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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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참호전의 서막과 흐름
2.1. 예상외로 쓸 만했던 참호전
2.2. 우연과 악재가 만들어낸 참호전선
3. 기본적인 양상
3.1. 방어선 건설
3.3. 일제돌격
3.4. 방어사격 및 반격
3.4.1. 맞돌격
3.5. 도돌이표
4.1. 장교들
5. 변명
6. 피와 진흙의 요람
7. 왜 서부전선에서만 생겨났나?
8. 기타
9. 현대의 참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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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rench Warfare
대체로 참호전이라는 용어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지상 전투 양상을 일컫는다.
참호전의 본격적 발단은 1914년 9월 마른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의 후퇴였다. 당시 파리를 50여km 남겨둘 만큼 엄청난 진격속도를 보였던 독일 제국군은 슐리펜 계획에 의거해서 조기에 영국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러시아 제국과의 전면전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이 전투의 패배로 계획이 틀어져 끝내 양면전쟁 상황에 빠졌다.
이에 독일 제국군은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 여기에 대응하여 연합군 역시 적의 진공을 저지하러 참호를 팠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측면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북해부터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을 판 것을 '바다를 향한 경주'라 부르기도 한다.
전쟁 초기부터 동원된 근대적 병기들은 기관총과 철조망, 그리고 간접사격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야포의 조합이라는, 방어에 적합한 병기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 전차 등 공격에 적합한 병기들은 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야 개발이 시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이 제대로 참호를 파고 방어를 구축할 경우 제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과 병사들이 있다 할지라도 진격하기 어려웠으며, 설사 참호 하나를 돌파한다고 하더라도 적의 또 다른 참호를 만날 뿐이라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서부전선에선 서로 진격할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지지부진한 치킨 게임이 전개되었으며, 양 측의 참호간 거리가 '''2m'''밖에 안 되는 상황도 나오질 않나, 백병전이 빈번해지면서 중세시대에 볼 법한 냉병기나 갑옷 같은 것을 참호에서 제작하는 사례까지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다시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전장이 5년간 계속 되었고, 이로 인해 참호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양상과 그 당시의 전후 문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2. 참호전의 서막과 흐름



2.1. 예상외로 쓸 만했던 참호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엔 참호전을 주요 교리로써 중요시했던 나라는 없었다고 봐도 좋으며, 서부전선에서 펼처진 대규모의 참호전은 의도된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 흙으로 만든 참호는 (어디까지나) 요새나 전략적 고지 및 하천 방어를 보조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참호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당시의 주 된 교리는 그 이전과 같이 대규모 회전을 통해 승리를 취하는 것이지. 적의 도시, 전략 거점이나 요새도 아닌, 참호 한 곳을 얻겠다고 수년간 수십만 명씩 죽어나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1차 대전에 앞서 남북전쟁 및 각 식민지에서의 소규모 전쟁들은 장차 보병전의 양상이 어떻게 바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전쟁들이었다.
미니에탄과 강선 소총, 후미장전식 화포 등의 전장 도입으로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이 월등히 증가하게 되었고, 동시에 신식화기를 갖춘 진영의 화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됨에 따라 전투의 양상은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을 살리거나 신식 화기로 일방적 전투를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남북전쟁에서는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킨 저격 병과가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두 차례의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민병대에 불과한 보어인의 저격과 게릴라전에 완전히 농락당해 영국군이 자랑하던 레드 코트의 일제 사격과 포병 화력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참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이나 영국 같이 비싼 교육비를 치룬 적이 없는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신식 화기로 식민지인을 학살하는 것만이 '장차 현대전의 모습'이라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한 번의 회전을 통해 적을 일망타진하면 전투를 자연스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두 차례나 비싼 대가를 치른 영국군은 보병 대열의 일제 사격보다는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 향상 및, 생존을 위한 참호 활용 등의 훈련이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1차 대전의 주역이 될 각 국이 참호의 효율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이들에겐 참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이유가 부족했다.
일단 엘랑 비탈 교리로 유명한 프랑스군은, 보불전쟁의 복수심에 불타 방어보다는 독일에 대한 복수에 중점을 두었으며 공세를 멈추는 것을 최악의 행위라 여겼다.
넓디 넓은 영토에서 싸움을 펼칠 러시아군은 참호와 같은 고정 진지를 활용하기 쉽지 않았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을 통해 참호와 기관총의 효율을 알고는 있었으나, 동부전선의 기동전에선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어려웠다.
독일군은 양면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클라우제비츠의 사상과 보불전쟁의 승리요인을 참고해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따라서 슐리펜 계획과 같이 꼼꼼한 전투 계획을 기반으로 기동전을 선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물자도 부족한 마당에, 상대적 소국을 상대로 참호전을 전개할 이유가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국경선의 험악한 산지가 참호 역할을 수행하고, 유리한 진영의 편을 들어 숟가락 얹기를 하려던 입장인지라 굳이 참호를 중시할 필요가 없었다.
예외는 영국군과 벨기에군이었다. 영국군은 두 차례의 보어 전쟁으로 값비싼 교훈을 얻어 현대전에 빠르게 적응하였고. 벨기에군은 독일군에 비해 숫적 및 질적 열세인 상황을 극단적인 방어적 교리로 완화하려 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이 시작될 경우, 우회로 확보를 위해 독일이 벨기에를 위협할 것임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전 국토의 전략적 거점을 요새화해 좁은 영토와 적은 인구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방어적 교리를 중시했던 벨기에의 노력으로, 벨기에 전선의 참호는 1차 대전 초기부터 독일군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슐리펜 계획으로 최대한 빠르게 벨기에를 통과하려 하였던 독일에겐 벨기에의 저항은 큰 변수였고, 독일은 벨기에의 요새와 참호를 공략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공성용 중포를 긁어모으거나 비신사적인 전략까지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벨기에군이 참호와 요새로 격렬히 저항한 만큼, 독일군은 무고한 벨기에 시민들에게 앙갚음했다.
그 이후 1914년 8월에 있던 몽스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참호를 활용해 효율적으로 방어했다. 당시 영국군은 직업군인으로만 이뤄진 정규군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몽스 전투에 참전한 영국군은 다수의 식민지 전투 경험을 통해 깊게 판 참호와 기관총의 위력을 체득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군대들이 도랑을 끼고 전투를 펼치며 허리를 겨우 숨길 정도로 참호를 파고 있을 때, 영국군은 독일군과의 첫 번째 전투부터 마을을 요새화하는 동시에 몸을 완전히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참호를 파는 철저함을 보여주었다. 영국군은 몽스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매우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사상자의 비율 또한 압도적으로 양호했다.
비록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요청으로 파리 사수와 전선 보강을 위한 전략적 후퇴를 했지만, 파리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던 벨기에 방면의 독일군에겐 영국의 참호가 골칫거리였음은 틀림없다.
이렇게만 보면 독일이 벨기에와 영국에게 호되게 당하고 뒤늦은 교훈을 얻은 것 같지만, 사실 독일은 유럽의 타국에 비해 전쟁 초기부터 참호에 깊은 관심을 보인 나라 중 하나였다. 독일은 1906년부터 기동훈련에 철조망과 참호를 활용했으며, 보어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드러난 참호전의 이점을 빠르게 학습했다. 그리고 1914년에는 보병의 군장에 참호 도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참호를 건설하지 않은 것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기세를 살려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지, 참호를 팔 줄 모르거나 '촌스럽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파리를 빠르게 점령하려고 계획한 마른 전투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은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국가보다도 더욱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참호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몇 년이 이어지든 전선에서 아예 틀어박혀 있을 작정이었다.

2.2. 우연과 악재가 만들어낸 참호전선


어디까지나 전략적 거점의 방어 수단에 불과하던 참호의 규모를 참호'전'이라는 일련의 대전략으로 확대시킨 계기는, 문서 상단에 서술된 마른 전투의 후퇴였다.
탄넨베르크 전투의 승리 덕분에 일약스타로 떠오른 독일의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동부전선에 집중해서 러시아를 우선 무찌르자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제 1차 이프르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못보였던 서부전선의 병력 일부가, 고전을 겪는 오-헝군을 돕는 동시에 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서부전선의 독일군 병력이 줄어든 만큼, 프랑스와 영국에겐 이보다 좋은 공세의 기회는 없었다.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데만 급급하던 프랑스군은 벨기에 전선을 유리하게 정리하고 싶었고, 이에 14년 12월 동계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화력의 부족으로 독일군을 밀어내는데는 실패했다.
영국군은 포탄 부족과 포병의 유연하지 못한 지원 사격 때문에, 기껏 거점을 빼앗았다가 독일군에게 다시 내주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프랑스군은 예비병력의 활용에 문제가 있어, 일선병력이 괴멸되고 나서야 후방병력이 전선에 도착하여 점령한 거점을 쉽게 내주곤 하였다.
또한 전쟁 막바지인 1918년에서야 연합사령부를 구성할만큼, 영국과 프랑스는 하나의 전쟁을 별개로 치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약속된 화력 지원이 이뤄지지 않거나, 공세를 별개로 진행하여 각개격파당하는 일도 허다했다.
반면 독일군은 부족한 인력으로 넓은 전선을 방어해야하는 만큼, 참호를 더 깊게 파고 진지를 강화했다. 마른 전투가 실패로 끝난 뒤, 1914년 9월 14일 몰트케는 현재의 전선에 요새를 건설하고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록 마른 전투가 실패했지만, 전략적 후퇴를 하기엔 벨기에 전선이 지니는 가치가 너무나 중요했다. 양측 모두 이곳을 내어준다면 진격 루트가 알자스-로렌이나 아르곤 숲을 통한 선택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자는 베르됭 전투에서 알 수 있듯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기에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곳이며, 후자는 험난한 지형의 아르곤 숲을 통해 진격해야 하는 부담이 따르는 만큼 진격로로 선택하기 어려웠다.
결국 독일군은 연합군의 거친 공격을 끈질기게 방어해냈고, 지도상으로 봤을 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만 계속되었다. 또한 적이 참호를 우회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서 참호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독일과 영-프 연합군의 참호는 바다로까지 이어졌다.
참호의 규모가 증가하면서 필요한 인력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고, 더 이상 참호와 요새를 우회할 길을 찾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선 참호 전선을 뚫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참호 돌파 시도에 막대한 포탄과 병력이 필요했던 만큼, 전쟁은 얇은 참호선 곳곳을 뚫기 위한 참혹한 국지다발전 양상으로 계속 이어졌다.
한편 1915년 이탈리아가 뒤늦게 전쟁에 참전하자, 또다른 양상의 참호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1915년까지 눈치만 살피던 이탈리아는 기습을 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략하려 하였지만,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오-헝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다. 수 차례의 이손초 전투는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평지와 요새에서 펼쳐지던 전투는 갈수록 교착상태에 빠져 험난한 알프스 산맥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산악지대는 방어에 유리한 것이 장점이나, 물자 수송과 거점 형성에 어려움이 있어 장기적인 대치 상황은 부적격한 것이 큰 단점이다. 그러나 영토를 한 치도 내주기 싫었던 양측은 산악지대에 곡괭이를 이용해 암벽에 참호를 건설하고, 야포를 인력으로 견인하는 근성까지 보였다.
이 산악지대에서의 싸움이 오히려 서부전선보다 더 치열했는데, 포격이 일어날 때마다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큰 인명피해를 냈고, 보급의 어려움과 더불어 알프스 산맥의 겨울은 쉽게 버틸 수 있는게 아니었다. 거기다 '하얀 금요일'이라고 불린 1916년 12월 13일에는 약 만 명이 넘는 병사가 눈사태로 인하여 죽음을 맞기도 하였다.
사실상 알프스 전선의 산악지대에서 펼쳐진 참호전은, 공세에 나설 여력과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양측이 억지로라도 뭔가를 쥐어 짜내고자 한 현실도피성 발버둥인 셈이었다. 이때 이탈리아군은 타국에 비해 군법 위반에 대한 처벌 강도가 훨씬 높았는데, 이는 열악한 환경에서 군대의 사기를 억지로라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참호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병사 개개인이었다. 가장 먼저 식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1914년만 해도 톱밥과 분필[1]이 든 말라 비틀어진 빵을 먹는 일은 없었다.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몇 날 며칠간 광범위한 포격을 가하다보니 취사 시설이 전선과 점점 멀어지며 규칙적인 식사도 점점 힘들어지고, 포탄과 독가스, 그리고 저격수로 전우가 죽어가니 사기는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대규모 공세의 계획일이 다가오면 적이 쏘는지 아군이 쏘는지 알 수 없는 포탄세례가 지속되었으며, 기관총 세례를 뚫고 적의 참호를 점령하더라도 통신의 미비로 아군의 포탄이 날아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참호 근무 부대를 교대하는 제도는 전쟁 중 후반기에서야 들어섰는데, 이로 인해 제대로된 휴식과 영양 섭취가 불가능한 병사들의 위생 상태는 매우 열악하였다. 비가 내리면 땅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밭으로 변했고, 참호에 고인 빗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가 병사들이 참호족(Trench Foot)이라는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포탄과 공격해오는 적에 대한 압박감으로 쉘쇼크(Shell Shock)라는 일종의 정신공황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아군 참호와 상대편 참호 사이는 '''NO MAN'S LAND'''(무인지대)라고 불렀는데 그 사이에는 살아있는 것이라곤 시체를 파먹는 쥐와 벌레 뿐이었으며, 미처 수습되지 못한 병사들의 시체와 절규를 내뱉는 부상자만이 널려 있었다.

3. 기본적인 양상



3.1. 방어선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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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육군의 참호선 건설 매뉴얼을 보고 싶은 사람은 이곳을 참고 바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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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당시 형성된 참호들의 큰 분류.
가장 상단이 '일반적'인 참호, 중간이 '이상적' 참호, 맨 마지막이 '습지' 참호이다. 저격을 피하기 위해 사람 키보다 깊게 교통호를 파고, 사격용 발판(Firestep)을 만든 뒤 바닥에 나무판자를 까는것이 공통적인 참호의 모습이었다.
벽은 닭장용 철망이나 양철 슬레이트, 모래주머니 따위로 보강을 하고, 가능하면 배수로도 팠지만 그건 여유로운 상황에서 넉넉한 인력과 보급을 동원해야 가능한 것이고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급조한 참호는 꼼짝없이 흙바닥에 흙벽이었다.
Parapet(여장) - 적 방향을 향한 방어 구조물.
Parados(배장) - 후방을 향한 방어 구조물. 급조 시 생략하기도 했다.
Firestep - 사격 시 올라서는 발판.
Ground Level - 땅바닥. 그러니까 참호를 파기 전 땅의 원래 높이이다.
Duck Board - 참호 바닥에 까는 재료로 가장 널리 쓰였던 나무건널판. 이것 말고도 레이션 상자나 깡통 따위를 넓게 펴서 깔기도 했다. 걸핏하면 진흙진창이 되는 참호 바닥에 꼭 깔아야 했던 필수품이었다.
'일반적' 참호와 '이상적' 참호는 모두 땅 밑 깊게 파여져 있지만, '습지' 참호는 물에 잠기는 일이 많기 때문에 땅을 얕게 파고 부족한 엄폐는 여장과 배장을 높게 쌓는 것으로 해결한다. '이상적' 참호에는 배수로를 깊게 판 뒤 발판 역할을 하는 Duck Board를 깔아 마른 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습지' 참호는 바닥이 물에 잠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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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7월, 솜 전투의 체셔 연대 병사들. 경계병이 Firestep에 올라가 전선을 살피는 동안 아무렇게나 누워 자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재료와 시간이 충분하면 '이상적' 참호처럼 배수로를 파고, A프레임으로 구조를 보강하고, 철판 따위로 참호 벽을 세우는 등 그럭저럭 안전성도 확보하고 사람이 살 만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습지' 참호처럼 늘 질척거리는 바닥에서 참호족에 시달리며, 끈적거리는 진흙벽에 기대서 먹고, 자고, 쉬고 싸워어야만 했다.
후방 참호라면 그나마 교통호에 딸린 비교적 넓은 지하 유개호에서 침대 위에 누울 수 있었지만, 전방이라면 정말 나무판자 깔린 기다란 구덩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좁고 축축하고 차가운 곳에 오랜기간 동안 노출된 병사들은 적군 뿐만 아니라 온갖 질병에 맞서 싸워야 했다.
사실 잘 구축된 참호건 급조된 참호건 사람이 지낼만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더욱이 참호전은 몇 주에서 몇 달까지 전선이 유지되었으니...
공격군·방어군 모두 지그재그 모양의 최전선을 비롯한 다중의 참호선을 파고 전면에는 대규모 철조망을, 참호에는 기관총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막는다. 지금은 기관총이 소대 혹은 분대 지원 화기지만, 이 무렵에는 대대 지원 화기였기 때문에 거의 몇 백 m마다 하나 정도만 놓여 있었다. 또한 참호 내부 시설은 몰라도 참호 외부 구조물(철조망, 모래주머니 등)은 저격수나 포격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되면 증축하기가 곤란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간소화되었다.
당시에 사용되던 기관총들은 거대한 수냉식 냉각방식 중기관총들이라 제2차 세계대전기의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나 M1919 브라우닝 정도는 우습게 여길 정도로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에 야전 운용 시에는 전세대의 기관총인 가드너나 노덴펠트처럼 전용 포가가 필요한, 마치 나폴레옹 시기의 포병대처럼 운용해야만 했다.
실제로 기관총 반은 포병용 조준기를 보급받아서 마치 포병처럼 운용했기 때문에 광대한 참호 망을 전부 커버하기에는 설치비용에 비해 효과가 상당히 미미했다.[2] 참호선 곳곳에 기관총호를 따로 만들게 된 것은 1915년을 전후 시점부터로, 이 무렵부터 전선 곳곳에 기관총호가 나눠 만들어져갔다.
한편 참호 방어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국가마다 양상이 달랐다. 프랑스군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참호를 적에게 공세를 가하기 위한 단기 거점으로 여겼다.
반면 침략자 입장인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를 물리치는 동안 서부전선에서 시간만 잘 끌어준다면 언제까지든 눌러 앉아 있어도 좋다고 여겼다. 전쟁 초기 (상대적으로 형편이 괜찮았던) 독일측 참호는 전등과 침상까지 배치되어 있었던 반면, 프랑스군은 참호에서의 휴식은 프랑스 영토를 수복한 뒤에 치루는 것이라 여겼다.[3] 물론 프랑스군은 본토에서 싸우니 참호보다 훨씬 강력한 요새에서 방어할 수 있었던 점도 있었다.
이 과정은 대규모 공격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호에 병력을 배치한 상태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한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참호가 거의 미로에 가깝게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참호 미로에선 병사 개개인만이 길을 잃는 게 아니라, 부대, 심지어 대대 단위로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이를 위하여 해당 참호의 지리를 잘 꿰뚫고 있는 정찰병이 이들을 구출하는데 동원되었으며, 복잡한 참호에서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하여 무너진 건물 잔해를 나침반 삼거나 참호 곳곳에 표지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3.2. 대규모 공격준비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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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를 촬영한 항공사진. 사진의 하얀 반점들이 모두 포탄구덩이다.
당시 공격 측은 엄청난 규모의 사전 포격(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해 상대의 참호, 지뢰, 철조망 등을 박살내고 돌격했는데, 짧게는 돌격 직전, 길게는 몇 날 며칠을 연달아 행했으며, 이에 상대 측도 맞포격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야포에게 비약적인 사거리와 정밀 포격을 기대할 상황이 아니었으며, 일제히 통제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양측의 포격 세례는 무차별 포격을 야기해 한번 시작되면 양측 모두 참호 안에 틀어박히게 만드는 양상을 띠었다. 한편 가스 포탄도 쓰였는데, 이것도 상대 병력에게 방독면을 쓰도록 강제해 피로와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또한 대규모 포격에 앞서, 선발 부대를 투입하여 적의 산병이 엄폐할 것으로 예상되는 거점을 정찰하기도 하며.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병력을 내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적 참호의 근무병이나 저격수에 맞아 죽기 딱 좋은 행위나 다름이 없었기에,[4] 포격을 통한 진로 개척에 크게 의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포격 과정에서 방어군은 모두 참호로 대피하여 큰 피해 없이 포격을 버텨낸다. 콘크리트로 건설된 토치카나 흩어져 있는 적 방어병력을 제외한다면 철조망 같은 급조(?) 방어선은 모두 포격에 증발하므로,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보병들의 진격이 큰 무리가 없게 된다. 즉, 몇 분간의 기관총 세례만 버티면 적군 참호에 돌입,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장애물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으면 난이도가 급상승한다는 것. 당장 솜 전투 당시 제대로 포격이 되지 않은 일부 지역에서는 철조망 제거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 결과 어떤 곳은 하루 만에 보병 중대가 돌격 한번에 통째로 증발하기도 했다. 게다가 솜 전투의 주역이던 영국 육군은 한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을 한 중대에 배치하는 정책을 취했기에,[5] 이런 중대단위 증발은 전후 지역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러한 지역 출신 편제 방식은 영국만의 특수성이 아닌 독일을 비롯해 많은 국가에서 사용하던 방식으로, 병사간의 사기를 증진하고 (민병대나 현재의 향토예비군처럼) 지역 방어에 효율적인 이점이 있었다. 어쨌거나 미래 지역 사회의 기둥이 될 2~30대들이 무더기로, 그것도 무참히 죽어나가는 것을 눈 앞에서 본 1차 대전 세대들은, 이후 전쟁에 대해 매우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되었고. 이는 아돌프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를 대상으로 많은 외교적 이득(뮌헨 협정, 가짜 전쟁)을 취할 수 있던 배경이 되었다.
당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고 평가될 만큼의 포격이 수 일동안 이어졌는데 정작 철조망 하나 치우지 못 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 육군 포병대는 대부분이 유산탄(Shrapnel : 포탄 안에 쇠구슬이나 금속 조각을 가득 넣어서 파편 효과를 극대화한 포탄)을 사용했는데, 유산탄은 폭발력을 어느정도 포기하는 대신 많은 파편으로 인마살상을 하는 것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개활지에서 밀집한 보병들에게는 효과적이었지만 빈약한 폭발력 탓에 방어용 구조물에는 직격탄이 아닌 이상 효과가 매우 미미했다. 정작 참호나 철조망과 같은 구조물에 유효한 고폭탄은 극소수만이 사용되었다.
또한 나중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영국군의 포격은 상당히 부정확했으며 솜 일대의 토질은 습기가 많아 부드러웠고 영국군 포탄은 질이 떨어졌기 때문에 불발탄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1차대전 때 생긴 불발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해서, 종전 100년을 찍은 지금도 벨기에에 영국 육군 1개 공병대대가 상주하며, 수시로 발견되는 불발탄이나 지뢰 등을 처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격이 너무 강력해도 문제인데, 저 때 포탄은 공중폭발 기능 따위는 당연히 없고 그냥 땅에 처박힌 후 터지는게 전부였기 때문에 진격로에 엄청난 숫자의 '''구덩이'''를 만들어 기동력이 심각하게 저해되기 마련이다.
부드러운 토질도 구덩이 생성에 한 몫 했는데,
땅이 부드러움 → 포탄이 땅에 '''깊게''' 박힌 뒤 터짐 → 지상 피해는 별로 없는데 땅만 크게 패임
이런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포탄 구덩이들은 폭도 넓고 깊이도 깊어서 재수 없게 잘못 빠지면 탈출하기도 어렵고, 빙 돌아가게 만들어 기관총 포화에 노출되는 시간을 키우는 역할을 하여 오히려 아군 병사의 사망률만 높이는 상황을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구덩이에 물이 고여 그대로 방치되면 말 그대로 죽음의 함정이라 여러 명이 총상 등을 입고 빠져 줄줄이 익사자가 되고 결국 시체 썩은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겨 심각한 위생적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포격이 만든 구덩이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독가스가 고이기 딱 좋은 환경이다 보니, 구덩이 밖의 병사들이 안심하고 방독면을 벗었다가 고여있던 독가스에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탄 구덩이가 완전히 공격측에게 피해만 준 것은 아니었다. 생긴지 얼마 안되어 물이나 가스가 고여있지 않고 군데군데 깊게 패여있는 포탄 구덩이들은 진격하는 공격군의 좋은 엄폐물이 되어주기도 했다.

3.3. 일제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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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지대로 돌격하는 왕립 해군 사단(제63사단)병사들[6]
사전포격이 끝나면 뒤이어 공격군이 일제돌격을 감행한다. 보통 포격이 끝난 직후에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포병과의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포격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격해서 아군 포탄에 팀킬을 당하거나, 너무 늦게 돌격해서 적군 최전선 참호까지 가기도 전에 기관총 세례를 맞고 전사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참호 밖으로 나가자마자 피격을 당해 뒤로 자빠지는 바람에 뒤이어 나가려던 아군의 총검에 찔려 의도치 않게 팀킬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1차 대전 당시에도 무선 기술이 존재는 했지만 성능이 좋지 않아 자주 활용되지는 못했고, 유선반이 가설하는 유선망에 의존하거나 전서구를 이용한 전통적인 연락방식이 선호되었다. 양측의 포격이 격렬해지면 기껏 세운 유선망이 개판이 되고, 전서구는 포연과 전장 소음으로 길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등 제대 간 연락을 못하는 상황이 정말 많았다. 유무선, 심지어 위성통신까지 발달한 현재에도 전령(연락병)은 연대, 대대 본부단위로 2-3명씩 할당되어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1차 대전시 독일 육군에서 받았던 보직도 전령이었다.
게다가 돌격하는 병력이 쓸 탄환이나 적 참호선 점령 시 확보를 위해 필요한 자재를 운반하려면 기관총 사격을 뒤집어쓰면서 포격으로 엉망이 된 땅을 지나가야 한다. 이 경우 차량이나 수송부대를 쓰기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돌격하는 병력 개개인이 무거운 짐을 나누어서 지급하는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돌격속도가 느려지므로 그야말로 기관총 사수 입장에서는 사격 연습하기 딱 좋은 상황이 된다. 2차 대전 시기의 군장도 무거워 보이지만 1차 대전에는 프랑스 육군처럼 돌격시에 생필품까지 싸맨 완전군장을 맬 때가 있었다.[7] 이는 점령한 참호선을 바로 아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전초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이후 참호전의 양상이 바뀌면서 완전군장을 매고 돌격하는 일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일제돌격을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병력을 나눠서 산발적으로 돌격하면 적측의 집중 포격을 맞아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일부 인원이 희생되더라도 살아남은 병력이 적 참호에 육박할 수 있도록 일제돌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포격을 멈추지 않고 동시에 일제돌격을 감행하는 ‘이동탄막포격전술’을 시행할 때도 있었다. 이론적으론 아주 좋은 전술로, 지속적인 포격으로 장애물을 제거하고 적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막으면서 비교적 안전하게 적 참호를 점령할 수 있다. 보병들의 속도에 맞춰서 포격 지점이 아군 보병 앞에 떨어지게 조금씩 조정하는 방식이였는데, 돌격대와 포병대의 통신이 원활하지 않다보니 포격이 돌격대와 너무 멀리 가해져서 효과가 없거나, 아군에게 포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초의 이동탄막포격전술은 1916년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첫 선을 보였지만, 병사들의 숙련도 부족 및 각종 제약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제대로 된 이동탄막은 의외로 캐나다군비미 리지 전투에서 처음 선보여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3.4. 방어사격 및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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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병사들이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다.
참호로 대피했던 방어군은 포격이 멎으면 다시 복귀하여 돌격하는 적들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준다. 이 때 방어의 성공을 가르는 기준은 포격시의 충격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서 중기관총을 참호 내부의 사격위치로 재빠르게 배치한 후에 사격을 실시하는지에 달렸다.
공격군의 정면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게 아닌 공격군의 측방(정확히는 공격군 입장에서 10시 혹은 2시 방향 정도. 대략 45도)에 기관총을 설치했는데, 이것은 공격군이 넓은 전장 탓에 횡대로 돌격해 오거나 장애물에 걸려서 병목현상과 같은 양상을 띠면서 공격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사실 기관총을 난사하면 명중률이 심하게 떨어진다. 난사하는 기관총에 죽는다는 말은 까놓고 말해 눈먼 총알에 죽는 셈인데, 때문에 기관총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번의 난사범위에 최대한 많은 표적을 밀집시키는 게 중요하다. 때문에 기관총 사수 입장에서는 횡대로 들어오는 공격군의 측면에 대기하고 있으면 한 번에 많은 표적을 산탄범위에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참호전에서는 측방으로 노출된 경우에 방어 쪽 기관총의 공격 범위에 수십 명씩 중첩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고, 절망적인 조준력을 감안하지 않고 마구 난사하여도 중대 하나를 증발시키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래도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부대라면 우물쭈물하다가 적의 침입을 허용하는 막장 상황을 맞이하게 되며, 그렇지 않더라도 보통 방어전 중에 아군 참호 중 최전선에 위치한 1개 열 정도의 참호는 잠시 적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대개 참호선은 기본적으로 3선 이상을 중첩해서 설치하며, 제2선 참호에 예비 병력을 두고 포병들도 적에게 넘어간 제1선 참호를 정확히 명중시키도록 훈련을 받고 참호가 공격받을 시 1선 아군 참호를 조준하고 대기한다.
반대로 공격군은 엄청난 손해를 입으면서 간신히 참호 하나를 점령하더라도 후속해서 들어오는 증원 병력이나 보급이 모자라고, 자기가 점령한 참호의 특징도 잘 모른다. 따라서 대형 해프닝만 없다면 일반적으로 방어군이 다시 반격해서 참호를 탈환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군의 장기였다. 기동방어와 종심방어(Defence In Depth) 전략은 독일의 특기였는데, 루덴도르프는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 보인 독일의 방어 교리가 인력만 낭비하는 쓸모없는 교리라 판단하여[8]힌덴부르크 선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방어 교리인 종심방어를 창안하게 된다.
직선에 가까웠던 참호전선을 다층으로 세분화시킴으로써 살상구역과 역공구역, 그리고 2차, 3차 방어 참호로 나누었다. 공격측은 공격이 성공했다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반대로 방어측에서는 최소한의 손실로 적을 점점 더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공격측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가며 참호를 점령한들 애당초 쓸모 없는 참호(이자 함정)만 손에 넣을 뿐이었다.
독일군의 장기인 종심방어와 기동방어, 그리고 프랑스군의 막장스런 행보는 니벨 공세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독일군과 루덴도르프도 기껏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여 보존한 병력을 연합군처럼 참호에 무의미하게 던지는 바람에(루덴도르프 공세) 역시나 똑같이 말아 먹었고, 이후 독일의 방어선은 급격하게 약화되어 미군이 연합군에 참가해 실시한 공세인 백일 전투에 이르러 무너지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적군 참호를 향해 땅굴을 파거나[9] 돌격용 참호로 길도 뚫었다. 최전방은 적아군 할 것 없이 참호가 복잡하게 얽히거나, 참호 안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적군 진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3.4.1. 맞돌격


방어측이 공격측을 격파하여 후퇴시켰을 때 한정으로, 공격측의 참호로 즉시 맞돌격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생각보다 유효한 전술이었는데, 우선 공격측이 방어측의 참호 앞까지 왔다는 말은 이동 경로상에 장애물이 없다는 뜻이고, 공격측은 이미 방어측의 기관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일부가 후퇴하는 도중일테니 공격측 참호를 수비할 병력도 거의 다 증발해버린 상태이다. 또한 공세를 하다 후퇴하여 자신들의 참호로 돌아온 직후이니 돌진해오는 방어측의 병력을 상대로 반격을 할 여력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맞돌격에 가만히 있을 공격측이 아니다. 보통 공세를 나가더라도 공격보단 방어 위주의 훈련을 받은 기관총 사수들은 참호에 남겨두는 경우가 많았으며,[10] 이들은 아군측의 공세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늘 방어태세에 있기 때문에 맞돌격을 해오는 방어측 병사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상대측의 공세를 격파한 직후가 그나마 가장 공세하기가 좋은 상황인건 확실했기 때문에 협상국, 동맹국 안가리고 맞돌격은 자주 쓰인 전술이었다.

3.5. 도돌이표


이렇게 되면 공격군은 다시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모으고, 그동안 방어군은 다시 참호선을 재정비하면서 '''1번으로 되돌아간다.'''
간혹 공격이 성공하거나 방어에 실패해서 전선이 몇 km씩 이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는 반격 등의 이유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원상복구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부전선 초기 전투들 대부분이 예상외의 진격 속도로 후속 예비대와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져 역공을 당하거나 물자 부족으로 후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4. 생지옥


문제는 이러한 '''4단계의 무한반복을 4년간 지속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의미한 돌격과 살육의 반복이었고, 제1차 솜 전투 당시 영국 육군은 '''공세 개시 딱 하루만에 6만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엄청난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망 19,240명, 중상 35,493명, 포로 및 실종자까지 합치면 총 57,470명. 참고로 독일 육군 사상자는 겨우 8,000명, 모 독일 육군 연대는 아군 280명/ 영국군 5,121명이라는 기록적인 교환비를 보이기도 했다.[11]
이런 끔찍한 피의 루프 상황과 함께 '''시체를 파먹어 고양이만하게 살찐 들이 돌아다니고, 엄청난 숫자의 벼룩이 득실거리며, 만 오면 참호에 이 가득 차 장병들은 걸레처럼 젖기 일쑤에 심지어 참호 속에서 익사하거나 참호가 무너져 매몰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거기에 무시무시한 추위와 더위, 온갖 질병이 만연해 참호전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상황이 너무 처참한 나머지 각국은 전선의 장병들이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 참호전의 지옥 같은 상황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참호에서의 스트레스를 못이긴 몇몇 병사들은 후방이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직/간접적 자해까지[12] 하는 것을 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의료기술의 한계와 야전 병원의 극단적 처치로, 굳이 절단하지 않아도 될 상처를 절단하는 일도 횡행했으며, 의료품의 부족으로 가망이 없는 중상 환자는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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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비가 온 뒤 참호에 도랑이 고이는데, 이 물이 그냥 빠질 리가 없기 때문에 며칠 동안 발을 담그게 된다. 그냥 강물에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인데 비위생적인 참호 안에서 꽉 끼는 군화를 신은채로 지저분한 물에 하루종일 발을 담그고 살다 보니, 참호족(Trench Foot)을 달고 살며 개고생을 해야 했다.
독일군 쪽이 상대적으로 고지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선 비교적 나았으나, 대신 만성적인 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으며 군사들의 참호-후방 교체 주기도 연합군보다 길어서 별로 나을 게 없었다. 더구나 솜 지역에 엄청난 비가 내릴 때는 고지대도 진창으로 변하게 되고, 이곳이 물이 잘 빠지는 지역도 아니었기 때문에 끝내 사이좋게 시궁창. 물가가 만들어진 만큼 모기가 득시글하게 번식하여 질병의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물난리는 영국군이 가장 심했는데, 벨기에가 국토 전역이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전선의 모든 운하와 둑을 폭파하거나 밀어젖혀 독일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늦췄기 때문. 벨기에 영토의 한 귀퉁이를 보전한 대신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있는 연합군(대부분 벨기에군과 영국군)은 매년 홍수로 고생해야 했다. 영화 60고지 전투를 보면 뽀송뽀송한 독일 육군의 참호에 비해 완전 물바다가 된 영국 육군 참호를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영국의 근현대 역사상 영국인들에게 가장 쓰라린 기억을 남긴 곳이 바로 이 지역의 이프르, 그리고 솜이다. 영국군은 전쟁 초기에 이프르 전역만 맡다가 이후 병력을 늘려 전선의 1/3이나 맡을 정도로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 지역은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인 파스샹달 전투가 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프르는 독가스가 가장 처음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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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전이 벌어지는 지대는 안 그래도 부드러운 토질인데 중간지대는 포격에 땅이 죄다 갈아엎어지다보니 비만 왔다 하면 그대로 진흙 밭이 되었다. 상당히 지저분한 것은 물론이고 지대 자체가 위험한 곳으로 바뀌었는데, 상술했듯 여기저기에 생긴 포탄구덩이에 물이 고이면 깊이도 알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이 되었다.
나름 움직이기 편하게 한다고 참호 바닥엔 나무판자들을 깔았는데 잘못 밟으면 놀이터 시소처럼 위로 날아올라 만화영화마냥 얼굴이나 몸을 후려치는 일이 많았으며,[13] 물구덩이 위의 판자가 습기에 썩어 부서져 사람이 빠져 죽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대량의 성인들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위생시설도 없다 보니 배설물 때문에 더욱 눈물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사방에 물이 고여 진탕이라 똥오줌이 참호 안까지 넘쳐 흘러와 똥오줌 범벅인 참호에서 먹고 자며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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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에 지친 영국군 병사들이 비좁은 참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제대로 된 거주시설을 구축할 여유도 없었으므로 교대가 이루어지기까지 이들은 이렇게 쪽잠을 자며 몇 주에서 몇 달을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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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독일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진은 프랑스 전선의 독일군들. 천으로 덮인 피켈하우베와 눈이 쌓인 것을 볼 때 1916년 초 이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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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족을 검사하는 군의관. 하지만 저렇게 잘 지어진 참호에서 제때 군의관의 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운 좋은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더러운 물이 넘실거리는 곳인지라 참호족으로 고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더러운 흙탕물과 철조망 등으로 인하여 파상풍도 빈발했다. 지저분한 장병들이 집단으로 모여있으니 는 물론 , 벼룩 등 사람을 물어뜯는 각종 해충들까지 참호에 들끓어 장병들을 극심하게 괴롭혔다.
갈리폴리 전투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직을 사퇴한 뒤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소집되어 대대장으로 복무한 윈스턴 처칠의 수기를 보면, 해충에 견디다 못해 큰 통을 구해다 놓고, 자신과 장병들이 총알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철모만 쓰고 들어가 자주 목욕해서 부대에서 이와 벼룩을 격감시켰다는 내용까지 나온다. 목욕하러 불을 때면 연기와 김이 펄펄 올라왔을 텐데 어떻게 적진의 관측을 피했는지 자세한 내용이 없어 신빙성이 좀 의심을 받고는 있지만.[14][15] 물론 참호전에서 목욕이라는 사치(?)를 즐길 수 있던 부대들은 극소수였던지라 대부분의 장병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다.
비단 처칠 중령의 부대 뿐 아니라, 일단 참호에서도 혹은 참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어떻게든 장병들의 위생 상태를 개선시켜보려는 노력을 전반적으로 하긴 했다. 물론 관료적인 방법으로 강요하는 통에 병사들이 오히려 고생하는 경우들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
각국 수뇌부도 아주 손을 놓은 것은 아닌지라 물이 고인 참호에 고무장화와 우의, 보온용 의류 등을 지급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고무장화는 하루도 못 되어 사방의 날카로운 파편과 못 등에 구멍이 나 물이 들어오고, 우의나 트렌치 코트같은 보온용 의류는 울 등의 두터운 실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것들이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 10kg 단위로 무게가 불어나 장병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더구나 연기나 불꽃을 피우면 금방 적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적 포병에게 목숨을 헌납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서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축축한 참호 안에서 불을 피워 발을 말리거나 차디찬 통조림 등의 음식을 따뜻하게 데워먹을 수도 없었다.
덤으로 참호 전후방에 당연히 포탄이 날아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라 정시에 따뜻한 음식을 보급하러 오다 포탄에 맞아 추진 인원들이 사망하거나 도망가는 일도 자주 벌어져, 딱딱하고 맛없는 밀가루 조각 등의 비상식량으로 며칠에서 몇 주일 동안을 연명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당시 장병들이 가장 원하던 품목 중 하나가 연기 없이 장시간 태울 수 있는 고체 알코올로, 연기가 나지 않아 안전하고 체온이 떨어지는 야간에도 유용한지라 가족들에게 부탁하거나 급여를 모아 공동구매하는 등으로 많이 조달했다. 그나마 미군은 이러한 문제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결했는데, 먹고 버리는 레이션 깡통을 발 밑에 깔아버린 것이다. 미군의 보급은 이때부터도 워낙 충실했기 때문에 바닥이 깡통으로 메워져 차오르는 물로 인한 고생은 그나마 덜했다고 한다.
게다가 참호에 있으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포탄과 탄환 때문에 정신붕괴를 일으켜 미쳐버리는 장병들도 꽤나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탄환충격(셸 쇼크, Shell Shock), 정식명칭 CSR(Combat Stress Reaction. PTSD와는 다르다)로, 정신적인 충격보다는 포격에 의한 뇌의 물리적 이상이라는 게 당시 의료계의 정설이었다.
위의 정신붕괴 문제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이 계속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당시 심리학자들을 보는 시각은 거의 점술사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심리학이란 학문 자체가 그 당시에는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을 위시한 당시의 심리학자들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분석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래도 장병들의 불만이 증폭되는 1916년 이후에는 많은 처우 개선이 있었다. 그나마도 독일군보다는 좀 여유가 있었던 연합군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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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저격수, 영화 60고지 전투 중에서)
포탄이 날아오지 않는 소강 상태일 때도 저격수 때문에 어떤 진영이건 참호 위로 머리를 내미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언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16] 독일을 시작으로 각국은 저격수를 양성해서 교착 상태인 참호전에 투입하여 적 참호를 노리게 했다. 그 결과 치열한 신경전을 매일 벌이는 사이 하루에 수십 명 단위로 몰래 저격을 당해 죽어나가는 처절한 사태도 벌어졌다.
게다가 전쟁 양상이 총력전으로 바뀌면서 아무리 병력을 잃어도 증원군이 무한정 오다 보니[17] 각 군은 참호 돌파의 방법으로 압도적인 화력, 즉 머릿수로 밀어붙이기만 되풀이했다. 이런 지옥도는 쇼미더머니를 치는 미군 참전과 각국의 전차 개발, 그리고 독일의 국력이 완전히 연소할 때까지 이어졌다.
죽고 다치는 것만으로도 장병들의 정신이 한계에 내몰리는 마당인데, 사병들 입장에선 쓰잘데기 없는 소모전만 무한 반복되고, 참호전 특성상 싸우는데서 계속 싸우다보니 시체가 쌓이고 쌓여 엄폐물은 아군 시체, 뛰어가다 자빠지면 푹 썩은 시체의 산의 뱃속에 다이빙을 하는 등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지자 적지 않은 장병들이 PTSD를 비롯한 각종 정신병에 시달렸고 전투를 거부하는 등 항명을 하는 사례가 넘쳐났다. 항명은 사형이었지만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장병들이 적지 않았다.
장교들 또한 정신이 멀쩡한건 아니라서(...) 항명이라고 즉결 처분 했다는데 실제론 어처구니 없는 것도 많았다. 어디 말도 안통하는 벽촌지대 사람을 끌고와서는 명령을 이해하긴 커녕 언어 자체가 달라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명령 불복종이라며 총살시키질 않나, 심지어 중대가 적의 화력을 버틸 수가 없어서 퇴각한걸 군인 정신이 부족하네 겁을 먹었네라면서 총살시키려 드는 미친 일들이 벌어졌다.
이런 반역(?)자들을 총살하는건 보통 신병들의 몫이었는데 애국주의 광풍속에 나라를 지키겠답시고 전쟁터에 온 신병들은 사형수를 정말로 반역자인줄 알고 죽였지만 몇주 뒤엔 자기들이 죽인 반역자(?)의 상황을 뼈저리게 알게되고 되려 자기들이 총살대에 오르는 일이 적지 않았다. 사형을 남발해가면서 하급 장교와 헌병들은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병사들을 전쟁터로 몰아세우려 노력했는데 이 때문에 장병들에게 찍혀서 중앙의 통제가 닿지 않는 곳에선 헌병과 하급 장교가 ''' '실수' '''로 등에 총을 맞는 일이 빈발하는 등 말그대로 파리 목숨에 불과했다.
사실 참호전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직위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소대, 중대장급의 하급 장교들이었다. 끔찍한 환경 속에서 휘하 병사들을 독려해 공격을 지휘해야 하는데 병사들은 항명을 해대고 아무것도 모르는 윗선에선 계속 공격을 명령하고 소모전만 주구장창 하면서 휘하 부대원이 거의 전멸해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니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보통 공세가 시작되면 호루라기를 불며 병사들을 지도하고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참호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가는 인원들이 바로 이런 하급 장교들이었고, 당연히 참호에서 가장 먼저 나온만큼 가장 먼저 적군 사격에 쓰러질 확률도 높았다. 통계에 의하면 일반 사병의 사망률은 1/8 정도였지만, 귀족 장교들은 1/5 가량이 사망하였다. 오죽하면 '''하루살이 소위'''란 말도 있었을 지경.
단, 이는 일부 역량은 부족할지라도 어느정도 양심은 갖춘 지휘관들 한정이었고, 휘하 장병들의 목숨을 소모품으로 여기며 돌격하지 않으면 쏴버리겠다고 협박하거나 즉결처분을 남발하는 똥별 하급장교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사항이었다. 전쟁터를 탈출하기 위해 항구적 장애가 남을 정도의 자해를 하거나 일부러 괴저를 일으켰다가 열악한 의료시설 때문에 퇴역도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다.
덧붙여 전쟁의 포화가 미치지 않는 각국의 본토에선 '참호 연습장'이라는 명칭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둔 참호를 각종 군용 장비와 함께 민간인들이 관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참호 연습장이란 대체로 일반 공원에 있었는데, 시민이나 소위 상류층 사람들이 여기서 소풍을 즐겼다. 카페, 레스토랑, 전쟁영화를 상영하는 극장까지 두었다. 이런 것에 낚여서 '''진짜''' 참호전을 겪고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그렇게 죽어간 가족이 어떤 환경이었는지 모르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부모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 BBC 라디오 방송에서도 이러한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지금까지 적군에 맞서 장렬히 전사한 줄 알았던 고조 할아버지가, 알고보니 다쳐서 참호 안에 남겨졌다가 의무대로 옮기는 사이 눈먼 포탄에 죽었다고.
사실 참호라는 것이 계획표대로 구축되기만 한다면 비번일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게호라거나, 병사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는 야전취사장, 참호보다는 훨씬 쾌적한 후방의 숙영지, 이런 시설들을 연결하는 교통호 등을 모두 갖추게 되어 있고, 참호 안에 물이 고이는 현상 역시 배수로와 발판 등을 잘 설치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즉, 계획대로 잘 구축된 참호는 나름 아늑한 병사들의 보금자리로 봐 줄 수 있는 정도라는 것.
당연히 실제 전선에서는 배수로는커녕 총알을 피할 구덩이를 파는 것만도 힘에 부쳐 이런 부대시설이 전혀 건설되지 않았지만, 안전한 후방의 참호 연습장에는 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참호공원에는 카페, 레스토랑, 극장까지 갖춰져 있었다고 하지만, 원래 참호에도 카페나 레스토랑급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병사들이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고 작은 서재나 영사기 등을 갖춰 문화생활 및 휴식을 즐길 수 있는 휴게호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당시 부모가 전선의 병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휴일'''에는 가능하면 예배에 참석하고, 참석할 수 없더라도 기도는 꼭 드려야 한다'거나, '휴식 시간에는 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와 같은 현지 사정에 눈먼 황당한 조언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당시 적지 않은 유럽인들이 가졌던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 영웅주의적 관점과 소속 부대를 일종의 의사가족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이런 비정상적인 인식을 더욱 부채질했고, 차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하여 가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고 여긴 병사들의 심정과 정부 당국의 정보통제 및 우편검열, 그리고 대부분의 전투행위가 참호선에 집중되어 국내(후방)에는 전쟁의 불길이 미치지 않았던 전쟁의 전개과정 때문에 이런 참상이 후방의 가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4.1. 장교들


이런 처참한 상황을 몸소 겪어본 고위 장교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 통신 수단의 발달로 고위 지휘관들은 최소 몇km 떨어진 곳에 둔, 포격에도 안전한 벙커를 마련한 다음, 거기서 지도나 보며 작전을 지시했고, 참호전의 특성상 전선이 대규모로 급격하게 변하지 않아서 지휘관들이 굳이 안전한 벙커와 편리한 숙소를 버리고 최전선으로 갈 까닭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전방 지대는 오히려 수십 km의 전 전선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통신 수단이 없었으니 문제였다. 유선 전화야 있었지만 적의 공격 준비 포격이 참호 가까이 떨어지거나 하면 단선되기 일쑤였고, 이는 아군의 공격 때도 지속적으로 올라온 문제였다. 확보한 적의 참호에 유선 전화망을 가설해도 당연히 금방 단락되었고, 전선과의 통신은 문서 수발병을 거쳐야만 했다.
기껏 전방에서 일선 보고를 수합하고 상부에 보고한 뒤 상부가 계획을 세운 다음, 다시 일선 부대에 하달하면 상황이 끝난지 수 시간 뒤였다. 각 군 수뇌부 입장에서 수만 명에서 수십 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휘하는 핵심 지휘관이 통신 두절 상태에 놓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 정확하다.[18]
게다가, 관료제의 폐해로 전방의 장교들은 쓸데없는 서류 업무를 보느라 부대 지휘와 전투력 유지에 쏟을 시간이 줄어들곤 했다. 당장 부하 장병들이 포탄에 날아가는 와중에도 "귀 연대에 며칠 전 보급한 딸기 통조림의 수량을 실셈해서 보고하라.", "장성기를 휘날리는 차량이 지나가면 차 안에 아무도 없어도 무조건 경례할 것을 전파하라."처럼 쓸모없는 서류들의 지시 이행 독촉을 예사로 받았다.

5. 변명


이러한 비참한 상태가 지속되었던 이유는 각국 수뇌부들의 무능 때문만은 아니고, '''당시로서는 이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위력을 떨쳤던 폭격기도, 중전차도, 지진폭탄도, 대전차 로켓도, 현대의 벙커버스터도 없었다. 즉 땅을 파서 만든 참호를 뚫을 수단은 보병들이 닥치고 돌격하든지, 제2차 세계 대전의 포병 수준에 비하면 형편없는 포병,[19] 그리고 '''해안에서나 가능한''' 해군 함정의 포격[20] 밖에 없었다.
보병의 화력이라도 좋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단발식으로 쏘는 볼트액션식 소총을 쓰고,[21] 그나마 기관총이 대대별로 보급된 정도였다. 폭탄도 아닌 총기류였기에 참호에 틀어박혀버리면 '제압'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점령'을 할 수 없는 사태가 속출했다. 심지어 참호전의 해결사인 박격포의 경우에는 전쟁 중반에 등장한 스톡스 박격포가 등장하기 전까지, 구형 봄바드는 물론 심지어 투석기와 유사한 투탄기까지 사용하는 안습한 현장이 계속되었다(투탄기는 정숙성 때문에 이후에도 종종 사용되었다).
이론상으로는 포병의 철저한 포격과 그에 보조를 맞춘 보병의 진격을 통해 참호를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통신 수단이 월등히 발전한 현대에도 제병 합동 작전은 상당히 기교가 필요한데, 당시 통신 수준으로 봐서는 더 어려울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포병이 의미있는 사격을 하려면 탄착의 관측이 필요한데, 당시 광학 장비로는 포병 혼자서 탄착을 관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며, 이때는 레이더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레이더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이 최초로 실전배치하게 된다.)
참호전에서는 보병들의 백병전이 밥먹듯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군 오사가 일어날 확률도 매우 높아 대강 좌표를 알아도 마구 쏴 제낄 형편이 못 되었다.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곳의 적을 포격해야 하는 포병이 정확하게 목표를 타격하기란 불가능했으며, 보병을 이용해 목표 좌표를 확실히 확인하고 탄착 여부를 관측하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지만 적의 대응 사격이나 누전, 쥐에 의한 피해, 기타 사고, 발전하지 못한 통신 수단 등으로 인해 전선의 보병과 후방의 포병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통신을 주고받기 어려웠다. 그렇게 보조가 안 맞아서 일어난 일이 위에 말한 사태이다.
이런 점 때문에 초 단위까지 싱크로시킨 시계들을 이용해서 포격이 끝나자마자 돌격하는 방법을 써먹기도 했지만 기술력이나 착오, 또는 기타 이유들로 그 시계들이 싱크로되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청년들을 기관총 앞에 조공하거나 아군 포병대 밥으로 던져줄 수 있다는 문제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 갈리폴리 상륙전에서 일어난 일인데, 포격이 (보병부대 기준으로) 돌격 예정 시간 몇 분 전에 끝나버렸기 때문에 몇 분 후 보병 부대들이 돌격할 땐 이미 준비를 끝낸 투르크군의 기관총에 갈려나갔다. 물론 한 번에 돌격시켰을 리는 없고 여러 번에 걸쳐서 돌격시켰는데 처음 몇 번의 돌격에서 이 짓이 병사들이 기관총에 갈려나가는 개죽음이라는 걸 인지하긴 했지만 일단 사령부에서 돌격 명령이 내려왔기도 했고 어차피 기관총에 맞아 죽은 병사들은 말이 없기도 했기 때문에 '''2~3만 명에 달하는 청년들을 그냥 그대로 투르크군의 기관총 밥으로 던져주는 것 이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진짜로 75mm 구경의 포도 매우 희귀한 판이고, 양국 모두 총력전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 준비한 포탄도 부족하였다. 또한 당시 중포들은 특수 제작하여 전략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만큼 전선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힘들었으며. 전쟁 후반에서야 참호를 갈아엎어버릴 화력의 중포와 숫자를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보병과 포병의 이론상의 완벽한 유기적인 협동은 2차 세계 대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는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무선 통신이었다. 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유일한 장거리 송신 수단이 유선 통신 장비뿐이었고 유선을 안 쓰는 것은 깃발신호나 전서구 뿐이었다. 이러니 참호에 적을 몰아내고 나서 점령해도 증원이나 포격 지원을 할 수가 없었다.
좀 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 나온 때는 1차 세계대전 후반이었다. 연합군이 기존의 적 참호에 골고루 포탄을 뿌리는 방식 대신 모든 중포와 포를 총동원해서 한 지역에다 빽빽하게 퍼부어버리는 전술로 바꿨는데, 이러면 철조망이든 참호든 거기를 지키는 보병과 함께 아예 흙에 파묻어버리고 덤으로 유선 통신체계도 망가지기 때문에 효율적인 방어가 아예 불가능해진다. 이 전술은 매우 효율적이었고 이 방법을 통해 연합군은 독일의 철통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을 무너뜨리고 천천히 독일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
실제로 참호속의 병사들의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참호전은 병사들의 생존률을 엄청나게 올려준 전술이였다. 엘랑 비탈에 미쳐서 공격 의지가 참호의 방어력을 뚫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초기 프랑스군은 140만 전사자 중 60만명을 전쟁 첫해인 1914년, 그것도 5달만에 날려먹었다. 덕분에 실제 사상자 비율도 상당히 떨어졌는데, 사상자 수가 많았던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군인 사상자는 산업화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이 가능해져서 발생한 것이지, 비율로 따지면 나폴레옹 전쟁은 물론 남북전쟁 시기보다도 상당히 낮아졌다. 이걸 사람 대 사람의 검투나 격투에 비유하자면, 두 선수가 철저하게 가드를 올리고 대치한다면 서로 몇 대 때리더라도 치명상만큼은 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 대 사람의 충돌이 아닌 집단 대 집단의 충돌 상황에서 이러한 대치 상황을 유지하다보니 그 집단 속의 병사 입장에서는 목숨만 붙어있을 뿐 죽을 맛이라는 게 문제일 뿐이다(...). 쉽게 말해 참호전으로 고통받는 병사 개개인의 신세는 전장에서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철저한 소모품이라 할 수 있는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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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전투 사상율의 변화 - 출처: 무기체계와 전쟁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각국 수뇌부가 당시로서는 최선의 대응을 했다는 식으로 마냥 면죄부를 주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당장 프랑스군의 공세숭배(Culte de l'offensive) 사상만 살펴봐도 엄청난 막장인데, 공격제일주의의 창시자 그랑메종 육군 대령은 이런 사상을 극대화시켜 교본에도 "전통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육군은 공세 외에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같은 구절을 넣고야 말았다. 엘랑 비탈 사상으로 잘못 알려진 공격제일주의 교리는 전초 프랑스 육군의 극심한 인명 피해의 주범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육군 또한 포병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부정확하고 포탄은 품질이 낮았으며 지휘부에서는 피해 상황조차 제대로 모르는 등, 전장에서 다소 혼란이 있을 만함을 고려해도 도저히 옹호하지 못할 행태를 보였다. 이런 극심한 병력 소모로 인해 연합군 및 동맹군, 특히 영국과 독일은 여단~사단 규모로 해군 병력을 차출해 참호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진창에서 구르기 싫어서 병사가 아닌 수병을 택한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벼락이다.
덕분에 영국과 프랑스는 젊은 청년층을 너무 많이 잃어 뒷날 일어나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에 엄청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방어전 일변도로 나서게 된다. 분명 전투의 전사자 비율 자체는 줄었지만, 과거의 상비군은 민간인과 완전히 다르게 운영했던 반면, 1차 대전부터는 전쟁의 양상이 총력전으로 바뀌면서 투입 병력 자체의 규모가 비교하지 못할 만큼 늘었고 노동 인구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6. 피와 진흙의 요람


참호전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던 교착상태였으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양 진영은 계속해서 새로운 전술과 병기를 개발했다.
먼저 기존에 정찰 임무를 맡던 기병이 참호로 인해 그 능력을 상실하자 대신 기구, 그리고 신기술인 항공기를 활용하기 시작했다.[22] 후장식 대구경 장포신 곡사포[23]의 발달로 사거리가 무시무시하게 늘어난 포병은 이제 육안 관측이 아닌 이들이 정찰을 통해 찍어준 좌표에 맞추어 보이지도 않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포병은 전쟁 후반기에는 보병의 진격 속도에 정확히 맞춰 이동 화망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전술의 발전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항공 전력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처음에는 정찰로 좌표를 찍어주는 것이 목표였던 육군 항공대는 서로를 견제하려는 공중전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전술 폭격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가 된다. 바로 '''공군'''의 탄생이다.
포병을 활용한 참호 외부의 지원이 아닌, 참호 그 자체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시도 또한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연합군은 적 참호 지하까지 여러 개의 갱도를 파서 대량의 폭약을 매설하여 폭파시켜 보기도 했다. 공병을 이용하여 적 진지의 지하를 침하시키는 전략은 옛부터 종종 있었지만, 폭약의 발전으로 인해 단순히 적 진지를 '침하'시키는 정도로만 끝나지 않았다. 광산 노동자와 기술자들을 훈련시킨 후 공병 부대로 참전시켰는데, 이들은 참호 지하에 갱도를 파는 일 뿐만 아니라, 청진기를 이용하여 적 공병과 갱도 위치를 파악하는 일, 적의 갱도를 공격하거나 점령하는 일 등을 맡았다. 갱도 전쟁 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공병대가 참여한 60고지 전투가 매우 유명하다. 당시 전장이었던 곳에는 아직도 폭파되지 않은 거대 지뢰 2개소나 남아 있어서, 1950년대에 그 하나가 낙뢰로 폭발한 적도 있다. 덕분에 참호와 그 파괴 공작을 위한 이런 대공사를 거치면서 공병은 전에 없이 큰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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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는 양측에서 수 없이 발생하였으며, 상대의 효과적인 방법을 재빠르게 흡수하기도 하였다.
독일군은 참호 안의 병력 그 자체를 무력화하기 위해 '''독가스'''를 살포하기도 했으며, 기관총 진지나 포대 같은 고가치 목표를 공략하도록 부대 단위를 소규모로 줄여 수류탄과 경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돌격대'''를 창설했다. 적 거점을 빠르게 소탕하고 후퇴하는 돌격대의 전술에는 다른 참전국들도 감명받아 그들만의 돌격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한편 연합군의 경우 기관총에 방호력을 갖추고 더 확실한 지원 화력을 지니게 함으로써 보병을 전진시키기 위해 Mk 시리즈 등의 '''전차'''를 발명하여 투입했다. 독일군도 Mk 시리즈에 대항하기 위해 A7V 같은 전차를 만들긴 했지만, 그다지 좋은 성과를 거두진 못하였다.
이 모든 난장판이 끝난 뒤, 1918년의 각국 군대는 이미 1914년 처음 전쟁을 시작했던 때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군대가 되어 있었다. 보병과 기갑, 항공, 포병이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적의 전선을 돌파하고 목표를 타격하는 현대전의 기본적인 양상이 바로 참호전이라는 강철과 진흙, 피로 도배된 요람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끔찍한 참호전 속에서 교훈을 얻은 인류는 항공기, 전차, 공병과 전술적 타격이란 개념을 만들고, 2차대전에서는 아예 최소한의 피해로 분쟁을 종결시키고자 핵무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저 비상식적인 위력의 핵무기의 탄생이 오히려 전쟁을 방지하는 강력한 억지력으로 자리잡아 2차대전 이후 강대국과 강대국간의 전면전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7. 왜 서부전선에서만 생겨났나?


동부전선과 발칸, 중동에서는 참호전이란 상황이 없었다. 서부전선에 비해 지형이 험해 전선이 엄청나게 길고, 보급도 서부에 비해 형편없었기 때문.
원래 전쟁은 보급이 핵심이다만 참호전은 다른 전투양상보다 보급이 훨씬 더 중요했다. 참호전 상황에서는 사망자도 많지만 소모되는 생필품 수량도 엄청나게 많았다. 전쟁이 몇년씩 장기화되며 도시에 생필품 부족현상이 길어졌고 민간인 삶의 질이 낮아지게 되었다. 하물며 동구권 국가들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부유한 나라도 아니었고 러시아는 민심이 최악이었다.
보통 1차대전 동부전선은 러시아의 엄청난 수의 야포가 떠오를 수 있는데, 이건 재정이 나빠져 기관총같은 신문물을 들여올 수 없어 낡은 무기를 다 동원한 것 뿐이다.[24] 동부전선에선 연합국과 동맹국 양측 모두에게 충분한 기관총이 사용된 것도 아니라 기관총 유효 사거리 이내에서 교착상태에 빠지는 일도 적었다.
그래서 설령 참호로 된 전선이 형성되더라도 중간지대가 너무 넓어서 그 안에 사는 민간인들이 평상시의 생활을 유지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동부전선 등에서는 전차 등장 이전부터 장갑차가 전차 노릇을 하며 활약했고, 전통적인 기병도 현역으로 활용되었다. 기관총과 참호, 전차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기병이 계속 존속했던 것은 이러한 서부전선 이외 전역에서의 경험 탓도 있다.
그렇다고 동부전선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서부전선의 병사가 시체와 진흙 사이에서 구르며 참담한 식사를 해야 했다면, 여기 병사는 눈 먼 포탄 세례를 피하느라 아무것도 못먹고 굶어야 했으니.

8. 기타


참호전의 생생한 묘사를 알고 싶다면 에리히 M.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보자.
그 외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광의 길, 최근 영화로는 프랑스 영화 '인게이지먼트(Un Long Dimanche De Fiancailles, A Very Long Engagement)'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워호스(War Horse)'가 참호전의 완벽한 재현을 보여준다. 1917에서도 당시의 참호전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파스샹달 전투를 다룬 폴 그로스 감독의 2008년작 영화 '파스샹달(Passchendaele)'의 참호전 장면.
주인공들은 왕립 캐나다군 소속이다. 물론 영국군들도 많이 섞여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는 병기도 전술도 달랐지만 '참호전'은 고대부터 있었다. 고대부터 체계적이고 효율성 높은 모습을 보였던 로마 군단의 경우, 야전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개인 무장에 야삽이 포함되었다.[25]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상 최초의 참호전은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쓴 것이었다. 그는 첫 번째 회전에서 참호에 병사를 대기시킨 뒤 미트리다테스군을 맞아 싸워 격퇴하였고, 두 번째 회전에선 참호를 판 뒤 미트리다테스군을 그 쪽으로 몰아붙여 승리할 수 있었다. 삼국지의 조조도 참호를 이용하는 전투방식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는 완성 전투에서 장수와 싸운 뒤 패주하는 과정에서 추격해온 유표, 장수 연합군을 맞아 참호를 팠다. 그 뒤 병사를 그 밑에 대기시켜 연합군이 다가오자 그 참호에서 병사를 내보내는 기습작전으로 성과를 거뒀다. 또한 이슬람을 세운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쳐들어온 메카의 원정군을 상대로 참호전을 펼친 끝에 이겼다는 기록도 있다.
서유럽 전역에서 참호전이 펼쳐졌던 만큼, 프랑스의 베르됭 같은 지역에서는 지금도 참호전의 흔적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움푹 파인 불규칙적인 구덩이와, 언덕 곳곳에 남아 있는 참호의 흔적, 포격으로 파괴된 요새와 마을의 모습은 배틀필드 1에 등장하는 광경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조금만 걸었을 뿐임에도 다양한 모습을 지닌 참호들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한편 베르됭과 같은 몇몇 격전지에는 인류사에 대한 기록과 반성의 의미로, 몇몇 장소를 출입제한하고 있다.[26]
미니어처 게임 워머신의 국가 시그나에서는 참호전 당시의 병사의 모습을 딴 참호병이라는 병과가 있다.
독일군은 참호를 만들 때 '''모서리를 무조건 90도로 각을 맞춰 팔 것'''이 교범이었다. 심지어는 병사들이 지나다니며 모서리가 닳는 것도 철저하게 다시 각맞출 것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이 이랬던 이유는 다름 아닌 '''박격포 등이 참호에 떨어졌을 시 모서리가 90도인 참호라면 인명손실이 줄어들어서'''였다. 당시에는 이 사실을 독일군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야, 독일 애들은 참호도 각 맞춰서 파네, 힘들겠다."로 대충 넘어갔는데 Mythbusters에서 실험해본 결과 '''정말 폭발 충격파가 모서리에 부딪혀 사라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저격수를 교란하는 한편 그 저격수의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참호 위에 가짜 머리를 달아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양쪽 다 주기적으로 최전방 참호에 있는 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시켰다.[27] 아무래도 체력 소모가 심한 편이니 인력이 되면 계속 교대하는 건데, 이것도 예외 상황은 있는지라... 어떤 부대는 '''6달 동안''' 최전방 참호에서 지내야 했다.

9. 현대의 참호전


초기 총력전에서 공중전과 기갑전력이 많이 소진되고 진격이 어려워 독가스까지 쓰인 이란-이라크 전쟁의 후반부에 참호전의 양상이 보였다.
걸프전 당시 이라크군은 '대포밥 전술'로 2선급 부대들을 참호에 배치한 뒤 소모전이 발생하면 후방에 대기중이던 1선급 부대로 미군을 격퇴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미군은 GPS를 이용해 수백km가 되는 거리를 우회해서 사막에서 전혀 낙오되지않고 기동했으며 이라크군이 구축한 참호와 벙커들은 미군의 전차, 포병, 항공기의 공습에 녹아내렸다.
이와같이 현재는 폭격, 벙커버스터, 전차 등 '''고착상태를 타개할 방법이 차고 넘친다.''' 현대전에서는 1차 대전 이래 참호를 돌파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면서 각종 화기 및 기갑과 항공 전력이 발전해, 대규모 참호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 산악 지대라면 참호 형성 자체를 못하고,[28] 평지에서는 참호를 돌파할 수단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당장 박격포와 자주포 등 곡사화기의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였고, 공중폭발탄 등 신형 포탄이 대거 등장하여 포격만으로도 피해가 막심하다. 그리고 공격 측이 제대로 작정하고 항공폭탄급 열압력탄이나 소이탄을 떨어뜨리면, 참호는 그대로 무덤으로 변한다. [29]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아르메니아의 참호를 아제르바이잔이 무인기로 가볍게 날려버린 사례도 있다.
그럼에도 지형적 유리함을 선점할 경우 갖는 장점은 여전한지라, 여전히 현대에도 쓰이고 있다. 또한 비록 엄밀히는 교리도 형태도 전술도 다르지만, 자연 및 인공적 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자의 철저한 은, 엄폐 하에 공격자는 지형 및 노출의 불리함을 안고 보병 중심의 전력으로 대치 및 교전을 통해 조금씩 전진한다는 면에서 비슷한 시가전이나, 애초에 양상부터가 전혀 다른 전장인 기동전바로 다음 전쟁부터 새롭게 나타났다.
그래도 소규모 지역공동체들의 내전이나 국지전이면 아직 참호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기갑과 공중전력이 부족한 빈국들간의 전쟁에서 참호전의 양상이 재래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1998~2000년에 있었던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이 있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간간히 보인다.#[30] 이 영상의 참호는 이슬람 반군 "자이쉬 알 이슬람"이 내전 초기부터 구축한 '죽음의 선'이며, 결국 돌파당할 때까지 시리아군과 공화국 수비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시리아의 사례는 공격 측이 넉넉한 화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정이 못 된다면 참호는 여전히 유효한 방어수단인 것을 증명해주는 셈이다. 지금도 한국 육군에 장교나 부사관으로 임관해서 소대전투 전술을 배우거나 병사로 최전방에서 훈련이나 전시에 진지가 참호인 부대들로 자대배치 받으면 저 내용과 전혀 다른게 없는걸 배운다. 아니, 최전방의 경우 아예 보병이 하는 훈련이 '''기동전, 참호전하고 시가전밖에 없으며''' 그나마의 기동전도 부대이동하다가 기습당했을때 대응하는 수단으로 쓰기위한 수준이나 공격시 적의 진지의 약점을 찾기위한 수단 정도로만 쓴다. '''메인은 참호전이고 시가전은 뒷전[31](...)'''이다.


[1] 빵을 흰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분필 가루를 섞었다.[2] 기관총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걸 보병이 맡느냐 포병이 맡느냐로 논쟁이 벌어졌다.[3] 참호와 무인지대 간의 거리도 각국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가령 영국은 적 참호와 최대한 가깝게 건설하여 무인지대를 최대한 줄이는 것을 주 전략으로, 프랑스는 무인지대를 최대한 연장시키고, 포병 화력으로 적을 타격하는 쪽을 선택했다.[4] 이는 프랑스 만화가 자크 타르디의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잘 묘사된다.[5] Childers Reforms을 기반으로 한 이 정책을 팔스라고 한다.[6] 왕립 해군 사단 특유의 방서모를 착용하고 있다. 이들은 1916년 이전까지 영국 해군해군 육전대로 활동해 왔으며 이후 해상 활동이 줄어들고 지루한 참호전이 전개되자 육군으로 편입된다. 본 사진은 그 유명한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돌격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7] 특히 전쟁 초기 프랑스 육군의 군장은 어깨와 머리 위치에 철제 취사장비를 배치하였는데, 철제 취사장비가 만들어낸 반사광은 프랑스군의 개성 강렬한 군복과 더불어 은엄폐에 큰 지장이 되었다. 이 영상을 보면 딱히 맑은 날씨가 아님에도 프랑스군 병사들의 철제 반합이 매우 밝게 반짝여 거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을 해봐도 알 수 있는 것이, 그냥 천으로 된 파우치같은 것을 만들어 지급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8] 양면전쟁을 겪는 독일의 입장상, 인력난 또한 매우 심각하였다.[9] 상대 참호를 점령하거나, 포탄을 매설해 날려버리려는 목적이었다. 청진기를 들고 땅의 진동을 감청하거나 방어용 땅굴을 뚫어 땅굴을 파고 들어오는 적군을 날려버리기도 했다.[10] 물론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의 구시대적인 기사도와 맞물려 '공격도 안나가면서 편하게 기관총이나 쏴갈기는 겁쟁이들'이란 멸시를 받아야 했다.[11] 그러나 전쟁 후기에 영국군의 손에서 나온 스윈턴과 처칠의 최종병기는 무한반복을 끝내는 데 일조했다.[12] 간접적 자해는 적 저격수가 맞추도록 일부러 팔다리를 참호 위로 내밀어 부상을 입는 것. 당연히 죽을 확률이 높으며 산다해도 여차하면 과다출혈로 죽는것이다. 즉, 죽으나 마나니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것이다.[13] 우스워 보이지만 현실에서 저렇게 되면 그냥 좀 아픈정도로는 안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실제 농기구나 연장, 판자등을 바닥에 둘 때 주의해야할 사항이다.[14] 사실 위에 천을 깔거나 비교적 후방 지역에서 시행하는 등 하고자 하면 방법은 많다. [15] 혹은 불을 피우지 않고 찬물 목욕을 하는 것은 일선 참호에서도 무난하게 가능할 것이다. 겨울이면 얼어죽으니 불가능하겠지만 여름이라면 그럭저럭 할 만했을 것이다.[16] 이를 역이용해서 일부러 신체 일부분만 참호 밖으로 내놓고 저격을 당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극단적인 자해를 택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한 병사들 중 적지 않은 수는 과다출혈로 사망하거나 치료의 미비로 항구적 장애를 입게 되었다.[17] 그런데 정작 최전선에서 참호전을 직접 겪고 있던 각국 군대의 병사들은 증원군이 전선에 도착하면 "이 바보들아! 너희들 때문에 전쟁이 더 길어지게 생겼잖아! 여긴 뭐하러 왔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참호전을 겪고 나니 지옥 같은 전쟁 그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전황이 어떻게 되건 그냥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병사들이 많아졌는데, 그런 병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증원군의 도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옥 같은 참호전을 계속 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18] 이와 반대되는 사례로는 봉천 전투 당시의 일본군 3군이 있는데, 상부의 강요에 의해 사령부를 전선에 밀착시켰다가 러시아군의 역공에 걸려 핵심 지휘부가 전멸당할 뻔 했다.[19] 일단 포의 사정거리가 길지 않았으며, 대구경 고폭탄을 운용 가능한 중야포의 수는 굉장히 적었다. 거기에다가 포병 교리가 미성숙해서(포병 교리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성숙해진다) 솜 전투와 같이 포격은 열심히 했는데 장애물이 전혀 제거가 안되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20] 이 당시 세계 최강의 전함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장착된 15인치 Mk-I 주포는 사거리가 26.5km 정도였다. 즉, 포격 지원을 해주고 싶어도 해안 인근이 아닌 이상은 타격할 수 있는 지점에 제한이 너무 크다. 게다가 이런 해군의 주력 전함들은 화력지원 같은 하찮은(?) 임무에 투입할 여유가 없는게 당시 영국 주력함대는 제리 놈들을 견제하기에 바빴기 때문. 만약 화력 지원을 하다가 재수없게 기뢰에 걸려서 전함을 무의미하게 상실하기라도 하면 그로 인한 타격은 심각할 수 밖에 없다. 다르다넬스 해전에서 전함 3척이 기뢰에 접촉해 침몰하자 피셔가 기를 쓰고 신형 전함을 도로 빼온 이유도 이거다.[21] 반자동소총이나 자동소총같은 과도기적 형태의 자동화기들 자체는 1차대전 이전에도 존재했고, 군부도 이에 대한 유용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1차대전 때도 일부 채용되기는 했으나, 문제는 채용 시기. 전쟁 후반기에나 채용되어 최전선에서 제대로 활약할 일이 드물었고 수량도 적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자동화기가 사용된 전쟁터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라고 정의할 수 있다.[22] 다만 항공기도 1차 세계대전 무렵엔 별로 안전하지 않았다. 비행 속도가 느려 기관총이나 대공포도 아니고 소총에 맞고 격추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23] 장전을 뒤로 하기 때문에 포신을 길게 만들 수 있다.[24] 물론 러시아군도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기관총의 유용함을 알고 있었고 맥심 기관총을 국산화한 PM M1910과 같은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당 기관총은 사격 방향을 바꾸기 위해 가대 전체를 움직여야 하는 등 여러 한계가 있었고 (이 문제는 소련 성립 후 개량을 거쳐 개선된다) 수량도 그리 넉넉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며 경기관총은 외국에서 공여받은 소수의 루이스 경기관총이나 쇼샤 경기관총 정도를 운용하였을 뿐이었다.[25] 다만 고대 로마군이 그랬듯, 장비는 개인이 구매하여야 하였다.[26] 백년이 지난 현재에도 발견되지 않은 불발탄이 남아 있는 현실적인 위험 때문이기도 하다.[27] 짧게는 하루 이틀, 보통 2주 안에 교대했다.[28] 특히나 화강암질이 대부분인 한반도의 산 같은 경우 폭약 없이 보병만으로 땅을 깊고 길게 파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참호가 파여있는 곳은 산 중에서도 토양이 많아 삽이 박히는 곳 정도 뿐이다.[29] 열압력탄이 아니긴 하지만 미군이 데이지커터로 이라크군의 참호와 지뢰밭을 통째로 날려버린 사례도 있다.[30] 해당 영상은 2018년 시리아군의 고타 주 공세 당시 영상이다.[31] 정확히는 그냥 길가다가 마을 지나는 중에 기습받을때나 하는 것 아니면 대침투작전(훈련)때 하는것 취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