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1세
고대 노르드어: Haraldr Knutsson (하랄드 크누트손)
고대 영어: Harold I (하롤드 1세)
영어: Harold Harefoot (해럴드 토끼발왕)
해럴드 1세는 11세기 중반의 잉글랜드 왕국 국왕이다. 해럴드 헤어풋(Harefoot, 산토끼발)이라고도 불렸는데, 빠르고 사냥을 잘했다는 의미였다고.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의 왕이었던 크누트 대왕과 그의 첫 아내 사이의 아들이며, 해럴드의 뒤를 이은 하레크누드 왕의 배다른 형이다. 그런데 그가 크누트 대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라는 중세 기록에는 그가 크누트 대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나온다. 대왕의 첫 아내는 임신을 못하고 있었고, 자식을 낳고 싶은 욕심에서 남의 아이를 데려다가 애를 낳은 척 했는데, 그 애가 바로 해럴드라는 것이다. 하지만 무려 3개국을 통치한 크누트 대왕이 그렇게 어리숙했을 리는 없고, 어쩌면 대왕의 두 번째 왕비가 퍼뜨린 헛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035년 11월 12일, 크누트 대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레크누드가 덴마크 왕 및 잉글랜드 왕으로 등극한다. (노르웨이 왕 자리는 망누스 1세가 차지했음). 크누트 대왕이 왕위계승에 대한 갈등의 씨앗을 남기는 실수를 한 덕분에 하레크누트의 배다른 형이었던 해럴드는 하레크누트 대신 잉글랜드로 가 섭정으로 선언하며 사실상 잉글랜드를 장악했다. [주의] 초창기의 해럴드는 잉글랜드 전역을 장악하지 못했고 템즈강 북부만을 통치했다. 남부는 강력한 귀족인 고드윈과 하레크누드의 친어머니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해럴드의 세력에 눌린 고드윈이 해럴드 쪽으로 붙었고, 해럴드는 권력을 확고히 해 나갔다.
해럴드가 권력을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 있다. 1036년에는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와 그의 동생 앨프리드가 오랜 망명 생활 중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지배층은 그들이 왕위를 뺏기 위해 온 것이라는 의심을 했고, 이미 해럴드 편에 붙었던 고드윈은 앨프리드를 속여 포로로 잡았다. 고드윈은 그를 해럴드에게 넘기기 위해 배에 태웠는데, 고드윈의 부하들은 배 위에서 앨프리드를 장님으로 만들었고, 얼마 후 그는 상처가 덧나 죽었다. 형 에드워드는 별다른 저항을 못했고, 그리고 아무런 소득없이 잉글랜드를 떠났다. 이 사건은 해럴드가 잉글랜드를 지배하던 덴마크계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에드워드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고드윈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후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고, 고드윈과 협력과 대립을 오가는 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1037년에는 하레크누드의 친모가 프랑스로 도망쳤고, 해럴드는 잉글랜드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1037년에서 1040년까지 그는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했으며, 심지어 하레크누드조차 잉글랜드로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병력을 모아나갈 수 밖에 없었다.
1040년 3월 17일, 해럴드는 25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었다. 사인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왕위는 원래 주인 하레크누드가 차지하였다. 해럴드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설령 있었다 해도 왕위를 물려주기에는 너무 어렸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죽었을 때는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를 침공할 함대를 준비하던 중이었으니,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얼마 뒤 하레크누드는 결국 잉글랜드에 함대를 이끌고 유유히 도착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해럴드의 시체를 파헤쳐서 공개적으로 목을 벤 다음 템즈 강 옆의 습지에 던져버렸다. 그의 시체는 나중에 어부들에게 발견되어 런던 근처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한다. 그 후 최종적으로 웨스트민스터 구의 세인트 클레멘트 데인스 교회에 묻혔다.
[주의] 이전에 써져있던 맡겼단 소린 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