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예
田豫
(171 ~ 252)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국양(國讓)으로 유주 어양군 옹노현 사람이다.
연의에서의 등장이 너무 빈약하여 존재감이 없지만 그 활약상은 어느 세력에 대입해도 에이스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
2. 정사
초기에는 여러 세력을 전전하는, 다사다난한 생활을 보냈다.
본디 젊었을 적에는 공손찬에게 의탁한 유비의 수하였다.[1] 전예전에 따르면 전예가 '''스스로''' 의탁하여 섬겼다고 하니 당시 유비의 상황이 상당히 불안정했음을 감안하면 그에게 상당히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유비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후 유비가 도겸에 의해 예주자사가 된 194년 무렵에 고향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유비와 헤어졌는데 이때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면서 "그대와 더불어 함께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함이 한스럽구려."라고 말하면서 무척 아쉬워했다. 이후 공손찬을 섬겼으며, 공손찬 휘하에서 천주현[2] 을 지켰는데, 공손찬의 수하였다가 원소에게 투항한 장수 왕문이 군사 만여 명으로 공격하자 전예가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왕문은 부끄러워해 돌아갔으며, 이 일로 공손찬은 전예에게 권모가 있음을 알았지만 중용하지 않았다. 성급하게 원소와 싸우려는 공손찬을 말렸지만 무시당했다가 결국 공손찬이 멸망하자 선우보의 밑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선우보가 누굴 따르는 것이 좋은지 묻자 필경 조조가 이길 것이라 해 조조를 따르도록 했다.그대는 공손씨의 은혜를 입고도 떠났지만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었소. 그러나 다시 돌아와 이처럼 공격하는 것을 보니 그대가 한낱 배신자에 지나지 않음을 이제야 알게되었소. 대저 보잘것 없는 지혜를 가진 자라도 자기 것을 지키며 쉽게 내어주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나는 이곳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소. 어찌 속히 공격하지 않는 것이오?
208년에 조조가 승상이 되자 부름을 받아 승상공모연으로 임명되었다가 낭릉 현령과 익양태수 자리에 있을 때 가는 곳마다 공이 있었으며, 218년에 조창이 이민족을 토벌하러 갈 때 대군(代郡)을 치며 전예를 상(相)으로 삼았다. 군대가 역수(易水) 북쪽에 주둔하자 이민족이 기병을 복병으로 두었다가 공격하니 군인들이 요란해져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전예가 지형에 의거하여 수레로 둘러싸 원진[3] 을 만들면서 그 안에서 군사들이 활과 쇠뇌를 가득 당기고 의병(疑兵)들을 그 틈에 채워두었다. 이민족들이 진격하지 못하고 흩어져 물러나자 이를 뒤쫓으며 대승을 거두었고 마침내 대를 평정했다. 조창을 도와 대를 토벌한 것은 모두 전예의 계책 덕분이었다.
이후 남양태수로 승진하는데 남양태수로 지낼 때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자 완을 점령해 그로 인해 수많은 도적 떼들이 생겨나 민심이 흉흉했는데, 전 태수가 그 중 500명을 붙잡고 전예에게 자랑하면서 "병사들의 사기와 저런 놈들이 다시는 없도록 본보기를 위하여 몽땅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히려 전예는 그들을 좋은 말로 타이르고 그대로 풀어줘 그 소문이 널리 퍼져서 후음의 군단이 해산하고 도둑들이 싹 사라졌다.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오환교위 지절이 되어 오환족을 감독하는 역을 맡았으며, 그는 이이제이의 전법을 기본으로 삼아 그들을 상대해 소리가 말 천필을 중국에 관에 보낸 일로 가비능에게 공격을 받자 전예는 그를 도와주러 갔다가 너무 깊숙한 곳으로 가 귀로가 끊기게 된다.
이에 전예는 소똥과 말똥을 태워 불을 환하게 유지해 군사가 있는 것으로 위장해서 빠져나왔으며, 적이 뒤쫓아 다시 마성에서 포위되자 남문으로 큰소리를 내어 나가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북문으로 나가 적을 공격해 예상치 못한 상대의 군대를 대파한다.[4] 오환왕 골진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전예는 백여기 만을 이끌고 골진의 진영으로 가서 그의 목을 베고 빠져나오자 모두 두려워해 감히 행동하지 못하고 골진의 동생에게 골진을 대신하게 했을 뿐이며, 이후로 전예의 위엄에 호인들은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산적 고애가 노략질을 하자 선비족의 소리를 보내 고애를 배게 했으며, 이 공으로 전예는 장락전후에 봉해졌다. 공손연이 배반할 때 조정이 오나라와 공손연의 연계를 두려워 해 양기의 추천으로 전예에게 일을 맡기자 산동반도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텅 빈 땅에 진을 치고 있으니 사람들이 다들 미쳤다고 여겼으나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주하 등 공손연에게 갔다가 돌아오는 오나라 사절이 산동반도에 표류하자 몽땅 다 잡아들인다.[5]
234년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때 손권이 10만 대군을 칭하며 촉과 함께 양동 작전으로 신성을 공격하니 만총이 곧장 신성을 구원하려 하자 전예는
라고 조예에게 진언한다. 당시의 상황에 비춰 적의 의도를 파악해 구태여 급하게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이길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한 것인데, 이 자체만으로 이미 상당한 식견을 드러낸 것이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층 더 나아가적이 모든 부대로 대거 출군한 것은 단지 작은 이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담보로 하여 우리의 대군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공성하도록 내버려두어 그 예기를 꺾어야 마땅하고 그들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성이 함락되지 않아 적군은 필시 피로하고 나태해질 것이니 파태해진 연후에 적을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아예 손권의 전략과 행보를 완전히 예측한 듯한 의견을 피력하였고 조예가 이를 따르니 과연 그 말대로 손권은 도주하였다. 정말로 골든전예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초절정 간지'''라 아니할 수 없다 .만약 적이 우리의 그런 계책을 알아챈다면 필시 공성하지 않고 '''형세상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만약 곧바로 진병하면 적의 계책에 그대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또한 대군이 서로 상대할 때는 응당 알기 어렵도록 해야하며 자획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경초 연간(237 ~ 239년)에 식읍이 3백 호가 늘어나 5백 호가 되었으며, 232년에는 진이장군을 지내 겨울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 대장 주하를 성산에서 토벌하고 죽였지만 정희의 참언 때문에 공적이 거론되지 않았다. 정시(240 ~ 248년)에는 사지절, 호흉노중랑장, 진위장군, 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에 호인들은 예전에 그의 위명을 따라 서로 뒤따르며 헌상했고 후에 위위가 되었다가 여러 번 사직을 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결국 병이 위독하다고 해 태중태부의 벼슬에 임명되었다가 252년에 향년 82세로 죽었다.
청렴해서 포상은 언제나 장사들에게 흩어주면서 호와 적이 보낸 사사로운 선물은 모두 장부에 적고 관에 보관할 뿐 자기 집에 들이지 않아 집안이 늘 가난했다. 비록 그와 다른 부류의 사람일지라도 모두 전예의 절의를 높게 여겼을 정도였다.
그의 청렴함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선비족 소리 등이 바친 소와 말은 언제나 관으로 보냈는데, 전예가 가난한 것을 불쌍하게 여긴 호가 금 30근을 바치면서 집안의 재산으로 삼으라고 하자 소매를 펼쳐 받았다가 돌려보낸 뒤에 관에 바치니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칭찬한다.
그리고는 비단 5백 필을 하사했다. 전예는 하사품을 받자 이를 나누어 그 중의 절반은 소부에 간직하고, 뒤에 호가 다시 왔을 때 나머지 절반은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옛날에 위강[6]
은 가슴을 열어 융의 뇌물을 받았는데 이제 경은 소매를 들어 적의 금을 받았으니 짐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또 여남에서 그가 쇠약해졌다는 말을 듣고 비단 수천 필을 모아 전예에게 줬지만 받지 않은 일도 있었다. 전예가 죽으면서 말하길 서문표와 같은 길을 걸었으니 그와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서문표의 사당 옆에 묻을 것을 분부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아주 짤막하게 등장하는데 제갈량의 북벌 때 손권이 양양을 공격하자 조예가 양양으로 파견하여 수비하게 한 게 전부다.
4. 평가
전선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훌륭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심리전의 대가로서의 면모. 북방에 주둔하면서 이민족들의 이합집산을 교묘하게 통제시켰다. 행적을 보면 기후를 예측하는 능력이나 대기병 수레방진을 이용하는 능력도 있었던 듯.
전예는 조운과 더불어 공손찬군 출신 중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성공한 사실상 둘 밖에 안되는 케이스로,[7] 공손찬이 패망한 후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적잖은 공을 세워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세수 여든이 넘도록 오래 살아 그 활동 시기도 군웅할거#s-1 시대부터 제갈량의 북벌 종료에 이를 정도로 장구하다.
비록 연의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아 인지도가 떨어진 탓에 이따금 듣보잡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면모들을 보면 가히 '''특급 인재'''였다 할 수 있겠다.
5. 미디어 믹스
5.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image]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연의에서 비중이 없기에 다른 여타 연의 관련 매체에 비하면 실루엣으로나마 등장했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5.2.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한때는 삼국지 갤러리의 꾸준글에서 유래한, '''완전소중 골든전예'''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삼국지 커뮤니티 전반에 떠받들어지는 아이돌이었다.
시나리오 2부터 등장하고 위에 생몰년도처럼 고평릉 사변 이후 2년까지 매우 오래 살고 능력치도 통솔력과 지력이 80대 초반에 무력과 정치력은 70대 초반을 찍는 다재다능한 A급 장수이다. 군웅할거(195년)와 여포토벌전(198년) 시나리오에서 공손찬군에서 조운에 이은 No.2 장수이고 조운이 유비 소속으로 있는 영웅집결에서는 공손찬 군의 에이스다. 고증을 따지면 190~194년 사이 시나리오에선 유비군에 속해야 하는데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운, 전예가 빠지면 힘들어지는 공손찬군의 밸런스 문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삼국지 8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당시에는 '전여'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열전을 살펴보면 전예를 소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는 무력 63,/지력 58/정치력 62/매력 58에 전법도 불화살과 난사밖에 없는 잉여 장수이고 일러스트도 매우 못나게 나왔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6/무력 71/지력 78/정치력 74이다. 그리고 골든전예의 일러스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궁기 최강 병법인 비사를 가지고 있다. 비사 외에는 돌파, 파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성이 아예 유비로 맞추어져 있는 것도 특이점. 그래서 서서, 방덕과 함께 후방인 데다 충성도 100인데도 어느날 갑자기 제갈량이 와달라고 슬그머니 청하면 홀라당 유비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는 쓰리탑이다. 여하튼 상성이 유비라는 점으로 인해 낚아오는 데 성공만 하면 유비군 유일의 비사 보유 장수로 진정한 골든전예의 위용을 볼 수 있다. 공손찬을 정복할 경우 공손찬, 엄강, 전예, 공손월, 선경의 비사연쇄부대를 운용하면 공성전에서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반드시 등용하게 되는 장수.
삼국지 10에선 능력치가 무력을 제외하곤 삼국지 9 때보다 조금 상향되어 통솔력 80/무력 62/지력 83/정치력 72/매력 75이고 보유한 특기는 농업, 보수, 치안, 화시, 진정, 은밀, 반목, 지리, 반박로 총 9개다. 지력이 제일 높지만 기술 특기가 없고 무력이 제일 낮은데 보수 특기는 있는 등 특기 배분은 조금 불만족스럽지만, 치안 특기가 있고, 통솔력이 80인지라 전장에선 유용하다. 공손찬군이라면 조운에 이어 단연 넘버 2이며 유비군, 조조군으로 가면 인재가 많아 조금 묻히지만 출사표 시나리오까지도 살아있기 때문에 이때쯤 되면 눈에 띄는 급은 된다.
삼국지 DS에서는 수군 지휘 70외에는 삼국지 10의 능력치로 나온다. 역시 조운과 함께 공손찬의 양대 에이스. 책사도 겸한다. 숨겨진 능력치는 의리 66, 야망 8, 행운 8, 냉정 10, 용맹 7 수명 B. 그러나 다른 시리즈와 달리 비교적으로 수명이 짧다.
삼국지 DS 2에서는 나오기는 하는데 '''SP 무장'''이라 실질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능력치는 통솔력 82/무력 72/지력 85/정치력 84/매력 79, 특기와 전기는 정보, 제조, 화공, 궁장, 화계, 낙석, 동토, 혼란, 수복, 매성, 허보, 난사, 연사.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0/무력 72/지력 80/정치력 78/매력 75이고 병과 적성은 노병, 기병, 병기 적성이 A. 특기로는 오환족 등 이민족 토벌에 능했던 것을 반영했는지 친오라서 영 잉여스럽다. 그래도 전 능력치가 70 이상이라 전 장수 중 능력치 총합이 장임과 함께 30위이다. 통솔력과 지력이 80인지라 쓰기도 괜찮으며 다른 능력치들도 어느 하나 심하게 떨어지는 건 없는지라 범용성이 높다. 게다가 수명도 매우 길기 때문에 발전의 가능성도 높으므로 PK라면 업그레이드를 통해 빨리 다른 특기를 주는 게 좋다. 영웅집결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다 보면 능력연구의 산물로 지력이 95가 되어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배신도 잘 안한다. 상성은 위나라 쪽에 가깝지만 친애무장이 유비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유비로 쉽게 등용이 가능하다.
삼국지 12에서 일러스트가 그야말로 폭풍간지이긴 한데, 어째 진도의 좌우반전 같은 느낌도 든다. 자세히 보면 말을 탄 채 고삐를 쥐면서 손을 펼치고 있다. 능력치는 통솔력 80/무력 72/지력 80/정치력 78. 전법은 무력 72인데 양민학살 특화인 대타격이라 애매하지만 전예가 소속된 세력이 지휘 포인트를 전예에게 투자할 일이 드물어서 별 상관없다. 조조군은 말할 것도 없고, 공손찬군도 공손찬의 기군신속과 조운의 단기구가 우선이기 때문. 그래도 극초반에는 질러줄 만은 하다. 보통 처음으로 상대하게 될 유우와 공손도 세력 역시 무력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지 13에서 능력치는 삼국지 12 때와 동일하다. 전법은 오리지널에선 기동강화였으나, PK에서 적군의 기동성을 감소시키는 금족으로 변경됐다. 특기가 매우 많은데 상업 1, 문화 1, 훈련 6, 순찰 4, 설파 6, 교섭 5, 신속 4, 연전 1, 공성 2, 견수 4이고 전수특기는 훈련이다. 병과적성도 창병 B/기병 A/궁병 A로 뛰어나다. 군주인 공손찬의 중신특성 때문에 기병은 S라고 보면 된다. 다만 중신특성이 없어서 매우 아쉽다. 상성은 31로 조조를 섬긴 후 삼국시대 후반기까지 쭉 위나라 장수였음을 반영했는지 유비(75)보다는 조조(25)에 가깝게 설정되어 있다. 군웅할거 시나리오과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 공손찬의 세력이라 얻어맞고 원소군 소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유저가 잡더라도 전법이 좋지 않아서 쉽지 않은 편. 공손찬군이 이번 작에서 상당히 어려워진 이유는 공손찬 본인의 잉여화도 있지만 전예의 저평가도 한몫한다.
삼국지 14에서 일러스트는 12,13의 재탕이며, 능력치 역시 동일하다. 통솔 80/무력 72/지력 80/정치 78에 매력 75로 매력이 부활해서 삼국지11과 같은 수치를 받았다. 개성은 5개로 명경(혼란 상태이상 기간단축), 봉살(적부대 상태이상 저지 지속시간 증가), 친오, 친선(각각 오환족, 선비족이 소속도시에 미출현 및 매복지독계략으로 해당 이민족 출현), 소욕(자신의 봉록감소)으로 좀 잉여한 느낌이다. 주의는 왕도, 정책은 군제개혁 LV 4, 진형은 장사, 안행, 충차, 전법은 돌격,제사, 저지, 혼란, 친애무장은 선우보, 유비, 혐오무장은 없다. 그리고 이번 작부터 드디어 190~194년경의 행적이 고증이라도 된 듯 반동탁연합 시나리오에서는 유비군으로 등장하게 되어 평원에서 노는 유비군에게 전력이 되어준다.
5.3. 삼국전투기
연재 당시 은근히 유행했던 골든 전예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했다. 금색 때문에 백식으로 등장할 때도 있다. 역경 전투 (3)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다.
역경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공손찬군에서 찬밥 신세로 살던 중 옆에 있던 조운에게 자신의 철학인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를 설파하지만 묻지도 않은 내용을 시끄럽게 자꾸 나불대는 전예가 마음에 안 들었던 조운에 의해 두들겨 맞게 된다.[8] 이후 조운과 공손속이 흑산적 장연에게 원군을 청하러 가게 되자 둘의 어설픈 원소군 변장을 보고 두 사람만으로는 위태위태해 보인다며 자신도 따라가기를 자청하는데, 두 사람이 관정의 배웅을 받으며 전예를 무시하고 그냥 가자 헐레벌떡 갑옷을 걸쳐입고 두 사람을 따라간다.[9]
이후 조운, 공손속과 함께 원소군과 선비족 연합군의 기습을 받게 되고 공손속이 사망한 뒤 싸우려는 조운을 개죽음이 될 뿐이라며 뜯어 말리고 같이 선비족에게 붙잡히게 된다. 전예와 조운의 선비족 포로기는 단행본으로 빠져서 본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팽성 전투 편에서 재등장한다. 어째서인지 선우보의 참모가 되어 있었으며, 조조가 천자를 끼고 있다는 점은 큰 메리트라며 조조의 승리를 점치고, 원소 편에서 조조 편으로 줄을 바꿔 잡을 것을 제안한다.
소패2 전투 편에서는 여전히 선비족 진영에 있는 걸로 묘사된다. 가비능과 함께 원상 기습에 동참했으며, 적이 완전히 사정권 안에 들어온 뒤 공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으나 가비능이 그 정도는 자기도 안다고 쏘아붙이고, 동시에 한족의 명령 따위 들을 생각 없으니 명령하지 말라고 화를 내자 빠르게 사과하기도 했다.
가비능과 함께 원상을 공격하기 전, 조조에게 원상을 인질로 잡으라는 부탁을 받은 뒤 이건 너무 무리한 부탁인 거 아니냐는 선우보에게 어차피 이쪽이 원상을 잡고 말고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계속 공격하는 척만 해도 될 것 같다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최훈의 빠심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인재. 손자가 가장 칭찬했을 스타일의 장수라는게 작가의 평.#
상단에 쓰여 있듯 싸움을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라고 여긴다. 이유는 아군의 피해가 없으니까. 전예는 이에 덧붙여 공적이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며, 후세에는 반드시 누군가 알아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 고당현령으로 있다가 도적에게 격파되어 임지를 버리고 공손찬에게 유비가 의탁한 것이 191년 이전의 일로 보이고 전예가 위나라 가평 연간에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전예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였다.[2] 동주현이라고 하는데 이런 행정구역은 실제로 없었다. 그래서 유주 어양군 천주현의 오기로 보인다.[3] 헝가리의 wagon 전법이나 팔진도, 국의가 공손찬의 백마의종을 막을 때의 전법과 비슷하다.[4] 견초전에는 견초의 공으로 되어있다.[5] 오가 공손연에 파견한 사신인 장미, 허안 등은 오와 친교를 유지할 생각도 없고 재물에 욕심을 낸 공손연에게 처형당했고, 주하가 그나마 살아남아서 배를 타고 오로 귀환하려 하던 차에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6] 춘추시대의 인물. 진도공의 신하로, 융족의 화친을 거부하려는 임금에게 간언해 화친을 받아들이게 했다.[7] 그리고 이 둘 다 공손찬 부하 시절에는 중용받지 못했다. 이 둘의 잠재력을 알아본 사람은 유비이다. 공손찬의 인재보는 눈이 얼마나 나쁜지, 유비의 인재 보는 눈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려주는 예.[8]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자기 할 말은 계속 이어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표정 변화도 하나도 없었다.[9] 이 와중에 군복 색도 원소군의 녹색이 아닌 황금색 군복을 입고 와서 조운이 그 금색 군복은 뭐냐며 태클을 걸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