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레크누드
고대 노르드어: Hörða-Knútr (회르다크누트)
덴마크어: Hardeknud (하데크누드), Knud 3. (크누드 3세)
영어: Harthacnut (하타크뉴트), Canute III (커뉴트 3세)
11세기 덴마크 왕국의 국왕이자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크누트 대왕의 아들이다. 1035년 크누트 대왕이 죽었을 때, 노르웨이 왕위는 마그누스 1세가 가져갔고,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왕위는 하데크누드가 물려받았다. 다만 잉글랜드의 왕위는 불안한 덴마크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배다른 형인 해럴드 1세에게 맡겨 놓았다.
1040년 3월, 해럴드 1세는 병으로 죽었고, 1040년 6월, 하데크누드는 왕위를 접수하기 위해 62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유유히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그리고 이미 죽은 해럴드이지만 그에 대한 복수를 한다. 해럴드가 잉글랜드의 섭정왕이었을 때 하데크누드의 이부형인 앨프리드(참회왕 에드워드의 동복동생)를 죽였으며 잉글랜드를 하데크누드에게 돌려주지 않고 마음대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 있던 해럴드의 시신을 파헤쳐서 공개적으로 목을 베고 하수구에 던졌다. 시신은 다시 템즈 강에 던져졌다가 시민들에 의해 교회 뜰에 묻혔다. 그가 씨다른 형의 복수를 위해 배다른 형의 시체를 훼손한데는 아마도 그의 어머니의 사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데크누드는 덴마크의 전통에 따라 전제군주로서 강력하게 통치했다. 이는 예전의 잉글랜드 왕들이 귀족들을 통해 통치해 온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전함을 두 배로 늘렸고, 그것을 위해 세금을 가혹하게 늘렸으며, 때마침 찾아온 흉년이 겹치면서 발생한 반란에 대해서는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그는 배반자 및 맹세를 어기는 자로서 두루 까였다. 당시 노섬브리아의 백작은 시워드(Siward) 백작이었지만, 북부 지역은 버니시어(Bernicia)의 백작 이드울프(Eadwulf)가 다스리고 있었다. 독재주의자인 하레크누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왔는데... 1041년에 이드울프 백작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왕에게 도발했다가 화해를 청한다. 하레크누드 왕은 쿨하게 그의 안전을 보장해 줬지만, 실은 뒤에서 시워드 백작과 공모를 하여 이드울프를 죽이게끔 한다.
하여간 잉글랜드에서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좋지 않다. 왕다운 행동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까였고, 하루에 4끼씩 성찬을 차려가며 먹고 마셨다고 까였다. 심지어 거의 800년 후의 소설 아이반호에서도 하데크누드는 끊임없는 식탐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평소 여러 가지 병을 앓아 왔으며, 아마도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기 1년 전에는 생이 얼마 안 남았음을 깨닫고 노르망디로 추방당해 있던 잉글랜드 왕위의 정통 계승자인 이부형 에드워드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여 입지를 강화시켜주기도 했다. 결국 1042년 6월 8일, 그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신부를 위한 축배를 마시다가 쓰러져 심한 발작을 일으킨 후 죽었다. 이때 나이 23세 혹은 24세. 잉글랜드의 왕위를 얻은 지 겨우 2년 만이었다.
덴마크의 왕위는 생전에 미리 맺은 협약[1] 대로 노르웨이의 왕 마그누스 1세에게 넘어갔고, 잉글랜드 왕위는 참회왕 에드워드에게 넘어갔다. 하데크누드는 잉글랜드를 통치한 마지막 덴마크 왕이다.
[1] 더 오랫동안 살아 남은 사람이 상대방의 왕위까지 잇기로 한 협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