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1세
1. 개요
- 고대 노르만어: Williame I (윌리아므 1세)
- 고대 영어: Willelm I (윌렐름 1세)
- 영어: William I (윌리엄 1세)
- 프랑스어: Guillaume I (기욤 1세)
- 라틴어: Gulielmus I (굴리엘무스 1세), Willelmus I (윌렐무스 1세)
원래는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었으나, 노르만 정복을 통해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 된 인물로 노르만 왕조의 창시자이다. 이후부터 몇 차례 왕조가 바뀌는 등 변화는 있었지만 현재까지 영국의 왕은 미약하게나마[2] 이 사람의 피가 흐른다. 영국 왕실 계보도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는 기욤 2세였다. 하지만 기욤은 현대 프랑스어 형태이고 당시 노르만인들이 쓰던 고대 노르만어 기록에는 Williame, 앵글로색슨족의 고대 영어로는 Willelm이다. 전자의 경우 '윌리아므', 후자의 경우 '윌렐름' 비슷한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노르만어는 프랑스어와 가까워서 프랑스어의 방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보통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생아왕'''이라는 별명도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노르망디 공작이자 '악마공' 로베르 1세와 그의 내연녀였던 평민 출신 에를르바 사이에서 태어났다.[3] 하지만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사생아였고 따라서 '''사생아왕'''[4]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에를르바는 출신마저 미천했고[5] 기본적으로 사생아에 대해 굉장히 엄격했던 시대에 로베르 1세가 이런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로베르 1세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베르 1세가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귀환하는 도중에 갑자기 병을 얻어 죽게 되자 '''7살''' 나이로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기 전에 사생아였던 윌리엄을 후계자로 지정해 놓았던 덕분에 공작을 계승할 수 있었으나, 사생아라는 지위 때문에 끊임없이 친척들의 견제와 맞서야 했다. 로베르 1세는 생전 봉신들에게 윌리엄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했지만 사후 그의 친척들에 의한 단순한 조롱에서 암살 시도까지 괴롭힘은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그에게 대항하는 성을 포위했을 때 성벽에 무두질할 가죽이 내걸려 그의 미천한 외가 혈통을 비웃는 일도 있었다. [6] 그래도 아버지의 충신들 및 어머니의 보호와 헌신으로 초기 위기를 극복했고 이는 그에게 강한 의지력을 심어 주었다.
15살에 기사로 인정받은 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그는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7] 옆동네인 플랑드르의 공녀 마틸다 판 플란데런과 결혼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틸다 역시 윌리엄을 천한 혈통의 사생아라고 놀려대자 화가 치민 윌리엄 1세는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 마틸다의 집에 쳐들어가서는 그녀를 다짜고짜 채찍으로 때려눕히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 행동이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4년 뒤에 결혼하게 된다(…).[8] 윌리엄은 평생 성실한 남편 노릇을 했지만 이 결혼에도 쑥덕거림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사실 친척지간[9][10] 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촌간 혼인도 흔한 유럽 귀족가에서 이건 말도 안되는 트집이었으나, 당대 교황인 레오 9세는 그레고리오 개혁 이전에 교회를 쇄신하고자 노력한 독일인 교황이였다. 레오 9세는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혼인 문제를 엄격히 금하고 전통적 도덕상을 되돌리려한 원칙파 개혁 교황이었고, 그런 그의 눈에 원칙적으로 금지된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윌리엄과 마틸다의 결혼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 결혼을 지지한 것은 루앙 대주교이자 리샤르 3세와 로베르 1세의 남동생이었던 윌리엄의 숙부인 모지였으므로, 교황의 반대마저 무시하고 모지가 윌리엄과 마틸다의 결혼식을 주관한다. 이 구설수를 무마하고자 이들 부부는 성당 두 채를 지어 헌납했다.
2.2. 젊은 노르망디 공작, 잉글랜드 침공
주변에 적이 많던 윌리엄은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후원 덕분에 노르망디 공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이 노르망디 공작이 되고나서 노르망디 공국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앙리 1세는 이때부터 1054년과 10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실패했다. 젊은 윌리엄은 다혈질에 잔혹했지만 앙리 1세가 침공할 무렵에는 이미 노르망디의 반란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래서 앙리 1세의 침공에도 무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메인 지역을 병합했다. 앙리 1세는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프랑스의 왕위까지 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11] 윌리엄이 실제 노렸던 것은 잉글랜드의 왕위였다. 1066년 윌리엄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을 겪었던 잉글랜드 왕위 문제에 개입했다.
[image]
당시 즉위한 해럴드 2세는 선대 왕 에드워드의 처남이라 견제하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의회를 통해 적법한 절차로 선출된 왕이었다. 문제는 이 해럴드 2세가 예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배를 타고 나갔다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포로가 됐으며 풀려나려고 한동안 봉신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걸 빌미로 삼아 윌리엄 1세는 해럴드 2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죽은 에드워드 왕도 생전에 왕위를 약속했다는 주장을 하면서 침공을 개시했다.[12]
당시 잉글랜드는 내부로는 데인 계열과 앵글로색슨 계열 간 대결 구도가 확연했고 외부로는 교황에게 견제받으면서 노르웨이에 침공받기까지 하던 상황이라 그야말로 최악의 카운터를 맞은 셈이었다. 여기에 윌리엄을 적대하던 앙리 1세가 1060년 죽고 친분이 있었던 필리프 1세가 뒤를 이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2세도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대립하면서 윌리엄을 적극 후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용병을 모으고 함대를 건조하여 막 침공하려 하자 심한 북풍이 불어 배가 뜰 수 없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사이에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먼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해럴드 2세가 이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쳐 유력한 경쟁자 하나는 저절로 줄고 주적은 힘이 빠져 버리는 행운으로 다가왔다. 더 극적인 것은 해럴드 2세가 싸움을 마치자 바람은 기다렸다는 듯 바뀌었고 덕분에 윌리엄은 사흘 만에 잉글랜드에 간단히 상륙할 수 있었다.
2.3. 잉글랜드 국왕
[image]
결국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는 전사하고 윌리엄이 승리하면서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엔 이상할 수도 있지만, 이는 봉건제도의 특성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지만 노르망디 공작위는 잉글랜드 왕위와는 별개로 프랑스의 봉신이기 때문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즉, 평소에는 독립 왕국인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지만 노르망디 공국과 관련된 것으로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봉신이었으므로 세금을 냈다.
또한 이때부터 런던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수도로써 기능하기 시작한다. 물론 알프레드 대왕이 데인 족의 침략을 격퇴한 후로 런던을 상당히 중요한 도시로 키웠기에 이미 인구 수로는 전의 수도인 윈체스터를 추월해 있었고, 참회왕 에드워드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설하여 종교적 중심지로도 기능했었지만, 왕의 공식적인 궁전은 아직 윈체스터에 있었던 것. 이랬던 것이 1066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런던으로 개선할 때 웨스트민스터로 정궁(正宮)을 공식적으로 옮기면서 웨스트민스터가 행정 수도로 기능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옆의 시티 오브 런던은 상업 중심지로서 번영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토지를 조사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토지 조사 문서가 둠즈데이 북이다. 이 둠즈데이 북 전후의 잉글랜드 귀족 체계가 크게 흔들리는데, 그전에는 윌리엄도 앵글로색슨계 잉글랜드인이 귀족 신분으로 있는 것을 허락하고 토지도 냅두었지만 1086년 이후 상황은 급격히 변하여 오직 2명의 앵글로색슨계 귀족만이 지위를 유지하였고 4000여 명의 귀족들이 토지를 몰수당하였다. 그리고 이 4,000여 명이 소유했던 영지들은 200명이 채 안 되는 노르만계(그리고 약간의 브르타뉴인과 플랜더스인) 남작들이 하사받았다. 종교적인 측면에선 이러한 반잉글랜드적(anti-english policy) 정책이 더 심했는데, 1070년이 되자마자 윌리엄은 잉글랜드인 주교들을 면직시켰고 그 후로 한 명도 다시 임명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1066년 12월 25일 즉위식을 거행할 때 성당 내부에서 선서를 하던 도중 너무 크게 말한 나머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르만 경비들이 놀라버렸고 근처 집들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후 노르만 신부에 의하면 그 아수라장 속에서 사람들은 약탈을 하거나 놀라 도망치기만 할 뿐이었고 뒤늦게 수습되었다고 한다.
2.4. 북부원정 및 대학살
하지만 윌리엄의 재위는 순탄치 않았는데 재위 중 반란이 끊이지 않아 큰 반란만 해도 5번이나 일어났을 정도였다. 윌리엄은 남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북부에서 반항하는 앵글로색슨족 및 데인족[13] 에 대한 토벌 및 학살을 벌였다. 이 당시 잉글랜드는 6세기에 북독일로부터 이주해 원주민인 켈트족을 몰아내고 정착한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8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몰려온 데인족들의 소국들이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왕국이었는데, 왕이 바뀌었다고 해서 순순히 따르진 않았고 당연히 반항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윌리엄은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지배에 따르지 않는 북부를 초토화했는데, 이를 북부 원정(Harrying of the North)이라고 한다. 이 참혹함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기준에서도 너무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10만 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다만 영국에서는 이런 학살의 역사는 딱히 강조하지 않는 듯 하다. 고대-중세에선 반항하는 주민에 대한 대학살은 정복 후에 자주 일어나는 일이어서 그런 모양.
이외에도 1069년에 덴마크의 스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와 그에 맞서 싸워야 했다. 다만 실제로는 싸우지 않고 거금을 주어 물러나게 한다.
2.5. 말년
영국 내의 상황이 안정되자 윌리엄 1세는 프랑스로 눈을 돌려 프랑스 내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윌리엄 1세의 영토확장으로 인해 프랑스의 왕 필리프 1세와 프랑스 귀족들이 경계하게되어 충돌은 불가피해져 나중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큰아들 로베르와 불화가 심해졌고 급기야 노르망디를 탐낸 로베르가 필리프 1세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하기도 했다. 1087년 7월 프랑스의 망트를 공격하다 병을 얻어, 혹은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사망한 뒤에 신하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캉에 있는 생 테티엔 성당에 묻혔다. 그를 성당에 안장시키려고 할 때 선약자가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60실링을 지불한 후에야 매장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윌리엄 1세는 말년에 대단히 뚱뚱해져 있었고[14] 매장이 늦어져 그의 시신은 부패되고 부풀어올랐다. 그에게 맞는 관이 없어서 사람들은 왕의 시신을 소가죽 안에 넣고 꿰맨 뒤에 사이즈를 크게 맞춘 석관에 안장하기로 했는데 # 그렇잖아도 뚱뚱한 그의 시신은 부풀어올라 도저히 석관 안에 들어가지가 않았는데도 신하들이 용을 써서 결국 석관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신이 터져 악취가 진동한 탓에 놀란 사람들이 성당에서 빠져나오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15] 그의 무덤은 16세기 종교전쟁 때와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약탈되어 지금은 관 속에 넓적다리뼈 하나만 남아있다.
2.6. 가족관계
윌리엄 1세는 4남 5녀가 있었는데 장남인 로베르와는 사이가 나쁘다 못해 철천지 원수와도 같았다.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로베르가 프랑스로 도주하자 윌리엄은 로베르의 상속권 일체를 박탈하고 죽기 전에야 유언으로 노르망디 공국을 남겨주었다.
장남 로베르는 모든 것을 잃고 프랑스로 추방당했으나 윌리엄이 죽어가면서 그래도 자기 아들이라고 내어준 노르망디 공작 자리에 올라 로베르 2세가 된다. 차남 리사르는 윌리엄보다 일찍 죽었고, 삼남 윌리엄은 원래라면 로베르가 물려받았어야 할 잉글랜드 왕위를 받았다. 막내아들인 헨리는 영지를 살 돈을 받았는데 윌리엄 1세 사후의 형제들 간의 계승권 분쟁 이후에 헨리 1세가 된다. 또한 장녀 아델라의 아들이자 외손자였던 스티븐은 헨리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된다.
3. 여담
윌리엄 1세가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영토 중에서 지금도 남아 있는 영토가 딱 한 곳 있는데 바로 채널 제도이다. 하지만 채널 제도를 제외한 다른 영토는 1204년 존 왕 때 프랑스 필리프 2세의 공격으로 모두 잃었다. 백년전쟁 때 잠시 탈환했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상실했다.
재산이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가치로 2295억 달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건 '''인류 역사상 7위에 해당하는 재산''' 기록이다.
영국의 국왕이 되었으나 윌리엄 1세는 프랑스어만 말하고 쓰며 읽을 줄 알았지 영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고 읽거나 쓰지도 못했다. 특히 프랑스 내의 영토인 노르망디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말년에는 아예 노르망디에 거주하며 영국에는 대리인을 통해 문서로 지시하며 통치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노르망디 주민들과 잉글랜드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위인이라며 다투기도 한다.
위의 유년기 문서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아내 마틸다(1031~1083)와의 결혼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노르망디 공작 시절인 1050년 경 20대 초반인 윌리엄은 당시 19세쯤 되던 마틸다에게 대리인을 보내 청혼을 했다. 하지만 마틸다가 "너님 같은 사생아랑 나랑 격이 맞는다고 생각함? 꿈 깨셔."라고 대답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윌리엄은 플랑드르로 달려갔다. 여기서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교회에 가던 마틸다를 만났다는 설과 그녀의 방으로 쳐들어갔다는 것. 진실이 어느 쪽인지는 크게 상관없다. 어쨌든 열받은 윌리엄이 마틸다를 보자마자 '''머리채를 잡아다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두들겨팼다'''는 점은 변치 않으니까. 여기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는데 자신의 딸이 미천한 사생아 공작에게 두들겨 맞는 광경을 본 마틸다의 아버지 보두앵 백작(1012~1067)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칼을 뽑으려 하자 '''마틸다가 아버지의 앞을 막으며 "이 남자가 아니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버틴 것. [16] 여튼 두 사람은 아버지와 레오 9세 교황의 결사 반대[17] 에도 결혼을 강행했고 결국 교황의 승인[18] 도 받아냈다.
물론 이후 아들 네 명과 최소 다섯 이상의 딸을 두었고, 윌리엄이 잉글랜드 원정을 떠날 때 마틸다가 남편을 위해 자신의 개인재산까지 털어서 "모라"라는 이름의 배를 선물했다고 할 정도니[19] 부부간의 금슬은 굉장히 좋았던 모양이다. 윌리엄 1세에게 혼외자식이 있다는 증거도 없고 딱히 추문 같은 것이 전해져 내려오지도 않는다는 점도 부부관계가 좋았음을 의미한다. [20]
얼음과 불의 노래의 정복왕 아에곤 1세의 모델이다.
[1] 보통 노르만 정복이 최후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알려져 있으나 엄밀하게 최후의 잉글랜드 정복은 명예혁명이라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물론 본인이 직접 무력을 일으켜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민족 군주로는 진짜로 윌리엄 1세가 마지막이다. 또한 아직도 영국 왕족의 뿌리는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이 표현이 적절하기도 하다.[2] 역대 왕조마다 왕위 계승자가 없으면 모계 계승 등으로 대대로 이어왔다.[3] 기록에는 에를르바가 길에서 춤을 추던 모습을 우연히 목도한 로베르가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4] 영어로는 William the bastard라고 하는데, bastard는 현대영어권에서 호로새끼(...) 정도의 어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는 현대에 사생아가 나올 일이 거의 없어서 욕설로 굳어졌을 뿐 그전까지는 사생아, 혼종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였다. 물론 사생아를 좋지 않게 본 기독교의 관념 상 좋은 뜻은 전혀 아닌 것은 마찬가지였다. 현대 영어에서 혼외자녀를 지칭할때는 보통 love child 라고 하며 bastard는 역사적인 언급이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다.[5] 그녀의 아버지는 흔히 무두장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무두장이는 유럽에서는 백정과 비슷한 불가촉천민에 가까운 최하급 계층이었다. 하지만 재단사 또는 장의사였다는 설도 있으며 로베르 1세의 시종을 지냈다고도 한다. 다만 시종이었던 것은 윌리엄이 태어남으로써 받은 직위였다는 추정도 있다.[6] 시민들(전부였다고도, 혹은 지도 계층의 시민 40명만이었다고도 한다)의 손을 잘라버렸다고 한다.[7] 당시 노르망디 공작위를 노리던 사람은 윌리엄 뿐만이 아니었다. 형제는 자매인 아델하이드 외에는 없었으므로 주 적은 역시 아버지 로베르 2세의 형제들, 그러니까 숙부들이었다.[8] 이 문서의 여담 문단에 적혀 있지만 이때 그냥 달아난 게 아니라 마틸다의 아버지가 “감히 사생아 주제에 귀한 내 딸을 두들겨팼겠다!” 라며 윌리엄을 죽이려 했는데 마틸다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막았다(…). 그리고 마틸다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9명이나 낳으면서 추문 하나 없이 잘 산 것을 보면 결국 부부 사이는 원만했던 듯.[9] 마틸다의 어머니 프랑스의 아델은 프랑스의 경건왕 또는 현명왕이라 불린 리샤르 2세의 딸 즉 공주였는데 노르망디 공작가의 리샤르 3세(윌리엄의 백부)와 결혼했다가 리샤르 3세가 결혼 6개월 만에 죽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재혼했고, 이후 낳은 딸이 마틸다이다. 이 경우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사촌뻘이 될 뻔 했던 남매로 해석할 여지가 없진 않다.[10] 또한 윌리엄 아버지 악마공 로베르 1세의 어머니는 부르고뉴 공작 코난 1세의 딸 유디트였고, 유디트의 외할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리 1세였는데 조프리 1세는 선대 앙주백 폴크 2세의 아들이었다. 폴크 2세는 조프리 1세 외에도 슬하에 딸 아델하이드가 있었고, 이 아델하이드가 낳은 딸이 프로방스의 콘스탄스였는데 콘스탄스는 다시 경건왕 리샤르 2세의 딸 프랑스의 아델을 낳았다. 즉, 윌리엄의 외할머니와 마틸다의 어머니가 같은 외증조할아버지를 둔 외가쪽 외삼종자매(6촌)지간이었으며, 따라서 윌리엄과 마틸다의 촌수는 외가에 외가가 겹친 11촌 당고모와 조카에 해당하는,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족보(…).[11] 이러한 걱정이 괜한 걱정은 아닌 게, 훗날 윌리엄 1세의 여계후손인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백년전쟁을 일으켰다.[12] 이 장면을 두고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 편에서는 윌리엄 1세가 "영국 왕이 죽기 전에 나한테 왕 자리 물려준다고 약속했어! 의심 가면 왕한테 물어봐!"라고 우기는 것으로 패러디했다. 물론 이미 왕은 죽고 없는데 죽은 왕이 대답할 수 있을 리는 당연히 없다. 그러자 영국 어느 관료가 "야! 죽은 왕이 어떻게 대답하니?"라고 되물었는데 윌리엄 1세는 뻔뻔하게도 "그럼 내 말을 믿으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로 받아쳤다(...).[13] 윌리엄의 지배에 심하게 반항한 자들이 바로 데인족이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윌리엄 휘하의 노르만인과 데인인들은 모두 바이킹의 후예로, 1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동족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라틴 문화에 동화된 노르만족과 북유럽에 잔류하여 자신들의 북게르만 문화를 지켜낸 데인족은 조상 세대에 비해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데인족은 북게르만어군에 속하는 고대 노르드어를 사용했지만 윌리엄 1세는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노르만어와 프랑스어만 구사할 줄 아는 등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다.[14] 나중에는 아예 말을 타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필리프 1세는 이를 조롱하기도 했다.[15] 이 악취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향을 피워도 없어지지 않아 나중에 성당을 환기시켜 악취가 다 빠지고 나서야 장례식을 치루었을 정도였다.[16] 아무리 봐도 아버지가 윌리엄한테 죽을 것 같아서 막은 것 같다는 의견이 있으나, 마틸다의 아버지는 윌리엄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었고 더 강한 권력을 가졌다.[17] 상술했다시피 이 두 사람은 모계로 먼 친척이다. 그러나 사실 촌수로만 무려 11촌지간에 외가에 외가가 겹친(...) 사실상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교황은 이걸 근친혼이라고 반대한 것이다. [18] 레오 9세는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이후 여러 교황도 반대했으나 결국 1059년 교황인 니콜라오스 2세가 인정했다.[19] 이후 이 배는 잉글랜드 침공 때 윌리엄의 기함이 된다.[20] 애초에 마틸다가 자신의 남편이 사생아를 낳는 상황=불륜 자체를 싫어했는데, 마침 이렇게 사생아란 말만 듣고도 미친듯이 화내는 남자라면 절대 사생아는 안만들겠지 싶어서 윌리엄과의 결혼을 다짐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윌리엄은 사생아는 커녕 딱히 정부를 뒀다는 기록조차 없으니 옳은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