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대왕

 


'''고구려 7대 국왕'''
'''次大王 | 차대왕'''
'''시호'''
'''차대왕(次大王)'''
'''성씨'''
고(高)
''''''
수성(遂成)
'''왕태자'''
고추안(高鄒安)
'''생몰연도'''
음력
71년 ~ 165년 10월 [1]
95년 ~ 165년 10월 [2]
'''재위기간'''
음력
146년 12월 ~ 165년 10월 (18년 10개월)[3]
122년 ~ 165년 10월[4]
1. 소개
2. 의문의 가족 관계
3. 생애
3.1. 왕자 시절
3.2. 왕위를 이어 받다
3.3. 폭정과 말로
3.4. 의문점
4. 삼국사기 기록
5. 대중 문화에서의 차대왕


1. 소개


“나는 너무 늙어 만기(萬機)에 귀찮음을 느낀다. 하늘의 역수가 네 몸에 있다. 게다가 넌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를 총괄하니 오랫동안 사직에 공을 쌓았다. 신민의 소망을 채웠으니 내가 부탁할 인물을 얻었다고 가히 이를 수 있다. '''너로 하여금 즉위하게 하니, 영원히 영광을 누릴 것이다!”'''

"吾旣老倦於萬機 天之曆數在汝躬 況汝內參國政 外摠軍事 久有社稷之功 允塞臣民之望 吾所付託 可謂得人 '''作汝其卽位 永孚于休!'''"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이 아우 수성에게 전한 양위의 말. 이를 시작으로 완전히 수성의 시대가 열렸다. 사실은 유언이었을 수 있다.

고구려의 제7대 임금. 휘는 수성.
이름 자체가 '''태조대왕 다음 대의 왕'''이다. 진시황-이세황제 호해 같은 느낌.

2. 의문의 가족 관계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이 형제라 되어 있으나 중국 측 사서인 범엽의 《후한서》나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태조왕의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에는 차대왕은 태조왕의 아들이고 《정사 삼국지》에서는 신대왕을 다시 차대왕의 아들이라 되어 있다. 한편 《북사》에는 동천왕을 태조왕의 증손이라고 기록해 놨다.[5] 태조대왕신대왕은 형제가 아니라 부자 관계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며 그럼 차대왕의 족보도 태조대왕의 형제일 수도 아들일 수도 있게 된다.
단재 신채호는 범엽의 《후한서》나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더 현실적이라 보고 이를 채택해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서자로 봤다. 연대상으로는 후한서나 삼국지 측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사실 태조대왕의 연대가 불확실해서 차대왕이 태조대왕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결론을 내리기 애매한 상황이다. 일반적으로는 나이 차이가 무지하게 큰 동생임을 인정하거나 서자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채택된다.[6]

3. 생애


'''등극한 고추가 재사의 아들'''
'''6대'''
'''7대'''
'''8대'''
'''태조대왕(太祖大王)'''
'''차대왕(次大王)'''
'''신대왕(新大王)'''

3.1. 왕자 시절


삼국사기 태조대왕 기사 초반을 읽어 보면 동생 백고(신대왕)가 "사냥 좀 그만하삼"이라고 고언하는데도 "내가 즐길 만하니 즐긴다는데 무슨 상관임"하는 니트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부하들을 모아서 한번 엎자고 선동하거나 뒤에 서술할 활약상을 볼 때 놀고 먹기만 하는 허당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즉위 후 앞서 고언한 우보 고복장은 끔살당한다. 차대왕의 야욕을 알고 태조왕에게 차대왕을 제거해야 한다며 그러지 않으면 아들들이 죽게 될거라고 간언했지만 태조왕이 공이 많다는 이유로 내버려뒀는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목도루는 벼슬이고 뭐고 내팽겨치고 튀었다.
태조대왕 재위 시절에 장군으로 활약해 요동군 현들을 활발히 공격하였다. 또한 123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정사에 참여한다. 후한서에는 이 시기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왕이거나 최소한 왕에 준하는 지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3.2. 왕위를 이어 받다


次大王諱遂成 太祖大王同母弟也 勇壯有威嚴 小仁慈 受太 祖大王推讓 卽位 時年七十六

차대왕(次大王)의 이름은 수성이고 태조대왕의 친동생이다. 용감하고 굳세며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함이 적었다. 태조대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 때 나이가 76세였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후한서 기록으로는 122년에 이미 즉위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미 태조대왕 고궁은 121년에 이미 사망한다. 《삼국사기》나 기타 사서에서 유사한 행적이 나타나는데, 《삼국사기》에선 아예 이후 태조대왕의 아들들을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느껴 살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二年 春二月 拜貫那沛者彌儒爲左輔 三月 誅右輔高福章

2년(147년)[7]

봄 2월에 관나 패자 미유를 좌보로 삼았다. 3월에 우보 고복장을 죽였다.

三年 夏四月 王使人殺太 祖大王元子莫勤 其弟莫德恐禍連及 自縊

3년(148년) 여름 4월에 왕은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莫勤)을 죽였다. 그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연이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을 메었다.

삼국사기》차대왕 본기

만약 태조대왕-차대왕이 형제가 아닌 부자 관계라면 차대왕과 막근태자는 형제 관계가 되는데 이 시기에 막근태자가 태자 직위를 달고 있었던 것을 보면 차대왕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으나 차대왕이 태자를 자신이 아들인 고추안으로 교체하면서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3.3. 폭정과 말로


차대왕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즉위 후에는 별다른 정복 사업을 벌이지 않은 듯 하며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고복장과 이복동생 또는 조카 막근, 막덕을 죽이고[8] 동생인 백고[9]를 견제하는 등 왕권 강화에 주력했다고 한다. 또한 멋대로 신하들을 처형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걷었으며 천재지변까지 일어나면서 조정의 신망을 잃게 된다.
결국 이에 참지 못한 조정 관료들이 명림답부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과정 속에서 시해당했다. 이후 신대왕이 왕위를 잇게 된다.
후한서에는 태조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마저 미워해 아들인 신대왕이 아버지를 두려워해 숨었으며 명립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한 후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태조대왕의 장수 기록이 워낙 쩔어줘서 그렇지 이 노친네도 만만치 않다. 신대왕과 더불어 소위 장수 형제로 취급되는 왕 중에서 유일하게 제 명에 못 죽은 케이스인데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오래 살았다. 더구나 후한서에 기록된 즉위년을 기준으로는 무려 42년간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3.4. 의문점


먼저 재위 기간에서부터 의문점이 생긴다. 《삼국사기》 태조왕 편에 김부식이 주석으로 인용한 부분에서 나오는 《후한서》에 따르면 121년 궁(宮 = 태조왕)이 승하하고 수성(遂成 = 차대왕)이 뒤를 이었는데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를 궁의 사자(嗣子 = 대를 잇는 아들)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이 146년에 양위하고 이후 165년에 사망한 것과 모순된다. 처음부터 삼국사기의 내용은 구삼국사해동국기에 잘못 적힌 내용을 그대로 적어버린 탓에 그런 것이지 후한서 기록과 당대 중국의 기록을 보면 121년 태조대왕은 이미 사망하였고 122년에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차대왕의 실제 나이도 훨씬 적었다. 후한서의 기록과 여러모로 남은 기록으로 볼 때 실제 차대왕은 후대에 연대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76세에 왕위를 이어받은 것으로 바뀐 것이다. 삼국사기의 차대왕의 나이는 원래보다 대략 24살에서 25살 정도 많게 나이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차대왕과 신대왕 나이에서 24살을 낮춰보면 후대의 왕과 나이차가 그나마 현실적인 나이차가 된다.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 신대왕과 형제 관계로 모두 고재사의 아들들로 기록되어 있지만 각각 25년과 18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데 이걸로 보아 이들의 수명은 후대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말로 형제 관계인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요즘에는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먼 방계거나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아니며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형제가 맞다는게 정설이다. 최소한 태조왕과 차대왕의 수명이나 재위 등에 대한 기록의 정확성은 당대의 기록인 후한서나 삼국지의 내용이 맞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삼국사기의 내용이 꼬여버린 것은 김부식이 연도를 잘못 쓰거나 착각해서 벌어진 일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미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 참조한 국내 문헌부터가 고구려인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조작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김부식 본인이 이에 대해 태조대왕 본기에도 "후한서 기록이랑 우리쪽 기록이랑 비교해보니 앞뒤가 안맞는데 어느 쪽이 맞는거야?"라며 어리둥절해하는 사론을 남겼다.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주요 인물인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명림답부 등은 수명 부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긴 수명[10][11]을 자랑한다는 점도 조작 의심을 부채질하는 부분이다.[12][13] 결론은 차대왕은 121년 태조대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해 165년 쫒겨나거나 하는 등 모종의 방법으로 왕위에서 내려왔으며 차대왕이 저지른 폭정이 실제 일인지 조작인지는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차대왕 본기'''
一年冬十二月 차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관내부 미유를 좌보에 임명하다
二年春三月 우보 고복장을 죽이다
二年秋七月 어지류를 좌보에 임명하다
二年冬十月 양신을 중외대부에 임명하다
二年冬十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夏四月 태조왕의 장자를 죽이다
三年秋七月 무당을 죽이다
四年夏四月 일식이 일어나다
四年夏五月 점치는 사람이 점괘를 거짓 보고하다
四年冬十二月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八年夏六月 서리가 내리다
八年冬十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三年春二月 혜성이 북쪽에 나타나다
十三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年春一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年春三月 태조왕이 붕어하다
二十年冬十月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다
즉위 4년차부터는 전부 자연재해 관련 기록뿐이다(...).

5. 대중 문화에서의 차대왕


과학소설(SF) 작가 김보영진화신화에서 대표적 빌런으로 등장한다. 용불용설(...)을 차용한 작품.

다음 웹툰 위나암림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웹툰의 내용은 맥베스의 기본 스토리 얼개를 배경만 고구려로 바꾸고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데[14], 그래서인지 차대왕이 태조왕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나온다. 태조왕이 너무 오래 살아서 동생인 차대왕이 갈등 끝에 결국 자신의 야심을 참지 못하고 태조왕을 손수 찔러죽이는,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몸서리치며 더더욱 광기를 내뿜는 등의 장면에서 드러나는 차대왕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다.[15]
실제 역사에서는 차대왕(수성)이 태조대왕을 살해하고 왕위 찬탈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나오긴 하나 실제로 실천에 옮기지는 않는다. 태조대왕이 "내가 나이가 들어서"라는 이유를 시작으로 상왕으로 물러나는 데서 마무리되는데... 모르긴 몰라도 안 물러났으면 죽였을 것 같기도 하다.
허나 어째 고구려 왕이 칭제를 한다든지, 고조선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천부인을 고구려 왕인 차대왕이 즉위식에 건네받는다는지 하는 내용을 보면 뭔가 환빠스럽다(...).
[1] 삼국사기 기준[2] 당대 중국 사료를 기준으로 환산한 연대[3] 삼국사기 기록[4] 후한서자치통감 기록. 또는 삼국사기에서 대리청정 기간 포함.[5] 근데 이 책에서 고구려의 계보를 설명할 때 차대왕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이 죽자 아들 백고가 즉위했다고 한다.[6] 아니면 삼촌 - 조카 관계일수도 있다. 태조왕과 차대왕이 25년의 나이 차가 나는데, 사실 삼촌과 조카의 나이 차가 25살 차이가 나는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7] 원래는 25년이다.[8] 사실 차대왕이 조카 또는 형제인 막근을 죽이자 막근의 동생인 막덕이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9] 차대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신대왕을 참조[10] 태조대왕 119세, 차대왕 95세, 신대왕 91세, 명림답부 113세.[11] 당대 중국의 기록상 태조대왕은 121년 75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12] 실제로 동생 신대왕은 179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차남고국천왕이 176년 태자에 책봉되어 179년에 왕이 되고 197년 사망한다. 아버지 신대왕과 나이차를 현대식으로 30년 차이로 잡아도 고국천왕 역시 80세 이상은 살았다는 결론이 된다. 다음 왕인 산상왕은 신대왕의 4남으로 197년 즉위해 30년 후인 227년 죽는다. 명림답부는 113세까지 살았다고 적혀 있으며 명림답부는 신대왕과 같은 해에 죽고 태조대왕은 차대왕과 같은 해에 죽는다. 이게 우연일까? 태조대왕~산상왕 시기의 비정상적인 연령대는 동천왕의 등장으로 비로소 끝이 난다.[13] 다만 90세가 넘도록 살았다고 널리 인증받는 장수왕의 사례도 있는 만큼 과장되었을지는 몰라도 무조건적으로 거짓이라 보는 것 또한 곤란하다. 장수는 유전자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고구려 왕가 자체가 장수하는 유전자를 지녔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 하지만 유전자로 치기에는 태조대왕~신대왕과 장수왕 사이의 세대가 10대로 너무 멀기도 하고 태조대왕의 119세는 고대인이 기네스북 공인 최장수 인간잔 루이스 칼망과 도찐개찐일 정도로 비현실적이라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14] 초반부에 귀신이 왕이 되기 전의 수성(차대왕)에게 예언을 내리는 것도 맥베스와 비슷하다.[15] 다만 태조왕은 완전히 죽지는 않았고, 심한 부상으로 인하여 식물 인간 상태가 되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태조왕이 차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몇년 동안을 더 살았다고 묘사한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