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전

 

1. 후한 말의 인물 1
2. 후한 말의 인물 2
2.1. 창작물에서
3. 후한 말의 인물 3
4. 대만의 가수
5. 兆前
6. 弔電


1. 후한 말의 인물 1


曹全
(? ~ ?)
자는 경완(景完). 돈황 효곡 사람.
진탁[1]의 후손이고 한나라 때 조참이 왕실을 도와 한무제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자손이 옹주 교외로 옮겨 우부풍, 안정, 무도, 농서, 돈황 등에 모여 가는 곳마다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극진하면서 위를 삼가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글이 없었으며, 어질면서도 효도하는 성품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계조모를 수양하거나 계모를 받들어 섬겼고 그들의 생각을 먼저 알아 뜻대로 받들었다. 그에 대해 향리 사람들은 행정을 종사하는 것에 있어 청백함은 백이, 숙제, 정직함은 사어를 사모했다고 했다.
군의 우직을 거쳐 상계, 연사, 장사를 지내다가 양주날사가 되었으며, 일찍이 치중별가가 되어 기강을 떨쳐 관리들이 잘못된 일을 저지르지 않았고 여러 고을을 다스려 간사한 것을 없애 악한 무리들이 마음을 씻고 동료들이 덕에 감복하면서 위엄에 두려워했다.
169년에 효렴으로 뽑혀 낭중이 되었다가 서역무부사마가 되었는데, 소륵국에서 화덕이 아버지를 죽이자 군사를 일으켜 항복시켰고 이후 우부풍 괴리령이 되었다가 동생의 상으로 벼슬을 버리고 7년간 은거했다가 183년에 효렴으로 뽑혀 184년에 낭중이 되었다가 주천복록장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함양령이 되어 주천현에서 혼란을 일으킨 곽가(郭家)[2]를 진압했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주거나 병든 사람에게 약을 나눠줬으며, 장원, 가옥을 수리했고 군의 선비인 이유, 난규, 정인 등을 천거했다.
이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바로 한나라 예서체의 대표적인 작품인 조전비이다.

2. 후한 말의 인물 2


趙戩
(? ~ ?)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숙무(叔茂). 조기의 조카. 장릉 사람.
학문을 좋아하고 말이 조리가 있으면서 곧고 꾀가 많았으며, 시경, 서경을 좋아하고 사람을 불쌍하게 여겨서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공부에 벽소되어 상서선부랑을 지내다가 평릉령이 되었다. 초평 연간[3]에 상서가 되었다가 동탁이 재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면서 동탁이 죽이려고 했지만 조전은 태연했으며, 동탁이 후회해 풀어줬고 평능령을 지내다가 왕윤이 죽자 관직을 포기하고 그의 시체를 수습해 묻어줬다.
삼보의 난이 일어나면서 형주로 피난을 가서 유표가 그를 후하게 대접했고 조조가 형주를 점령하면서 그를 불러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정도였으며, 212년에 승상연을 지내면서 유비유장을 공격할 때 조전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부간의 말에 따라 유비는 익주를 평정했고 종요 밑에서 장사를 지내다가 사망했다.

2.1. 창작물에서


소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조비가 진군과 함께 상국부로 들어갈 때 상국장사를 지내면서 조비에게 인사했고 조비에게 상국(종요)께서 대왕(조조)의 부름을 받고 아침 일찍 입궁한 것을 알려주며, 임치후(조식)도 곧 이 곳으로 오고 위풍이 종요에게 기용된 것을 알려준다.
소설 삼국지 마행처우역거에서는 부호를 시켜 비관의 가족을 죽게 만든 것으로 나오며, 장합이 비관이 지휘하는 군사와 싸우다가 왕평에게 죽은 소식을 듣다가 갑자기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3. 후한 말의 인물 3




趙典
생몰년도 미상
자는 중경(仲經). 조계[4]의 아들. 팔준(八俊)의 한 사람. 촉군 성도 사람.
147년에 대장군부, 삼공 등에게 추천되었고 의랑, 홍농태수, 우부풍, 성문교위, 장작대장, 소부, 대홍려를 지냈고 황제의 은택을 받아 공로가 없는 사람이 제후가 되자 이를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태복이 되었다가 태상에 올랐다. 166년에 태상을 지내면서 순숙을 천거해 낭중이 되도록 했으며, 곽태를 천거하기도 했다.
황제의 뜻을 거스른 간언으로 면직되어 봉국으로 나갔다가 환제가 붕어하자 번국 제후들의 분상을 금지했지만 조전은 황제의 은덕으로 고관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인수를 풀어 부절과 함께 현에 반환하고 평민이 되어 낙양으로 갔다. 이에 주군과 대홍려에서 조전을 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공경과 백관들은 조전의 대의를 가상하다고 여겨 자신들의 녹봉으로 죄를 속죄하겠다고 주청하자 조서로 승낙했다.
168년에 영제가 즉위하자 장락소부, 장락위위 등을 역임했으며,국사에 추대되었다가 병으로 사망했고 시호는 헌후(献侯)이다.
기록상 문제가 있어서 후한서 조전전에는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송의 후한서에는 제2차 당고의 금에 휘말려 죽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두 열전에 있는 조전은 고향이 일치하며, 범엽이 후한서에서 당인 36명 중에 유일하게 조전만이 업적을 설명하면서 조전은 후한서에 열전이 따로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렇게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4. 대만의 가수


趙傳
(1961년 6월 18일 ~ ?)
이름을 원어 발음으로 하면 '자오촨'.
대표곡은 1988년에 발매한 1집에 수록된 '我很丑, 可是我很温柔'이다.


5. 兆前


어떤 일이나 상황, 상태가 아직 나타나기 전

6. 弔電


상가에 대한 슬픔위로표시하는 전보
[1] 주무왕이 기틀을 잡고 은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봉록을 받아 조나라에 봉해졌다.[2] 조조의 모사 곽가(郭嘉)가 아니다.[3] 190 ~ 193년이다.[4] 趙戒, 순제 때부터 환제까지 관직을 지냈으며, 후한의 태위, 사공 등 삼공을 지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