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삼국지)
1. 후한 말의 인물
楊琦 또는 楊奇
생몰년도 미상
1.1. 개요
홍농군 화음현 사람으로 자는 공연(公挺)이지만 공위(公偉), 공작(公綽)이라고도 한다.
증조부는 태위 양진(楊震), 조부는 양진의 장남 양목(楊牧)으로 아버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제 때 시중을 지냈고 영제가 하루는 양기에게 '짐과 환제를 비교하면 그 우열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했다. 이 때 양기는 아첨을 하지 않았기에 영제는 불쾌해하면서 '역시 양진의 후손이다.'라고 하며 여남 태수로 전출시켰다.
영제 사후 동탁이 집권하고 헌제가 즉위하자 중앙으로 복귀해 시중, 위위에 임명되었고 동탁이 장안으로 강제 천도하자 수행했으며, 동탁이 죽고 195년에 헌제가 이각에게 끌려가자 헌제를 비롯한 백관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에 헌제는 양기를 시켜 이각에게 쌀 5섬과 소뼈 5인분을 요청했지만 일부러 이각은 썩은 쌀과 썩은 소뼈를 보내 야유했으며, 헌제가 분노해 힐책하려고 하자 이각이 하는 행위에 대해 참으면서 그의 분노를 사 죄를 더욱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상주했다.
양기는 종요와 함께 이각의 부장 송엽(宋曄)과 양앙(楊昂)을 배반시키는 것에 공적이 있었고 이각과 곽사의 내분을 틈타 헌제를 모시고 장안에서 탈출했으며, 도중에 곽사의 군대에 포위되었지만 동료였던 시중 유애(劉艾)와 함께 수레의 휘장을 높게 들었고 헌제는 곽사군을 향해 지존을 감히 침범하냐고 해서 곽사군을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후 양기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헌제가 조조의 비호를 받아 허창으로 천도하자 헌제는 양기의 공적을 인정해 그의 아들 양량(楊亮)을 양성정후(陽成亭侯)에 봉했다.
1.2. 창작물에서
삼국지연의에서 행적은 거의 비슷하지만 가후의 사람됨을 보고 황제에게 그를 불러 이각, 곽사를 제거할 계책을 묻게 했다. 헌제가 이각, 곽사가 싸우는 틈을 타 탈출하면서 패릉에 이를 때 곽사의 군사들이 오자 천자의 어가가 지나는데 누가 감히 막느냐고 하거나 추격한 두 장수가 천자의 어가라고 하시니 직접 황제를 뵈야 믿을 수 있다고 하자 구슬로 꿰어 만든 발을 높이 젖혀 확인시켜줬다.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3에 등장한다. 그런데 헌제의 아버지 때부터 시중으로 임명될 정도의 신하를 젊은 장수로 등장시켜서 시나리오6까지 계속 등장할 정도다. 초기 삼국지 시리즈의 고증 부족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유저 패치에서조차 수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삼국지3의 사정은 더 복잡하다. 애초에 시중이라는 직책을 지낼 정도의 인물이 동탁 휘하 시나리오에서 연령이 10대라는 말도 안되는 부분을 보여주는데다가 초반 시나리오에서는 동탁 세력에 소속되어 있다 조조 휘하 문관으로 계속 등장하는 걸로 봐서는 아래 항목의 두명의 양기가 합쳐진 것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퓨전?)
두 명 다 생몰년도가 확실치 않다 보니 초기 삼국지 시리즈의 고증 부족 탓에 생긴 일인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한말패업에서 등장해 군사 51, 무용 36, 지모 64, 정무 56, 인사 65, 외교 71의 능력치로 145년생으로 나온다.
2. 중국 삼국시대의 인물
楊曁
생몰년도 미상
위나라의 인물. 양조의 아버지. 자는 휴선(休先). 형양 사람.
228년에 조예가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오를 공격할 때 사마의는 한수를 따라 남하하고 조휴는 다른 군사들을 이끌고 심양으로 진격했는데, 조휴가 주방의 거짓 항복에 속아 적진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패하자 조휴가 조예에게 글을 올려 사죄했다. 이 때 둔기교위를 지내면서 조예의 명에 따라 양기는 사신으로 파견되어 조휴를 위로하는 조칙을 내리고 더욱 후하게 예물을 하사했지만 이 일로 조휴가 화가 겹쳐서 등창으로 죽었다.
태화[1] 말에 조예가 공손연을 토벌하려 했지만 적임자를 고르기 어려웠다. 이 때 중령군을 지내고 있던 양기는 전예를 추천한다. 과연 같은 해에 전예는 오에서 공손연에게 파견했다가 오히려 배신을 당하고 돌아온 사절들을 중도에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동소와 함께 조조의 한중 정벌에 대해 올린 표가 있는데, 조조가 한중을 정벌한 것에 대해 직접 친정해서 조조가 싸운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로 인해 장로의 수비가 무너졌다는 내용의 표를 올린 적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엽이 나라의 대사를 논하면서 군사를 부리는 일에 속임수가 있어야 했기에 유엽이 조예에게 촉을 공격하라고 권했다가 대신들 앞에서는 촉을 치면 안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양기가 조예에게 이는 폐하를 속인 것이라면서 어째서 폐하께서 그를 불러 묻지 않냐고 했다.
[1] 227-23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