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충
閻忠
(? ~ 187)
후한 말의 인물.
한양 사람으로 가후가 젊은 시절에 아무런 명성도 없었지만 염충은 가후를 기이하게 여겨 장량, 진평의 기묘한 꾀, 계책이 있다고 평가했으며, 신도령을 지내다가 184년에 파직되자 황건적의 난을 토벌한 황보숭을 찾아가 거병할 것을 권하면서 방책을 제시했다.
황보숭은 마음속으로 충성심을 잊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안전하지 못하겠느냐고 했지만 염충은 지금 장군이 황건 반란도 진압하고 공이 높은데 암군(영제) 밑에서 안전하지 않다며[1] 공을 세운 한신은 머뭇거리다 유방에게 죽었다고 언급한 후, 지금 혼란스러운 나라를 세운다는 기치를 들고 일어서면 모두 따를것이라 주장했다. 먼저 격문을 띄우고 낙양을 얻고 환관들을 처벌하면 아이부터 여자, 지식인 모두 따를 것이며 그렇게 정권을 잡으면 왕조를 바꾸라고 권했다. 후한은 이미 어렵고 환관이 모든 권력을 잡고 있으니 지금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황보숭이 끝내 듣지 않자 떠났다.
187년에 마등, 왕국 등이 반란을 일으켜 삼보 지방을 노략질했는데, 기록에 따라서 황보숭전에는 왕국의 협박으로 염충은 주장으로 추대되어 36개의 부를 통괄하게 하면서 거기장군이라 불렀고 자치통감에는 한수가 왕국의 지위를 폐지하고 염충을 추대했다고 한다.
이후 염충은 이를 한탄하다가 병사했으며, 그가 죽자 한수 등이 권세, 이익을 두고 다투어 서로 죽이면서 점차 쇠퇴했다.
다른 사람의 인물평을 해주고 한수 등의 반란군이 그를 추대한 점으로 봐선 염충은 그 당대에는 이름 높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한 황조를 갈아 엎으려는 시도는 시기상조였는데 원소가 반동탁의 기지를 들고 일어선것이나 조조가 말년까지도 한의 신하를 자처했던 것을 생각하면 한나라의 영향력은 그렇게 쉽게 사라질게 아니었다. 황보숭이 거절한 것도 그 영향이 없다 보기 힘들다. 물론 황보숭이 역성 혁명의 의도를 품고 일어서도 바로 왕조를 갈아없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한나라는 당대인이자 바로 그 황보숭의 부하였던 조조에게 사실상 망했고, 황보숭이 군권을 잡고 있던 시기는 군웅할거가 대두되기 이전, 즉 군웅할거의 가장 큰 계기인 [동탁]]이 조정을 유린하기도 이전이였기 때문에 훨씬 신속하게 권력을 잡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가후의 스승이자 황보숭을 섬기는 것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염충(삼국지 가후전) 항목 참조.
(? ~ 187)
후한 말의 인물.
한양 사람으로 가후가 젊은 시절에 아무런 명성도 없었지만 염충은 가후를 기이하게 여겨 장량, 진평의 기묘한 꾀, 계책이 있다고 평가했으며, 신도령을 지내다가 184년에 파직되자 황건적의 난을 토벌한 황보숭을 찾아가 거병할 것을 권하면서 방책을 제시했다.
황보숭은 마음속으로 충성심을 잊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안전하지 못하겠느냐고 했지만 염충은 지금 장군이 황건 반란도 진압하고 공이 높은데 암군(영제) 밑에서 안전하지 않다며[1] 공을 세운 한신은 머뭇거리다 유방에게 죽었다고 언급한 후, 지금 혼란스러운 나라를 세운다는 기치를 들고 일어서면 모두 따를것이라 주장했다. 먼저 격문을 띄우고 낙양을 얻고 환관들을 처벌하면 아이부터 여자, 지식인 모두 따를 것이며 그렇게 정권을 잡으면 왕조를 바꾸라고 권했다. 후한은 이미 어렵고 환관이 모든 권력을 잡고 있으니 지금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황보숭이 끝내 듣지 않자 떠났다.
187년에 마등, 왕국 등이 반란을 일으켜 삼보 지방을 노략질했는데, 기록에 따라서 황보숭전에는 왕국의 협박으로 염충은 주장으로 추대되어 36개의 부를 통괄하게 하면서 거기장군이라 불렀고 자치통감에는 한수가 왕국의 지위를 폐지하고 염충을 추대했다고 한다.
이후 염충은 이를 한탄하다가 병사했으며, 그가 죽자 한수 등이 권세, 이익을 두고 다투어 서로 죽이면서 점차 쇠퇴했다.
다른 사람의 인물평을 해주고 한수 등의 반란군이 그를 추대한 점으로 봐선 염충은 그 당대에는 이름 높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한 황조를 갈아 엎으려는 시도는 시기상조였는데 원소가 반동탁의 기지를 들고 일어선것이나 조조가 말년까지도 한의 신하를 자처했던 것을 생각하면 한나라의 영향력은 그렇게 쉽게 사라질게 아니었다. 황보숭이 거절한 것도 그 영향이 없다 보기 힘들다. 물론 황보숭이 역성 혁명의 의도를 품고 일어서도 바로 왕조를 갈아없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한나라는 당대인이자 바로 그 황보숭의 부하였던 조조에게 사실상 망했고, 황보숭이 군권을 잡고 있던 시기는 군웅할거가 대두되기 이전, 즉 군웅할거의 가장 큰 계기인 [동탁]]이 조정을 유린하기도 이전이였기 때문에 훨씬 신속하게 권력을 잡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1. 미디어 믹스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가후의 스승이자 황보숭을 섬기는 것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염충(삼국지 가후전) 항목 참조.
[1] "지금 장군께서는 초봄에 부월(斧鉞)을 받았고, 늦은 겨울에 공을 거두었으며, 병사들은 마치 신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략은 다시 꾸밀 필요도 없이 불과 열 달 동안에 신병이 마치 빗자루로 쓸 듯이 소탕하니 아무리 단단한 성채도 마치 썩은 나무를 자르는 듯 했으며, 적은 눈이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7개의 주를 석권하여 36만 명을 도륙했습니다. 황건의 우두머리를 죽여서 사악한 무리들이 일으킨 우환을 제거했습니다. 봉호를 돌에 새겼으며 황제는 남향을 하여 장군의 덕에 보답을 했습니다. 장군의 위엄은 본조에 떨쳤으며, 풍문을 타고 해외로 나아갔습니다. 이로써 군웅들은 머리를 장군에게로 돌렸으며, 백성들은 뒤꿈치를 세워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록 은의 탕왕(湯王)과 주의 무왕(武王)이 세운 공적도 장군의 높은 공에 미치지 못합니다. 몸소 높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북면을 하여 용렬한 군주를 섬기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안전을 도모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