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더청

 

[image]
'''중화민국 7대 고시원장
32대 연성공
'''
'''한문'''
孔德成
'''한국식 독음'''
공덕성
'''영문'''
Kung Te-cheng
''''''
달생(達生)
''''''
옥여(玉汝)
'''출생'''
1920년 2월 23일 중화민국 산동성 곡부현
'''사망'''
2008년 10월 28일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국적'''
중화민국 [image]중화민국 [image]
'''학력'''
가정교육
'''직업'''
교육인, 정치가
'''고시원장
재임 기간
'''
7대 1984년 9월 1일 ~ 1993년 4월 24일
1. 개요
2. 생애
2.1. 온 중국이 주목하는 탄생
2.2. 마지막 연성공
2.3. 초대 봉사관
2.4. 대만에서의 삶
3. 여담
4. 주요경력
5.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공자의 77대 후손으로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세습하던 작위인 연성공을 마지막으로 세습했던 인물이다.

2. 생애



2.1. 온 중국이 주목하는 탄생


1920년, 산동성 곡부에서 전대 연성공인 쿵링이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쿵링이의 첩 왕보취였으며 2명의 누나 공덕제[1]와 공덕무[2]가 있었다. 이미 9년 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하고 북양정부가 수립된 후였지만 공자의 직계후손이 태어난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며 쿵링이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쿵더청은 전 중국의 주목을 받으면서 출생했다. 쿵링이가 사망전 쉬스창에게 왕씨가 임신 5개월이라고 상주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중화민국 내정부는 공씨 일족에게 왕씨의 임신 사실을 입증할 서류를 성장공서를 통해 보고하게 하였다. 이에 공부 족장 공흥환, 공상체, 공령예, 공령후 등이 중국 의사 류금패와 독일 의사 루돌프를 보내 왕씨를 진단하게 했고 이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에 쉬스창은 왕씨가 임신한 상태라는 것을 공인하였다.
왕씨의 뱃속에는 공자의 유일한 종손이 있을 수도 있었으므로 엄중한 대우를 받았다. 우선 왕씨를 위해 안채 후원에 별도의 주방을 만들어 두 사람이 식사를 만들어 왕씨에게 올렸는데 왕씨는 이 사람들이 만든 음식이 아니면 절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또한 딸이 태어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곡부의 공씨 일족들과 절강성의 남종 일가들이 모두 모여서 딸이 태어날 경우의 작위 세습에 대해 논했다. 대총통 쉬스창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혹시나 아이가 뒤바뀜 당하는 일을 막기 위하여 엄중히 곡부에 초소를 세우고 장군의 지휘 아래에 경호하였고[3] 아들이 태어나길 기원하기 위해 공부의 불당루와 전당루의 송자관음상에서 제상을 차리고 불공을 드렸으며 공자의 제사 때만 여는 중광문까지 열고 아들이 태어나길 기원했다. 만일을 대비하여 외국인 의사들까지 불러온 상황이었지만 전통을 중시하기 위해 곡부의 모든 산파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가졌다.
몇시간 동안의 고통스러운 분만이 이어졌지만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 공덕제와 공덕무는 매우 쉽게 태어났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번에는 아들이 나오는 모양이라고 흥분했고 하인들이 폭죽과 오색비단, 붉은 종이를 준비하였다. 산파들이 중광문만 여는 것으론 부족하니 곡부현성의 정남문도 열라고 요구했다. 정남문도 황제가 올때나 공자의 제사 때만 여는 곳이었지만 이번에도 관례를 깨고 열어놓았다. 그런데도 분만이 계속되자 누군가 후화원의 지세가 높아 전당루를 누르고 있다면서 앞의 지세를 높이라고 했다. 이에 "노반이 여덟장을 높였다."라고 쓴 나무패를 전당의 각 문에 걸어놓았고 얼마 후에 쿵더청이 탄생했다.
쿵더청이 탄생하자 즉시 이를 축하하기 위한 예포 12발이 발사되었고 공부의 각 문에는 채색등불을 걸었다. 그리고 하인들이 징을 치면서 거리로 뛰어나가 "작은 성인이 태어났다."고 알렸다. 공흥환이 즉각 대총통 쉬스창, 국무총리 진윈펑, 내무총장, 산동성장에게 "선 연성공 령이의 첩 왕씨의 유복이 2음력 정월, 초나흘 사시에 남자아이를 출산하였는데, 모두 무사하다."라고 전보를 보내며 작위 계승을 요청했다. 1920년 4월 20일, 쉬스창은 쿵더청을 대총통령으로 연성공에 봉했다. 쿵더청을 낳은 왕보취는 불과 17일 후에 사망했다.
[image]
쿵더청의 생모 왕씨

2.2.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을 키우기 위해 공씨 문중은 즉각 유모를 물색하였다. 하지만 쿵더청은 입맛이 까다로웠는지 젖을 먹지 않고 울기만 했고 10여명의 유모를 찾았으나 그때마다 탈이 났다. 결국에는 공부의 의사인 유몽영이 데려온 유모 장씨의 품에서 쿵더청이 얌전해졌다고 한다. 공씨 문중은 장씨에게 매일 아침에 돼지 뒷다리를, 저녁에 닭 한마리를 삶아 주었고 하루에 2근 반의 찐빵을 먹였다. 그리고 장씨의 남편에게는 10여무의 채소밭과 몇칸짜리 집을 내려주었는데 쿵더청이 9살에 젖을 완전히 뗀 후에도 이후 30여년 동안 공부에서 같이 살았다. 쿵링이의 정실 부인인 도씨는 쿵더청과 공덕제, 공덕무를 교육하기 위해 두개의 사숙을 건설하여 신식교육을 받은 왕육화[4]를 초빙하여 자식들을 가르쳤는데 공자의 종손이 전통을 잊어버릴 것을 염려하여 국학에 정통한 한림 출신의 장해란과 거인을 지낸 여금산 등을 초빙하여 국학에 대해서도 가르치게 했다. 고로 쿵더청은 사서오경을 비롯한 전통교육과 더불어 수학, 영어, 지리, 역사를 비롯한 현대교육도 받아야 했다. 1924년에는 궐리명덕중학이 세워졌다. 이는 이듬해 명덕중학으로 개편되었고 쿵더청은 명덕중학 교장 겸 학생이 되었다.
[image]
왼쪽부터 공덕성의 큰 누나 공덕제, 둘째 누나 공덕무, 공덕성 그리고 세 남매의 스승 왕육화
1925년 손봉전쟁이 일어나자 공씨 문중은 산동군벌 장쭝창에게 곡부현에서는 전쟁을 하지 말아줄 것을 호소했다. 쿵링이와 의형제였던 장쭝창은 이를 수락하였고 공씨 문중이 답례하기 위해 제남을 방문하자 자신의 아들인 14살의 장제악과 쿵더청이 의형제를 맺게 하였다. 1924년 북경정변의 발생으로 청나라 소조정이 폐지되고 국민혁명으로 북양정부가 멸망하고 중국 국민당이 영도하는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공씨 문중은 국민당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공화국에서 세습작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작위 취소를 청했으나 국민정부는 중화문명의 계승을 천명하였기 때문에 이를 당장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쿵더청을 보호하였다. 1929년 2월에는 도씨가 사망하면서 쿵더청과 공덕무, 공덕제가 공씨 문중의 주인이 되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벌어진 반장전쟁 기간 동안 곡부도 전쟁에 휘말렸는데 특히 1930년 중원대전에서 옌시산 군대가 산동에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공묘와 임묘가 포격으로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조선 유림계에서 1931년, 안향의 후손 안순환의 지원으로 위문단을 파견하여 곡부에서 쿵더청을 만나 위로의 뜻을 전달했다. 장제스, 펑위샹, 쑨커 모두 이에 대한 위로전문을 보내왔다.
이 시기 장제스, 펑위샹, 쑨커, 쿵샹시, 다이지타오 등 많은 군정요인의 방문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된 후 만주국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선통제가 즉위했다.

2.3. 초대 봉사관


[image]
1936년, 쿵더청의 결혼식
1935년 1월 18일. 국민정부는 연성공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관직으로 대체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중앙관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위인 특임관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쿵더청은 맹자의 종손 맹경당, 안회의 종손 안세용, 증자의 종손 증번산 등과 함께 제남과 산동성부에 들러 주요 관리들과 인사한 후 난징으로 갔다. 7월 8일,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천리푸 등 국민정부의 고위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쿵더청은 국부 예당에서 정식으로 봉사관에 취임했다.
광활한 중화민족, 유교를 널리 알린다.
대동 세계, 예의로써 나라를 흥성시킨다.
명을 받아 제사를 받듦을, 대대로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성실하게 공경하면서, 악장을 영원히 계승한다.
성인의 도리로 교화하고, 종묘를 지킬 것을 맹세한다.
선인의 유적을 본받아서, 지키면서 영원히 알린다.
쿵더청의 취임선서
다이지타오는 쿵더청에게 "소년이 영민하고 품위있고 소박하며 조상의 미덕을 계승하여 완성하고 잘 지키어 친인들이 경축할 일이다!"라고 칭찬하며 효경 등의 여러 책을 선물로 주었다. 취임 후 쿵더청은 국민당 중앙대표 저민의와 재정부 대표 공상면과 함께 공원거리 부자묘에서 고묘 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쿵샹시가 주재한 환영 연회에 참가한 후 곡부로 돌아왔다. 곡부로 돌아온 후 출퇴근 시간과 각자의 역할, 근무수칙을 새로이 정하고 회계제도를 정비하여 공부를 개혁하였다.
1936년 12월 16일, 공부 후당루 건물에서 손가내(孫家鼐)[5]의 증손녀 쑨치팡(孫琪芳)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중국의 명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장제스 역시 참석할 계획이었으나 4일 전 서안 사건이 발생하면서 장쉐량에게 감금당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장제스가 갇힌 줄 몰랐던 하객들은 장제스를 위해 기다렸으나 오후 2시에 72사단장 손동훤이 장제스가 참석할 수 없다고 알려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중체서용의 정신을 표방하기 위해 쿵더청은 중국식 예복을 입었으나 손가내는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결혼식도 중국식과 서양식을 섞은 형태로 치러졌다. 국민정부 주석 린썬,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 전 대총통 쉬스창, 차오쿤,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엽초창,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 주중 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 판첸 라마 9세 등 전 중국의 명사들이 선물을 보내왔으며 심지어 상하이의 청방 우두머리 황진룽도 선물을 보내왔다.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도 국민당 명의로 예물을 보냈다.
쿵더청의 명망을 노린 일본 제국에서도 쿵더청을 포섭하기 위해 수시로 학자들이나 정치인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냈으며 도쿄에 공묘를 건설하는 등 쿵더청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며 1935년에는 도쿄의 공묘인 사문회가 건설된 후 쿵더청을 초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쿵더청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자신을 얼굴마담으로 이용하려는 수작임을 눈치채고 초청을 거절했다. 이후로도 일본에서 집요하게 쿵더청의 방일을 요구했으나 쿵더청은 병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국민혁명군 72사단장 손동훤이 산동성 정부가 이미 황하를 건너 피했으며 장제스가 쿵더청을 내지로 피신시키라고 지시했다고 알렸다. 당시 아내 쑨치팡(孫琪芳)이 막 임신한 상태인데다가 자신이 곡부를 떠나면 제사지낼 사람이 없어서 쿵더청은 당황했지만 일본인들이게 이용당할 수는 없다고 여겨 결국 삼촌 공영욱에게 제사를 책임지게 하고 자신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우한으로 피신했다. 우한으로 가던 중 호북성에서 장녀 공유악이 태어났다. 쿵더청은 우한에서 항일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우한 함락 후에는 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했다. 충칭에서 장제스의 배려로 봉사관부를 설치하고 국민참정회에 출석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1938년 공자 탄신일은 무척이나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장제스는 엽초창을 대표로 파견하였으며 고시원 대표 임상민, 민정청장 이수춘, 산동교육청장 하사원 등 수십명의 정부대표가 참서했다.
[image]
1947년의 쿵더청 일가

2.4. 대만에서의 삶


1949년, 국부천대 시에 장제스의 특별지시를 통해 스승 여금산 등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했다. 1955년, 대만국립대학 중문과와 인류학과 겸임교수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게 되었다. 타이베이 공자묘를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만인궁장의 문패를 직접 썼다. 중화문명의 정통을 자처하는 국민정부의 안배에 따라 고시원장, 총통부 자정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의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퇴계 이황에게 참례를 올리고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휘호를 남겼으며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예일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1988년 1월 13일 장징궈 총통이 사망하자 부총통 리덩후이, 행정원장 위궈화, 입법원장 예문아, 사법원장 린양강, 감찰원장 황존추, 장징궈의 3남 장효용과 함께 <경국선생유서>에 서명한 후 장징궈가 사망한 당일에 발표했다.
1989년, 장남 공유익이 62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 대만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말년까지 꾸준히 중국 전통문화에 대해 강연하였다. 2006년, 손자 공수장이 결혼식을 올리고 증손자 공우인을 낳았다.
[image]
쿵더청, 공수장, 공우인
2008년 타이베이에서 작고했다. 사과 수출 문제 때문에 대만을 방문 중이었던 김휘동 당시 안동시장이 조문하였다

3. 여담


대륙에 누나 공덕무를 비롯한 친족들이 일부 남았는데 양안관계가 개선된 후 대륙에 잔류한 친족들이 공부가주를 가지고 대접하자 문화대혁명 중에 공림이 홍위병의 만행으로 파괴된 사실 때문에 분격하여 이런 술은 모른다고 함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다고 한다. 원래도 공산당이 타도의 대상으로 천명한 공자의 후손인 그가 공산당과 친할 수 없는 관계였겠지만 특히 문화대혁명 중 자행된 반달리즘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고 공산정권에 극도의 반감을 품어 1990년 1월, 누나 공덕무와 재회할 때도 중국에서 만나길 거부하고 일본과 대만에서 2차례 만났다. 다만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 상봉은 계획적 만남이 아니라 일본에서 강연이 있을때 공덕무의 일본인 지인들이 황급히 공덕무를 초청하여 상봉을 주선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때의 만남은 겨우 30분 동안 이루어졌으며 제대로 된 상봉은 1995년, 공덕무의 대만 방문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쿵더청은 곡부의 공묘에 묻히지 않은 공씨의 종손 3명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공씨 종가가 대만으로 이주한 현재는 앞으로도 계속 타이베이에 공씨의 종손들이 매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 독립파들의 세력이 커질수록 이들이 설 자리는 없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극렬 독립파들 입장에서 공자와 그 후손은 대만인이 아닌 중국인 즉 '외국인'이기 때문인데... 다만 앞으로 공자의 직계 후손은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랄 것이며, 온건 독립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만인들도 외성인을 대만인으로 인정해주는 추세이기 때문에[6] 연성공 가문이 대륙으로 추방(?)당하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연인'으로 대만에 사는 것과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선현의 후손'으로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며, 대만이 독립한다면 이 직책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사실.
해외에서도 한 나라의 귀족 가문이 전쟁 등의 이유로 타국으로 이주해서 이주한 나라 사람이 되는 경우는 많으니까. 당장 전주 이씨 후손 중에도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이 있다.

4. 주요경력


'''중화민국 역대 고시원장'''
[image]
6대

7대

8대
유계홍

쿵더청
(1984년 9월 1일 ~ 1993년 4월 24일)

구창환
'''역대 연성공'''
31대

3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이관
쿵링이

쿵더청
(1920년 4월 20일 ~ 1935년 7월 7일)
'''역대 특임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연성공에서 이관

1대

2대
쿵더청
(1935년 7월 8일 ~ 2008년 10월 28일)

공수장

5. 참고문헌


  • 가란, 공자 家 이야기(서울: 선, 2010)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1] 孔德齊 1915-1940[2] 孔德懋 1917- , 문혁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유교가 다시 대륙에서 대접받는 지금은 정협위원을 3차례 지내고 영화 공자의 시사회에 초청받기도 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2001년 정협중앙위원 자격으로 안동에서 열린 유교문화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하였으며, 동생보다 장수하여 2018년 101세의 나이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유림과 만나기도 했다. 현재는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으며 2019년에는 한국공자문화센터 사람들이 베이징으로 찾아가서 문안을 올리기도 했다.[3] 5대10국시대의 혼란기에 공자의 후손을 참칭한 사태가 벌어졌던 적이 있었다. 공씨 종가에서 대대로 노비를 한 공말(孔末, 원래는 유(劉)씨)이 곡부에 있던 모든 공씨를 죽이고 자신이 종손인 것처럼 행세하다 사실이 들통나 그 역시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당시 어린 종손 공옥인이 외가에 가 있던 터라 대가 끊기지 않을 수 있었다.[4] 王毓華 1887-1952 공덕성의 평생 스승으로 공덕성이 장성한 이후에도 공부에 머물며 공덕성을 도왔고 중일전쟁이 일어나 공덕성이 충칭으로 몸을 피했을 때는 공부에 남아 공부의 업무를 처리하는 걸 도왔다. 1949년 국부천대 당시 공덕성이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가자 고향으로 돌아가 1952년 사망했다.[5] 1827-1909 청나라의 학자 겸 정치가로 무려 장원 출신이다. 한족으로는 최고의 직위라고 할 수 있는 대학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증손녀 쑨치팡과 달리 신해혁명 이전의 인물이라 한국식 독음으로 표기한다.[6] 단 진정한 대만인은 본성인이고 외성인은 '중국'이라는 외국에서 이주한 이민자라고 여긴다. 몇 세대를 넘겼으니 대만인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 대만취청의 4민족 중 하나도 외성인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