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생
梁羽生
(1924.04.05 ~ 200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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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무협 작가. 본명은 진문통(陳文統).
신파(新派) 무협의 시조로, 35편 천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넉넉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여덟살 때 당시삼백수를 암송했을 정도로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1943년 광주의 학자 몇몇이 난을 피해 왔을 때, 저명한 사학자인 간우문(簡又文)에게 역사학을 배웠다.
1949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장의 소개로 홍콩 신문사 대공보(大公報)에 입사해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양우생은 이듬해 신만보(新晩報)로 자리를 옮긴다. 이 때 같은 신파무협의 작가이자 언론인 김용을 만나 우정을 쌓았다. 둘은 기자 시절 같은 책상을 썼으며 바둑 친구였다고 한다. 김용에게 무협소설을 쓰라고 권한 인물도 양우생. 근데 양우생은 필명으로 정체를 감추고 김용 작품이 서구적이며 음탕하다고 깐 적이 있다.
1954년, 오파 태극권 오공의(吳公儀)와 백학문 진극부(陳克夫)가 공개 비무[1] 를 벌이면서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그러자 신만보(新晩報) 편집장 나부(羅浮)는 이에 편승하고자 양혜여라는 이름으로 칼럼을 쓰던 진문통에게 무협 원고를 청탁했지만 거절당한다. 그는 역사와 시서화에 해박한 교양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칼럼니스트였고, 하물며 대학시절 전공이 국제경제학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측은 가볍게 씹고(...) 신문지상에 "'''내일 양우생이라는 사람이 무협소설을 연재한다'''"고 광고를 때려버린다. 심지어 '''시놉시스까지 멋대로 적었다.''' 결국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밤만에 이야기를 짜내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를 연재했는데, 이게 제대로 대박이 난다.
이후 양우생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서서 1956년 칠검하천산(七劍下天山), 1957년 강호삼여협(江湖三女俠)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1959년 평종협영록(萍踪俠影錄) 등 연이어 대작을 발표하며 신파무협의 거두로 자리잡는다. 양우생 본인이 꼽는 대표작은 평종협영록, 여제기영전(女帝奇英傳), 운해옥궁연(雲海玉弓緣)이다. 무협 소설을 쓰는 와중에도 양혜여라는 이름으로 칼럼 기고도 계속했다.
1983년 무당일검(武當一劍)을 끝으로 절필하고 1987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갔다. 2006년 말에 홍콩에서 활동 도중 중풍에 걸려 요양생활을 이어가다가 2009년에 시드니에서 타계했다.
"무협 작가는 중국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도 보이다시피, 양우생의 소설은 곳곳에서 중국 고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역사무협'''이다. 또한 주먹제일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유명해서 그의 작품은 절대로 청대 이후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2] , 이에 대해 양우생은 "총의 등장이 권법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덕분에 대다수 국내 무협 독자들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중화권에서는 신파무협의 시조로 공인받고, 김용과 함께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이란 칭송까지 듣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듣보잡 신세다...
참고로 상당수 작품이 연대기적 구성을 띄고 있어, 작중 사건과 인물이 다른 작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가능한 시대순으로 읽는 편이 좋다. 위 목록에선 화청지(당), 명황성(명), 백발마녀전-강호삼여협-운해옥궁연(명말·청초)이 서로 이어지는 작품들이다.
(1924.04.05 ~ 200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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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의 무협 작가. 본명은 진문통(陳文統).
신파(新派) 무협의 시조로, 35편 천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2. 생애
넉넉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여덟살 때 당시삼백수를 암송했을 정도로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1943년 광주의 학자 몇몇이 난을 피해 왔을 때, 저명한 사학자인 간우문(簡又文)에게 역사학을 배웠다.
1949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장의 소개로 홍콩 신문사 대공보(大公報)에 입사해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양우생은 이듬해 신만보(新晩報)로 자리를 옮긴다. 이 때 같은 신파무협의 작가이자 언론인 김용을 만나 우정을 쌓았다. 둘은 기자 시절 같은 책상을 썼으며 바둑 친구였다고 한다. 김용에게 무협소설을 쓰라고 권한 인물도 양우생. 근데 양우생은 필명으로 정체를 감추고 김용 작품이 서구적이며 음탕하다고 깐 적이 있다.
3. 상세
1954년, 오파 태극권 오공의(吳公儀)와 백학문 진극부(陳克夫)가 공개 비무[1] 를 벌이면서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그러자 신만보(新晩報) 편집장 나부(羅浮)는 이에 편승하고자 양혜여라는 이름으로 칼럼을 쓰던 진문통에게 무협 원고를 청탁했지만 거절당한다. 그는 역사와 시서화에 해박한 교양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칼럼니스트였고, 하물며 대학시절 전공이 국제경제학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측은 가볍게 씹고(...) 신문지상에 "'''내일 양우생이라는 사람이 무협소설을 연재한다'''"고 광고를 때려버린다. 심지어 '''시놉시스까지 멋대로 적었다.''' 결국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밤만에 이야기를 짜내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를 연재했는데, 이게 제대로 대박이 난다.
이후 양우생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서서 1956년 칠검하천산(七劍下天山), 1957년 강호삼여협(江湖三女俠)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1959년 평종협영록(萍踪俠影錄) 등 연이어 대작을 발표하며 신파무협의 거두로 자리잡는다. 양우생 본인이 꼽는 대표작은 평종협영록, 여제기영전(女帝奇英傳), 운해옥궁연(雲海玉弓緣)이다. 무협 소설을 쓰는 와중에도 양혜여라는 이름으로 칼럼 기고도 계속했다.
1983년 무당일검(武當一劍)을 끝으로 절필하고 1987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갔다. 2006년 말에 홍콩에서 활동 도중 중풍에 걸려 요양생활을 이어가다가 2009년에 시드니에서 타계했다.
"무협 작가는 중국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도 보이다시피, 양우생의 소설은 곳곳에서 중국 고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역사무협'''이다. 또한 주먹제일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유명해서 그의 작품은 절대로 청대 이후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2] , 이에 대해 양우생은 "총의 등장이 권법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덕분에 대다수 국내 무협 독자들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중화권에서는 신파무협의 시조로 공인받고, 김용과 함께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이란 칭송까지 듣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듣보잡 신세다...
참고로 상당수 작품이 연대기적 구성을 띄고 있어, 작중 사건과 인물이 다른 작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가능한 시대순으로 읽는 편이 좋다. 위 목록에선 화청지(당), 명황성(명), 백발마녀전-강호삼여협-운해옥궁연(명말·청초)이 서로 이어지는 작품들이다.
4. 국내에 나온 양우생 작품
- 강호삼여협 - 녹정기 2부
- 광협천교마녀(狂俠天驕魔女) - 대륙풍
- 대당유협전(大唐游俠傳) - 화청지 1부
- 용봉보채연(龍鳳寶釵緣) - 화청지 2부
- 무당일검 - 무당제일검
- 백발마녀전 - 여도 옥나찰
- 운해옥궁연 - 승천문
- 평종협영록 - 명황성 1부
- 산화여협(散花女俠) - 명황성 2부
- 연검풍운록(聯劍風雲錄) - 명황성 3부
[1] 그 유명한 '중국 무술 실전대결' 동영상의 바로 그 비무. 정작 비무는 3분만에 싱겁게 끝났다. 훗날 양우생은 농담삼아 '''"3분 비무 때문에 나는 30년 동안 무협을 썼다"'''고 말했다.[2] 사실은 초기에는 청대 배경으로도 많이 썼다. 하지만 모두 다 졸작이라, 거의 기억되지 않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