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김성한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1996'''
'''1997'''

'''아시안게임 금메달(코치)'''
'''2002'''




'''1985, 1988 KBO 리그 MVP'''


'''1985, 1988, 1989 KBO 리그 홈런왕'''


'''1982, 1988 KBO 리그 타점왕'''


'''1985, 1988, 1989 KBO 리그 장타율왕'''


'''1988, 1989 KBO 리그 승리타점왕'''


'''1992 KBO 리그 미스터 올스타'''


'''김성한의 감독직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1번'''
창단

'''김성한(1982~1995)'''

김상진(1996~1999)
'''KIA 타이거즈 등번호 90번'''
결번

'''김성한(2001~2004)'''

유남호(2005)
<color=#373a3c> '''한화 이글스 등번호 71번'''
정민철(2010~2012)

'''김성한(2013~2014)'''

김종수(2015~2016)


[image]
80년대 해태왕조를 이끌던 현역 시절.
[image]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스승인 김응용 감독과 함께.
'''이름'''
김성한(金城漢 / Sung-han Kim)
'''생년월일'''
1958년 5월 18일 (65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북도 군산시
'''학력'''
군산중앙초-군산중-군산상고-동국대
'''포지션'''
1루수
2루수, 3루수, 유격수 (1982)[1]
투수 (1982~1983, 1985~1986)
'''투타'''
우투우타
'''신체'''
178cm, 85kg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2~1995)'''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1996~2000)
해태-KIA 타이거즈 감독 (2001~2004)
군산상업고등학교 감독 (2004~2005)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9)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13~2014)
'''해설위원'''
광주CMB 해설위원 (2018~)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해태 타이거즈 코치 시절
3.2.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3.4. 휴식기
3.5.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시절
3.6. 다시 야인생활
4. 기타
5. 연도별 주요 성적

[clearfix]

1. 소개


前 해태-KIA 타이거즈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멤버로, 은퇴할 때까지 해태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던 타이거즈의 대스타다.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 더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했던 스타 선수로, 이만수와 함께 80년대를 양분한 원조 기록의 사나이다.[2]
선수 시절 등번호는 11번.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하다가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자리를 옮기며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감독이자 KIA 타이거즈의 첫 감독이 된 것이다 그러나 감독시절은 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최악의 평가를 받게된다

2. 선수 시절


군산상고를 거쳐 동국대에서 활약[3]하던 김성한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통해 창단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당시 해태의 선수층이 타 팀에 비해 상당히 부족했던 탓에 팀 창단 초기에는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팀 사정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KBO 리그에서 '''투타겸업을 하면서, 양쪽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낸'''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선수가 되었고, 이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당시 김성한의 투수기용이 단순히 해태의 선수층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는 투수 출신으로 고교 때는 김시진과 투수로 맞대결하기도 하며 대학시절까지 투수로서 활약했었다. 다만 타격에 더 재능을 보였고, 팔꿈치 부상의 여파로 프로 데뷔 후 3년만에 타자로 완전 전향했다. 데뷔 초에는 선수층이 얇았던 팀이었던 해태의 팀 사정상 투수까지 겸업하면서 휴식없이 타자와 야수로도 계속 출장했는데, 그 결과 팔꿈치에 뼛조각이 떨어져나오며[4] 이후 기량하락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5]
[image]
2010년 일구회 자선경기에서도 여전한 트레이드마크인 오리궁뎅이 타법.[6]
엉덩이를 뒤로 내민 상태로 타격을 하는 특이한 타격폼으로 인해 오리궁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타격폼이 정형화되지 않아 각종 기상천외한 타격폼이 넘쳐났던 당시 기준으로 봐도 이상한 타격폼으로 유명했다. 이는 아마시절 유독 스윙스피드가 느렸던 김성한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을 거듭한 끝에 완성 된 것으로, 간결한 스윙을 통해 정확도를 높이면서도 자신의 강점인 뛰어난 펀치력을 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완전히 타자로 전향하고 나서는 그야말로 맹활약을 펼치며,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과 함께 '김씨타선'으로 대표되는 해태 타이거즈의 중심 타순을 이끌면서 해태를 7번이나 우승시키는 데 큰 공헌을 쌓았다. 이미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부터 타율 3할에 홈런4위(13)까지 수상하며 자신의 진가를 알린 김성한은 1985년 22홈런으로 홈런왕에 MVP까지 수상하면서[7] 본격적으로 프로야구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85년 첫 홈런왕을 기록한 시점부터 마지막 전성기였던 91년까지 7년간 기록을 보면 '''타율.301(3위)[8] 홈런 145개(1위), 타점 483개(1위), 안타 803개(1위)[9]도루 99개(8위), OPS.902(2위)[10], WAR 30.97(2위), +wRC 157.5(2위)를 기록'''하면서 또 다른 전설인 이만수와 함께 리그를 양분했던 어마어마한 타자였다.[11] 개인 타이틀 역시 이 기간동안 '''홈런왕 3회(1985, 88, 89),[12] 타점왕 1회(1988), 최다안타 2회(1985, 88), MVP 2회(1985, 88)'''를 기록하면서 화려함과 꾸준함을 갖춘, 당시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었다. 또다른 특기할만한 점으로는 이 전성기 시기에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한 시즌 30홈런과 20-20 클럽[13]'''을 달성했다는 점. 특히 그가 은퇴한 후, 홈런 1위와 타점 1위는 2009년에 와서야, 김상현이 홈런 1위와 타점1위에 오를 때 까지 누구도 오르지 못했다. 또한 리그에서 한시즌 30-30을 최초 달성한 선수는 1996년의 박재홍이지만 100경기 남짓한 한 시즌에 30홈런과 한 시즌 30도루를 한번씩은 달성해본 최초의 선수는 김성한이라는 점에서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14]
그러나 그런 그도 1991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노쇠화가 오기 시작한다. 1991년 3할에 가까운 타율(.294)과 리그 3위의 홈런(23개)을 기록하던 방망이는 1992년 15홈런으로 꺾이더니[15] 1993년부터 다시는 두자릿수 홈런을 치지 못했다. 은퇴년도인 1995년에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했을 정도로 펀치력은 그대로였으나 노쇠화로 인해 본래 자신의 약점이던 스윙스피드가 더욱 떨어지게 된 탓이다. 결국 95년 투고타저와 맞물려 시즌 타율이 1할까지 떨어지게 된 김성한은 그 해에 은퇴를 결정하게 된다. 그의 은퇴식에는 1980년대를 함께 호령했던 라이벌 이만수가 꽃다발을 건내주어 눈길을 끌었다. 그가 남긴 통산기록은 타율 .286 1389안타, 207홈런[16], 781타점, 762득점, 2루타 247개, 2285루타, 143도루. 은퇴를 선언한 95년 당시 도루를 제외한 타격 모든 부분의 1,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17]
초창기의 해태 타이거즈 웹사이트에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김봉연이나 김종모, 선동열 등을 제치고[18] 김성한 혼자 당당히 올라있었다. 그래서인지 내용도 김성한에 대한 것들만 가득했는데, 영구결번만 안 되었다 뿐이지 당시 타이거즈의 역사를 빛낸 대스타로서 김성한의 위상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스윙스피드를 올리기 위해 개발된, 백스윙을 거의 생략한 간결한 타격폼 덕분에 특히 속구에 강해서 프로에서 최동원한테 가장 많은 안타를 얻어낸 선수였으며,[19] 제 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 일본 올스타에 큰 점수차로 밀리던 8회초 이라부 히데키의 직구를 받아쳐 도쿄돔 상단으로 넘겨서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그나마 세웠던 적도 있다. 게다가 4차전에서도 홈런을 날리며 일본 올스타를 상대로 한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덕분에 대회 당시 그의 배트가 도쿄돔의 일본 야구 박물관에 전시되는 영예를 누렸다. 또한 1993년에 열린 한일프로야구 친선경기[20]때도 잠실구장에서 이라부에게 홈런을 뺏은 바 있다.
[image]
[image]
마운드에서 투구하는 모습.
타자로서의 활약은 위와 같이 두말할 필요도 없고, 투수로서도 4시즌 동안 통산 방어율 3.02를 기록, 총 167이닝을 던졌고 1982년에는 무려 106.1이닝을 소화했다. 1982년에 타자로서 타자로 타율 0.305, 13홈런, 69타점, 10도루라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했지만, 투수로서도 '''규정이닝을 넘기면서'''[21] 10승[22] (5패 1세이브), 방어율 2.88을 기록하며 프로에 데뷔했다.[23] 현재까지 KBO에서 본인 한 명밖에 없는 한시즌 10승 - 10홈런 - 10도루 - 3할 타율 - 타점왕이라는 진기록 보유자.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투타 10-10-10클럽을 개설[24]하고 현재 그 유일한 회원이며, 투수도 타석에 서는 일본 센트럴리그나 미국의 내셔널리그식으로 경기운영을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지기 힘들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10홈런-10승은 베이브 루스만이 달성(1918년, 11홈런-13승)한 기록이다. 다만 세간에서 당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고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26경기 출장 중 5경기만 선발로 나왔다. 물론 80경기 체제 중에 5경기를 선발로 나온 것이 생각보다 적은 비율은 아니었겠으나, 주로 나온 포지션은 구원 투수로 보는 것이 맞다. 문제는 구원 투수라지만 80년대 야구 특성상 마구잡이로 등판하였다. 첫머리에서 부터 보였던 '''규정이닝을 넘기면서''' 라는 글귀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1982년 5월 15일 광주 삼성전에서 팀이 2-0으로 지고 있던 6회 구원투수로 올라왔고 7회말 투런 홈런을 쳐서 동점을 만든 후 11회까지 6이닝 5삼진 3볼넷 무실점을 기록하였고 11회말 끝내기 안타를 쳐 팀의 2-3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승리투수와 결승타를 동시에 이룬 선수가 되었다.[25] 11일후인 5월 26일 서울 MBC전에서도 7회말 구원투수로 올라와 10회초 이광권을 상대로 결승 2루타를 친 후 10회말을 틀어막아 승리투수가 되며 한국 프로야구 유일의 승리투수와 결승타를 동시에 그것도 두 번이나 이룩한 선수가 되었다. 심지어 9월 28일 구덕 롯데전에서는 선발투수이자 팀의 3번 타자로 출장했다. 9이닝 3실점 완투에 타석에서는 4타수 2안타를 기록해 4-3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 경기는 한국 프로야구 유일의 9명의 선수로 끝낸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즉, 투수교체는 물론 지명타자나 대타, 대주자, 대수비조차 없었던 것이다.
1982년 시즌 후 인터뷰에서 "너무 힘들어서 자청해서 마운드에 올라 죽도록 던지고 다시는 투수를 할 수 없도록 팔이 영영 고장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3. 지도자 시절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
'''패'''
'''무'''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1
KIA 타이거즈
133
60
68
5
5위
-
2002
133
78
51
4
'''2위'''
3위[26]
2003
133
78
50
5
'''2위'''
3위[27]
2004
88
41
43
4
5위[28]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487'''
<color=#373a3c> '''257'''
<color=#373a3c> '''212'''
<color=#373a3c> '''18'''
<color=#373a3c>
<color=#373a3c>

3.1. 해태 타이거즈 코치 시절


은퇴 후 1996년은 코치 연수로 한 해를 보냈으며 1997년부터 타격코치 직을 맡았다. 이 시기에 장성호, 홍세완, 이호준 등을 키워냈다. 이 당시에도 군기반장하던 기질이 여전해서 이호준장성호가 제일 무서워하는 코치였다고 한다. 이호준의 더그아웃 인터뷰에서보면 지금도 상당히 그 카리스마가 남아있는 듯.
1997년 한국시리즈 영상을 보면 이종범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이 있는 걸로 보아, 선수시절 호타준족이었던지라 타격코치 및 1루 주루코치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1루 코치 사진

3.2.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2000년 말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떠나자[29] 2001년 해태의 마지막 감독을 맡게 된다. 당시 해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비밀번호 5-7-6을 찍던, 다 무너져가던 팀이었다. 장성호와 함께 그나마 팀을 받들어주던 홍현우마저 FA가 되어 LG 트윈스로 이적하면서 말 그대로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현우도 없던 시기[30]
하지만 김성한은 남아있는 선수들로 기적같은 투혼을 발휘한다. 사실 5월까지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창단의사를 뚜렷히 밝히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 시기 해태 타이거즈는 5월 하순까지 22승 1무 19패로 4위를 마크하며 IMF여파를 무시하듯이 타격의 힘으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이며 현대자동차그룹의 구단 인수 결정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6월까지 3위 두산 베어스와 더불어 승승장구하며 3, 4위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해태 타이거즈는 6월말부터 에이스 최상덕에게 크게 의존하던 투수진의 힘이 떨어지면서 7월에는 간신히 4강싸움을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속에서 김성한 감독은 홍세완, 김종국[31], 김경언 등을 새로이 발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타선 쪽에서는 이렇게 좋은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 처럼 투수쪽에서는 이렇다할 선수의 발굴도 없고, 한 두명의 투수에게 의존하는 다소 아쉬운 운용을 보이면서 초보감독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경기는 7월 29일이었고, 팀의 마지막 감독으로서 이름을 올리게 된다.[32][33] 이 경기 이후 KIA 타이거즈로 팀명이 바뀌면서 초대 감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image]
팀이 KIA 자동차 그룹으로 인수되고 자연스럽게 KIA의 첫 번째 감독으로 임명된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페넌트레이스에서 해태 타이거즈시절에도 달성하지 못했던 2년 연속 승률 6할[34]을 달성했다. KIA 감독 시절 김성한 감독의 야구 스타일은 일명 '감의 야구'라고 불리며 데이터에 따른 기계적인 선수 운용 대신 선수의 컨디션 및 상황에 따라 감독의 직감으로 교체카드를 쓰는 스타일.[35] 그리고 대체로 강공 위주로 공격을 지시하고, 투수를 가능한한 최대한 믿고 오래 끄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잘 나가던 감독들인 짜내기 야구 및 지키는 야구의 대가 김재박, 벌떼계투진으로 대표되는 상대 맞춤형 전술의 김성근 감독, 데이터야구의 전도사 조범현 감독의 스타일과는 극단적으로 반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놈의 강공 위주 공격 때문에 일명 '짜내는 야구'를 잘 시도하지 않다보니[36] 이길 때는 화끈한 타격의 힘으로 크게 이겨주나, 질 때는 강공 실패가 반복되며 결국 수많은 잔루를 남기며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단기전에 약했다. 또한, '감의 야구'의 영향으로 당시 기아 타이거즈는 구단 내에서 '정보분석팀'의 영향력이 많이 약했고 이 당시 기아는 정보분석을 통한 확률놀이보다 감독이 관찰한 컨디션이나 감을 중시하다보니 부족한 인원으로 기껏 정보를 구해와도 그 정보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편이었다. 실제로도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조범현 감독 시절의 SK 와이번스에게 현미경 야구를 당하며 스윕으로 털리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정보분석팀의 차이'가 지적되기도 했다.[37] 결국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2002, 200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해 3위로 마감하고, 2004년에는 전년도 시즌성적 2위 팀을 4위 이하로 떨어뜨린 성적부진으로 비판을 받아 시즌 도중 경질됐다.
겉으로는 성적이 무난하게 좋아 보였으나, 김성한은 단점이 상당히 뚜렷하게 드러났던 감독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부분 말고도 투수 운용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무지막지한 이닝과 경기 수를 기록하게 한 오봉옥[38], 이강철[39], 신용운[40], 유동훈[41]은 말할 것도 없고. 선발진 역시 잘 던진다 싶으면 완투를 곧잘 시키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다니엘 리오스, 존슨, 마뇽과 같은 선발체질인 용병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뒷문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시즌 초 마무리로 쓰다가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서야 시즌 중간부터 선발로 돌려서 활용했다. 낙후된 재활시설과 관리시스템으로 유명했던 당시 기아의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부상에서 조금만 나아지는 모습만 보여도 마구잡이로 올려서 쓰다가 다시 탈이 나는 박충식과 같은 케이스 역시 존재했다. 또한 2002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즌 내내 풀타임 선발로 활약한 신인 김진우를 별다른 검증 없이 마무리로 돌리다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는 등 선수활용에서 부족한 점을 많이 보였다.
위의 것을 다 제쳐두더라도 김성한이 현재 감독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감독시절 행보 때문이다. 해태시절 군기반장으로 유명했던 김성한은 일명 김성한 구타 사건으로 대표되는[42] 80-90년대의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강압적 스타일의 감독이었으며, 이에 모자라 해임되기 바로 직전인 2004년 초 겨울, 정신력을 다잡는다는 이유로 선수들을 '''국토 대장정'''을 시킨다든지 하는 기행까지 벌였다.[43][44] 2002년과 2003년 승률 6할을 찍을 당시엔 성적이 나오니 이거에 대해 별말이 없었지만,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던 2004년에는 바로 이것이 발목을 잡아 정재공 단장과 좋지 못한 관계와 함께 김성한 감독의 명줄을 앞당기는 사유가 됐다. 김성한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 기아 자동차라는 거대기업의 인수덕에 이전에는 생각치도 못할 많은 금액을 투자하여 박재홍, 진필중, 마해영, 심재학 등 A급 선수들을 쓸어왔으나, 2년 이상 활약하거나 제대로 정착한 외부출신 선수가 진필중의 보상선수였던 손지환 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바뀐 환경에서 팀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고 구시대적 악습을 유지했던 것이 우승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3.4. 휴식기


휴식기 들어서 CMB광주방송에서 KIA 타이거즈 홈 경기 중계방송의 해설을 맡게 되었다. 군산상고 감독 [45] 등을 맡으며 '카리스마'가 넘쳤다는 증언을 듣기도. 이 시기에 그의 제자였던 차우찬삼성에 지명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 삼성 감독이 팀 후배였던 선동열이어서 가능했다. 그 후 KBO 기술위원으로 재직. 미국 연수를 끝내고 나서는 천하무적 야구단에 자주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기술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고정 확정, 매 경기 해설을 맡기도 했다. 해설 이외에도 연습경기에 참여하는데, 연습경기에 참여하면 매번 삼진아웃을 당한다고 한다. 2009년에는 WBC 대표팀 수석코치로도 참가했다.
참고로 기아의 감독에서 성적부진 명목으로 불명예 퇴진했으나 나름대로 팀 성적은 좋았던 터라[46] 이후 유남호, 서정환 감독 때에도 팬들 사이에서 수없이 김성한 감독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동안 해태-기아를 맡아왔던 감독들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조범현 감독이 2008년 팀을 맡고 역시 하위권을 기록하자 팬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고 역시 김성한 감독을 다시 데려오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결국 조범현 감독이 2009년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에야 이는 어느정도 잠잠해졌다. 본인 역시 인터뷰 등에서 감독 복귀를 꿈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위에서 나오는 폭행 사건이라든지 국토 대장정 병크들을 생각해보면 그의 복귀는 사실상 제로에 수렴한다. 2008년 7월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에서 중식당 하이난을 오픈해 부인과 같이 운영했으며 식당일을 돕고 계신다고. 심지어 손님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직접 손님들 차 발레파킹 해주러 온다. [47]
2011년 군산상고 VS 경남고 30주년 리매치에서.
NC 다이노스KT 위즈가 창단했을때 그 구단들의 감독으로 여러 사람들이 거론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김성한 전 감독의 이름은 어디서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업적이나 공과로 놓고보면 지금 NC 다이노스KT 위즈 감독 후보들 중 김성한 전 감독보다 훨씬 흠결이 많은[48] 감독 후보들이 적지 않음에도 김성한 전 감독이 거론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올드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듯 하다. 김성한 전감독 본인은 강력히 복귀를 열망하고 있지만 해태시절 선수생활을 보냈고 여러가지 강압적으로 비쳐질수 있는 방식등등. 본인이 강력하게 변해야 한다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할듯하다.
당장 프로감독이 못 된다해도 고교 & 대학팀 등에서 지도자 오퍼가 온다면 현장감각도 다시 살리는 의미에서 수락하는 것도 좋을듯하다. 김성한 감독이 강성인건 맞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서 더 크게 비친 면도 있고 다 드러난다면 감독할 사람 아무도 없긴하다. 더군다나 군기로는 사상최강급인 해태에서만 선수생활을 보낸 해태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그에 따른 야구관정립문제도 있을 터이니 억울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본인이 철저히 변해야 한다는 의지표현 역시 필요하기도 할 듯하다. 신생구단 창단소식에도 자신의 이름이 거론조차 안되는건 김성한 전 감독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으므로.
또한 루이스 안두하를 잘 던지는데도 뜬금없이 강판시켜 그가 짐싸들고 가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2012년 7월경 교원그룹의 상조 브랜드인 '물망초'의 광고에 김용철 전 롯데감독과 함께 출연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광고 슬로건인 "떠나도 남는다 가슴에 남는다"가 김성한 본인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터라 짠해지는 느낌이다.
2012년 10월 15일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3.5.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시절


[image]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적어도 취임 직후 시점에서 한화팬들의 반응은 그런대로 호의적이었다. 이미 해태의 상징 김응룡 감독이 부임한 마당에 해태 출신이라고 거부반응을 보일 이유도 없으며, 김성한이라는 인물 자체도 순수하게 능력만 따진다면 유능한 인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지도.[49] 다혈질의 성격이 불안요소라면 불안요소이긴 한데...5년동안 꼴칰야구를 보면서 혈압이 오를대로 오른 한화팬들은 '''"최소한 실책이나 병살, 주루사 나왔을때 쪼개는 꼴은 안 보겠네"''' 하면서 은근히 좋게 보는 분위기.
공백기가 좀 길었지만 능력 자체는 검증된 인물이기 때문에 김응용 감독과 함께 많은 기대를 받았다.
2013년 시즌이 시작된 이후, 투수진의 붕괴로 팀이 총체적 난국에 빠지며 김응룡 감독과 함께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나마 타격 코칭은 괜찮다는 말도 나오긴 했지만, 여기에도 의구심을 보이는 이들도 많다. 특히, 송창식 문제로 대표되는 한화 불펜진의 고질적인 소진 문제에도 불구하고 김응용 감독에게 이렇다할 진언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 하나 없이 손 놓고 있는 느낌도 강하다.
2014년, 5월 14일, 4연패(기아전 3연패+삼성에게 패배) 끝에 "감독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며 사임했다. 자진사퇴의 형식이지만,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김응용 감독과의 트러블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만한 점으로는, 김성한이 수석코치를 맡기 불과 4개월 전에 MBC 정보석의 쥬얼리하우스 이종범 편의 초대손님으로 등장했을 때, 이종범 보고 절대 코치는 하지 말라고[50] 만류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인데, 김응용의 한화 감독행에 맞물려 강제 소집(?)되자 어쩔 수 없이 이종범과 함께 한화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는 거다. 나이나 경력 등을 고려할 때 김성한은 결코 코치 정도로 그칠 인물이 아니고[51] 감독 후보군이었는데 김응용 감독에 대한 의리로 억지로 한화 수석코치를 맡았었는데[52] 결국 김성한의 인내심과 김응룡에 대한 서운함이 폭발하여 이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53][54][55]

3.6. 다시 야인생활


야인이 다시 되고, 2014년 2월 무렵 음료광고를 하나 찍었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가 되기 전에 했던 CMB광주방송 KIA 타이거즈 홈경기 해설을 다시 맡게 되었다.
선동열 감독이 부진한 성적으로 계약기간이 끝나고 사실상 재계약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을 때는 새 감독 후보군으로 오르는 듯 했었으나 선동열의 재계약으로 결국 소문으로 끝났다. 그러나 선동열이 2014년 10월 25일에 사퇴하면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비록 흑역사가 존재했지만 2년연속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은 김성한 감독이 복귀하면 환영할 기아팬들이 많을 듯하다.[56][57] 하지만, 김기태가 부임하는 바람에 복귀는 당분간 요원해졌다.
그리고 상무지구에 차렸던 중국집 '하이난'을 넘겨주고[58], 나주혁신도시 휴먼스프라자 건물 4층에 새롭게 ''''더 하이난''''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중국집을 열었다고 한다. 중국집도 하면서, 나주시의 유소년야구와 아마야구 육성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한다.
요즘엔 야구칼럼을 쓰는데, '''김성한의 눈'''이라는 타이틀로 엑스포츠뉴스에서 연재를 하고 있다. 상당히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논점으로 글을 풀어나가서 한번 읽어볼 만 하다.
2017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연설을 했다.영상[59] 이 때문에 2018 시즌이 끝나고 kt wiz의 단장으로 선임된다는 썰[60]이 네티즌은 물론 선수단 내에서도 돌았고, 정권에서 앉힌 낙하산 단장이라고 야구팬들에게 비난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김진욱 감독과 임종택 단장이 모두 나가면서 새로 인선된 단장으로 이숭용 타격코치가 확정되면서 김성한 전 감독이 kt 단장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이번엔 진천선수촌의 새로운 선수촌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2018년 12월 19일에 전해졌다. 하지만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은 이 소식을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대중의 반응은 당연히 안좋다. 야구팬들은 모두 김성한의 배트 폭행 사건을 기억하고 있고, 최근 심석희 폭행사건으로 체육계의 폭행 악습들을 끊자는 목소리가 커져가는 와중에 폭행에 앞장서던 사람이 선수촌의 촌장으로 낙점 되었기에 반발은 더 커져가는 중. 2019년 1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신치용, 김호곤과 함께 선수촌장 복수 후보로 올라있다고 한다. SBS의 보도에 따르면 김성한은 2017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를 공식 지지했고 TV 찬조연설자로 나섰음에도 유세 활동이 보잘것 없던 사람들에 비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측근들을 체육회 요직에 앉혔다가 정부와 여권에 미운털이 박힌 이기흥 회장이 김성한을 통해 정권과의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하는 보은 인사 차원의 내정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체육계 인사들의 대부분 불만스럽게 애기하는 의문점은 태릉선수촌과 전혀 관련없는 프로출신 사람이 회장 유력시가 되는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스포츠 망치는 현 정권 낙하산 인사
사실 보은인사 시비보다는 구타사건으로 인해 선수촌장에서 낙마한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다른 구타사건이 연일 지상파 뉴스를 타던 와중이니 더더욱. 구타사건만 아니었다면 사실 보은인사 논란은 다른 사례에서 흔히 보듯이 무시할 법도 했는데, 선수 구타라는 악질 범죄행위 이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체육계에 역풍을 몰고 오기 좋은 기록이다.
이후 신치용 고문이 2019년 2월 7일부로 선수촌장이 확정됨에 따라 없는 일이 되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스승인 김응룡과 동료인 이순철 등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을 지원유세하였다.

4. 기타


  • 조카가 시각장애인 가수인 이민석[61]이라고 한다.


  • 1983년 시즌, 타임 요청을 받아주지 않은 김광철 주심과 말싸움을 한 짤방이 유명하다. 자세한 스토리는 기사 참조.
  • 짬뽕에 관한 일화가 있다. 본인의 타격감이 좋지 않다 싶으면 구단 직원을 구장에 일찍 불러서 짬뽕 한 그릇 사주고 배팅볼을 던지게 했다고... 코치 시절엔 이호준장성호를 일찍 불러 짬뽕 한 그릇 먹이고 훈련시켰던, 야구에 열정적이었던 사람이다.김성한 홈런은 짬뽕국물 덕이었네 지금은 중국집을 경영하고 있으니 짬뽕과의 인연은 야구계를 떠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
  • 연차가 높던 시절, 해태의 라커룸에는 개인당 의자가 배치된 대신 평상이 있었는데 신입들은 눈치 보여 앉지도 못하는 평상에 누워 있거나 앉아서 부채를 부쳤다고 한다. 상기 언급한 짬뽕도 베테랑들만이 라커룸에서 시켜먹을 수 있었다. MBC 스포츠플러스의 엠스플 텔레비전 9화 참조.
  • KBO 최초의 원조 멀티플레이어라 할 수 있는 이건열이 1루수 연습을 하러 1루에 가면 김성한이 '아따 너는 저기(외야)로 가라잉∼'하며 쫓아냈다고 한다. 이건열은 해태 입단 전 1루수로 활약했으나, 입단하고 보니 고교-대학 직계 선배인 김성한이 1루를 지키고 있었다.
  • 홍현우의 수비력 향상에 일조했다. 수비 연습 시 3루수인 홍현우가 송구를 하면 정면으로 오는 것만 받고 옆으로 오는 것은 받지 않았으며 뒤로 빠진 공은 홍현우가 뛰어가 주워와서 공손히 김성한의 글러브에 갖다 바쳐야 했다. 물론 머리통 한 대씩 맞는 건 당연.
  • 광주MBC, 전주MBC, 광주KBS 등 지역 방송국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한다.
  • 1958년생으로 원래는 77학번이어야 하지만, 1년 유급으로 인해 1978년 대학교에 입학했다.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이만수와 같은 케이스다.
  • 프로야구 창설이 없었다면 실업팀 한일은행에 입단하려 했다고 한다. 프로 출범 당시 한일은행과 가계약까지 마쳐놓고 계약금도 받은 상황이었다고.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80
318
.305
'''97'''
(3위)
'''17'''
(5위)
'''4'''
(4위)
'''13'''
(4위)
'''69'''
(1위)
48
10
17
.506
.340
1983
96
339
'''.327'''
(3위)
'''111'''
(4위)
20
0
7
40
'''59'''
(3위)
13
42
.448
'''.402'''
(3위)
1984
98
365
.258
94
16
2
12
41
48
7
43
.411
.336
1985
105
400
'''.333'''
(3위)
'''133'''
(1위)
'''29'''
(1위)
1
'''22'''
(1위)
'''75'''
(2위)
'''66'''
(2위)
8
45
'''.575'''
(1위)
'''.400'''
(3위)
1986
104
404
.280
'''113'''
(4위)
16
0
'''18'''
(2위)
'''57'''
(5위)
'''64'''
(2위)
10
38
.453
.340
1987
81
306
.314
96
'''22'''
(3위)
0
'''15'''
(3위)
46
43
3
33
'''.533'''
(3위)
.378
1988
104
404
'''.324'''
(3위)
'''131'''
(1위)
12
0
'''30'''
(1위)
'''89'''
(1위)
'''72'''
(2위)
16
42
'''.577'''
(1위)
.382
1989
118
414
.280
'''116'''
(3위)
18
0
'''26'''
(1위)
'''84'''
(2위)
'''93'''
(1위)
'''32'''
(3위)
'''93'''
(1위)
'''.512'''
(1위)
'''.407'''
(2위)
1990
89
331
.281
93
17
2
11
49
61
14
45
.444
.361
1991
112
411
.294
121
'''25'''
(3위)
5
'''23'''
(3위)
'''83'''
(4위)
69
16
66
'''.547'''
(5위)
.388
1992
117
410
.261
107
18
0
15
59
62
6
44
.415
.331
1993
107
362
.273
99
'''23'''
(5위)
0
6
52
45
4
33
.387
.331
1994
45
157
.236
37
10
0
1
14
17
4
12
.318
.288
1995
82
229
.179
41
4
0
8
23
15
0
18
.301
.236
<color=#373a3c> '''KBO 통산'''
(14시즌)
<color=#373a3c> 1338
<color=#373a3c> 4850
<color=#373a3c> .286
<color=#373a3c> 1389
<color=#373a3c> 247
<color=#373a3c> 14
<color=#373a3c> 207
<color=#373a3c> 781
<color=#373a3c> 762
<color=#373a3c> 143
<color=#373a3c> 571
<color=#373a3c> .471
<color=#373a3c> .358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해태
26
106⅓
10
5
1
-
'''0.667'''
(4위)
2.88
88
6
51
49
44
34
1.25
1983
4
17⅓
1
1
0
-
0.500
2.08
13
1
6
8
6
4
1.04
1984
1군 기록 없음
1985
10
40⅓
4
3
1
-
0.571
3.35
35
1
19
12
18
15
1.31
1986
1
3
0
1
0
-
0.000
9.00
2
0
3
0
3
3
1.67
<rowcolor=#373a3c> '''KBO 통산'''
(4시즌)
41
167
15
10
2
-
0.600
3.02
138
8
79
69
71
56
1.25
[1] 포수를 제외하고 내야수 모든 포지션을 원년에 뛰었다. 당시에 해태는 '''14명으로 시작한 초미니구단'''이라서 선수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2] KBO 최초로 '시즌 30홈런', '20-20 클럽', '통산 1,000안타', '통산 2000루타', '통산 700득점' 등 굵직한 기록들을 달성했다.[3] 당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당대 아마야구 에이스였던 최동원김시진에게 의해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다.[4] 이 팔꿈치 부상은 김성한이 대학 시절부터 안고 있던 문제였다. 이미 대학 1학년 때 팔꿈치 부상을 당했고 이후 3년 간 타자로만 활동했던 것. [5] 80년대 한국프로야구는 체계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였었기에 투수와 타자의 겸업은 선수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다. 현재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는 MLB에서도 이도류는 실행되기 힘든데 이는 오타니 쇼헤이만 보아도 알 수 있다.[6] 한때 타격폼을 백인천의 타격폼으로 바꿔볼려고 했었다. 이걸 본 김응용 감독은 "그냥 니 식대로 해. 백인천이 네가 될수 없듯 너도 백인천이 될수는 없어."라는 말로 타격폼 수정을 막았다.[7] 본래 그해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한 삼성의 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등이 유력한 MVP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이들에게 표가 분산되면서 예상 밖으로 김성한이 MVP를 차지했다.[8] 동일한 7년 플레이 선수 기준[9] 1991년에는 KBO 리그에서 개인 통산 1,000 안타를 기록한 첫 선수가 되었다.[10] 동일한 7년 플레이 선수 기준[11] 이 7년간의 개인 통산 기록은 김성한이, 세이버메트릭스 기준의 질적 지수는 이만수가 더 앞선다.[12] 특히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시즌 30홈런은 김성한이 가장 먼저 달성하였다.[13] 1989년 26홈런 32도루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야구전문지 <주간야구>만이 대서특필했을 뿐, 그 외에는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14] 이 당시 김성한은 몸에 맞는 볼도 상당히 기록했는데, 88년엔 2위, 89년엔 3위, 92년엔 15개로 1위까지 달성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땐 당시 워낙 홈런을 많이 치던 전성기 시절이라 견제 목적으로 던진게 많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참조영상[15] 그럼에도 그의 인기는 상당해 그해 올스타전에서 팬투표로 베스트10에 올랐고, 홈런을 날리는 활약으로 미스터 올스타를 수상했다.[16]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통산 홈런 1위였으며, 나지완이 2020년에 넘기기까지 25년간 깨지지 않았다.[17] 당시 안타, 루타, 득점, 2루타 부분에서 역대 1위에 올라 있었다.[18] 당시 선동열은 주니치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19] 통산 31개[20] 주니치 드래곤즈치바 롯데 마린스의 방한 시험경기, 3차례의 경기를 가졌었는데, 1,2차전은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 연합팀이 주니치, 치바 롯데 연합팀과 친선경기 가진바 있었다. 1차전 사직 경기는 2:2로 무승부였고, 2차전 잠실 경기는 승리하였다. 김성한 선수가 속한 해태 타이거즈는 1993시즌 한국시리즈 우승팀 자격으로써 단독으로 일본팀과 3차전 경기를 치렀다. 그 경기는 일본팀이 승리하였다.[21] 이때는 80경기만 했기 때문에 규정이닝을 넘긴 수치이다.[22] 3선발승으로 김용남 이상윤(모두 6선발승)에 이어 팀내 선발승 3위[23] 김성한의 야구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단한 기록인데 당시 10승과 2.88은 '''해태 팀내에서 평균자책점 1위에 다승 1위였다.''' 더군다나 그때 80경기 체제에 타자로서도 13홈런 10도루면 오늘날은 거의 '''2~3점대 평균자책점에 15승, 20-20클럽을 달성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20-20 클럽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상황에서 제일 먼저 달성한 것도 김성한이었다.[24] 오승환도 10-10-10 클럽을 달성했지만 이쪽은 승리, 홀드, 세이브라는 순수 투수관련 부분의 기록이다.[25] 이 기록은 김성한 말고도 김재박, 최동원도 이루었다.[26] 플레이오프에서 LG에게 패하며 최종 3위[27] 플레이오프에서 SK에 패하며 최종 3위[28] 시즌 도중 사퇴 당시[29] 이 무렵 유남호, 김종모, 이상윤 등의 코치들이 김응용 감독을 따라 삼성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정환, 최해식, 김봉근, 이건열, 백인호가 새 코치로 오게된다.[30] 홍현우는 90년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고졸 신인으로 입단해 입단 2년차부터 노쇠화 기미를 보인 한대화를 밀어내고 주전 3루수를 차지했고 1996년 그는 .332의 타율에 .453의 출루율을 찍었으며, 1999년 김종국의 부상으로 2루수 자리가 비자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겨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을 찍으며 클래식 스탯 기준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선수 항목 참조.[31] 첫 풀타임은 아니지만 타격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이다.[32] 7월 29일에 마지막 게임을 치뤘지만 마지막 승리는 7월25일 사직구장 대 롯데전이며 해태의 마지막 승리투수, 마지막 완투승 투수이자 마지막 완봉승투수도 그때 완봉승을 거둔 최상덕이며 팀의 마지막 승리타점도 그때 2점홈런을 쳐낸 해태의 루이스 산토스이다.[33] 마지막 경기 당시 상대는 공교롭게도 당시 김응용 감독이 이끌던 삼성 라이온즈였는데, 그 경기는 아쉽게도 6:8로 지게 되었다.[34] 2002~03시즌 6할 달성.그러나 2002시즌때는 4위 LG 트윈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했고 2003시즌에는 4위 SK 와이번스에게 스윕으로 업셋당하며 한국시리즈에 못가봤다.[35] 대표적으로 네임드인 검증된 타자인 신동주를 7번에 박아가면서까지 당시 2할 5푼대의 좌익수이던 김경언을 6번타자로 중용한 것. 이 덕분인지 김경언은 결국 기아에서는 빛을 못봤지만 10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한화에서 각성했다.[36] 타고투저인 지금과는 다르게 이때는 강공위주 플레이는 장단점이 극명하다고 평가받았고 짜내는 플레이를 섞어쓰는게 권장되는 분위기였다.[37] 여기에 김성한은 당시 자기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김봉근투수코치를 시즌 중 경질했고, 그 때 SK 와이번스의 감독이던 조범현이 냉큼 영입하여 기아 투수들의 약점을 손쉽게 분석할 수 있었다.[38] 2001년 50경기 102이닝 출장[39] 2002년 66경기 105이닝, 2003년 67경기 68이닝, 2004년 79경기 85이닝 출장.[40] 2003년 70경기 119이닝 출장[41] 2004년 68경기 120이닝 출장[42] 2002년 시즌중 팀의 2군 포수이던 김지영의 머리를 방망이로 때려 머리가 찢어지는 불상사를 일으킨 사건이다.[43] 시즌 종료 후 체계적인 웨이트나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시즌을 치르기 위해 조금씩 준비해야하는 한 겨울에 별다른 이유도 준비도 없이 무작정 몇 일간 걷게하는 것이 선수들의 몸 상태에 좋은 영향이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의도했던 목적면에서도 의지력 또는 성취감보다 강제로 실시된 이 행사로 인한 피로감으로 인해 정신력을 오히려 저하시킬 우려도 있었다. 이는 훈련이 아닌 오히려 선수들에게 가해진 고문에 가까운 행동이었다.[44] 실제로 이 국토 대장정 이후, 2004시즌 중 차세대 에이스였던 김진우가 무릎 부상을 당했고, 이종범의 체력저하로 인한 시즌 중 부진, 홍세완의 무릎 부상, 박재홍의 햄스트링 부상 재발 역시 이와 연관이 없었다곤 보기 힘들다.[45] 이 시기의 제자는 차우찬, 원종현, 황선일, 이준호였다. 김성한은 부임하자마자 2005년 대통령배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46] 2-2-4를 기록했다. 다만 포스트시즌에서 2002년(對 LG), 2003년(對 SK) 2년 연속 업셋을 당했다.[47] 벽마다 김성한의 선수시절 사진들이 걸려있다. 다양한 팀의 후배들이 찾아와서 사인을 남기고 갔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2015년 6월에 나주시에 '더 하이난'을 오픈했다. 상무지구의 하이난은 '시안'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48] 야구 외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독으로서의 지도능력만 따졌을 때[49] 순수하게 야구 내적인 능력만 판단했을 때 김성한 수석코치는 분명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으며 최연소 2000안타의 장성호, 인생은 로또 이호준, 100타점 유격수 홍세완 등을 키워내고 팀을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고 2년 연속 6할 승률을 찍는 등 타격코치와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검증된 인물이다. '''적어도 2013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진 그랬다.'''[50] 이 발언은 이종범을 강제은퇴시킨 선동열의 밑에서 코치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선동열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51] 50대 중반이면, 이미 감독도 몇년 해봤으니 어딜 가도 감독급 레벨이다. 사실 기아 감독 시절 성적도 무난한 편이였다. 2015이면 선동열 감독과 김응용 감독의 계약기간이 종료되는지라, 감독으로 복귀할 가능성도 생겼다.[52] 첫 수석코치 등용당시에는 폭력사건으로 인해 막힌 야구계 커리어를 김응용 감독이 해결해 주려고 한 거 아니냐는 게 대다수의 견해였다.[53] 사실 해태선수 말년에도 불화가 있었다. 1994년 시즌 전 전지훈련지에서 김성한 특유의 오리궁뎅이 타법을 감독이 강제로 뜯어고치려다가 실패해 은퇴로 내몬 것도 있고, 2000년 시즌이 종료된 뒤, 주요 코치진을 김응용 감독이 줄줄이 빼간 것, 그리고 김응용 감독이 과거 박동희 기자 와의 인터뷰에서 김성한 구타 사건을 대놓고 디스한 적도 있는지라,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상당히 곪아 있던 게 터진 건지도 모르겠다.[54] 사실 김응용 감독은 과거에 수석코치와 트러블을 빚고서 그 코치를 내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0년 김인식쌍방울 레이더스 초대 감독으로 가면서 수석코치가 된 백기성은 김감독이 자신을 선수들 앞에서 종종 갈구고, 이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자, 김 감독에게 육두문자를 들어야 했고 결국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1991년 시즌이 끝나고 사임하고 말았다.[55] 이와 같은 케이스로는 유남호도 있다. 원래 해태에서 같이 삼성으로 옮긴 유남호는 수석코치로 1992년과 2002년 그를 보좌했으나, 그와의 사이가 틀어져, 2003년 시즌 중 기아 코치로 자리를 옮긴다.[56] 지금 기아 상황이 답이 없긴 해도, 김감독 초기도 상황은 비슷했다.[57] 다만 이당 시엔 젊은 선수인 김상훈, 홍세완, 장성호, 이현곤, 정성훈,김진우 등이 있었다는것. 과연 김감독이 와도 잘 할지 의문.[58] 지금은 '시안'으로 상호를 변경했다.[59] 참고로, 스승인 김응용 감독 역시 문재인 지지를 선언했다.[60] 여기에 감독으로 해태출신이 같이 온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LG의 금지어'''인 '''이순철'''이나 대학야구 감독으로서 호성적을 거두던 장채근, 이건열이 온다는 썰이 돌았다.[61] 임요환과 2004년 경기를 가졌던 그 사람. CCM 가수로 RickyP와 같이 앨범에 참여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