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육군

 


'''소비에트 육군
Советская Армия
'''
[image]
창립
1918년 1월 15일
해체
1993년 12월 25일
명령체계
소비에트 러시아 육군 인민위원회[1]→소련 육해군 인민위원회[2]→소련 국방 인민위원회[3]→소련 국가방위원회[4]→소련 육군부[5]→ 소련 국방부[6]→독립국가연합 통합 사령부[7]
소속
러시아 SFSR소련독립국가연합
병력 (1991년 기준)
3,668,075명 (상비군)
4,129,506명 (예비군)
병영형태
징병제
참전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헝가리 혁명
베트남 전쟁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중소 국경 분쟁
앙골라 내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8월 쿠데타
1. 개요
2. 2차 대전기
2.1. 기갑
3. 냉전기


1. 개요


소련군육군에 관한 문서이다.

2. 2차 대전기



2.1. 기갑


당시 사용되었던 전차는 크게
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가장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T34로, 모든 개수형을 합치면 10만대가량 만들어졌다.
KV계열은 변속기 등의 신뢰도가 많이 부족했지만, 2차대전 초반 독일군 상대로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KV-2라는 '''152mm'''주포를 탑재한 괴랄한 전차도 있었다. 2차대전 초반 기준으로 이 물건을 격파하려면 3호 전차의 37mm따위로는[8] 답도 없었으며 최소 75mm 야포나 88mm 대공포 정도는 들고와야 관통이 가능했다.
IS계열은 전쟁 중후반에나 등장했으며 철저히 6호 전차 티거를 의식해 만든 전차였다. 탑재 주포는 122mm[9] 이라는 대구경이지만 당시 소련 철강기술과 포탄 개발 기술의 한계로 그 구경만큼의 성능을 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BT계열은 전쟁 극초기에 일본과의 전쟁 등에 잠깐 쓰였었고, 2차대전 중반 이후로는 후속작인 T-34가 나오며 사실상 단종되었다.

3. 냉전기



소련군의 서유럽 침공 전략을 설명하는 일본 교범영상.
2차대전 중 급속도로 팽창한 소련군은 전쟁 말기가 되면 500여개 보병사단과 50여개 전차군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당시 '''총병력'''은 '''1000만'''을 넘었다.[10] 소련군은 전쟁 직후부터 병력을 감축하면서도, 기갑 덕후인 독일군과 싸우면서 얻은 '전차는 육상전의 제왕이다'라는 교리에 충실하게 군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완전 기계화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주코프가 국방장관을 맡고 있던 1957년이 되면 전차군단은 전차사단으로, 일반보병사단은 기계화보병 사단으로 전환되었고, 전통적인 보병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기계화보병사단은 3개의 기계화보병 연대와 1개의 전차연대를 보유했다. 전차사단은 그 반대비율로 3개의 전차연대와 1개의 기계화보병 연대를 보유했다. 냉전의 최절정기에 소련군은 500만의 병력과 210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일반보병사단은 없고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전체가 기계화보병이거나 전차사단이었다.
가끔 인터넷에 나토가 침공 징후를 보이는 유사시에는 핵선제공격과 함께 7만대의 탱크가 서유럽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작전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돌아다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실상은 이렇다. IISS에서 발간하는 연감 밀리터리 밸런스(Military Balance)는 소련군이 보유한 전차 수량을 53,000대에서 55,000대 수준으로 잡았다. 7만대는 소련 전차전력 전부와 바르샤바 조약국을 모두 포함한 수치다. 그나마도 맬컴 찰머스(Malcolm Chalmers)와 루츠 운터제어(Lutz Unterseher)는 "Is There a Tank Gap?: Comparing NATO and Warsaw Pact Tank Fleets"라는 논문에서 바르샤바 조약군이 이탈리아, 터키, 그리스, 스페인, 노르웨이를 제외한 중부 유럽에 개전 3일 후 동원 가능한 전력을 9,900여대로 추산하면서 6,700여대를 동원 가능한 NATO군에게 단지 1.47:1의 수적 우위밖에 가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추정으로는 스티븐 잘로가(Steven J. Zaloga)의 수치가 있다. 잘로가는 "Tank War-Central Front: NATO vs. Warsaw Pact"에서 소련군이 1989년 기준 치장물자를 포함해 중부 유럽에 17,000여대의 전차를 배치해두고 있어 13,000여대의 전차를 배치한 NATO보다 1.3:1의 수적 우위를 가진다고 계산했다.
물론 잘로가는 소련군의 동원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NATO의 증원능력은 보수적으로 접근하면서 동원령 발효 30일 후에는 소련군이 전차 4만여대를 중부 유럽에 동원, 약 15,000여대를 동원 가능한 NATO 중부유럽군보다 약 2.6:1의 수적 우위를 가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찰머스와 운터제어는 소련군의 동원능력이 상당히 취약하다고 평가했으며, NATO의 증원능력도 보다 높이 샀다. 이 추산대로면 소련군이 개전 120일까지 전차 28,000여대를 동원 가능하지만, NATO 중부유럽군의 전차전력도 21,000여대까지 증강된다. 전력 비율은 고작 '''1.31:1'''로 소련군=압도적인 물량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소련군이 선제 핵공격을 수행했을지조차도 확실치 않다. 소련 핵전략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70년대 이후 소련군은 선제 핵공격을 내켜하지 않는 편이었다. 82년 선제불사용(No First Use)를 천명할 정도. 80년대 초반에는 선제사용을 아예 고려치 않았고 80년대 후반에도 제한적으로 고려되는 수준이었다. 물론 툴라 선언 이후에도 선제 핵공격을 전제로 한 작전계획이 수립됐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건 여러 작전계획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 실제 전력구조와 작전술의 발전이 재래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
정규전이 벌어졌다면 무시무시했겠지만, 문제는 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을 때다. 게릴라전이 중심이고 좁은 산지의 비탈길이나 돌산을 오가며 벌어지는 아프가니스탄의 전투에서는 그 우월한 기갑전력도 큰 효용이 없었고, 인명을 돌보지 않는 무자비한 공격과 피점령지 정책은 결국 소련군에는 반전과 염세주의를 퍼트리고, 아프간인들을 무자헤딘에 가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8년만에 GG치고 물러났다. 하지만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보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아무리 강대국의 군대라도 답이 없는 곳이다.[11]
[1]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по военным делам РСФСР (Наркомвоен), 1917년 11월 23일~1923년 11월 12일, 1944년 3월 4일~1946년 3월 15일 존치[2]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по военным и морским делам СССР (НК ВиМД СССР), 1923년 11월 12일~1934년 3월 15일 존치[3]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обороны СССР (НКО СССР / Наркомат Обороны), 1934년 6월 20일~1946년 2월 25일 존치[4]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 СССР, 1946년 2월 25일~1950년 2월 존치[5] Военное министерство СССР, 1950년 2월~1953년 3월 15일 존치[6] Министерство обороны СССР (МО СССР), 1953년 3월 15일~1992년 3월 20일 존치[7] Главное командование ОВС СНГ, 1992년 2월 14일~1993년 12월 24일 존치[8] 50mm탑재형은 전쟁 중후기에나 나왔다[9] 서방측의 105mm에 대응한다.[10] 동원 인력이 아니라 병력이다. 동원인력은 2800만 정도. 동시기 미군은 1700만 정도를 동원하였다.[11] 100년전 제국주의 시대에는 당대 세계 최강 대영제국도 학을 떼고 나간 곳이 아프가니스탄이다. 그야말로 '''제국의 무덤'''.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