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누엘 스베덴보리
Emanuel Swedenborg
1688년 2월 8일 ~ 1772년 3월 29일(향년 만 84세)
18세기 스웨덴의 자연과학자[1] ·철학자·신비주의자·신학자. 원래는 기계공학자이자 해부학자, 인문학자였다.
스베덴보리는 1688년 1월 29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예스퍼 스베덴보리는 루터파 궁정 성직자였으며, 웁살라 대학 신학교수직을 맡았다가 주교가 되어 숨을 거두었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인 것을 깊이 생각하곤 하였으나 결국 과학자의 길을 걷는다.
1699년 11살 나이에 웁살라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있는 동안 인문학과 수학, 과학을 골고루 배웠으며 1709년 21살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1710년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을 거쳐 영국 런던에 도착, 4년간 머무르다 1715년에 귀국하였다.
1744년(56세) 4월 6일, 스베덴보리는 네덜란드에 있으면서 부활절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2] 잠자리에 들었다. 한창 잠을 자던 중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큰 소리가 들리자 스베덴보리는 두려움을 느꼈는데 그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다가왔음을 느끼고 바닥에 얼굴을 대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도 런던에서 비슷한 신비 체험을 한 번 더 하자, 스베덴보리는 이후 열성적인 신비주의자로 돌변, 이전의 다른 과학적/인문학적인 일들에서 손을 떼고 종교적인 저작을 쓰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웨덴에서 스베덴보리는 뭔가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란 평가를 얻으며 점차 유명해졌다. 그 외에도 스베덴보리는 귀족원의 일원으로서 정치에도 일부 참여하였다.
1759년(71세), 스베덴보리는 예테보리에서 열린 잔치에 참가했다가 갑자기 안색이 파리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그곳에서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스톡홀름에서 불이 났는데, 자기 집 근처까지 불이 미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우리집 세 번째 옆집에서 불이 잡혔다오."라고 대답하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사람들이 한 번 확인해보자, 정말로 그 시간에 스톡홀름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한 대로 화재가 있었으며, 경과도 말했던 대로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신통한 사람으로 유명해지고, 점차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761년,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왕비 루이제 울리케(Luise Ulrike)가 스베덴보리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불러 자기 오라비 소식을 듣고 싶어하였다. 루이제 왕비의 오빠는 프로이센의 왕태자 아우구스트 빌헬름(August Wilhelm)이었는데 이미 1758년에 사망했다. 프로이센과 스웨덴의 사이가 나빠지자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할 수 없었으나 왕비가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은밀히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은 받지 못한 터였다.
다음날 스베덴보리는 왕비를 찾아가 "편지는 받았으나 당시 국정 때문에 답장을 할 수 없어서 저를 통해 소식을 전한다고 합니다."라고 말했고, 루이제 왕비는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스베덴보리의 명성을 더욱 높인 것은 당연지사.
그 외에도 스베덴보리 추종자들의 자료에 따르면 스베덴보리는 감리회 창시자 존 웨슬리와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으나,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존 웨슬리가 한때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고 흥미를 가졌으나, 좀 더 알아본 뒤에는 매우 혹평하며 관계를 끊었는데, 스웨덴보리 추종자들이 왜곡했다는 주장도 있다. 존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에 따르면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매우 허황되이 느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772년 3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머물다가 숨을 거두었다. 죽기 약 1년 전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죽을 날짜와 시간을 편지를 통해 한 목사에 전했다고 한다 . 사람들은 시신을 런던에 있는 스웨덴 교회 뜰에 묻었지만, 1908년에 스웨덴 정부가 묘소를 웁살라 성당으로 이장하였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반대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아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사후에 영국에서 그의 교리를 따르는 '새 그리스도 교회'(Church of the New Christ)가 설립되었다. 미국과 영국에는 꽤 널리 퍼져 있다고 하는데, 사실 국내에서도 '''새교회(진짜 이름이 이렇다)'''라는 이름으로 정식 교단이 들어왔다.
교회 건물이나 안에 있는 집기들은 의외로 평범한데, 북유럽에서 유래한 교파답게 루터교와 비슷한 인테리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베덴보리 교회와 웨이페어러 채플 교회가 유명하다. 후자는 사실상 예식장이나 마찬가지이지만.
1688년 2월 8일 ~ 1772년 3월 29일(향년 만 84세)
18세기 스웨덴의 자연과학자[1] ·철학자·신비주의자·신학자. 원래는 기계공학자이자 해부학자, 인문학자였다.
스베덴보리는 1688년 1월 29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예스퍼 스베덴보리는 루터파 궁정 성직자였으며, 웁살라 대학 신학교수직을 맡았다가 주교가 되어 숨을 거두었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인 것을 깊이 생각하곤 하였으나 결국 과학자의 길을 걷는다.
1699년 11살 나이에 웁살라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있는 동안 인문학과 수학, 과학을 골고루 배웠으며 1709년 21살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1710년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을 거쳐 영국 런던에 도착, 4년간 머무르다 1715년에 귀국하였다.
1744년(56세) 4월 6일, 스베덴보리는 네덜란드에 있으면서 부활절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2] 잠자리에 들었다. 한창 잠을 자던 중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큰 소리가 들리자 스베덴보리는 두려움을 느꼈는데 그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다가왔음을 느끼고 바닥에 얼굴을 대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도 런던에서 비슷한 신비 체험을 한 번 더 하자, 스베덴보리는 이후 열성적인 신비주의자로 돌변, 이전의 다른 과학적/인문학적인 일들에서 손을 떼고 종교적인 저작을 쓰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웨덴에서 스베덴보리는 뭔가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란 평가를 얻으며 점차 유명해졌다. 그 외에도 스베덴보리는 귀족원의 일원으로서 정치에도 일부 참여하였다.
1759년(71세), 스베덴보리는 예테보리에서 열린 잔치에 참가했다가 갑자기 안색이 파리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그곳에서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스톡홀름에서 불이 났는데, 자기 집 근처까지 불이 미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우리집 세 번째 옆집에서 불이 잡혔다오."라고 대답하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사람들이 한 번 확인해보자, 정말로 그 시간에 스톡홀름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한 대로 화재가 있었으며, 경과도 말했던 대로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신통한 사람으로 유명해지고, 점차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761년,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왕비 루이제 울리케(Luise Ulrike)가 스베덴보리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불러 자기 오라비 소식을 듣고 싶어하였다. 루이제 왕비의 오빠는 프로이센의 왕태자 아우구스트 빌헬름(August Wilhelm)이었는데 이미 1758년에 사망했다. 프로이센과 스웨덴의 사이가 나빠지자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할 수 없었으나 왕비가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은밀히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은 받지 못한 터였다.
다음날 스베덴보리는 왕비를 찾아가 "편지는 받았으나 당시 국정 때문에 답장을 할 수 없어서 저를 통해 소식을 전한다고 합니다."라고 말했고, 루이제 왕비는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스베덴보리의 명성을 더욱 높인 것은 당연지사.
그 외에도 스베덴보리 추종자들의 자료에 따르면 스베덴보리는 감리회 창시자 존 웨슬리와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으나,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존 웨슬리가 한때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고 흥미를 가졌으나, 좀 더 알아본 뒤에는 매우 혹평하며 관계를 끊었는데, 스웨덴보리 추종자들이 왜곡했다는 주장도 있다. 존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에 따르면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매우 허황되이 느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772년 3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머물다가 숨을 거두었다. 죽기 약 1년 전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죽을 날짜와 시간을 편지를 통해 한 목사에 전했다고 한다 . 사람들은 시신을 런던에 있는 스웨덴 교회 뜰에 묻었지만, 1908년에 스웨덴 정부가 묘소를 웁살라 성당으로 이장하였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반대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아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사후에 영국에서 그의 교리를 따르는 '새 그리스도 교회'(Church of the New Christ)가 설립되었다. 미국과 영국에는 꽤 널리 퍼져 있다고 하는데, 사실 국내에서도 '''새교회(진짜 이름이 이렇다)'''라는 이름으로 정식 교단이 들어왔다.
교회 건물이나 안에 있는 집기들은 의외로 평범한데, 북유럽에서 유래한 교파답게 루터교와 비슷한 인테리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베덴보리 교회와 웨이페어러 채플 교회가 유명하다. 후자는 사실상 예식장이나 마찬가지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