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왕

 


'''상(商) 15대 국군
초대 왕
탕왕
湯王
'''

'''묘호'''
태조(太祖) / 고조(高祖)
'''시호'''
태무왕(太武王) / 무왕(武王)
'''왕호'''
태을(太乙) / 대을(大乙)
''''''
(子)
''''''
(履)
'''아버지'''
기종(夔宗) 자주계(子主癸) / 자시계(子示癸)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1589년(?)
'''재위 기간'''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589년
1. 개요
2. 만들어진 성군?
3.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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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폭군이었던 하나라(夏)의 걸왕(桀王)을 무너뜨리고, 상나라(商)를 건국했다는 사람[1]으로, 성은 자(子), 휘는 리(履)이며, 대을(大乙), 태을(太乙), 성탕(成湯), 성당(成唐)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주계.
이후에 묘호로 태조(太祖)[2], 시호로 태무왕(太武王)[3]으로 추존되었다. 이윤(伊尹)의 보좌로 명조(鳴條)에서 대승하며 걸왕을 패사시켰다. 박(亳)에 수도를 정하고 상(商)을 건국하였으며 제도를 정비하였다.

2. 만들어진 성군?


다만 사료인 갑골문에 따르면 하나라 걸왕을 무너뜨리고 상을 건국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갑골문에서 탕왕은 중흥 군주로 묘사되며, 상나라는 삼황오제제곡에서부터 기원을 찾는다. 상나라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3. 일화


식언(食言)이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탕왕에게서 유래했다. 걸왕을 칠 때 박(亳) 땅의 백성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공을 세운 자를 포상할 것을 약속하면서 "너희는 불신할 것 없다. 나는 (내가 뱉은) 말을 먹지 않는다(爾無不信 朕不食言)." 라고 한 것.[4]
태을진인이 이 사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나라를 치기 전 명분과 군수 물자를 얻기 위해 일으킨 갈국(葛國) 정벌에 앞서 탕왕이 연설한 것을 기록한 "탕정"에서 탕은 천명을 강조한다. 갈국의 군주인 갈백(葛伯)이 포악무도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지 않으니 먼저 하늘에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소와 양을 갈국에 보냈으나, 갈백은 이를 모두 잡아먹어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농사일을 도울 일꾼들을 보내고, 이들에게 새참을 주기 위해 소년을 보냈는데, 갈백은 상나라에서 온 일꾼들은 모두 노예로 삼아버리고, 소년은 죽여버리자 하늘의 명을 대신해 갈국을 정벌한다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후 하나라 걸왕이 이를 문제삼자 이윤을 보내 조공을 바치게 하면서 이를 설명하는데, 걸왕은 아무 말도 못했고 훗날 걸을 정벌할 때도 마찬가지로 천명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탕의 덕이 높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탕이 교외에 나갔다가 사방에 그물을 쳐놓고 신에게 “천하 사방의 모든 것이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라고 기원하는 사람을 만났다. 탕왕은 그 장면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그물을 펴 놓으면 숲 속의 짐승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잡히고 말 것이니 너무도 잔혹하다.” 그리고 그물을 거두고 이렇게 기원하게 했다. “가고자 하는 대로 가고 하늘의 법도를 어기고 자기 스스로 그물에 걸리는 놈만 잡히게 하소서.” 이 이야기를 들은 제후들은 “탕의 덕망이 금수에까지 미치는구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 일은 여러 제후국에 펴졌고 40여 개의 제후국이 탕에 승복했다고 한다.
걸을 정벌하고 천하를 도모한 이후로 탕은 무력으로 천하를 도모한 점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자 본래 걸의 중신이었으나 상나라에 귀순한 재상 중훼(仲虺)는 탕에게 "하나라는 덕을 잃어 백성들이 진흙탕과 타오르는 숯불에 빠졌습니다. (有夏昏德 民墜塗炭)"라고 말한다. 오늘날까지도 위정자의 실정을 비판할 때 허구한 날 나오는 '도탄'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나왔다.[5]
[1] 비슷한 경우로 수나라의 폭군이었던 양제를 몰아내고 당나라을 건국한 이연이 있다.[2] 혹은 고조(高祖).[3] 혹은 무왕(武王).[4] 출처: 《서경(書經)》 탕서(湯誓)편.[5] 출처: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