세를 시도하면 카츄사 로켓을 퍼부어 출격도 못하게 막았으며, 장사포를 잽싸게 볼가강 너머에 안전하게 배치하고 보병의 요청에 맞춰 꾸준히 포격 지원을 해 주었다. 보병들은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 바로 건너편의 건물까지 돌격해 양 군의 거리가 10m도 안 되었다. 그 때문에 큰 골칫거리였던 독일 공군의 폭격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를 지속하기 위해 볼가강 도하 지점을 사수해 냈다. 근접전은 노련한 병사들을 20~30명 규모의 습격조[33] 로 편성해 기관단총과 대검, 야삽, 다수의 수류탄으로 무장시키고 필요에 따라 브리칭을 위한 폭약, 경야포, 실내전을 위한 화염방사기, 대전차 소총, T-34를 추가로 지원해 줘 돌격시키거나 몰래 우회하여 독일군이 점령한 중요 건물들을 브리칭 후 쓸어버렸다. 아직 평지전이 대세였던 WW2에서 시가전을 선보인 것 이다.
독소전 중, 후반기 소련이 공세로 돌아선 후엔 병과 간, 제대 간 연계를 치밀하게 설계한 후 돌격했다. 보병 중대마다 우라돌격을 지원하기 위해 PPSh-41로만 무장한 기관단총 소대는 그 효과를 입증해 여전히 존재했다. 작전 수행 이전에 공병을 동원해 조용히 철조망, 지뢰 등의 장애물을 치운 후, 포격이나 공군의 폭격, 또는 모두가 미리 관측한 화기 진지들, 특히 대전차 진지에 집중적으로 화력을 퍼붓고, 습격조들이 남은 적의 주요 화기 진지들을 급습해[34] 무력화한 뒤, 기계화한 병력이 돌격해 방어선을 벗겨내 돌파구를 만들면 이 곳으로 전차 사단들이 종심 깊숙이 쭉쭉 침투하는 소련의 우라돌격은 독일군에게 극심한 피해를 줬다. 당연히 반자이 돌격과 비교도 안 된다.
이러한 무기가 나오기 전인 전열보병 시대에도 기병 전투나 함상 전투 등에서는 권총이 있다면 그것부터 쏘고 냉병기를 쓰거나, 쓴 권총을 둔기처럼 휘두르거나 해서 최대한 화력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백병전을 펼쳤다. 이 시절에도 근접 화력 확보를 위해 권총을 여러 자루 들고 다니거나 페퍼박스 리볼버나 덕 풋 피스톨 같은 다발 화기도 운용했다.
당장 이게 잘 묘사된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를 조금만 해 보면 안다. 반자이 돌격은 미군 측에서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와 짜증만 날 뿐 결국 막강한 미군의 화력에 쌈싸먹히는게 일상이지만,[35] 소련의 경우 우라돌격을 해도 자연석, 자연목, 포탄 구덩이, 잔해 등등의 엄폐물 사이로 은엄폐를 반복하며 거리를 좁히고 수류탄, 화염병, 파파샤, T-34등 있는거 없는거 다 동원해가면서 어떻게든 독일군을 밀어붙인다.
5. 실전에서의 반자이 돌격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 러시아 제국군, 소련군, 미군, 영연방군과 네덜란드군과 미군의 태평양 전선의 ABCD 연합군이건, 중화민국군이건 간에 언제나 자살 공격을 하기 시작한다.[36] 그리고 결과도 이긴 것 치고는 어째 뒷맛이 찝찝한 경우도 있었다.[37] 결국 태평양 전쟁이 중반에 접어들 때쯤이면 야음을 틈타서 공격을 했지만 낮에 돌격하다가 미군의 우수한 화력에 밀려 도무지 가망이 없어보이니까 야간작전에 매달린 것 뿐이다. 근데 문제는 한밤중에 조용히 진입해서 소탕하기는 커녕 대놓고 저 멀리서부터 '''천황폐하 만세!!!!'''를 목터지라 외쳐대며 접근했기에 오십보백보, 아니 그냥 효과없음 수준이다.[38] 게다가 이 때는 미군, 영연방군도 일본군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탓에 조명탄+기관총의 십자포화[39] 등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5.1. 성공한 경우
청일전쟁~중일전쟁 초기까지의 청나라 군대와 중국군에게는 이게 아주 잘 통했다. 아무나 용병으로 모아서 쓰던 청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무참히 패배했는데, 청조 붕괴 이후 상황이 더욱 막장으로 치달은 1930년대의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에게 더욱 상대가 되지 않았다.총검만 들고 돌격하면 중국군은 도망갑니다. 아니, '''도망쳐준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도망가버리는 겁니다.
- NHK다큐멘터리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고' 과달카날 편 -
당시의 중화민국군이란 것은 사관학교, 부사관학교, 육군훈련소를 통해 양성된 정규 군인이 아니라, 장교라고 해본들 전체 중국군의 '75%가 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니 나름대로 훈련을 받고, 엄격한 규율을 유지한 일본군이 칼 빼들고 '반자이!' 돌진하면 겁먹고 알아서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장작림(장쭤린)-장학량(장쉐량) 부자가 지배하던 만주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가장 공업화가 잘된 곳이었고 상태가 좀 멀쩡한 곳이었지만 일본군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장학량(장쉐량)의 소극적 대응 때문에 앉아서 망했고, 이후 기찰정무위원장 쑹저위안을 비롯한 많은 군벌이 이런 이기적이고 소극적 태도로 자멸했다. 그도 아니면 산동 군벌 한푸쥐나 광동 군벌 위한머우처럼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거나 옌시산처럼 자기 영지에 틀어박혀서 단독 협상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허수아비 같은 오합지졸을 상대로 계속 이겨대던 일본군은 당연히 반자이 돌격에 재미가 들려서 청일전쟁 이후로 30년간 지겹도록 써먹었다. 그리고 당시의 중국군은 청조가 멸망하고 난 후로, 지역 군벌들이 날뛰던 때이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군대로 보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태평양 전쟁의 초기에는 본진에 신경 쓰느라 '조그만 섬나라 황인종쯤이야'라는 생각을 가졌고, 최소한의 장비만 갖췄을 만큼 준비가 부실했던 동남아시아의 미군 및 네덜란드군, 영연방 식민지군들을 쉽게 이기며 정신력으로 귀축영미를 처단하는 무적 황군의 기분을 '''잠시나마''' 만끽했다. 그러니까 후방 부대나 치안 유지용 준군사 조직, 식민지군 상대로 정예부대를 투입해서 이겨 놓고는 '오오 우리 진짜 좀 쩌는 듯 ㅋ' 하며 정신승리를 한 셈.
여기까지는 사기가 낮고 훈련도가 낮은 오합지졸 적군을 상대할 때 번뜩이는 총검은 그대로 적군에게 멘탈붕괴를 준다는 연구 결과를 증명하는 사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사기도 충천하며, 보급도 잘 되고, 훈련도 잘 받은 데다가, 병력까지 많은 군대를 상대한 결과이다.
5.2. 실패한 경우
중화민국군 상대로 반자이 돌격이 잘 통하던 것도 중일전쟁 극초반까지고 당장 전선이 상하이로 확대되면서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신으로 매도되는 군벌군이지만 광서군벌의 리쭝런, 바이충시 등 능력 괜찮은 군벌들이 지휘하던 군벌군은 우수한 전과를 자랑했고 일본의 오랜 침략과 만행으로 중국 전체도 반일감정으로 투철한 정신무장을 한 상태였다. 더욱이 장제스가 애지중지 키운 독일식 사단의 전투력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독일식 훈련을 받고 독일식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 직속 독일식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은 개인무장으론 일본군보다 나았다. 게다가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의 독일 나치스 정권 고문들을 초빙하여 군대를 강화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고 일본군이 공격 대상으로 삼은 상하이는 그런 장제스의 국토수호 노력의 결정체였다.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지뢰밭, 철조망, 토치카, 참호, 체코제 경기관총 등으로 촘촘히 중무장된 우쑹 해안에 자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도와 총검을 들고 상륙했던 일본군들은 삽시간에 십자포화 앞에서 도륙났고 상륙 3주 후에는 상륙부대의 96%가 전투불능이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상하이로 이어지는 뻘밭들을 자신들의 피로 메워가면서 처절하게 전진해야 했다. 상하이 전투 자체는 중국군 중에 어느 누구도 80만 대군을 한꺼번에 지휘해본 적 없다는 지휘 능력의 부재로 인해 결국 일본군이 이기긴 했으나 일본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3차례나 증원군을 파병해야 했다. 흔히 손쉽게 함락됐다는 난징도 중국군은 처절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을 상대로 많은 피해를 입혔다. 또한 일본은 창사 공략전을 세 차례나 실패했고 타이얼좡, 짜오양, 쉬저우에서는 중국군에게 참패하기도 했다. 중국 전선에서 무모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할 때까지 돌격하다 중국군이 미리 짜놓은 팔(八)자 포위망에 걸려들어 고전하거나 엄청난 출혈을 강요받고 도로 후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때마다 전황을 뒤집어준 것은 반자이 돌격이 아닌 일본군의 항공기, 군함, 독가스였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고 역습한 연합군, 특히 미군과 영연방군과의 대결에서는 대부분 접근은 커녕 적 보병 얼굴도 보기 전에 우세한 화력에 태반이 쓸려나가고 그 다음에는 오히려 일본군이 멘탈붕괴하여 도망가서 어떻게 손써보지도 못하며 대부분 전멸했다.
그래도 가끔은 제한적으로 성과를 거둘 때는 있었다. 개전 초기 미군과 네덜란드군, 영연방군의 상식으로는 소총, 기관총, 기관단총, 권총을 내버려두고 난데없이 "반자이!"라 외치며 닥돌해서 벌이는 백병전은 상상도 못할 짓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어, 어어 저새끼들 뭐야? 왜 저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난 뭘 해야 하지? 난 누구? 여긴 어디?' 등의 반응을 보이며 패닉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본군이 야간에 갑자기 반자이 돌격을 해오면 미군, 네덜란드군, 영연방군은 자신들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되는 상황에 얼이 빠진 데다 시야도 확보하기 힘들어서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리사카 같은 근대식 총기도 일본군에게 얼마든지 있었다. 일본군도 돌격하는 보병을 지원하기 위한 화기들이 존재했는데, 경기관총이나 보병포, 척탄통 등은 그때를 위한 무기들이었다. 하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고, 교전비는 엉망진창이였으며, 순식간에 수복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착검돌격이 중국 전선에서 잘 먹힌 가장 큰 원인은 다름아닌 교착화된 전선을 돌파할 수단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적던 시기였으니만큼,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 비해서 무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군과의 교전에서 고전하게 되면 그 즉시 독가스를 활용한 화학 공격을 개시하거나 기갑장비를 동원했다. 1차대전 이후로 화학탄 사용이 금기시되었고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보복이 두려워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국의 경우 일본이 아무리 화학 공격을 해대도 자체적으로 화학탄을 활용한 반격을 할 능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화민국 또한 화학공장에서 독가스와 방독면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같은 화학무기로 대응하는 것이 가능하긴 했고, 실제로도 중일전쟁 당시 여러 번 사용했었다'''.
다만 이는 전선이 화북과 상하이에 국한되었던 극초반의 일이고, 그 이후 전쟁 전반에 걸쳐 중국이 화학 공격을 시도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전체적인 산업 능력의 열세로 인해 방독면은 물론이고 소총도 딸랑딸랑하는 상황에서 화학 공격을 했다가 일본이 이를 빌미로 대규모 독가스 보복을 시도할 경우 이에 제대로 대응하거나 보복하는 것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쟁 초반 이후로 화학공장을 포함한 주요 공업 지대인 동부 해안이 일본군에 넘어가버리자, 중화민국은 화학무기로 대응하는 대신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규탄하여 외교적 우위를 점하고 열강의 지원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다만 그 이후로도 윈난성 안닝시에 위치한 주요 포탄 생산 공장인 제21병공창을 중심으로 백린탄과 화학제를, 쓰촨성 루현시의 제23병공창과 구이저우성 쭌이시의 제42병공창에서는 방독면을 지속적으로 생산했다. #
대전차전 능력도 매우 부실했으므로 일본군이 2~30년대 기준으로 제작한 기갑장비로도 전선 돌파가 충분히 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시 보병을 지원해야 할 기갑부대 역시 이 시대 수준에서 끝났다. 이것이 훗날 일본군이 진짜 강력한 상대와 교전시 교환비가 커지는 원인이 된다. 소련이나 독일 등 타 국가들은 돌격시 기관총이나 화포를 활용한 지원도 지원이지만 진짜 전선 돌파용 무기인 기갑장비가 충실했던 반면, 일본은 중국에서나 충실한 장비가 주어진 상태였다. 여기에 정신력 교리까지 합쳐져서 그야말로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 된 것이다.
즉, 일본군은 전선 돌파용으로 독가스와 기갑장비를 사용했지만 독가스의 경우, 미국은 충분히 화학전을 벌일 능력이 되므로 서로에게 지옥이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대미전에서는 사용하지 못했고[41] , 기갑장비의 경우 현실에 안주하느라 2~30년대 수준에서 멈췄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게 그냥 알보병의 돌격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화포와 기관총을 이용해서 제압하자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화포나 기관총은 어느 나라나 있었지만 결국 전선 돌파용으로 전차가 만들어졌듯이 총포만으로 진지를 구축한 적을 격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거기다가 백병전 상황을 굳이 강요하려면 소총보다는 기관단총이나 산탄총, 하다못해 단축형 소총 등 근접전에서 유용한 무기를 잘 활용해서 피해나마 최대한 더 늘리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군은 그런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건 일본군이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이 핀란드군의 수오미에 당했던 것처럼 근접전에서 피본 상황을 겪은 적도 별로 없고[42] , 1차대전 당시 참호전을 직접적으로 겪거나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칭다오 공략전의 경우 사실상 완전한 화력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톰슨 기관단총, M1911, 산탄총 등 근접전에서 아주 유용한 무기들을 훌륭하게 써먹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환상적으로 박살나면서 일본군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해서 대전 후반쯤 가면 100식 기관단총을 보급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것도 공정부대나 해군 육전대 등, 특정 부대 한정이라는 게 대다수였다는 것. 남방작전 당시의 일본군의 기관단총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의 팔렘방 유전을 방어하는 네덜란드군을 공략하기 위해서 공수작전을 펼쳤는데, 100식 기관단총의 보급이 딸리는 관계로 팔렘방 전투 이전에 격파한 연합군에게서 노획한 톰슨 기관단총을 지급하거나, 심지어는 권총 한 자루 주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당시 네덜란드군의 무장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수작전 자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중 공수부대가 들이닥쳤기 때문에 성과는 분명 거뒀지만, 일본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어떻게든 '''그나마''' 미군에게 피해를 준 대전 말기 반자이 돌격을 굳이 찾아보자면 사이판 전투의 1944년 7월 6일에 벌어졌던 습격(The Raid)를 찾을 수 있다. 당시 3000여명 가량의 대규모 일본군 부대가 최후의 옥쇄 돌격을 시행했고 미군의 허술했던 방어와 경계를 뚫고 '''나름대로''' 미군에게 꽤 큰 피해를 입혔었다. 영상에서는 날이 밝았을 때 옥쇄 돌격을 한 걸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새벽에 습격이 벌어졌다. 다만 이 그나마 성공한 습격에서도 일본군은 3000명 전원이 사망한 반면 미군의 사망자는 500명 가량으로 교환비는 6:1, 다만 3000여명의 일본군에 맞선 것이 미군 2~3개 대대 뿐이였던 데다가 영상에서도 체험할 수 있듯 파리 떼마냥 몰려오는 일본군의 돌격에 당시 미군들의 심리적 충격이 엄청났다고 한다.
'성과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이에 고무된 상부에서 '''더욱 권장'''했고, '성과가 없다'면 ''''지난번엔 실패했으니 이번엔 애들이 바짝 정신차려서 제대로 하겠지''''하는 마인드로 너그럽게 넘기며 또 돌격을 지시하는 패턴의 무한반복, 전쟁이 중후반으로 접어들면 일선 병사들은 보급이 모자랐고 영양상태도 아주 나빴는데 이렇게 굶어죽을 바에는 쟤랑 함께 죽자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제히 "반자이!"를 외치며 기합을 넣고 총검, 군도를 앞세워 돌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달하고 피로가 극에 달해 지친 상태였으니 아무리 기합을 넣고 백병전을 시도해도 미군을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일본군이 아리사카를 들고 근대식 총검술로 덤비면 미군은 권총, 산탄총, 기관단총, 화염방사기 등의 다양한 화기와 역시 냉병기인 마체테와 블랙잭[43]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가며 맞섰으며[44] , 남북전쟁이나 의화단 운동, 그리고 치열한 참호전이었던 1차대전을 통해 지독하고 처참한 백병전을 하도 겪다 보니 잘 정립된 현대식 총검술과 나이프 파이팅은 물론이고 권투, 레슬링, 그 외 더럽지만 매우 효율적인 싸움법들을 정식으로 교육했다. 당시 교육필름에서는 낭심 차기, 촛대 까기, 군화 뒷굽으로 발등 찍기, 엄지로 눈 후벼파기 등 이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전술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며,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병사들을 위해 ''''가장 훌륭한 병사는 살아서 계속 적을 죽이는 병사''''임을 수차례 강조한다.
실제영상
해병대가 아닌 육군의 1943년 교육필름이지만, 백병전은 그냥 막싸움이나 다름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적을 죽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분 50초대를 보면 적에게 총검으로 덤비다가 권총에 역습당해 쓰러지는 걸 보여주며 총이 필요할 때는 총을 쓰라고 말하기도 한다.
게다가 상대 중 하나가 미 해병대다.[45] 미 해병대는 육군에서 없어지기 시작한 총검술을 지금까지 교육하고 있으며 기관단총, 권총, 컴뱃 나이프와 맨손격투를 결합한 근접전투술을 가장 중요시하는 군대로서 심지어 원거리 무기인 저격총에도 총검장착을 하기도 한다.[46] 덤으로 깡다구 있는 대공황 세대라 기본적인 주먹질은 할 줄 알던 경우가 많아 가르친 걸 흡수도, 활용도 잘 했으며 병사간의 교육도 활발했다. 이러니 어떻게든 운 억세게 좋게 총알 한 발 안맞고 자기들이 상상했던 대로 맞붙어도 이지선다 뿐이기에 다지선다로 솜씨좋게 덤벼오는 미군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미해병대는 이미 의화단 사건 이후 격투술과 총검술을 다듬고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은 전술적으로는 거의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일선의 미군들이 비상식적인 돌격을 되풀이한 일본군에게 적개심과 공포심을 품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47] 문제는 이 때문에 일본군의 광기를 두려워한 미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바람대로 반자이! 한 마디만 들어도 떨어서 사기를 잃기는커녕 반대로 "야아, 저 개새끼들 또 온다. 저놈들 놔두면 다음엔 또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며 더욱 더 확실하게 일본군을 쓸어버렸다.[48]
이런 일본군의 공격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미군이 똑같은 마인드로 '너 죽고 나 죽자'며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과달카날 전투에서 반자이 돌격을 본딴 육박전 공격을 펼친 적이 있었는데, 매번 착검 돌격을 구사해서 본인들도 돌격질에 철저하게 대비할 줄 알았던 일본군은 미군의 '''제대로 된 착검돌격+빵빵한 M2 기관총, M1919, BAR과 화염방사기 크리티컬'''에 싹 전멸했다. 상기된 미군과 일본의 차이가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는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일본군과는 달리 적이 가장 취약할 새벽대를 노렸고, 일본군은 미 해병대가 이런 작전을 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피골이 상접해서 제대로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1943년 11월의 타라와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일본군 병사들이 좌초한 수송선 잔해에 숨어서 공격을 퍼붓자 미 해병대 1개 소대가 '''폭탄을 몸에 묶고 뛰어들어''' 수송선을 부순 적도 있었다. 결국 이 병력은 거의 전원 전사했다. 이에 대한 일설에 의하면, 일본군은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미군은 겁이 많아서 오직 원거리 사격만 한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정작 미군들이 닥돌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한다.
소련군도 독소전쟁 초기엔 대숙청으로 일본군처럼 전술의 격차를 무지막지한 인력으로 메웠고 큰 인명 피해를 봐야 했다. 다행히 미국이나, 영국 등 다른 연합국이 독일의 한쪽 팔을 잡아주던 형국이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나마 사람 보는 눈은 좀 있고, 부족하더라도 최소한의 상식은 있어 빠르게 숙청된 장교들을 복직시키고, 게오르기 주코프 등 능력 있는 지휘관을 적절히 기용하며 지휘관들의 의견도 그럭저럭 잘 들어줬다.[49] 일본군이 황당한 아집을 부하 탓만 돌리며 밀어붙인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들어진 우수한 무기와 개선된 전략전술로 '''질이 뒷받침되는''' 숫적 우세를 앞세워서 독일군을 쓰나미 앞의 조각배 신세로 만들었으나, '''일본군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소련군처럼 소모전을 반면교사로 삼지도 않았고,[50] 우수한 무기도 없었으며, 전략전술을 개선할 생각조차 없었으니 그냥 답이 없다.
이건 영국군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독일하고 전쟁 때문에 영국 본토 신경쓰느라 식민지 군대를 지원하기 힘들어서 밀렸지(그나마도 대부분은 영국군의 자멸...), 전쟁 후반부에도 일본군 최정예를 2선급 부대로 맞서는데도 화력부터 열세인 데다가 '''마틸다 전차가 쓰러지지 않아'''서 밀리고[51] , 간신히 육박전을 벌일 거리까지 다가와도 이를 대비해 '''전투종족인 구르카를 세워놨다.'''
전쟁 최후반부라서 별로 부각은 안 되지만 소련군을 상대할 때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때는 일본치고 이례적인 대형 요새포들이 포격지원을 해 주긴 했으나, 각각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엄청난 병력과 T-34, IS-3 러쉬 앞에서 일본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나갔다.
김영옥이 지휘했던 일본계 2세로 구성된 '''미군 부대''' 제442보병연대 제100보병대대(442nd Infantry Regiment, 100th Infantry Battalion)는 유럽 전선에서 문자 그대로의 반자이 돌격을 건 경우가 있다. 프랑스 비퐁텐(Biffontaine)에서 당시 소대장이었던 김영옥이 수류탄을 들고 독일군 기관총좌에 돌격하다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이에 분노한 소대원들이 '''진짜로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 독일군 기관총좌를 박살냈다.''' 다행히 김영옥은 가벼운 부상만 입은 덕분에 쓰러진 자리에서 수류탄을 까넣으며 부하들의 돌격을 지원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 한동안 100대대는 ''''야, 우리 쪽에 일본애들만 모인 부대 있지? 걔들이 나치한테 반자이 차지 해서 이겼대! 역시 잽스는 좀 다른 듯''''이라며 유럽의 미군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해졌다. 이 돌격은 유럽 전선에서 실행된 '''유일한 반자이 돌격'''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김영옥과 그의 상관이 100대대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던 중 독일군 기관총좌가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자 상관이 무턱대고 착검돌격을 지시했고, 결국 대원들이 공격한 물체는 나무 울타리에 불과했다고. 분명 김영옥의 회고록에도 적혀 있다.
김영옥이 수류탄을 들고 돌격하던 걸 보고 울컥했다는 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며, 정확히 말하자면 돌격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 판단한 김영옥이 혼자 몰래 기어가 수류탄을 까 넣은 것이다. 기관총 진지를 교란시키고 그 사이에 적은 인원이 기어가 수류탄을 까넣는 건 1차대전 초기는 물론 이전에도 있었던 상식적으로 누구나 시도할 전술이다. 일본계 미군의 유럽에서의 첫 총검 돌격이라 대서특필하여 군과 민간의 사기진작을 목적으로 미국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한 것이고, 실제로 효과도 있긴 했지만 돌격 자체는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었다.
6. 일본군의 문제점
6.1. 병력과 보급의 부족
같아보이지만 전혀 다른 소련의 우라돌격은 1, 2제대가 돌파구를 마련한 후에 약점에 집중적으로 전차사단을 투입해 돌파구를 벌리고 종심까지 위협, 격파까지 목표로 하는 체계적이고 현대적인 작전이었다. 즉, 우라돌격은 최대한 많은 병력이 전투력을 보존한 채 적 진지를 타격할 수 있도록 각종 화력지원을 동원하고 보병 위주의 돌격으로 시작해서 침투한 보병들에 의해 방어선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점차 기계화 비율을 높여가다 막바지엔 전차사단의 돌격이 이어지는 형태다. 그리고 소련군은 기본적으로 완전한 침묵 속에서 기도비닉을 유지한 채 적진에 최대한 접근하여 적 화력을 뒤집어 쓰며 돌격해야 하는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고자 애썼다. 대놓고 소리부터 치고 돌격하는 반자이 돌격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이다.
게다가 대전 초기 개판인 상황에서도 항공기, 곡사포, 전차, 경야포 등 중에서 1개 이상의 지원을 받거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양쪽 모두 보병끼리만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나왔다. 아닌 상황에서는 전차나 지상공격기 등의 지원이 오길 기다렸지, 병사들한테 의미없이 나가 죽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서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은 지속적인 병력 지원도 화력 지원도 없으면서 '''단숨에 전원이 시끄럽게 몰려나가 공격하는 무식한 방식'''이다. 게다가 전장은 일본군은 병력지원이 적던 섬 전투라서 병력 충원도 못했다. 병력 충원은 커녕 일반적인 보급로도 끊겨 보급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었다.
6.2. 병과 간 화력지원 전무
일본도 초기의 반자이 돌격에는 '''그나마 개념이 있어서''' 돌격시 기관총 엄호가 반드시 따랐다. 전술훈련 간 분대 이동시 기관총 사수 등의 엄호 사격을 통해 분대의 생존력을 높이려고 하는 시도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도 그나마 물자보급이 정상적이었던 처음이나 통하던 이야기였다.
태평양 전쟁 중반까지만 가도 넘사벽으로 나오는 미군의 물량에 일본군은 버거워했다. 그리고 질적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데다, 화력지원만 빼놓고 봐도 일본군과 미군은 차이가 확연히 났다.
6.3. 불합리한 명령
무능한 군인이 계급만 믿고 까라면 까로 밀어붙일 때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같은 추축국이던 독일군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대판 싸워서 작전을 수정하거나 취소시키는 경우가 있었으며, 설령 그 명령이 관철되더라도 임무형 지휘체계를 이용해 현장에서 영 불가능하다 판단되면 재량권으로 요식행위로 좀 하다 말거나 자의적으로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52] 특히 전쟁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베를린 사령부도 맛이 가기 시작하여 전선에서 야전 지휘관들이 죽자사자 싸우는 동안 히틀러와 그 측근들은 거짓 보고와 망상, 자기합리화에 근거한 상상 속의 전쟁을 하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명령[53] 을 쏟아냈기에 명령을 따를 래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독일과는 달리, '''일본군은 명령 불복종은 하기 힘든 구조였다.'''[54]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복종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윗대가리 덕분에 죽어나간 병사들이 불쌍할 정도다. 과거부터 일본군 특성상 명령에 의존하는 구조이다. 실제로 타지에서 소식이나 무전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항복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동남아시아에서 항복소식을 받지 못해서 1948년 정도까지 싸운 일본군도 있다.
결국 이 정신나간 지휘 체계는 반자이 돌격에도 적용되었다. 휘하 장병들의 생존률을 결정하는건 장교와 장군들이라는 건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돌격 개념이 전쟁이 가면 갈수록 점점 비정상으로 바뀌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는 '''장교나 장군들의 교육과정이 정신교육을 중시하고 전근대적인 공격 일변도 전투교리를 가르치는 등 제대로 된 게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 전쟁 초에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친 장교들이 전사하거나 해임되고 전쟁 중~후반에 저따위 교리를 몸에 익힌 장교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전체적인 장교의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 이런 장교들 밑에 있던 병사들은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게 되었고, 이게 이어지다보니 결국엔 총소리만 나면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다같이 반쯤 멘탈붕괴한 상태에서 반자이 돌격을 하게 된다.
반자이 돌격의 효율은 결국 장교의 질적 문제와 연관 있다는걸 보여주는 부분이, 전쟁 중-후반에도 살아남은 일본군 장교 일부는 반자이 돌격이 비효율적인 전술이라는 걸 알고 자제 시키거나, 기존 방식을 폐기하고 굉장히 효율적으로 쓰기도 했다. 결국 패배하는건 똑같지만, 일본군의 전투력이 평소보다 급상승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전투는 이오지마 전투로, 사령관이 직접 반자이 돌격을 금지시켰을 뿐인데 이전과 달리 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이 전투와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56]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러한 엄청나게 빡신 규정이 항상 일관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장교끼리 같은 파벌에 속한 경우에는 도리어 지휘 체계가 엉망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 중일전쟁 당시 위관급이나 영관급밖에 안 되는 장교들이 독단적으로 공세를 시전한 예시가 넘쳐난다.[57] 말도 안 되는 부당한 명령에는 항의할 수도 있지만, 정당한 명령이라면 복종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일본군은 정 반대로 실행했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저렇게 상부의 명령도 없이 독단적으로 공세를 감행한 이상 결과가 어찌되던 간에 강력한 징계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나, 당시 일본의 장교진은 같은 파벌에 속한 사람끼리는 저런 막장짓을 하고도 좋게좋게 다 넘어가 줬다.
6.4. 기관단총 부족과 특별한 전략도 없는 근접전
근대전에는 상대편의 화력이 이쪽보다 우월할 때 근접하여 돌격해 백병전에 돌입하여 병사들끼리 서로 뒤엉킨 혼란스러운 난전으로 몰고 가서 화력을 배제한 싸움을 유도하였다.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한 척탄병이라는 병과가 생기기도 하였다.
현대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차대전의 경우 탱크의 등장 전까진 적의 방어선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돌격하여 접근한 뒤 일시에 다같이 참호에 뛰어들어가 적을 밀어내는 것 뿐이었는데 매우 좁아터진 참호속에선 백병전은 필수였고 야삽, 몽둥이, 총검, 손도끼와 같은 냉병기는 유용한 무기였다. 하지만 이 때에도 이미 기관단총과 산탄총을 지급받은 정예 돌격병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58]
현대전에선 이러한 양상이 더더욱 심해진다. 보병화기만 보더라도 훨씬 발전된 경기관총과 기관단총과 같은 근접화기들이 잔뜩 보급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전같은 대규모 돌격을 하면 눈 깜짝할 사이 모조리 쓸려나갔다. 때문에 근접전에선 서로 근접화기로 싸웠으며 백병전에서도 총검은 보조 수단일 뿐이고 화기 위주로 싸웠다.[59] 물론 그렇다고 단검이나 총검을 아예 안쓴 건 아니지만, 이건 '최후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사실, 반자이 돌격과 우라돌격을 비교할 때 주로 전술 다르다고 비교하지만, 최종적으로 양국의 보병 화기가 결정적인 차이다. 이런 저런 지원이 있어봐야 결국 최후에 깃발을 꽂는 건 보병이다. 당시 소련은 71발 기관단총을 대량생산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5발 볼트액션 소총 생산에만 집중했다.
즉 반자이 돌격은 냅다 칼달린 소총만 들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하면서 달려들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미군이 화기를 못 쓸 만큼 달라붙으면 화력차가 좀 줄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위의 '화력의 차이를 줄인다'는 개념은 일본군과 미군의 비교를 보면 나오듯이 곡사화기의 장거리 지원화력의 차이가 너무나 커 일반적인 교전으로는 답이 안 나오니, 바짝 다가가서 소화기로 맞서겠다는 발상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댑따 긴 칼만 붙인 볼트액션 소총만 들고 다녔지만 이에 맞선 미군의 경우, 육군은 거의 처음부터 8연발 반자동 소총을 들고 나왔고, 그나마 해병대가 스프링필드 M1903 볼트액션 소총을 초반에 좀 쓰긴 했지만 전쟁 중반에 들어서자 해병대도 개런드를 들고 나왔다. 여기에 소총이 필요없는 거리까지 접근해서 백병전을 벌인다면 기본적으로 연사력이 높은 기관단총이나 근접전에서 효율이 높은 산탄총 아니면 권총이 필요한데, 미군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췄던 반면[60] , 일본군 수뇌부는 오로지 소총과 총검에만 목을 매었다. 물론, 일본군이 막장성 높은 지휘와 특유의 화력 부족과 보급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서 그렇지 이 부분이 해소된 상태면 연합군은 평소보다 피해가 증가했다. 수뇌부보다도 반자이 돌격 전술을 재설계에 가까운 개량으로 굉장히 효율적으로 쓰던 일본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기관단총과 산탄총이 제대로 있었다면 미군도 근거리 난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봤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일본군 측에서도 100식 기관단총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한심한 보급 능력과 산업 역량 때문에 소련군의 PPSh-41나 독일군의 MP40, 영국군의 스텐 기관단총, 미군의 톰슨 기관단총 처럼 널리 퍼지지 못한데다 외국에서 쓸만한 근접전용 화기를 대량 수입 또는 복제한 것도 아니라서 망했다.
이 기관단총 문제는 태평양 전쟁을 다룬 게임에서는 난이도 또는 진영 간 밸런스 조절을 위해서 일본군에게 100식 기관단총을 꽤 많이 들려주기도 하는데, 사람이든 컴퓨터든 이렇게 100식을 든 일본군 다수가 뭉쳐 반자이 돌격을 시전하면 미군 플레이어들이 곤욕을 겪기도 한다.
6.5. 자돌폭뢰, 대전차 발도술
반자이 돌격의 개량형으로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돌폭뢰를 사용한 대전차 돌격술이 있었다. 이게 뭔가 하면 죽창 끝에다 성형작약탄을 묶어 적 탱크에 돌격하는 일본군 '최고'의 대전차 전술이었다. 97식 전차를 위시한 일본의 전차들이 화력과 장갑이 매우 부실해서 대전차 전투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자 나온 방법. 관통력은 꽤 높았기에 셔먼 같은 중형전차들은 어느 정도 관통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가가기도 전에 미군 전차의 기관총 세례로 대부분이 전멸했고, 미군 전차의 공격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한들 전차 근처의 보병들의 살인적인 화력 앞에 갈려나갔다. 즉, 성공만 한다면 적 전차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성공할 확률은 굉장히 낮았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99식 파갑폭뢰를 품에 안고 길바닥에 누워 전차가 그 위를 지나가면 터뜨려 버리는 자폭전술 '복룡' 이 있다. 미군은 이에 맞서 M4 셔먼에 불도저를 달아 자폭하려는 일본군을 그대로 밀어 버려 생매장 해 버렸다. 말기에는 1식 투환관이라고 해서 청산가리 가스를 넣은 유리병을 전차의 관측창을 향해 던지는[61] 말도 안 되는 무기를 제식 병기로 채용한다. 자매품으로 1식 화학 수류탄이 있으나, 이것 역시 말만 수류탄이지 그냥 청산가리 넣은 병이다.
심지어 무타구치 렌야의 삽질 임팔 작전에선 '''대전차 발도술'''도 나온다. 갑자기 일본군 장교가 칼을 들며 뛰어올라, 머리를 내밀던 전차장을 죽이고 전차 안에서도 칼을 휘두르려다 조종수가 권총으로 사살한 것이다. 말기에는 그냥 정면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기까지... 물론 미군 전차병들에겐 곧 궤도에 끼일 고깃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6.6. 맛이 간 교리와 정신 상태
일본군의 작전 교리 교범인 '보병교전'이라는 책에서는 '기습적인 육박전만이 최고' 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건 상기했듯 대부분의 강대국들이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절대적인 진리인 줄 알았다가 '''11km 전진에 사상자 60만''' 같은 참극을 겪고 나서 즉각 내다버린 교리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이걸 외로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밀고 나갔다. 또한, 이 책을 거쳐서 ''''포로 따위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라''''라는 의식을 널리, 강하게 퍼뜨렸다.
6.7. 화력덕후 미군
이런 미친 짓을 하고도 열악한 일본군과는 달리 미군의 무장 상태가 매우 뛰어나서 별 성과가 없었다는 분석이 있다. 미 해병대는 주 무장으로 톰슨 기관단총, 반 자동 소총 M1 개런드와[62] M1 카빈[63] , M1918 브라우닝이 지급되었으며 수류탄은 1인당 두 개[64] 씩 지급받았으며, 방어진지엔 상자째로 준비해놨다. 지원화기도 충실해 M2 브라우닝 중기관총(50구경)과 M1917 브라우닝 수랭식 기관총(30구경), M1919 브라우닝 경기관총이 배치되었으며, 박격포도 수와 탄 보급량이 월등했다. 미군답게 산탄총도 상당히 보급되어 근접전과 백병전에서의 효용성을 또다시 증명했다. 장군 알렉산더 패치마저 과달카날 전투를 지휘하며 산탄총 한자루로 무장하고 다녔다. 또한 미군들은 평균 체격이 백인, 흑인답게 좋아 경기관총도 근접전에선 들고 쏘는 일이 잦았으며, 심지어 수랭식 기관총마저 혼자서 들고 쏜 사례도 있다. 따라서 볼트액션 소총이 대다수에 기관총도 별로 없는 일본군은 백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장병 개개인의 보조 무기 차이도 비참했다. 보조 무기의 꽃인 권총을 비교해 보면 미군은 109년 전 바로 이런 상황을 상정한 설계에 무수한 실전에서 검증 받아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현역으로 쓸 수 있다고 평가 받는 45구경 M1911 자동권총으로 싸웠지만, 일본군은 지랄맞은 고장과 안전 사고로 루거 권총보다 못한 괴작인 남부 권총으로 싸워야 했다. 남부 권총은 관리된 총을 모든 조건을 안전하게 통제하는 사격장에서 쏴도 위험한 물건이라는 평을 받는 물건인데, 그런 걸 사격장은 고사하고 같은 전쟁터인 대서양 전선과 비교해서도 훨씬 가혹한 환경이었던 남태평양의 열대우림에서 써야 했던 것이다. '''물론 보급 수량과 보급률의 차이는 따질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신뢰성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운동 에너지면에서도 M1911A1에 쓰는 .45 ACP(US Army Ball FMJ)의 운동 에너지는 약 477J인데, 남부 권총이 사용하는 8mm탄의 운동 에너지는 약 274J로 45구경의 운동에너지에서 절반 정도 수준이다. 물론 대인저지력에 있어서 운동에너지가 다는 아니고 구경이나 탄자 무게 같은 다른 변수들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운동에너지가 더 높은 .45 ACP가 구경도 더 크고 탄자 무게도 더 무거웠기 때문에(...) 당연히 저지력 차이도 심했을 것이다.
보조 무기 차이는 제식 무기로 끝이 아니었다. 태평양의 미군들 중에는 개인 사제총기, 그러니까 총 좋아하는 총덕후 미국인들답게 자기가 사거나, 가족이나 이웃, 친구들이 잘 싸우고 무사히 돌아오라며 선물로 준 총까지 가진 대원들[65] 이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개인 총기들은 주로 권총이었지만, 개중에는 산탄총을 가져온 병사들도 있었다.
전차에 항공 지원, 전함 포격 지원까지 받아가며 가용 화력을 모두 몰빵해 방어한 경우는 설명할 것도 없다.
6.8. 순수한 백병전 능력 비교
설령 양측 다 탄약, 수류탄 없이 총검으로 근접전을 벌여도 '''체력/체격에서 밀려서''' 그것대로 문제였다. 복싱 등 격투 스포츠에서 괜히 체급을 나눠 경기를 치르는 게 아니다.[67] 일본군은 미군에 비해 영양 상태도 부실했고, 체격도 미군보다 훨씬 작았으며,[68] 숙련도, 전투 의지도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뼈와 살이 적나라하게 맞부딪히는 백병전에서는 필패할 수 밖에 없었다. 순수하게 무기없이 맨손 격투기만을 겨루는 백병전을 한다고 해도, 그래도 미군이 우위였다.
당시 일본군은 긴 총검에 의지한 전방 찌르기에만 올인하는 '''근대 총검술''' 만을 익힌 상태였다. 그러나 '''근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이 총검술은 빽빽하고 철저한 대오를 지키던 전열보병 시절에, 달려오는 기병대에 맞서서 머스킷 총병들이 착검을 하고 창병처럼 기병대를 격파하던 시절에 맞추어 개발된 총검술이다. 화력의 발달로 병력 밀집도가 훨씬 낮아져 매우 불규칙하고 다양한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근대총검술은 이미 도태된 지 오래였다.
군필자라면 육군훈련소 등 기초 군사교육 때 배운, 무난하게 만들어진 현대총검술인 연무형을 떠올려 보자.[69] 연무형과 같은 현대총검술의 다양한 공격법과 방어법은 이러한 이유에서 도입된 것인 데, 그럼에도 시대에 뒤떨어진 '''전방 찌르기 일변도'''의 근대총검술을 고집하는 건 오로지 일본군 뿐이었다. 반면 미군은 현대식 총검술 뿐 아니라, 간단한 킥복싱 같은 맨손 격투기 등 다양한 근접전 대응 훈련을 받았으니 훨씬 효율적으로, 일본군의 찌르기를 받아 넘기며[70] 다양한 방법으로 때려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전방 찌르기에 대응하는 연무형의 초식만 7가지이다.[71] 일본인들이 전국시대에도 이지경이진 않았다. 도리어 전국시대에는 칼을 비켜내고 밀어내며 반격하는 기술이 많았는데 다 까먹고 정신력만 강조했다.
간혹, 양산된 싸구려 군도가 아니라 사무라이 명문가 출신의 장군이나 장교가 일본 전국시대부터 쓰던, 말 그대로 진짜 전가의 보도를 들고 와서 싸우다 전사하고, 그걸 노획한 미군 병사가 나중에 횡재했다는 것을 알고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비싼 값에 팔아 치운 사례도 있다. 한 사례.
1942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해병대 대위 월터 스토퍼 매킬러니(Walter Stauffer McIlhenny)[72] 가 일본군 장교가 휘두른 칼에 철모를 맞았으나 적을 사살하고 노획한 전리품이다. 사진의 군도는 98식 전도에 약식칼집으로 패용고리와 가죽덮개는 망실된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일본 육군 토야마 학교에서 내놓은 군도 조법 교범에서도 '철모는 때리지 말라'고 실려 있다. 일본군의 기초 군사 교육이 얼마나 막장으로 진행되었는지를, 그리고 설령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해도 실전에서 이를 적용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9. 장병 개개인의 수준
당시 일본군에서는 정신주의를 너무 강조해서 '''황군의 긍지''' 운운하며 귀축영미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며 함성 한 번이면 퇴각시킬 수 있다고까지 병사들을 세뇌했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크나큰 착각'''이었으니...
6.9.1. 미군
당시 10대 후반~20대의 미군 병사들은 지옥 같았던 대공황을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세대였다. 대공황 당시를 살아간 세대는 남녀노소, 심지어 10살 남짓한 어린아이까지 단순히 먹고살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길거리나 농장, 어선 등 어디서든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자유방임주의가 최전성기를 이루던 당대 미국 사회에서는 그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영화나 소설 등에서 자주 나오는 구두닦이나 "호외요 호외!"를 외치며 신문을 파는 어린이들은 그 당시 사회상의 반영이다. 한 마디로 일본군 선전물에 흔히 나오는 "호의호식하고 살던 군기 풀린 미국놈"이란 건 그냥 일본군의 머릿속에서만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었다.
그래서 비록 다른 세대에 비해 체격적 조건은 다소 부실했을지는 몰라도, 당시의 미국 청년들은 '''미국 역사상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깡다구가 넘쳐흘렀다.''' 위의 문단에서 나온 거짓말 같은 무쌍난무는 체력 조건뿐 아니라 이런 정신적인 배경이 있어서였다. 심지어는 유럽 전선으로 간 일본계 미국인 부대도 차별받고 수용소에 갇힌 가족들을 생각하며 미국인으로 인정받겠다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당시 남녀노소 미국인들의 이런 정신적 저력은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더 나아가 종전 뒤의 황금기를 일궈낸 인적 자원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 세대는 현재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란 칭송을 들으며 전반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침체기를 겪는 현대의 미국인들이 끊임없이 다시 돌아보고, 교훈을 얻으려는 세대이다.
그리고 당시 미군은 90% 이상이 자원입대자였다. 미국인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나라 전체가 "12월 7일을 기억하라! 진주만을 기억하라!"며 복수심과 분노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73] 대학생[74] , 영화배우[75] , 야구선수[76] , 상류층 자제[77] 등 사회 각계각층의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입대했으며, 심지어는 신체조건 미달로 불합격 판정을 받은 사람도 어떻게든 일본군을 때려잡기 위해 참전하려고 노력했다.[78]
심한 경우 입대 불가 통지를 받은 청년이 낙담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을 정도.[79]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 더 퍼시픽을 비롯한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 창작물에서 멸치 같은 몸으로 어떻게든 군에 가려고 기를 쓰는 인물이 등장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장면은 당대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했다는 말이다. 심지어 집총과 폭력 행위 일체를 거부하는 종교를 가졌으면서도 입대하여 비록 집총금지원칙에 따라 살생은 하지 않았으나 대신 부상당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구조작업을 벌여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데스몬드 도스 같은 사례도 있다.[80]
물론 병역 비리를 안 저지른 건 아니었으나, 병역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은 당연히 전후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은 가고 싶어서 난리인데 사고도 아니고 비리로 안 갈 정도면 왕따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더 퍼시픽에서 자원입대가 아닌 징병으로 참전한 해병대원을 모자라는 사람으로 대우하며 마구 갈구는 장면이라든가, 군에 입대하지 '''못한'''[81] 할 뉴하우저가 거의 평생에 걸쳐 '2차대전 투수'라는 비아냥과 저평가에 시달렸다는 점[82]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징병으로라도 참전한 사람'이나, '입대를 신청했으나 미군이 오지 말라고 해서 못 갔던 사람'들에 대한 대우도 이랬을 정도였는데 병역을 대놓고 기피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의 말같지도 않은 오판과 달리 이렇게 극단적인 분위기가 형성될 정도로[83] 미국인들은 겁은 커녕 분노로 차올랐으며 전의가 충만했다.
거기에 더불어 어느 정도는 상기한대로 대공황 때문에 먹고 살기가 힘든 탓도 있었다. 즉 군대로 가면 그래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니까 가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84] 즉 어떻게 하든 죽을 운명인데 군대를 안가면 없는 일자리만 찾아 헤매 돌다가 불명예스럽게 굶어죽을 판국이지만 군대를 가면 적어도 죽기 전까진 먹을거는 충분히 먹을 수 있으면서도 살면 좋고 죽어도 명예롭게 죽을 수 있었으니 어느쪽이 더 이득일지는 안 봐도 비디오.
6.9.2. 일본군
일찍이 중일전쟁 때부터 도시에 거주하던 젊은이들은 대학에 입학하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그 이유는 대학생은 징집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징집에서 제외된 이유도 참 가관인 것이, '중요 인재'기 때문이 아니라 '군기를 흐릴 수 있는 불순분자'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전체주의와 광신으로 굴러가던 일본군은 서구식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층이 그 체제에 위험이 되는 위험 요소라고 여겼다. 이런 탓에 전쟁 초 징집 대상은 주로 농촌 출신의 저학력자였다. 군부의 의도대로 이런 저학력자들은 지식층과는 달리 군국주의적 사상 교육에 물들기 쉬웠고, 이는 해외 점령지에서 벌어진 온갖 전쟁 범죄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에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인력이 부족해지자 부랴부랴 대학생도 강제 징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생은 고등 교육을 받은 중요한 인재였으므로 타 국가에서는 징병을 연기해 주거나, 하다못해 일개 소총병 따위로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을 받도록 해서 장교로 임관시키거나 후방 기행부대로 보내 행정병으로 배치한다던가, 기술을 가르치거나, 활용하게 해서 특기병으로 쓰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일본군에선 전쟁 말기에 치닫자 이런 대학생들까지도 징집하면서 카미카제나 이런 반자이 돌격용 병사로 뽑아 총알받이 노릇을 시켰으니 정말 말 다 한 셈이다. 요즘이야 발길에 치이는 것이 대학생들이라 별 감흥이 없지만 2차 대전기에는 대학생은 지금의 석사 이상의 위상을 지닌 고학력자로서 전후 복구의 최일선에서 활약해야 할 인재들이었다. 일본군은 잠시의 생명 연장을 위해 미래를 내다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 일본보다 사정이 더욱 열악했던 중화민국도 대학생은 아예 군 입대 자체를 불허했고, 1944년 대륙타통작전 등으로 전황이 크게 악화해도 자원자 한정으로 모병했지 무작정 총알받이 노릇을 시키지 않았다.
여기서 나타나는 최대 차이점은 바로 '동기'의 유무였다. 미국인에게는 선전포고도 없이 비겁하게 미국을 공격한 일본에 대한 보복 같은, 목숨 바쳐 싸울 만한 동기가 있었다. 반면 일본은 군부와 군부에 동조하는 기업이라면 몰라도, 평범한 일본인으로서, 자기희생을 하면서까지 조국에 몸 바쳐 싸울 이유가 하등 없었다.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은 아무리 뭐라 해도 남의 일로 느껴졌고, 길어지는 전쟁 탓에 일반에서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 본국이나 국민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도 아닌데 목숨 바쳐 지킬 게 뭐가 있다고???'라는 식이었다. 아무리 전쟁 지도부가 적개심 유발 차원에서 귀축영미 타령을 해대도, 적어도 본토가 본격적으로 공격받기 시작하는 대전 말까지는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85] 예나 지금이나 조직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게 개인의 동기부여인데 그걸 무시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작 총에 새긴 국화 문양 똑바로 안 닦았다고 죽도록 패던 일본과 전쟁에는 전혀 의미 없는 유대인들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면서 석유와 화학물질을 비롯한 최우선 순위의 물자를 최전선이 아니라 학살 수용소로 돌린 독일[86] , 아예 초반부터 선전포고만 때리고 전쟁에서 이길 의지가 있었는지도 궁금한 이탈리아 등과 달리 미국은 인적 관리 또한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당장 과달카날 같은 생지옥에서 구를 만큼 구른 병사들은 휴가, 휴식 등의 보상도 확실하게 해 주었다. 격전을 치른 장병들을 미국 본토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 주거나, 하다못해 전선 후방에 있는 군 휴양 시설로 보내서 피로를 풀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당장 2차 세계 대전을 다루는 미디어 매체만 봐도 미군들은 어떤 중요한 임무나 전투가 끝난 후에는 대위, 소령 같은 중대 및 대대장이 병사들에게 쉬라고 말한다.
반면 일본군은 휴가는커녕 부대 밖으로의 외출 및 외박도 제대로 없었고, 기껏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겠다고 허용한 게 음주, 마약, 위안부 같은 썩어 빠진 짓거리였으며, 이는 효율성 측면에서도 오히려 심신을 더 피폐하게 만들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스트레스는 그 원인을 해결하거나 최소한 원인과 멀어져 휴식을 취해야 풀리는데 그걸 술, 마약, 성관계 같은 더 큰 자극으로 덮으려고만 하니 군의 사기가 좋아질 수가 없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음주, 마약, 성관계는 그 행위가 잦아질수록 몸에 부담을 준다. 이슬람교의 일화이지만 누군가가 '''"천국에서 많은 여자와 살면 오히려 힘들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니 무함마드의 대답은 "힘도 업그레이드가 된다" 이었다. 그 와중에도 고급 간부들은 부대 밖에 있는 온천이나 요릿집 등에서 마음껏 놀 수 있었다. 당장 무타구치 렌야만 봐도 작전이 끝날 때마다 허구한 날 부대 밖 유곽에나 놀러 다니는 판이었다[87] .
현대에서 말하는 똥군기 같은 일은, 사람 말하는 거 하나하나, 전투력과 전혀 무관한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 가지고 권위로 병사를 찍어 누르는 경우는 미군에서는 있더라도 '''정말 필요한 경우'''였지, 일본군처럼 군기라는 부끄러운 명목으로 일상적으로 병사를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직무 외에는 어디까지나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생지옥을 함께 헤쳐나가며, 서로 마음 깊이 신뢰하는 친구로서 다져진 미군과 비교할 때, 폭력과 억압으로 억지로 단결력을 주입한 일본군 부대의 실질적인 연대 의식, 사기, 투지 등이 높았는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그 와중에도 어떤 유명한 독립유공자같이 작전이 끝날 때마다 허구한 날 부대 밖 유곽에나 놀러 다니는 고급 간부가 있는 등 전반적으로 부대 관리가 개판이었다.
결과적으로 '시대가 깡을 길러준 인재들'이 자원입대하여 모이고, 이들을 나름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운영했던 미군과 강제 징집한 장정에게 각종 가혹 행위를 가해 억지로 똥군기를 잡았을 뿐인 일본군의 정신 상태를 대비해 본다면 당연히 미군 병사들의 정신적 우월함이 명약관화하다.
7. 결과
포로를 심문해서 알아낸 사실이 있었습니다. 항복하지 말라는 교리를 주입시킨 이유는 바로 이런 식으로 무모한 돌격을 하게 만들려는 준비였다는 점입니다. 즉, 돌격할 때 도망칠 궁리를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싸워봐야 명예만 남는 이상''',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NHK 다큐멘터리, 태평양 전쟁 <적을 모른 채, 나를 모른 채 ~과달카날> 편
반자이 돌격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는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지휘한 과달카날 전투가 있다. 하지만 역시 미군의 기관총 십자포화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군 병사들처럼 말 그대로 '''학살'''했다. 1년여 뒤 동남아시아 임팔에서는 무타구치 렌야가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다" 라는 말을 하며 아군을 아사시켰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끝까지 '''내 잘못이 아니야, 부하 잘못이지!''' 라고 박박 우겼다[88] . 그러나, 그나마 살아남기라도 했고 적어도 이런 짓까지 명령하진 않았다.[89]주코프 曰 "일본군인이라면 반자이를 외치면서 '''용감하게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 할힌골 전투 후 수풀 속에서 매복 중 방충망을 받지 못해 만주 전투모기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 일본 병사에게
태평양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는 오히려 '''미군 쪽에서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을 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이 때 적을 크게 줄여놔야 나중에 동굴이나 참호 등에서 농성하는 일본군을 소탕할 때 훨씬 적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남들이 돌격할 때 달아나 숲에 숨어서 지내면서 저격이나 기습으로 미군을 공격하던 일본군들의 손에 죽어나간 미군이 반자이 돌격 과정에서 죽은 미군보다 훨씬 많았다. 모든 일본군이 이런 식으로 싸워왔으면 상황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제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미군은 그렇게 비교적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더라면 일본 측에는 홈그라운드라는 이점까지 생기는 셈이었으므로 피해가 더 생겼을 수 있었다.
전쟁 후반 들어 전세가 완전히 연합군 측으로 넘어가고 일본의 최우선 목표가 본토방위로 바뀐 뒤로는 전력보존 차원에서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 사용빈도가 극단적으로 줄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끝내 반자이 돌격은 안 그래도 걸레짝이던 일본의 패망을 더 앞당긴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19세기 이전에나 통했던 전법을 현대화기가 발전하는 가운데에 "안되는 억지"를 "정결을 지키는 죽음"으로 미화시켜 만든 일본 군부의 가장 멍청하면서도 바보같은 전법 중의 하나로 남았다.
손자병법 모공편의 결구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좋은 예시라 하겠다.
[image]知彼知己(지피지기): 저편의 사정을 알고 이편의 사정을 알면
百戰不殆(백전불태):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不知彼而知己(부지피이지기): 저편의 사정을 모르고, 이편의 사정만을 알면
一勝一負(일승일부): 한 번은 승리하고 한 번은 패배한다.
不知彼不知己(부지피부지기): 저편의 사정과 이편의 사정을 함께 모르면
每戰必殆(매전필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재미있게도 이런 일본군의 전술은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대거 유입된 창군기 한국군에도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다. 당시 미 고문단의 평가항목에 따르면 'Was there a "BANZAI" Charge? (반자이 돌격을 했는가?)'라는 항목이 보인다.[90]
사진은 1949년 5월 7여단 1연대의 검열보고서로, 다행히도 1연대는 합격했다.
김석원의 경우, 허구한 날 반자이 돌격을 하며 일본군 물이 안 빠졌다고 미 고문단이 씹어댔다. 다만, 이건 해당 문서에 들어가서 확인할 수 있듯 미국 측의 악의적인 평가라고 밝혀졌다.
8. 창작물에서의 반자이 돌격
- 영화 마이웨이.
카미카제와 반자이 돌격이 함께 이루어지며, 각종 대전차총검술 비슷한 것은 덤이다.
특히나 후반부로 가면 더 몰려오는 BT-7무리에 대부분이 겁을 집어먹는다... 물론 영화적 연출 상 병력 밀집도가 너무 높아서 소련군 피해도 꽤 크게 나온 것을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이게도 저 영화에서는 일본군이 실제보다 훨씬 괜찮게 나왔다. 실제 일본군은 트럭도 없거니와 트럭을 굴릴 연료도 없어서 드럼통 실은 차량으로 자폭을 하는 전술 같은 건 제대로 쓰지도 않았고, 대전차지뢰 들고 눕는 것 역시 성공률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 레드 오케스트라 2의 스탠드 얼론 버전인 라이징 스톰에서 일본군 특수 능력으로 등장한다. 일단 근접 공격 키를 누른 채로 달리면[91] 무조건 "덴노 헤이카 반자이!!" 나 "미나고로시다(몰살이다)!!" , "쇼리자(승리다)!!" , "토츠게키(돌격)!!" 이나 "코로세(죽여라)!!" 등등 다양한 대사와 온갖 괴성, 고함을 질러대면서 자동으로 발동하는데, 여기에 버프가 걸려서 쓰는 일본군의 맷집이 올라가고 이걸 듣는 미군의 시점이 흔들리며 사기가 저하되는 효과가 있으며 여럿이 반자이를 발동하면 그만큼 버프가 크다. 하지만 레드 오케스트라 게임 자체가 리얼리티에 충실해서 한두 발에 픽픽 죽어나가는터라 별 의미가 없고, 그나마도 패치로 너프먹었다. 그래도 반자이 돌격 중엔 운이 좋으면 기관총 탄환 2~3발까지도 버텨낸다. 하지만 미군의 반자동/자동 화기 비율이 워낙 높아 일반 소총수들조차 반자동소총인 M1 개런드로 무장하니[92] 현재 너프 먹었어도 팀리더의 적절한 포격지원과 항공기 지원으로 충분히 활약을 하며 일본군의 빈약한 화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저질 돌파력을 매꿔준다, 물론 미군 또한 적절한 대응을 하면 못막을 것도 없으니, 결국은 팀의 재량에 따라 결과가 갈린다고 볼 수 있다.
-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썰트는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데 일본군의 주요 공격으로 묘사한다. 덕분에 게임 전반에 걸쳐서 좀비떼마냥 튀어나오는 지긋지긋한 반자이 차지를 경험할 수 있다.
- 메탈슬러그 3의 스테이지 4 구 일본군루트에서 일본군이 줄에 메단 A6M과 인력 97식 전차와 함께 나오는데 보병들은 폭탄을 굴리며 반자이 돌격을 편다. 맵 지형의 특수성과 인공지능 탓에 등장 보병으로써는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며, 정예병사는 죽으면 어떻게 죽이든 자폭까지 한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에서는 욱일 제국 제국 전사의 특수능력으로 고속으로 상대 보병에 접근 뒤 단칼에 즉사시키는 능력이다. 초기엔 고증에 맞춰서 발동시 방어력이 내려가고 속도가 빨라지게 하여 개가 없는 욱일의 밸런스를 조정했다. 반자이 모드라면 개나 곰의 짖기에는 면역이다. 그러나 방어력 하락 때문에 타 진영의 화력에 접근도 못하고 케첩이 됐다. 그러나 끝내 패치로 방어력 하락이 사라졌다. 덕분에 욱일은 초반 유정싸움이 매우 유리해 보병 싸움에서도 안 밀린다. 처음엔 나름대로 충실했으나 현재는 밸런스 패치 때문에 개사기이다. 단, 싱글 플레이에서는 패치의 밸런스 수정 사항을 적용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패치했으니 괜찮겠지~ 하며 욱일 제국 임무에서 반자이 돌격을 한다면 역시나 다른 진영 화력에 그대로 갈려나가는 꼴을 감상할 수 있다. 다만 이쪽은 나노슈트에 광선검을 들고있긴 하다.
참고로 이렇게 '갑자기 돌진해와서 덮치며 타이밍 맞춰 키를 눌러서 대응하는 근접공격'은 시리즈 전통적으로 개(군견)의 역할이다. 고수들은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을 시전하는 이벤트를 이용해 체력을 회복하기도 한다. 이벤트 진행중에는 체력회복은 되는데 다른 AI들의 공격은 씹기 때문... 특히 본작의 악명높은 수류탄 폭격을 씹는데 아주 유용하다. 게다가 개와는 달리 버튼 액션 타이밍 젤 필요도 없이 이벤트 뜨자마자 그냥 근접 공격키만 연타해도 그냥 넘어가는게 가능하다. 참고로 개는 한박자 늦게 버튼을 눌러야 하기에 고수가 되도 타이밍 미스로 가끔씩 죽기도 한다. 즉 개보다도 못한셈. 현실에서도 소련군은 대전차 견을 운용했으므로 소위 '천황의 자식'들의 값어치는 러시아 개 수준이었다. 여담으로 화염방사기를 가지고 타이밍을 맞춰 비명을 지르게 하는 재미가 있다.[94]
사실 게임 상으로도 일본군 미션에서 까다로운 요소는 반자이 돌격병들이 아닌 중거리에서 100식 기관단총이나 기관총을 마구 쏘는 적들이나, 나무에 숨어서 즉사급 데미지를 주는 저격수 및 시도때도 없이 날아오는 수류탄이다. 반자이 돌격병들은 무적판정 제공기에 총검 달린 소총 조공하는 셔틀로 봐도 무방하지만, 적들이 중거리에서 무지막지하게 총질을 해 대는 구간은 레벨 디자인 상으로도 연막탄, 수류탄, 화염방사기를 적절히 써 가며 뚫게끔 짜여있다.
- 중국 FPS 광영사명의 온라인 서비스 버전에서 등장하는 중일전쟁 시기의 상하이 코옵 맵(抗战勇士)에서도 경험해 볼 수 있다. 맵 자체가 좁은 시가전형 맵인데다가 어느샌가 갑자기 스폰되어서 으아아아앙아~ 하고 달려오는 식이라 꽤 위협적이다. 차라리 이것만 있으면 괜찮은데 나중에는 96식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쏘는 중보병까지 나오는 데다 라운드 6부터는 B사이트도 추가로 지켜야 하고 A,B 둘 중 한 곳이라도 점령되면 게임 오버다. 여담으로 이 돌격병은 플레이어가 일정 거리만 다가오면 무조건 그 한 명만 집어서 돌격으로 들어가는 트리거가 걸려 있는지 옆에 더 가까운 다른 플레이어가 있어도 무조건 선택한 놈만 보고 돌격하거나 더 나아가 소총으로 쏴도 맞는 거리인데 총알 냅두고 닥돌하거나 엄폐물에 숨어 있다가도 알아서 튀어나와 닥돌한다.
- 미국 HBO 채널의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도 이러한 장면이 있다. 반자이 돌격장면은 1화인 과달카날 전투의 테나루 강 전투와 9화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등장한다. 역시나 여기서도 달려오면서 폭죽이 된다... 단, 일본군과의 육박전을 직접 보여주는 장면은 찾기 힘들다.
- 1999년도 작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은 이러한 육박전을 자세히 재연한 영화로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미군과 일본군의 육박전 전술을 굉장히 자세히 묘사한다. 고지에서 일본군은 착검한 소총으로 돌격하고 미 육군 중대 역시 착검한 소총을 기본으로 기관단총, 산탄총과 콜트 권총 등으로 육박전을 벌인다.
- 태평양의 기적 - 폭스라고 불렸던 남자에서도 등장한다. 일본 덧글 반응을 보면 가관이다.
- 걸즈 & 판처에서 일본(정확히는 구일본군)을 모델로 한 치하땅 학원이 반자이 돌격 같은 대책없는 돌격을 애용한다. 과거 '닥돌하여 일점돌파 후 포위섬멸'이 한 번 먹힌 뒤 그대로 학교의 전통이 되어 매년 써왔다는 설정. 얼마나 세뇌가 되었는지 명령 없이도, 심지어 아직 이르다고 대장이 말리는데도 씹고 돌격하는 지경이다. 물론 TVA에서는 닥돌을 시전하다 6호 전차 한 대에 모조리 양학당하고 극장판에서는 역시 닥돌을 시전하다 초반엔 처칠 전차와 마틸다 전차, IS-2에, 대학선발전에서는 M26 퍼싱에 양학당하는 등 별 성과는... 돌격이 학교 전통이라고 한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전투에서 그 전투의 지휘관이 실행할 수 있는 '전투 전술(Combat tactic)'에서 국가가 일본일 때 실행될 수 있다. 공격력을 25%, 이동 속도를 10% 올리지만 수비측의 방어력을 10% 올려주는 괴랄한 전술. 심지어 Overwhelming Fire에 저지당한다..
-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과달카날 전투편에 등장한다. 보급이 되지 않아 피골이 상접한 현지 일본군을 시찰한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병사들이 지친 건 못먹어서가 아니라 자위를 많이 해서 그렇다며 금딸파워를 이용한 반자위[95] 돌격으로 승리하겠다고 설쳐댄다. 당연하지만 미군의 빅파이 뿌리기 한 방에 실패한다.
- 소녀전선에서는 저체온증 에서 빨간봉투를 파밍할 때 주피터 포를 파괴하느 과정에서 손실이 막대해지자 유저들 사이에서 "반자이런" 이라고 불리는 전술이 유행했는데 내용은 흔하디 흔한 2성 인형들을 4개 집어넣어 고기방패로 세우고 주피터포가 이들을 포격하는 사이 후방에 있던 FNC가 주피터포를 잡고 전투중에 중상을 입은 2성 인형들은 전투가 끝나면 그대로 해체시키거나 강화재료로 쓰는 반자이 어택 이상으로 악랄한 (하지만 반자이런은 나름 유용하고 효율적이다.) 전술이 빵갤을 중심으로 번졌다. FNC(소녀전선) 문서 참조.
- 영화 택시 2
- 배틀필드 5를 패러디한 백틀필드의 3번째 DLC - 덴노 헤이카 반동노무 새끼 주인공은 미와 경부이며 메인빌런은 심영, 최종보스는 김두한이다.
9. 유사 전술
- 가이텐
- 대전차총검술
- 후쿠류 - 일본군 해군의 자폭 무기 및 병과로 대전차총검술의 대함 폭뢰버전.
- 데모맨(팀 포트리스 2) - 원거리 공격 능력을 일부 혹은 전부 포기하고서 근접무기+방패계열 장비의 돌진 능력으로 승부를 보는 소위 '흑기사' 플레이의 경우에 해당. 여기에 막대형 수류탄을 근접무기로 들면 자돌폭뢰가 된다.
- 뫼비우스 특전대 - 두 먼치킨들을 보자마자 도망가기는커녕 한 사신 여러 명이 아몬 찬양 구호를 외치면서 그저 돌격하는 걸 보고 케리건 왈: "이 녀석들 제정신이 아니야" 라고 할 정도.
- 우라돌격 - 우라돌격이라는 개념 자체가 소련군의 여러 공격들을 짜집기한 조어인만큼, 무식한 총검돌격과 같은 사례들도 있지만 올바른 제병연합과 함께한 좋은 공격들의 사례가 차고 넘친다.
- 인해전술
- 착검돌격
- 테러리스트의 자폭테러 - 무기가 폭탄인데다 그 방법들이 갈수록 정교해지는만큼, 지금도 피해자들에게 인명 피해와 정신적 피해를 남기고 있다. 자살 공격이라는 건 비슷하지만 반자이 돌격처럼 정면에서 무식하게 튀어나와서 죽어주는 바보짓보다는 훨씬 위력적이고 위험하다.
- 카미카제 - 항공기 버전 반자이 돌격[98]
- WAAAGH!!
- 반자이런 소녀전선 : 쎈 캐릭터던, 약한 캐릭터던 야포 한대 맞으면 죽는다는것을 이용하여 1딜러에 4개의 꽝카드 캐릭터[주로] 를 넣고 야포에 돌격하는 방법이다. 걸레짝이 된 고기방패들은 수복같은 것도 없이 해체나 강화자원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당시 주로 딜러로 채용되었던 FNC는 빨간봉투[99] 만 보면 PTSD를 일으키는 캐릭터라는 밈까지 생길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