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일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1994'''
'''이름'''
오영일 (吳泳日 / Yeong-ll oh)
'''생년월일'''
1960년 2월 6일 (60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출신학교'''
배명고-인하대
'''신체조건'''
185cm, 85kg, O형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투수
'''프로입단'''
1983년 1차 1순위 (MBC 청룡)
'''소속구단'''
MBC 청룡 (1983~1989)
태평양 돌핀스 (1990)
'''지도자'''
LG 트윈스 수석코치 (1993~2001)
현대 유니콘스 투수코치 (200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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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
4. 기타


1. 개요


KBO 리그 MBC 청룡의 야구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인천 출신이지만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나왔다. 대학 2학년 때 무사사구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등 일찍이 기량을 펼치며 1981년 한미 대학야구 친선대회,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선발, 연고구단이었던 MBC 청룡에 1차 지명을 받아 대학 졸업 후 입단한다.[1]
국가대표 투수였다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게 첫해 선발진에 진입해 10승을 거두고,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발로 출전하는 등 주축 투수로 부상했다. 이후 1984년에는 '''40경기 239.2이닝 15승 14패 3세이브, ERA 3.08'''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239.2이닝은 최동원-장명부에 이은 3위였고 15승은 팀 동료 하기룡과 함께 공동 4위였으며, 14완투 2완봉을 기록했는데 14완투는 최동원과 공동 2위였다.[2]
이 당시 이색적인 기록을 하나 세웠는데, 바로 최다실점 완투승이다. 1984년 5월 1일 해태전에서 그는 9실점을 하고도 타선이 14점을 내며 승리 투수로 기록됐다. [3][4] 재밌게도 이 부문 2위 또한 오영일인데 데뷔경기인 1983년 4월 10일 롯데전에서 8실점 완투승을 기록한 바 있었다. 즉 자신의 기록을 자신이 갈아치운 셈...
이후로도 규정이닝을 채워가며 MBC 선발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지만, 1989년 들어 노쇠화 및 후배들의 급부상 등으로 고전하였고, 1990년 1월 고향팀인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된다. 태평양에서는 1년만 뛰고 바로 은퇴하였다.

2.1. 플레이 스타일


성준 이전 성준의 플레이 스타일을 거의 그대로 보여주었던 선수다. 끊임없는 견제와 긴 인터벌로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플레이를 구사하였다.
이 선수의 진가는 내구성에서 찾을 수 있다. 1984년 커리어하이 시즌의 239.2이닝 14완투의 활약 외로, 통산 8시즌 동안 1043.0이닝을 기록했고 1988년까진 꾸준히 규정이닝을 채웠던 이닝이터였다.
이닝이터의 면모가 있음에도 통산 평균자책점이 3.56으로 특출났다고 보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가 뛰었던 1980년대는 ERA 1점대를 기록해야 방어율왕을 수성할 수 있던 투고타저의 시대임을 생각하면... 실제로 MBC의 에이스는 오영일보다는 하기룡으로 받아들여졌기도 하고. 이 때문인지 존재감이 꽤나 희미했던 투수다.
그러나 ERA+가 노쇠화 이전인 1988년까지만 해도 90~100 언저리를 기록했고 통산이 95.1인 것을 보면 최소한 못 한다기보다는, 평균치는 했던 투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요약하면 시즌 초 전력구상 시 한 시즌을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의 투수였다. 규정이닝과 10승 언저리, 리그 평균 정도의 ERA를 기대할 수 있던 무난히 좋은 투수.

3. 지도자 경력


1993년부터 LG 트윈스에서 코치로 근무하였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서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다.

4. 기타


등번호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아마 오영일과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유명한 일화일 것이다. 이름이 오영일이라 등번호로 501을 하려고 했는데, 당시 KBO에서는 세 자리수 등번호를 할 수 없도록 한 바람에 51번을 받는 선에서 타협했다는 에피소드다.
김성한의 연속 출장 기록을 의도치 않게 저지시킨 바 있다. 김성한은 원년 첫 경기부터 연속 출장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1983년 8월 20일 경기에서 오영일의 긴 인터벌에 타격 리듬이 꼬인 김성한이 타임을 외쳤으나 주심이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이에 김성한은 주심하고 싸우다가 퇴장 및 출장정지를 당하면서 기록이 저지당한 것.
[1] 오영일의 출신이 인천이었기에 삼미 슈퍼스타즈가 눈독을 들이기도 했다고.[2] 1위는 15완투의 장명부.[3] 이 경기만 제외하면 오영일의 평균자책점은 2점대다.[4] 이 경기는 최다실점 승리 기록 또한 갖고 있었는데, 2010년 이재곤이 5이닝 10실점으로 이를 경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