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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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FF> '''황건적의 난'''
'''시기'''
184년
'''장소'''
한(漢) 제국
'''원인'''
외척과 환관의 전횡으로 인한 부패한 정치
'''교전세력'''
'''한나라'''
'''태평도'''
<^|1> '''지휘관'''
'''한영제'''
대장군 하진
북중랑장 노식
좌중랑장 황보숭
우중랑장 주준
동중랑장 동탁
형주자사 서구
남양태수 저공
남양태수 진힐
거록태수 곽전
소릉태수 조겸
여강태수 양속
예주자사 왕윤
진왕 유총#s-1
유주자사 곽훈
광양태수 유위
교위 추정
<^|1>'''대현량사 겸 천공장군 장각'''
지공장군 장보#s-1
인공장군 장량
장만성
조홍
마원의
당주
파재
팽탈
복사
장백#s-2
양중녕
<^|1> '''참전장수'''
'''노식군'''
호오환중랑장 종원

'''황보숭군'''
호군사마 부섭
기도위 조조

'''주준군'''
군사마 손견
별부사마 장초

'''조겸군'''
문생 원비
공조 봉관
주부 진단†
문하독 범중례†
적조 유위덕†
주기사 정자사†
기실사 장중연†

'''왕윤군'''
종사 순상
종사 공융

'''추정군'''
의용병 유비
의용병 관우
의용병 장비

'''기타'''
환전#s-2
장합
<^|1>'''조홍군'''
한충
손하#s-1
'''병력'''
5만 이상
수십만~100만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태평도 세력 진압
'''영향'''
당인들의 금고 해제,
한 조정의 영향력 약화로 인한 지방 호족들의 성장 발판 마련
1. 개요
2. 배경
3. 전투
4. 평가
4.1. 한나라 쇠퇴의 본격적인 기점
4.2. 한나라의 멸망은 과장되었다
4.3. 농민운동으로서
5. 기타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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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어: 黄巾之乱, 黄巾起义
영어: Yellow Turban Rebellion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한나라)은 이미 죽었고 노란 하늘(황건당)이 바로 일어나리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중국 한나라 말, 장각을 필두로 한 황건적이 일으킨 반란.
위의 표어는 오행설, 그중에서도 상생설을 차용한 것이다. 오행에 의하면 한(漢)은 화(火)의 덕에 의해서 흥한 나라이기 때문에 한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던 세력은 하나같이 오행상생 중에서 火生土에 의해 토(土)의 덕을 타고 났음을 자처했고 모든 상징에 토의 덕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사용하였다. "창천이 죽고 황천이 일어난다"는 말도 후한에 반기를 든 황건적(노란색 두건을 쓴 무리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오행설에 끼워맞춰서 자신들이 토덕의 대표임을 자처한 데서 만들어낸 유언비어다.
설명을 좀 덧붙이자면 아주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니었고, 적어도 당시에는 그럴듯하다고 여겨졌던 '오행도참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행도참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생겨서, 처음에는 오행의 상극 순서(목-금-화-수-토)를 따른다고 여겼지만 후한 말에는 상생 순서(목-화-토-금-수)라는 게 정설이 됐다. 상술했듯 한나라는 화의 덕으로 흥한 나라라고 여겨졌으며 따라서 한나라를 상징하는 색은 화에 해당하는 붉은색이었다. '''장기에서 한나라의 각인색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자.'''
그리고 역시 상술했듯, 한나라의 후계자를 자처한 세력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토의 덕을 지녔음을 강조하며 토에 해당하는 황색을 상징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헌제에게 선양을 받은 것으로 정통성을 주장한 위나라는 최초의 연호로 '''황초(黃初)'''를 사용했다. 오나라의 손권도 오왕을 칭하며 사용한 첫 연호는 '''황무(黃武)''', 황제를 칭한 뒤 사용한 첫 연호는 '''황룡(黃龍)'''이다.
반대로 왕조 교체를 인정하지 않고 한 황실의 정통성을 이어 갈 것을 천명한 촉한은 263년에 연호를 바꾸어 ''''염흥(炎興)''''을 사용했다. 바로 그해에 나라가 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반란은 결국 실패했지만 통일왕조가 무너지고 난세로 들어가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초한지진승·오광의 난이나 후삼국시대원종·애노의 난과도 겹친다.

2. 배경



중국의 한나라 말기 영제가 통치하던 184년에 일어난 종교집단 태평도 교수 장각을 중심으로 일으킨 대규모의 농민봉기 혹은 역성혁명이다.
거록인 출신인 장각이 후한 말기에 성행한 황제노자를 교조로 삼는 종교인 황로도(태평도)를 통해 신도들을 모아서 스스로를 "대현양사"라고 자칭하고 그 무리들을 모아 신봉자들에게 과오를 깨우치게 하고 부적이나 부적을 태운 재를 탄 물 따위를 사용하여 주문을 외우며 병을 고치는 등의 전형적인 종교집단의 활동을 전개하였고 무리들을 이끌어 모았다고 한다.
장각은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어 황로도를 전파하여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 등의 8주에 무리들이 퍼졌으며, 황실의 환관들과 내통 약속을 받아내는 등 치밀하게 거사 준비를 하였으나, 이 사실이 제자들의 밀고로 발각되자 동생인 장보, 장량과 함께 184년에 전국적으로 난을 일으켜서 각지의 주군들을 약탈하고 관리들을 죽이는 등 온세상에 세력을 떨쳤다.
그 뒤, 조정에서 황건적 때문에 고전하게 되자 당인(청류파)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져서 그들을 중심으로 관군들이 편성되었고 각지에서 황건적들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점차 진압이 되었고, 그 와중에 난의 주모자인 장각이 도중에 병사하여 중심을 잃었다.
그럼에도 황건적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아서, 각지에서 독립적인 군소 세력이 할거[1]하였고, 이 때문에 때때로 지방관이 계속 토벌에 나서야 했다.[2] 이들 잔당의 일부는 각 군웅의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청주병. 황건적의 난은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져 온 셈이다.
'''그리고, 삼국지/삼국지연의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리는 시대배경이기도 하다.'''

3. 전투


(#)은 삼국지연의에서 나온 전투라는 뜻 입니다.
  • 대흥산 전투(#)
<colbgcolor=#c0c0ff> '''대흥산 전투
大興山戰鬪'''

'''시기'''
184년
'''장소'''
한나라 유주 탁군 대흥산
'''원인'''
황건적의 유주 침공
'''교전'''
유언군
황건적군
'''황제'''
황제 유굉
'''지휘관'''
교위 추정
정원지
'''장수'''
<^|1>유비
관우
장비
<^|1>등무
'''병력'''
5백명
5만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유언군의 승리 및 황건적군 지휘관 전사
황건적과 유주자사 유언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또한 유비 삼형제의 첫 전투이자 첫 승리이기도 하다.[3]
184년, 황건적 장수 정원지는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유주 탁군을 침략했다. 유주자사 유언은 유비에게 5백명의 군사를 주면서 저들을 막으라 명령했고 유비는 겨우 5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5만의 황건적과 싸워야 했다. 유비는 대흥산 아래에서 황건적과 대치했고 유비는 적장 정원지에게 소리쳤다. “나라를 배반한 역적놈아! 어찌 어서 항복하지 않냐!”
이 말을 들은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출진시켰고 장비 또한 장팔사모를 들고 돌격하였다. 등무는 장비를 찌르기도 전에 장비의 장팔사모에 명치를 찔려 몸이 뒤집히며 말에서 낙마했다.
등무가 장비에게 손쉽게 당하자 대장 정원지는 칼을 들어 장비를 향해 말을 몰면서 칼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그러자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정원지를 맞이했다. 정원지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관우를 보고 미쳐 대처하지 못했고 관우는 청룡언월도로 정원지를 두동강 내버렸다.
대장 정원지가 베이자 남은 황건적들은 창을 거꾸로 들어 달아났고 유비가 이들을 추격하자 이들에게 투항하는 황건적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유비가 황건적을 격퇴하고 성으로 돌아오자 유주자사 유언은 이들을 직접 맞이해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며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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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성 전투(#)
<colbgcolor=#c0c0ff> '''청주성 전투
青州城戰鬪'''

'''시기'''
184년
'''장소'''
한나라 청주
'''원인'''
황건적의 청주 침공
'''교전'''
공경군
황건적군
'''황제'''
황제 유굉
'''지휘관'''
교위 추정
불명
'''장수'''
<^|1>유비
관우
장비
<^|1>불명
'''병력'''
<^|1>유비군▶ 5백명
추정군▶ 5천명
병력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공경군의 승리
유언의 명령으로 청주자사 공경의 구원을 간 유비는 관우에게 1천을 장비에게도 1천의 병력을 주어 산 오른쪽에 숨어 징소리 신호로 일제 협공하게 하였다. 이튿날 유비가 추정과 더불어 군을 이끌고 북소리 울려 진격했고 적장은 이에 반응하여 출진했고 유비는 적을 유인했다.
관우, 장비는 유비가 신호를 보내자 황건적을 공격했고 유비 또한 뒤로 돌아 공격하였다. 적이 세갈래로 공격하자 결국 황건적은 무너졌고 유비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황건적이 청주성 앞으로 까지 도망쳐 나오자 공경은 군사를 이끌고 황건적을 무찔렀다. 청주성의 포위가 풀렸고 공경은 유비에게 음식을 주면서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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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4.1. 한나라 쇠퇴의 본격적인 기점


황건적의 난의 의의는 내부적으로 쇠약해 있던 한의 세력을 대내외적으로도 크게 위축시켰다는 시발점과 중국 각 지역의 군웅들이 할거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계기였다는 점에 있다. 즉 '''난세의 시작'''인 것이다. 이 시기부터 시작된 한나라 내부의 혼란은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다시 재통일할 때까지 무려 400년 이상 넘게 이어졌다. 그래서 보통 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위진남북조시대를 일컫는다.
황건적의 난 이후부터 한 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면... 일단 황건적의 난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한나라의 중앙정부(조정)가 지방 통제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전근대 제국에게 있어 "교통과 통신수단의 제약 속에서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 중 하나였고,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위축될 경우 지방에 대한 통제력 역시 함께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서, 한 왕조는 황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이 실추'되고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방의 통치기구들이 군사력을 확대하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 할 수 밖에 없게 되면서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상실하게 된 것이다.
즉, 이전까지 한나라 조정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방관'들이 황건적의 난 이후에는 '군웅'(=군벌)로 변모한 것이다. 한 이전의 통일제국인 진은 아직 통일제국의 체제가 정착되기 전에 영향력을 상실했기에 진나라의 쇠퇴기에 나타난 현상은 '지방 세력의 독립'이라기보다는 '진에 병합되었던 국가들의 부활'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이후 오대십국시대로 대표되는 당송교체기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난 통일제국 멸망사의 효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후 시대에 비해 진-한-당 시대에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지면 바로 지방세력들이 '''독립''' 해 나가면서 제국이 분해되어버리는 현상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송의 멸망 이후 송-원-명-청 교체기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없지만은 않았고 지방세력의 독립 현상은 간간히 나타난다. 이자성과 청나라에게 치명타를 입은 이후 남명 정권의 분열상이라거나, 삼번의 난, 청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 성립기에 다시 대규모의 군벌 난립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나 원말명초에 등장한 여러 군벌들의 사례가 있다.
다만, 존속기간이 실질적으로 겨우 한세대에 불과한 진나라나 수나라는 빼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멸망사와 이후 시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멸망사를 보면 상당히 의미있는 특징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예로 든 남명 정권의 분열상을 보면, 이는 저오학히 말하면 지방 세력의 할거라기보다는 주씨 황족들을 구심점으로 삼은 중앙정부의 잔여세력 내에서 벌어진 권력투쟁과 그로 인한 의견일치 실패의 결과물에 가깝다. 남명의 사례,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례로 남송의 사례를 보면 이 두 사례는 분명 지방정권이기는 하나 '중앙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이 실추되면서 지방세력이 중앙정권의 영향력 바깥으로 이탈하여 발생한' 사례는 아닌 것. 오히려 그 반대로, 외부의 적에 의해 중앙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도 그 잔여세력조차 여전히 강력한 지방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지방으로 도피하여 지속적인 저항을 시도할 수 있었던 사례라고 보아야 한다.(물론 이 쪽 사례의 효시는 동진이다.) 요약하자면 <지방 통제력과 구심력 부족으로 나라가 분해되어 망한 사례> 이 아니라 <나라가 망했음에도 남아있는 지방 통제력과 구심력으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 사례>가 된다. 다만 그 저항세력이 150년간이나 끈질기게 버텨낸 남송의 사례와 달리, 심한 내분을 겪은 남명은 20년만에 지리멸렬해져 멸망했다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건 이는 <중앙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자 지방이 분열되어 이탈한 사례>는 아니다.
이 외에 송나라 이후 군벌 난립시대의 전형적인 사례를 찾아본다면 원말명초 홍건적의 난을 중심으로 한 사례가 있으나, 이 경우는 중앙정부의 장악력이란 측면에서 원라라는 전대의 송에 비해서도 크게 퇴보하여 반원 봉기의 중심지였던 강남지방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통제력이나 장악력이 낮은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삼번의 난 같은 경우, 중원 진입 직후에는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청나라가 한족 출신 항장들의 지방정권을 인정했지만 이후 통일제국으로써의 통제력을 확보하면서 지방정권(번국)들을 흡수(철번)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다만 또, 청나라 멸망에서 중화민국 성립 무렵까지 다시 한번 군벌들의 할거기를 거치게 되지만. 결국, 송나라 이후 역대 중국의 통일왕조 멸망사를 보면 일단 이민족 왕조는 한족 왕조에 비해 지방 통제력이 약한 편이었고, 반면 중앙집권을 지향한 한족 왕조에서는 멸망과정에서 외곽지역의 이탈 현상을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셈이다.

4.2. 한나라의 멸망은 과장되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한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는 관점은 틀린 관점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황건적의 난 자체가 한나라가 쇠락해진 상태였다는 강력한 증거이고, 난을 겨우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니 이후 조정이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한나라가 본격적인 멸망 수순에 돌입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후에도 한나라가 회생불가의 수준에 이르러 멸망이 실질적으로 확정되었다고 여겨지기까지는 몇 차례 더 중요한 분기점, 또는 역사적 이정표를 지나치게 된다.
예를 들어, 황건적의 난 이후에도 상당히 남아있던 중앙정부의 조직력을 결정적으로 실추시켜 사실상 정부 붕괴의 상태로 몰아넣은 십상시의 난이 있고, 십상시의 난 이후 공백이 된 중앙정계에 서북지방의 군벌인 동탁이 진입하여 헌제를 협박하여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직위를 부여받아 온갖 국정농단과 전횡을 일삼고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면서 황제의 권위까지 크게 실추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현실적으로 한나라의 체제가 복구될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 왕윤의 동탁 암살이 일어나지만[4] 동탁 세력의 반격에 의해 왕윤이 무너지고 삼보의 난으로 황제가 군벌들에게 무력하게 끌려다니고 도망다니는 처지가 되면서 황제와 조정의 권위가 또 무너졌다가 결국 조조의 옹립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지만 조조에 의해 지속적으로 황제파가 숙청되면서[5] 한나라의 쇠망이 도저히 돌이키기 어려운,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멸망이 도래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실상의 멸망' 상황이 되었다는 것. 즉, 황건적의 난이 한나라 멸망 과정의 시작임은 명백하지만 황건적의 난 만으로 한나라의 실질적 멸망을 설명하기에는 그 후에도 의미있는 멸망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4.3. 농민운동으로서


중국역사학자들은 종교집단에 의해 조직/주도된 최초의 농민봉기로서 황건의 난이 가진 가치를 높게 보고 있다. 진승·오광의 난 등 민란은 이전부터 많이 있었지만, 민간 종교집단이 주도한 반란은 이때가 최초였다.
다만, 현대의 중국은 마오쩌둥이 농민들의 힘을 얻어 세운 국가이다보니 대규모 농민봉기에 대해선 우호적인 평가 일색이라는 점도 일정 부분 감안을 해야 한다. '이자성의 난'이나 태평천국이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서는 황건의 난을 가리켜 보통 黄巾之乱(황건지란)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지만, 黄巾起义(황건기의)라고 높여서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곧 의로움을 들고 일어났다는 식의 표현이다. 84부작 삼국지이나 장정일 삼국지도 이와 같은 난의 가치를 높이는 표현을 따랐다.
그런데, 사실 황건적의 난이 딱히 농민들이나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별로 없다. 장각 형제는 그 출신 지역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단 평민이었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지역 호족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태평도 신도들마저도 보편적으로 '하층민'이나 '농민'이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상당히 부족하다. 세설신어 등에는 유력한 지역 호족이나 관리들 중에서도 태평도의 신도가 있었다는 것이 엄연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봉기 역시 무슨 평등사상보다는, 오행설에 근거한 '왕조교체론'을 근거로 했다는 점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명언이라도 나온 진승·오광의 난보다도 평등적인 색체도 희박하다. 그래서, 현대의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재평가를 하는 것도 한계가 뚜렷하다.
다만, 역사학적인 관점에서 그 중요성이 전혀 부각되지 않고 단순히 삼국지 팬덤의 집단적 문화적 상상력에 의존하여 대충 군웅할거의 판을 깔아 주면서 영웅들에게 경험치를 제공하면서 썰리다가 그 중에서 운 좋게 특출난 인재들이 삼국지의 주인공급 세력들에게 편입되고 마는 잡몹스러운(...) 인식을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암울하고 부패한 현실에 불만을 갖고 왕조를 거부하면서 하층민부터 지역의 호족 출신들까지 민중들이 한 뜻으로 모여서 봉기와 민란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피해자 문서 참고.
또한 긍정적인 면 혹은 부정적인 면을 배제하고 볼때,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이후 일어나는 종교에 기반한 민란은 거의 전부 이 황건적의 난의 도식을 따른다. 난세마다 제2, 제3의 황건적들이 이름만 바꾸어 일어난 셈.

5. 기타 창작물에서


삼국지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무대로 자주 쓰였으나, 길어서 중간에 관두는 사람이 많은 삼국지라는 특성상 황건적의 난+동탁 토벌전만 보다 관두는 라이트 유저들에 대한 배려인지, 근 20년 사이에 나오는 삼국지 관련 작품에서는 자주 삭제되거나 간략화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또한 황건적 구성원들이 이렇다할 개성을 지닌 인물도 없이 줄줄이 털려나가기 일쑤다 보니 적으로서의 매력이 없고 극적으로 뽑아낼 만한 요소도 없어 아예 아동도서나 영상매체에서는 도원결의 다음에 바로 반동탁연합 전쟁으로 넘어가는 수준이다. 가령 드라마 신삼국은 조조의 동탁 암살 미수 사건으로 시작한다. 참고로 영걸전 시리즈에서는 조조전에만 황건난이 나왔다. 단 한 스테이지이다.
  • 영걸전 - 그냥 넘김
  • 공명전 - 겪어 보지 못한 일
  • 조조전 - 영천 전투만 등장
  • 조조전 온라인 - 장각전, 손견전, 동탁전, 관우전, 유비전에 등장
    • 장각전에서는 황건난 전과 후만 등장, 장각이 남화노선에게서 태평요술서를 받고, 찾아오는 사람을 도와주고, 백성들을 구출하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 이후 엔딩은 병사(...)라 등재가 안 됐다.
    • 손견전에서는 완성 전투
    • 동탁전에서는 곡양 전투
    • 관우전에서는 대흥산 전투
    • 유비전에서는 대흥산 전투, 청주성 전투, 광종 전투, 양성 전투

5.1. 삼국전투기


단적으로 최훈삼국전투기에서도 같은 이유로 생략되었다. 그런데 초반 캐릭터 설정을 보여주는 황건적 편을 빼버리니 캐릭터를 살리기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괜히 고전이 아니고, 쓸모 없는 부분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2016년 2월, '''삼국통일''' 챕터가 끝나고 황건적의 난을 '''에필로그'''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전반부 인물들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독자들이 많고, 원작처럼 진나라가 통일하는 결말은 허무하기에 아예 초반에 생략한 황건적의 난을 에필로그로 돌려버린 것. 각 인물들의 초창기 모습을 재조명함으로써 그들의 인물상의 완성도를 높였다.[6] 댓글창에서는 황건적의 난을 에필로그로 돌려서 오히려 신선하다는 반응과 오랜만에 전반부 인물들이 나와서 반갑다는 반응[7] 등 전체적으로 여론이 호의적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실수였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10년간의 연재를 특별하게 마무리하는 신의 한수가 된 셈.
上편에서 토벌 삼중랑장 황보숭, 주준, 노식이 등장하며[8] 선택의 기로에 놓인 장합[9], 어떤 꿍꿍이[10]를 숨기고 있는 관료 시절의 원소와 허유, 영천에서 야망을 꿈꾸는 조조하후돈이 등장한다.
下편에서는 소개컷에 장각, 장보, 장량 3형제가 라면 삼총사로 등장하고, 나라를 쌈 싸먹으려는 동탁[11]과 서영, 앞으로의 싸움을 예견하는 손견정보, 황개, 한당, 조무가 등장한다.
[image]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하라는 큰 뜻을 품은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등장한다.

5.2.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하진 세력과 장각(황건) 양강구도에다가 손견, 유언, 동탁 등 군소세력이 등장하나[12], 예외적으로 삼국지 8과 9는 세력이 1:1 대전을 치루는 시나리오로 등장한다. 동탁과 마등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쳐들어올 수가 없고 애초에 국력 차이가 나기 때문에 웬만큼 하진에게 말린게 아니라면 먼저 시비걸지 않는다. 근데 이들의 휘하 장수들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에[13] 만일 쳐들어온다면 가차없이 스노우볼링 당하기 쉽다.
황건세력의 경우 초보와 고수의 체감 차이가 매우 큰데 초보는 여러 방면에서 동시공격하는 우수한 무장들에 치여 순식간에 밀려버리는 반면, 고수들은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손견, 유언, 공손찬등 군소세력을 멸망시키고 황건의 시대를 연다.
하진과 장각(황건) 세력 양측의 능력을 비교하자면,
  • 군주의 능력: 하진 < 장각
이건 사실 별 의미가 없는데 장각과 하진 둘 다 일찍 죽기 때문이다. 보통 후임으로 조조와 장보가 임명되는데 장보도 뛰어난 장수이긴 하지만 조조가 훨씬 좋으므로 장기적으로 보면 장각 측이 불리할 수 있다.
  • 군주와 장수의 직함: 하진 > 장각
하진은 애초부터 대장군 또는 대사마나 그와 동급의 직함으로 시작한다. 게다가 천자를 알현할 수 있다. 그래서 각 휘하 장수의 직함도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장각은 세력만 클 뿐이지 직함은 그냥 개털이다. 결국 하진의 휘하 장수들은 군주의 직함빨로 각종 장군직을 차지해 병력을 많이 보유할 수 있지만 장각은 군주부터 직함이 허접하니 장군직을 가진 휘하 장수가 아무도 없다. 이런 문제로 인해 마음먹고 징병을 실시하면 장각은 보유병력의 한계 때문에 하진보다 어렵다. 다만 삼국지 11등의 일부 시리즈에서는 애초에 한실에 반발한 황건적의 특징을 살려 지휘와 상관없이 황건장수라면 많은 군사를 이끌 수 있도록 되어있는 시리즈도 가끔 있는데 이경우 부등호가 뒤집히기도 한다.[14]
  • 장수들의 능력: 하진 > 장각
말이 필요 없다. 하진은 나중에 군주가 될, 또 그들이 장차 큰일을 맡길 인재들[15]을 휘하에 두고 있다. 자체적으로도 노식, 황보숭 등 A급 무장들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장각의 무장들은 장각 3형제를 제외하면 도적떼가 나오는 삼국지 시리즈의 도적떼 능력치와 별차이가 없을 정도의 쓰레기급 무장들이 대다수다. 그것도 다 무관 쪽이니 한숨만 나온다. 때문에 인재등용을 장각이 손수 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마법이 있는 삼국지 시리즈라면, 마법의 성능에 따라 그 격차가 크게 좁혀진다. 환술이 터지면 일발역전이 가능한 삼국지 9와 희대의 사기특기 귀문#s-2이 있는 삼국지 11이 그렇다. 장각과 장보가 병사 1 군량 1로 낙뢰를 갈겨대면 하진의 무장들이 아무리 잘싸운들 답이 없다.
또한 장수제에 중국 전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삼국지10도 격차를 얼마든지 좁힐 수 있다. 장각이 등장하는 184년 시나리오에선 대부분의 장수와 모사들이 재야에 머무르고 있고[16] 매력이 유비 다음으로 높은 장각은 인재등용에서 매우 유리하다. 몇번만 돌아다니면 특급 인재들을 말 그대로 쓸어모아 질과 양 모두 하진을 압도할 수 있다 . 역시 장수제인 삼국지13에서도 마찬가지. 안량 문추가 훗날의 주군이 될 원소를 다굴치는 풍경 같은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 초기 자원: 하진 < 장각
초기 자원은 모두 장각이 월등히 많다. 이 때문에 하진 세력이 정비를 끝내기 전에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는 것이 일반적인 장각 세력의 공략법이고, 하진 세력은 장수의 성능과 방어시설을 이용해서 힘을 키운뒤 장각의 오합지졸(…)들을 철거해 나가는 것이 하진 세력의 공략법. 군소 세력이 존재하는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장각이 손견한테 초기 병력을 쏟아부어 잡아먹은 뒤 인재를 흡수하면 장각측의 떨어지는 인재를 만회할 수 있다. 하진한테 빈틈을 찔려 피해를 입는 걸 감수하더라도 이득.
  • 도시 수: 하진 < 장각
이는 플레이하는 삼국지가 도시의 성능이 장수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냐, 빈 도시를 점거했을 때의 페널티가 있냐 없냐에 따라 하진과 장각의 유불리가 결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도시의 연계성: 하진 > 장각
위의 도시수가 장각에게는 하나도 안 유리하다. 그 이유인즉 도시의 연계성 때문인데 하진의 도시는 숫자가 적은 대신 죄다 인접해있어서 옆에서 쳐들어오면 바로바로 지원이 가능하지만 장각의 도시는 숫자가 많은 대신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서 특정도시가 적에게 공격을 당하면 다른 도시가 타국에 막혀 지원을 못 한다. 또한 이 때문에 물자수송이나 장수 이동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즉, 장각의 경우는 도시 하나하나가 다 따로 노는 형국이다.
  • 병력: 하진 < 장각
병력은 분명 장각이 훨씬 많다. 하진 휘하에 있는 장수 중 조조가 끝장나게 좋다지만 조조는 신분이 군사라서 휘하 병력은 없다. 그리고 하진 휘하의 병력은 하진 본인과 원소, 노식, 주준, 황보숭 등 제한된 인원만 보유하고 있는 반면 장각은 장각 본인부터 시작해서 장수 전원이 휘하에 병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위의 도시의 연계성 문제 때문에 이 병력들을 합칠 수 없어서 그 많은 병력의 숫자값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면 하진은 누구 하나 정해놓고 병력을 몰빵할 수 있어서 둘이 맞붙으면 되려 하진이 장각을 각개격파하는 모양새가 나온다.
  • 동맹: 하진 > 장각
장각은 제일 큰 대신 사방이 적이다. 반면 하진은 여러 동맹이 있다. 동맹 싸움으로 장각이 하진을 상대하려면 저기 서량에 짱박혀 있는 동탁을 움직여서 하진을 공격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삼국지 13에서는 동탁마저 하진의 동맹이라 이것도 불가능해졌다.

5.3. 연희 시리즈


진 연희무쌍 애니메이션에서는 장3자매가 원래는 태평요술서[17]를 이용해서 아이돌이 되었지만 10화에서 악덕관리의 행동에 분노한 나머지 장보가 일을 크게 벌려 결국 태평요술서를 이용해 세뇌를 시켜 저지른 행각으로 나온다. 이를 화타원술, 장훈, 곽가 삼인방이 노래를 부르는 작전을 제안한다. 이에 장 삼자매도 노래로 반격하는 바람에 실패.[18] 하지만 등장인물이 모두 노래를 하는 것으로 인해 세뇌당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정화되고 장 세자매가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5.4. 진삼국무쌍 시리즈


대대적으로 오프닝 맵으로써 빠질수 없게 나온다. 보통 개인 무쌍모드에선 초기 인물의 시작 시나리오로 나오고 진영별 무쌍모드에선 각 진영의 첫 시나리오로 편입된다.
주로 등장하는 기믹은 도술 기믹으류 장씨 3형제가 도술을 여러 가지 부려서 진행해 방해하는 요소가 있지만, 파해법은 많은 편이라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단지, 동료 ai가 문제이기도 하고...

이외의 경우 개근하는 시리즈는 스탠드 얼론 확장팩인 엠파이어스(쟁패) 모드. 저 모드가 진삼국무쌍을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 시리즈처럼 플레이하게 해주는 모드인데 삼국지의 맨 첫 배경이 되는지라 쟁패모드 첫 번째 시나리오를 항상 선점중이다. 시나리오 구성은 당연히 기존 삼국지 시리즈와 비슷하게 기본적으론 군웅할거 틀에다가 하진군과 장각군을 양강구도로 놓는 식으로 구성된다.

5.5. 토탈 워: 삼국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토탈 워: 삼국의 그랜드 캠페인 스타팅이 반동탁 연합군의 해체 시점(190년)이라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상황이지만 황건적 팩션 역시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예약 구매 특전 DLC인 "황건적의 난"이 있으면 황건적 팩션을 플레이할 수 있으며, 역대 시리즈에서 공공질서가 낮아져서 나오는 반란군은 해당 작품에선 황건적으로 다뤄진다.
2020년 1월 16일 DLC '천명(Mandate of Heaven)'이 고유 캠페인으로 출시되었으며 해당 시점이 182년이라 살아있는 장각 3형제가 모두 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나온다. 트레일러에선 여타 삼국지와는 다르게 황건적의 황천을 창백한 구름(창천)이 걷히며 나오는 샛노란 햇빛으로 표현해 망해가는 나라의 최후의 충신 노식과 대립하는 구도와 구름이 걷히면서 색채를 잃은 세상에 다양한 색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삼국지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연출했다. 서양권의 자유로운 시각이 반영된 신선한 연출이 호평받았다.

5.6. 삼국지톡


파트 1에서 다루었으며 이후 파트의 중심인물들이 등장해 개성을 드러내는 정도를 빼면 큰 특징은 없지만 21세기 현대 테이스트를 섞은 작품답게 황건적 토벌에 참가하는 이들이 인증샷을 올리고 거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운 유비가 혹해 참가한 걸로 나왔다. 해시 태그의 킬(Kill)건적이 압권.

[1] 황소, 하의, 관해, 유벽, 서화, 사마구 등.[2] 사서의 황건적 토벌기록이 경우에 따라 184년이 아닌 시기에도 있다. 도겸의 파견기록이 그 예시.[3] 단 삼국지연의의 기준이다.[4] 동탁을 암살한 후 동탁의 부하였지만 사이가 벌어진 여포를 끌어들여 '왕윤 자신이 조정의 수장이 되고 여포를 중앙군의 수장으로 삼는다'는 왕윤의 정치적 구상은, 이후 등장한 삼국시대의 군웅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영역 확보를 위한 전쟁보다는 중앙정계를 장악하기 위한 군사력을 이용한 정쟁의 성향이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난다. 즉, 해당 시점에서 왕윤은 한나라 황제와 조정의 권위를 복원함으로써 후한의 체제(더 나아가 제국의 영향력)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는 것.[5] 조조의 헌제 옹립 이후에도 왕윤과 비슷한 방법으로 한나라 조정과 황제의 권위를 복원하려 했던 동승의 조조 암살 기도가 있기는 하나, 이 시점에서 한나라 조정은 사실상 이미 완전히 붕괴되었고 원론적으로는 한나라의 한 제후일 뿐인 조조의 정부조직이 사실상 한나라의 조정을 대체해버린 상황에서는 왕윤의 계획보다 성공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낮았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즉 조조를 암살하더라도 조조 세력이 반격을 막을 방법이 없고 설령 조조의 사망으로 조조 세력이 붕괴하더라도 그를 대체할 한나라의 조정이 없었다는 것. 이 때문에 그나마 수도 내에서 대체세력을 구축하려 시도할 수 있었던 왕윤과는 달리 동승은 마등이나 유비 등 외부세력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정치적 행보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6] 인물의 묘사를 보면 연재 초반과는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관념이 바뀐 부분이라 할 수 있다.[7] 특별출연이 아닌 순수한 사망씬을 기준으로 上편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캐릭터는 장합으로, 사망신 연재분이 2013년 6월 13일로 무려 '''2년하고도 8개월 만에 생전 모습으로 등장했다.'''[8] 부연 설명을 하자면 황보숭은 화공을 했다는 점 때문에 아카이누로 , 노식은 유비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에 정상결전까지 "한껏 해이해진 정의"를 모토로 삼은 아오키지로 패러디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은 주준은 자동으로 키자루 당첨.[9] 실제로 장합은 원래 '''관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가 징집 명령에 무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 케이스다.[10] 아마도 십상시의 난.[11] 실제로 황건적에게 일부러 패한 근거는 없다. [12] 장각을 제외한 모든 군주는 동맹 or 하진에게 종속 or 연합세력으로 맺어져 있긴 하다.[13] 장수들이 기마특성을 갖고 있어 시너지를 일으키는 공손찬, 여포가 있는 정원, 유관장이 있는 유언. 게다가 하진 세력은 군사가 조조이고 대표장수가 황보숭과 주준, 장합에, 전투력이 높은 본인과 정보, 황개, 한당이 있는 손견이다.[14] 격차가 꽤 심한데, 관직과 기교 '군제개혁'이 모두 없을 때 대부분 세력은 병력 5000을 이끌 수 있으나, 황건적은 처음부터 10000명이 넘는 병사를 한 장수가 통솔할 수 있다.[15] 쉽게 말해서 후일 위/촉/오의 주력 인재들을 다수 챙긴 드림팀이라는 소리다.[16] 시나리오 시작하는 184년만 쳐도 진류에서 하후돈, 하후연, 평원에서 화흠, 남피에서 안량, 문추, 봉기, 업에서 전풍, 저수, 심배, 북해에서 왕랑, 손건, 허창에서 순욱, 종요, 곽도, 순심, 희지재, 복양에서 진궁, 정욱, 우금, 완에서 황충, 천수에서 화웅, 무위에서 가후가 재야로 있어 등용할 수 있고 유관장 삼형제가 하북에서 방랑군으로 떠돌고 있는데 세력이 약해 손쉽게 멸망시키고 등용할 수 있다. 따로 언급은 안 하지만 상기한 이들보단 능력치가 떨어져도 그런데로 쓸 만한 B급 이하 인재들은 더 많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특급무장들이 추가로 쏟아진다. 거기에 허창에는 곽가, 순욱 등의 모사진들이 조금만 캐다보면 나오는 지역.....[17] 게임 등에서는 지력+10정도를 올려주는 아이템으로 등장. 실제로는 만민 평등 등을 주장한 저서로서 한제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당한다.[18] 거기다 장 삼자매는 태평요술서를 가지고 있어서 사실상 요력이 무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