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공

 

1. 공자의 적통에게 수여한 작위
2.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군주
2.1. 개요
2.2. 생애


1. 공자의 적통에게 수여한 작위


衍聖公
공자 이후 유교가 중국 왕조의 가장 중요한 학문 체계로 자리잡으면서 공자 가문에 대한 대우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공자 가문의 적손들에게는 조정에서 작위를 하사하였다. 작위의 이름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포성후, 봉성정후, 문성공 등으로 바뀌었는데, 45세손 공종원(孔宗願)부터 연성공이란 작위를 하사하였다. 정강의 변으로 인해 공자의 종가 중 3대 연성공인 공단우(孔端友, 공종원의 장손)일가는 남송 조정과 함께 절강성으로 이주했고 공단우의 동생인 공단조(孔端操)는 곡부에 남아서 공묘를 지키다가 금나라 조정에게 연성공 작위를 새로 받았다. 이 공단우 일가를 남종, 공단조 일가를 북종으로 나뉜다. 이는 원나라 때 남종의 종손인 공수(孔洙)가 정통성을 북종에게 양보하면서 끝난다.
마지막 연성공은 76세손인 쿵더청(孔德成)으로 32대 연성공이다. 쿵더청이 연성공 자리를 계승했을 때는 공화국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였으나, 북양정부는 쿵더청의 연성공 작위 세습을 용인하였다. 국민혁명으로 북양정부에 비해 더 혁명적인 국민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연성공 작위는 잠시 용인되다가 1935년,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라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쿵더청이 이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맡았다. 물론 귀족 작위에서 공직으로 형식이 바뀌었을 뿐 봉사관 자리를 공자의 종손이 대대로 세습한다는 원칙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대우 역시 장관급인 특임관에 준하는 지위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국부천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2.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군주



'''{{{#ece5b6 연나라 32대 국군
성공
成公}}}'''
''''''
(姬)
''''''
재(載)[1]
'''아버지'''
연효공(燕孝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34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34년

2.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연(燕)나라의 제 32대 군주. 연효공의 아들. 연민공의 아버지.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휘가 재(載)로 기록되어 있다.

2.2. 생애


연 효공 15년(기원전 455년), 연 효공이 사망하자, 연 성공이 그 뒤를 이어 받아 연나라 제후로 즉위하였다.
연 성공 16년(기원전 434년), 연 성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 연 민공이 즉위했다.

[1] 죽서기년에 등장하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