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명나라)

 


1. 개요
2. 생애
3. 조선과의 관계


1. 개요


楊鎬[Ring hou, 량호] (? ~ 1629년)
명나라의 인물.
정유재란 때 명에서 파견된 무장의 최고 지휘관으로 파병 당시 직위는 '''흠차경리조선군무도찰원우첨도어사 (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

2. 생애


상구 사람으로 1580년에 진사가 되었고 남창, 여현의 지현을 지냈다가 어사, 대리평사 등을 지냈으며, 요해도로 옮겨 산동 참의가 되었다. 토만의 초화의 장막을 기습해 공을 세워 부사가 되어 간황전 130여경, 미곡 1만 8천여 석을 받았다가 참정이 되었다.
1597년에 우첨도어사에서 병부 상서로 임명되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해 압록강을 건넜으며, 9월 1일에 해생을 시켜 직산에서 왜군을 격파하게 했다. 이 것이 직산 전투이다. 12월 1일에 마귀 등과 가토 기요마사가 점령한 울산성을 공격해 울산성 전투를 벌였지만 1천 명이 전사하고 3천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고 함락하지 못하자 철수했으며, 1598년에 죄를 청하고 돌아가기를 구해 명나라로 귀국했다.
양호는 100여 명이 전사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고 정응태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1], 1610년에 요동에서 초화가 기습하자 이여매를 대장으로 추천했지만 마희, 양주학의 반대로 실패했다. 1618년 4월에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자 병부 시랑으로 임명되고 요동 순무가 되었으며, 1619년 정월에 조선의 1만 1천 등을 포함한 10만에서 16만 정도로 추정되는 군사를 통솔해 네 갈래로 나누어 누르하치의 본거지 앞에서 합류해 포위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행위는 군사들이 가는 길의 험준함의 차이가 있었고 보병 특성상 후금의 기병 위주의 군대의 기동력을 가지지 못한데다가 병력들을 각개격파 당하기 좋게 분산되고 후금의 군대에게 병력이 압도되는 일이 많았다. 결국 사르후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감옥에 갇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즉시 집행되지 않고 무려 10년 동안 갇혀 지내다가 숭정제가 즉위한 이후에야 참형이 집행되었다.

3. 조선과의 관계


조선에서는 그가 명나라로 귀국하자 그를 기리는 양호거사비를 세웠으며, 1610년에는 그의 초상을 구해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생사에 봉안되었다. [2]
징비록에서 류성룡이 그가 적을 우습게 보는 게 문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표했는데 실제로도 그런 경향이 심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 자체의 준비가 철저했고 이순신이 때맞춰 명량에서 일본군을 막아준 덕택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결국 20년 뒤 그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명량 해전선조가 명나라에 해전의 결과를 알리면서 성과를 일부러 과소 평가하자, 선조를 설득해서 이순신의 전과를 높이 평가하고 품계를 올리라고 끈질기게 압박한 인물이다.[3] 사실 이때 선조는 이순신을 싫어하고 불신했기에 양호를 비롯한 명나라 장수들이 보기에도 과도할 정도로,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폄하가 심각하긴 했다. 명량대첩의 승전이 전해지자 양호는 크게 기뻐하며 이순신에게 붉은 비단 두필을 보내면서 본인이 직접 이 비단을 승리의 상징으로 배에 걸어주고 싶으나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만 보낸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기뻐했다. 하지만 선조는 이 소식을 듣고 양호를 찾아가 "이순신이 작은 승리를 거둔 것에 불과한데 대인이 비단을 내리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오히려 민망합니다"라며 이순신을 폄하했다
[1] 이때 조선 정부가 양호를 변호하다가 정응태가 조선을 모함하는 글을 명 정부에 올리는 이른바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2] 양호거사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의 제 91호로 지정되었고 소재지는 명지대학교 내부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50-3 (거북골로 34)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선조 31년 (1598), 광해군 2년 (1610), 영조 40년 (1764), 헌종 1년 (1835)까지 무려 4차례에 걸쳐 건립되었다.[3]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 조정은 물론이고 선조에게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나 원래의 임무인 일본군과의 전투에만 집중했지 조선의 내정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고 정도를 지켰다. 그런 사람들이 단 한번 조선의 인사권에 개입한 적이 있는데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의 품계를 올리라고 선조를 압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조가 이순신의 품계를 정3품 절충장군에서 정2품 정헌대부로 올려주긴 했으나, 사실 이는 정유년 파직 직전의 품계로 돌려준 것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