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애설링
고대 영어: Ēadgār Æðeling (왕손 에아드가르)
영어: Edgar Ætheling (왕손 에드거)
1. 개요
에드거 애설링은 잉글랜드의 왕위 요구자이다.
2. 생애
에드먼드 2세의 손자로 1051년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에드거의 조부인 에드먼드 2세는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망명자 에드워드(Edward the Exile)'가 에드거의 아버지였다. 에드거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적통 왕자였지만 덴마크 왕 크누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암살 위협까지 하자 헝가리로 피신했다. 에드워드는 망명지인 헝가리에서 아들 '에드거를 얻었다. 한편 에드먼드 2세의 아버지인 애설레드 2세는 두 번째 결혼에서도 두 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그중 첫째가 참회왕 에드워드였다.
이후 크누트 대왕의 자식들[3] 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지만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왕위는 다시 에드먼드 2세의 후손에게 돌아갔는데 계승 순위로 보면 '망명자 에드워드'나 그 자녀들이 앞서겠지만 왕이 된 건 참회왕 에드워드였다. 이유는 참회왕 에드워드가 덴마크 출신으로서 마지막 왕이었던 하데크누드의 이부형이었기 때문이다.[4] 두 왕의 어머니는 '''노르망디의 엠마'''로, 애설레드 2세의 두 번째 왕비였다가 크누트와 재혼하여 하데크누드를 낳았다. 정리해보자면 참회왕 에드워드와 하데크누드는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이부형제였던 것이다. 여기다 하데크누드가 덴마크 국내 문제 때문에 잉글랜드의 관리를 맡겼지만 왕위를 그냥 먹튀(...)해버린 해럴드 1세는 하데크누드의 이복형이었다.
참회왕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른 뒤 몇 년이 흐른 1057년이 되어서야 망명자 에드워드와 에드거가 헝가리에 생존에 있다는 사실이 잉글랜드에 알려졌고, 에드거는 그 해에 잉글랜드로 올 수[5] 있었다. 이후 또 다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는데 참회왕 에드워드 역시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에드거는 혈통상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당시 잉글랜드는 왕권이 미약했고, 유력한 영주들의 권한이 막강하던 때였기 때문에 영주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고드윈 가문의 해럴드가 유력한 차기 국왕 후보가 된다. 내우외환 앞에 놓인 잉글랜드를 수습할 강력한 군주가 필요했던 영주들은 혈통상 정통성이 가장 앞선 에드거 대신에 고드윈 가문의 해럴드 2세를 왕으로 추대한다.
하지만 해럴드가 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 1세에게 전사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노르만족에게 항거하기 위해 급히 귀족들은 에드거를 왕으로 추대하고 항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고, 색슨족 영주와 귀족들은 하나 둘 윌리엄 1세에게 항복했다. 결국 에드거도 12월 초에 런던에 입성한 윌리엄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윌리엄은 1066년 크리스마스에 정식으로 잉글랜드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윌리엄 1세는 에드거의 안위를 보장했지만 언제든 앵글로색슨족 반란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그를 놔둘 수는 없었다. 윌리엄은 이내 에드거를 구금한다. 에드거는 왕위를 빼앗기고 감금되었지만 얼마 안 가 감금 생활을 끝내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해 복위를 위한 여러 시도를 이어간다. 스코틀랜드의 국왕 맬컴 3세와 누나 마가렛을 혼인시켜 복위를 위한 지원 약속을 얻었고, 1069년 초 노섬브리아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세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알린다. 하지만 윌리엄 1세에게 이내 진압당한다. 한편 프랑스의 필리프 1세는 에드거에게 윌리엄 1세의 대륙 근거지인 노르망디를 같이 공략하자는 제안을 한다. 에드거는 이에 호응해 자신의 추종세력과 매형 맬컴 3세의 지원으로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 건너 프랑스로 향했지만 도중에 풍랑을 만나 잉글랜드 해안에 좌초하고 만다. 적지에서 배가 좌초되어서 많은 군사와 인원을 상실했지만 에드거는 어찌어찌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윌리엄에 대한 공략은 시작도 못 해보고 폭삭 망하자 맬컴 3세에게 더이상 잉글랜드 왕위를 탐내지 말라고 종용받기에 이른다. 결국 1086년 오랜 항전에 지친 에드거는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윌리엄에게 작은 영지를 보상받는다.
왕위는 포기했지만 여전한 영향력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 분쟁과 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다. 스코틀랜드의 왕위 분쟁에서는 자신의 조카 '에드거'를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으며 십자군 원정도 무사히 마치고 유럽으로 귀환한다.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에서는 헨리 1세와 로베르 중 로베르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로베르가 동생 헨리 1세와의 전투에서 개박살이 나서 망하는 바람에 말년에 험한 꼴 당할 뻔 했지만 헨리 1세의 사면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그 후의 행적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가 1125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영국왕으로서는 '에드거 2세'로 불리는게 맞으나 그의 재위 기간은 2개월이 채 되지 않는 데다 즉위식도 못 치렀기 때문에 왕자(王子), 왕손(王孫)을 뜻하는 Ætheling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에드거는 75세까지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장수했으며 왕위에서 쫓겨난 뒤로도 수십 년간 활동했으므로 실제 '에드거 2세'로 불릴 만한 기간은 그의 생을 통해 매우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2] 에드거가 추대에 의해 왕이 되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루지는 않았기 때문에 왕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3] 해럴드 1세, 하데크누드[4] 모계로 이어지는 혈통 때문에 후계자가 되기도 했지만, 쫓겨난 망명자 에드워드와 그 자녀들의 행방이 잉글랜드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5] 아버지인 망명자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하고 1057년 헝가리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