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
1. 소개
1982년 잠실 야구장에서 개최된 제 27회 IBAF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여했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관련된 내용. 같은 해 출범한 한국프로야구의 흥행을 만들어낸 대표팀으로, 한국야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도 볼수가 있는 대표팀이다. 야구 한일전하면 떠올리는 김재박의 개구리 점프와 한대화의 극적인 홈런이 바로 이 대표팀에서 나왔다. 국가기록원 영상 자료
2. 대회 준비
2.1. 1982년, 세계대회가 유치되기까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에서 최동원, 김재박등을 앞세워 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을 달성하게 되자 자신감이 생긴 한국야구계는 이를 계기로 한국에 국제대회를 유치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1977년 12월 2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국제아마추어야구연맹(AINBA) 총회에 박상규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를 파견, "세계대회를 치를 야구장을 건설하겠다"라는 공약[1] 을 내세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개최를 공식적으로 신청했고, 12월 24일에는 대한야구협회는 한국 야구 발전 및 프로야구 출범을 위해서 대한체육회를 통해 정부측에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개최승인 요청을 보냈고 정부측에서 허가가 내려지며 한국에서 사상 첫 야구 국제대회가 개최되는데 성공한다.
1979년 9월 11일, 대한야구협회는 국제아마추어야구연맹 임시총회에서 "서울에 국제대회를 유치할만한 야구장 건설이 지연될 경우 대회 개최권 반납하라"라는 발언이 나왔다며 '잠실야구장 건설을 진행해달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고, 11월 17일 서울시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 및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한 종합운동장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67억원을 투입해 야구장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2]
그리고 1980년 8월 22일, 국제아마야구연맹이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개최지를 서울로 확정 지었다.
대회 유치가 확정되자 대한야구협회에서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겸 월드게임에 출전할 대표팀의 예비 엔트리 54인 명단을 발표했다.기사 또한 대회 준비를 위해 임광정 대한야구협회장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비위원장으로 선임하고 허종만 전무이사와 송옥순 기획이사를 사무총장 및 사무차장으로 임명했다.## 1981년 대표팀은 월드 게임에서 2승 1패로 준우승을, 대륙간컵에서 4위를 기록했다.
1981년 8월 7일 국제아마야구연맹 총회에서 대회 참가국을 12개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 일본, 필리핀의 야구협회장들이 모여 아시아야구연맹 창설을 주도하기로 결정했다.
9월 3일에는 조직위원회에 이사 6명을 보강했고, 10월 8일에는 조직위원회 총장에 허종만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를 선임했다.## 11월 5일에는 조직위원회 구성위원장에 이광정을 선임했다. ##
2.2. 선수 선발과 그 과정에서 잡음
2.2.1. 실업 선수들의 프로 진출
대한야구협회는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이 이루어지면 주요 선수들이 대거 프로에 입단해 대표팀 출전이 불가능해지는 것을 막기위해 주축 선수들을 한국실업야구로 보내는 편법을 동원했다.[3] 이로 인해 실업야구 선수들의 반발이 거셌고 일부 선수들은 대표팀 차출 전 미리 프로팀과 가계약을 맺거나 대표팀 차출을 거부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는 등 대한야구협회의 일방적인 일처리에 항의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11월 13일, 대한야구협회는 대표팀 예비명단 25명을 발표하려 했지만 선수들의 항의와 반발이 이어지자 프로야구 출범 전 구단주 회의를 통해 대표선수들과의 계약을 미룬다라는 강경한 모습을 보여주며 선수단과의 정면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다.
12월 1일, 대한야구협회가 예비명단 27인을 발표했다. 슈퍼월드컵과 월드게임에 출전했던 김봉연, 김용희, 배대웅, 이선희등 주축 노장선수들이 대거 빠지고 최동원, 김시진, 임호균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을 대표팀 경력이 짧거나 없는 선수, 그리고 대학선수와 고교 유망주를 포함시키며 프로진출 잡음을 최대한 줄이려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그리고 대표팀에 발탁되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프로계약을 시도하는 선수들과는 한국야구위원회에서 거절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대신 대표팀에 합류하면 향후 프로팀을 운영하는 기업에 입사해주거나, 해당 프로팀으로 입단을 시켜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런 방침에도 김재박과 이해창이 프로입단 신청을 내면서 해결책이 필요한 상황을 맞이했다.##
예비엔트리가 발표된지 하루가 지난 12월 2일, 코칭스태프 선임도 완료했다. 대표팀 감독으로 한국전력감독인 어우홍이, 코치에는 김충(상업은행 감독), 배성서(동국대학교 감독)을 임명했다.
해를 넘긴 1982년 1월 6일,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는 프로입단 신청을 한 김재박과 이해창 문제를 놓고 논의를 펼쳤지만 서로의 입장차이만을 알게 된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월 11일 김재박, 이해창, 심재원, 유두열, 김일권, 임호균은 "만약 우리가 프로입단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에 따른 보상대책을 내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대표팀 전지훈련에 불참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월 13일에 대한야구협회 실무진과 선수들이 만나 보상책을 놓고 논의를 했지만 A급 프로선수에 해당하는 보상[4] 을 해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대한야구협회측에서는 "우리 돈없어서 안되고 우리가 30%, 너네 소속팀에서 40%, 앞으로 너네가 입단하게 될 팀에서 30% 부담하도록 해볼께"라는 반응을 내비쳤다. 이에 선수들은 실현가능성이 없다며 2시간여의 면담장을 박차고 나왔고 결국 15일로 잡혔던 대표팀 전지훈련도 27일로 연기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거기다 박노준과 김정수 등 유망주들에게도 프로구단들이 손을 내밀면서 일이 걷잡을수 없이 커지게 될 상황을 맞이했고 결국 대한야구협회는 "최대한 노력 하겠으니 선수들도 따라주기 바람. 안그럼 너네 미래 보장 못한다"라는 반응을 내비쳤다.##
파국으로 치닫던 이 사태는 1월 21일 한국야구위원회에서 일부 격려금을 기부받아 선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한 대한야구협회에서도 선수들에게 격려금을 지급, 프로유보 야구대표 보상 매듭 또한 이해창은 한국화장품으로 1년간 뛴후 세계대회가 끝나면 MBC 청룡에 입단하게끔 협의를 하며 마무리 되었다....싶었으나 김일권이 프로를 가겟다며 전지훈련을 무단 불참하며 파장이 일었다. 프로희망 김일권 대만 전지훈련에 불참, 김일권 "나는 억울하다"
이 문제는 한동안 질질 끌리다가 결국 김일권이 수많은 반발에도 해태 타이거즈 입단을 확정짓고## 대회집행위원회 지도부가 총사퇴를 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김일권은 대한야구협회로부터 제명 조치를 받았지만 이미 프로로 간 상황에서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징계였다.
2.2.2. 최동원과 토론토 블루제이스 간의 갈등
이와 더불어 대표팀의 에이스 최동원이 토론토 블루제이스 이적을 위해 메이저리그에 정식 선수로 등록됨에 따라 아마추어 자격이 박탈되며, 이 대회 참가가 불투명해진 것이다.최동원 세계대회 못나간다 거기다 최동원과 토론토 블루제이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대한야구협회도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야구협회는 "아직 군대도 안갔고 구단측으로부터 계약금도 안받았기에 아마추어임"이라는 자체적인 판단을 내렸다.최동원 세계야구출전 어려울듯.
이후 국제야구연맹 집행위원회가 1월 12,13일간 서울에서 대회 운영문제를 확인함과 동시에 최동원 참가 자격 문제를 다루기로 결정했고 2월 13일, 국제야구연맹이 "최동원은 아마추어 신분이다"라는 해석을 내놓으며 대표팀에 합류할수 있게 되었다.최동원은 아마추어 신분"
2.3. 전지훈련 종료 후 대회 전까지
1982년 2월 25일 대만 전지훈련을 마치고 복귀한 대표팀은 체력 향상에 초점을 뒀다고 밝혔다.
그리고 3월 16일에 대표팀으로써는 희소식이 들려왔는데 당시 아마야구 최강팀이었던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이 "우리 대신 니카라과를 출전 시켜달라"며 불참을 통보한 것이다. 이를 두고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으나 이후 쿠바의 게라 IOC 위원은 쿠바 대표"아니아니 그게 아니고, 팀의 전력이 약화돼서 그런 거야"라며 해명했다. ## 이 때문에 3월 18일 대회 대진표를 다시금 재조정 했으며 한국은 9월 4일 콜롬비아와의 첫 경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콜롬비아도 불참을 통보하면서 일정을 다시 재조정해야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따라서 12개국으로 계획된 이 대회는 최종 10개 국가가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미국 선교팀과의 2경기의 평가전을 가진 대표팀은 7월 20일 최종 엔트리 20명을 발표했다.
3. 코칭스태프 및 선수단
4. 제 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1982년 9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10일간 펼쳐진 이 대회는 잠실야구장, 동대문야구장, 숭의야구장에서 풀리그로 진행되었다.
4.1. [image] 이탈리아전 (9월 4일, 잠실 야구장): 1:2 패배
대한민국의 대표팀 선발은 김시진이었고 이날 상대 이탈리아는 약체로 평가받아 당연히 승리할 것으로 평가받던 상대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방망이가 터지지 않아 심재원이 4회에 기록한 1타점만이 전부였던 상황에서 김시진이 갑자기 무너졌다. 7회초, 이탈리아의 카롤리에게 2타점 2루타를 허용한 것. 이후 대표팀은 1점을 추가하지도 못한채 게임을 마쳤고 첫경기를 충격적인 패배로 마쳤다. 흥미로운 것은 이탈리아는 이후 단 1승만을 추가하는데 그쳤는데 하필 그 상대가 일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는 그 해 대회에서 우승, 준우승 팀만 잡고 나머지 팀에는 승리셔틀 노릇만 한 셈이다(...)
여담이지만 이날은 토요일이었던 관계로, 당시 이탈리아쪽 선발이 누구인지는 신문 지면상으로는 확인 불가능하다(...) 일단 웹상의 정보로 표기는 되어있지만 풀네임은 알아내기 쉽지 않을 듯.
4.2. [image] 미국전 (9월 5일, 잠실 야구장): 2:1 승리
의외로 미국 대표팀이 주목했던 선발 최동원 대신 신예 선동열을 내세운 대표팀은 선동열이 1회부터 실점을 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3회에 김재박이 안타로 출루했고 이어 미국 내야수들의 실책을 곁들이며 동점을 만들어내면서 분위기가 역전 되었다. 선동열또한 1회의 실점 이후로는 미국 타선을 철저하게 봉쇄했고 6회에 조성옥의 2루타에 이어 이해창이 3루수 옆을 지나는 3루타를 뽑아내는데 성공하며 역전에 성공하며 2:1이 되었다.
선동열은 2회부터 9이닝까지 완벽하게 틀어막으며 단 5개의 안타만을 내주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4.3. [image] 네덜란드전 (9월 6일, 숭의 야구장): 11:0 7회 콜드승
오영일의 호투와 김재박, 이해창이 각각 투런홈런을 때려내며 7회 콜드게임 승리를 기록했다.
4.4. [image] 중화민국전 (9월 8일, 잠실 야구장): 6:0 승
일본과 함께 가장 경계해야할 팀으로 꼽혔던 대만전에서 의외의 완승을 거머쥐며 우승에 한발짝 더 다아가게 되었다. 이날 선발 투수로 등판한 선동열은 9이닝 동안 5피안타 8K 무실점 완봉승을 기록해 내며 2경기 동안 18이닝 10피안타 1실점으로 방어율 0.50으로 새로운 스타탄생을 예고했다.##
타선도 불붙었는데 1회에 김재박과 이해창이 안타로 출루하며 만든 2사 만루에서 대만의 3루가 실책을 하며 1점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3회초도 안타 2개와 대만의 실책 1개를 곁들이며 1점을 추가한 반면 4회초에 한대화의 3루타와 대만의 실책 2개로 2점을 더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7회초에는 이해창과 장효조의 연속 안타로 1점을, 8회초에는 한대화의 솔로홈런이 터지며 최종 스코어 6:0이 되었다.
이날 승리로 3승 1패가 되면서 일본과 공동 선두가 되었다.
4.5. [image] 파나마전 (9월 10일, 잠실 야구장): 4:2 승
선발투수 최동원을 내세운 한국 대표팀은 이날 타선의 침묵과 수비의 연이은 실책으로 부진한 경기를 펼쳤다. 어느 정도냐면 한국 대표팀의 2실점은 모두 한국 내야수의 실책으로 생겨난 점수이기 때문에 최동원의 자책점은 0일 정도.
1회말, 2사 1루의 상황에서 4번타자 무노즈의 땅볼을 1루수 김진우가 잡은후 베이스 커버에 들어간 최동원에게 던진다는 것이 그만 너무 높게 떠버린 것. 그 사이에 1루주자였던 포사티가 홈을 밟으며 1점을 내주었다.
그러나 심재원이 2타점 2루타를 때려내는 등 결정적인 찬스때 안타를 때려내며 득점에 성공 4:2 신승을 거두었다.
4.6. [image] 캐나다전 (9월 11일, 잠실 야구장): 5:1 승
이날 대표팀은 박동수 - 김시진 - 선동열이 마운드를 지키며 캐나다 타선을 완벽하게 봉쇄하며 8피안타 1실점을, 타선은 3점을 내는데 성공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4.7. [image] 도미니카 공화국전 (9월 12일, 잠실 야구장): 3:0 승
3회초 이해창의 2루타가 터지고 이어 심재원이 1타점 적시타가 터지며 1점을 먼저 뽑아낸 대표팀은 5회초에 이해창이 안타로 출루한후 도루에 성공하자 장효조가 이해창을 홈으로 불러들이는 적시타를 때려내며 1점을 더 추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9회초에는 김재박이 안타를 친후 2루를 훔치는데 성공했고 이어 조성옥이 적시타를 치며 김재박을 홈으로 불러들이며 결승점을 뽑아내는데 성공, 3:0 완승을 거둔다.
2경기 연속 선발투수로 경기에 나선 박동수와 그 뒤를 이어 등판한 임호균은 도미니카 타선을 완벽 봉쇄하는데 성공하며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4.8. [image] 호주전 (9월 13일, 잠실 야구장): 7:6 승
이날 선발투수 최동원은 의외로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에게 난타를 당하며 위기를 자초했고, 끌려가던 대표팀은 9회말 장효조의 적시타가 터지며 간신히 동점을 만들어 냈다. 이후 대회 시간제한규정[6][7] 으로 인해 다음날 14일 10시 30분부터 연장 10회초 상황부터 재개되었다. 결국 연장 15회에 끝내기가 나오며 승리를 거둔 대표팀은 7승 1패를 기록, 최종 우승을 가리기 위한 마지막 경기 상대인 일본과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4.9. [image] 일본전 (9월 14일, 잠실 야구장): 5:2 승
일본과의 대결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던 경기이자, 8회의 기적의 시조격인 경기다. 특히 이날 경기는 역대 어느 한일전 보다도 특별했는데, 당시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가 터져 반일감정이 극도로 끌어올랐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82년 6월, 일본 문부성이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검정하는 과정에서, '침략'을 '진출'로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알려지며 한국과 중국에서 거센 반일시위가 일어났던 것. 그래서 이날 경기에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은 선수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표팀 사정은 좋지 못했다. 직전 경기가 서스펜디드 게임으로까지 흘러갔기에 당일 오전에 5이닝 경기를 치른 상황. 선수단은 단 몇 시간만을 쉰 채로 경기를 준비해야 했고, 거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한일전이었던 만큼,''' "지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선수들을 짓눌렀다고 한다. 최동원과 임호균은 호주전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해 쓸 수 없었으며, 김시진은 이미 이탈리아와의 1차전에서 코칭스태프의 신뢰를 상실한 상황. 그래서 어우홍 감독이 선택한 선발 카드는 고려대학교 투수 선동열이었다. 이미 대회기간 동안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최동원을 보러 온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선동열을 보고 간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기에, 일본전에서도 충분히 활약해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경기 초반, 일본이 한국 대표팀의 선발투수 선동열을 상대로 2점을 먼저 뽑아내는데 성공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고, 한국 타선은 6회까지 박노준의 잘 친 타구가 호수비에 잡히는 등, 불운이 겹치며 일본의 선발투수 스즈키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할 정도로 빈타에 허덕였다. 그나마 7회말에 한대화가 첫 안타를 때려내며 노히트 행진을 깨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타선은 무기력했다. 한국에게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6개.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가온 8회말, 기회가 찾아왔다. 선두타자로 나선 심재원은 중전안타를 치며 출루에 성공했고, 대타 김정수가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때려내 심재원을 불러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조성옥이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키며 2루주자 김정수가 3루에 안착. 일본은 선발투수 스즈키를 내리고 니시무라를 마운드에 올렸다. 이 때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1977년 실업야구 7관왕의 주인공' 김재박. 그러나 김재박은 이번 대표팀에서 대회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여 질타를 받았기에 번트를 시도할 것으로 보였고, 일본 배터리도 이를 인식한 듯 일부러 피치아웃을 시도하는데....
일본 배터리가 일부러 뺀 공을 향해, 김재박이 말도 안되는 점프로 방망이를 갖다대는데 성공, 번트타구를 만들어 냈다.[8] 이 틈을 타 3루주자 김정수가 홈에 들어오며 동점이 되었고, 김재박도 1루로 전력질주하여 살아나서 여전히 아웃카운트는 하나뿐이었다. 이 번트를 두고 한국야구사나 경기 당시 인터뷰 등에서는 "어우홍 감독의 사인을 김재박이 오해 해서 생긴 일"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정작 김재박 본인은 사인은 없었고,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고 밝혔다. 진실은 저 너머에.
그렇게 1사 1루에 발 빠른 김재박이 나가있는 상황에서 대표팀의 중심타자 이해창이 중전 안타를 때려내는데 성공하며 1사 1·3루가 되었고, 이어 일본의 투수로 세키네가 올라왔다. 장효조가 세키네를 상대로 때린 타구는 내야 땅볼이 되어 병살타 코스로 이어질 뻔했으나,[9] 일본의 유격수가 홈송구를 선택하며 홈으로 쇄도하던 김재박만이 아웃, 2사 1·2루가 되었다. 역전의 기회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는 대학생이던 한대화. 예선에서 홈런포를 가동하며 팀의 해결사로 불리던 그가 나왔다.
'''그리고...'''
'''2대2 동점 역전의 기회입니다 한국팀. 쳤습니다! 좌츠윽! 홈런성! 홈런이냐! 홈런이냐! 호오옴러언~!!! 홈러어언~!!! 쓰리런 홈러언~!! 한대화~!!!! 쓰리런 홈러언~!!'''
"좌측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공. 폴대를 맞고 크게 튕겨나온 이 공은,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때리는, 그야말로 기적이라 할 만한, '''홈런이었다!'''"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인 다큐멘터리 - 한대화 편
한대화는 일본의 4번째 투수인 세키네와 풀카운트 싸움을 펼쳤고, 6번째 공으로 슬라이더가 제대로 휘지 않고 들어오자 지체없이 방망이를 돌렸다.끈질기게 다섯 개의 공을 지켜본 한대화는 심호흡을 하며 배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6구. 일본의 세 번째 투수 세끼네가 한대화에게 던진 여섯 번째 공은 가운데,그리고 높은 쪽으로 몰린 실투였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실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전력으로 휘두른 한대화의 배트 중심에 제대로 통타당해 까마득히 뻗어나가기 시작했고,잠실야구장 좌측 폴대의 3분의2지점을 때리고 떨어졌다. '''홈런.'''
마지막 국가대표-김은식
21시 34분, 안개 낀 잠실 야구장의 왼쪽 담장을 향해 날아가던 백구(白球)는 그대로 스탠드에 빨려들어가서 폴대를 직격하고 튕겨나왔다. '''역전 스리런 홈런이었다!''' 0:2로 7회까지 끌려가던 대표팀이, 단 1이닝만에 5:2로 뒤집어 낸 것이다. 그리고 9회초, 일본의 마지막 타자 나카야가 선동열의 낮은 공을 퍼올렸고 이 공이 뜬공으로 처리되며 게임 종료. 야구 월드컵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아시아팀 우승의 업적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해냈다.
참고로 이 경기는 20세기 한국 스포츠 100년사 명장면을 꼽는다면 홍수환의 4전 5기와 함께 톱 10 안에 꼭 들어가는 경기이며, 그러다보니 이후 지상파 및 케이블 스포츠 채널에서 여러 번 방송했다. 특히 한국에서 열린 대회이자 일본을 이기고 우승한 대회라는 점과, 1977년 대륙간컵에 이어 두번째 세계대회 우승이라는 점 때문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 대회 우승을 무자비하게 휩쓸던 쿠바가 불참했기에 가능했던 우승이기도 했다.[10]
5. 수상
- 대회 MVP : 선동열(3경기 3승 0패 29이닝 1자책 0.31)
- 타격왕 : 자오스창[11] (대만, 32타수 17안타 .531)
- 방어율우수투수 : 임호균(한국, 0.00)
- 최다승리투수 : 선동열(한국, 3승 0패)
- 최다타점 : 타케스에(일본, 18타점)
- 최다홈런 : 타케스에(일본, 4홈런)
- 최다도루 : 고바야시(일본, 7개)
- 최다득점 : 콥(미국, 10점)
- 우수심판 : 맥 매너스(캐나다)
- 올스타상
6. 여담
- 한일전 마지막 경기 당시 한대화의 홈런으로 엄청난 환호가 이어졌고 이 때문인지 경기 종료후 대회 MVP로 선동열이 선정 되었지만 장내 아나운서가 실수로 한대화라고 해버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때의 쓰리런 홈런 기억이 강렬한 덕분인지 이후 프로리그에서도 몇 번 더 인상적인 장면에서 쓰리런 홈런을 치면서 '쓰리런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었던 선수들은 이후 1980년대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스타들이 되었다.[12] 이 대회의 우승, 특히 결승이 된 한일전에서의 극적인 승리는 같은 해 출범한 프로야구의 대중적 인기를 높이는 데 많은 기여를 해냈다.
- 이탈리아 야구 국가대표팀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2승만을 거두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2승은 바로 결승에 오른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거둔 것이었다. 반대로 한국과 일본은 각각 7승 1패, 6승 2패를 기록했는데 일본의 2패 중 1패가 이탈리아(나머지 1패는 결승에서 한국을 상대로)에게 당한 것.
-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 '마지막 국가대표'가 2012년에 발행되었으며 작가는 김은식.
- 이 대회의 결승전은 33년만에 재현되었다.
7. 관련 문서
[1] 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며 잠실지구에 야구장을 포함한 스포츠컴플렉스 건설이 이루어 지는 것을 감안해 발표한 것이라고.[2] 참고로 야구장 건설을 위해 대한야구협회에서는 1978년과 1979년에 각 1억씩 기부금을 냈다.[3] 당시 국제아마야구연맹의 규정 52조에 "프로선수로 활약했거나 프로팀에 입단하기위한 계약서에 서명한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었다. 프로 선수들의 출전이 허용되면서 삭제.[4] 매달 100만원[5] 현지 발음으로는 좡성슝. 가쿠 겐지(곽원치), 궈타이위안(곽태원)과 함께 '''2곽 1장'''으로 통하던 강속구 투수이다. 이 대회가 끝난 뒤 일본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에 입단해 암흑기 일본 롯데의 실질적 에이스로 활동했다. 이후 일본으로 귀화하여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소 카츠오'라는 이름으로 지냈다.[6] 3시간 반이 지나면 서스펜디드 게임 결정.[7] 이 규정이 적용된 이유는 당시 잠실 야구장에 야간조명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다.[8] 타격 규칙 위반으로 아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번트의 경우에는 발이 타석을 벗어나도 관례상 규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MLB 경기와 WBC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으나 누구도 항의하지 않는다. 김재박의 번트도 항의는 없었다. 아래의 Q271 참조.[9] 본인 말로는 당시 2사로 착각했었다는데... 사실 2사여도 홈에 던질 필요는 없다. 아마 경기장 분위기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던 모양.[10] 쿠바가 불참한 것은 북한의 우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이게 어때서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엔 냉전시절이라... 물론 쿠바 본인들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이 있을 리가... 결국 홈팀의 이점을 이중으로 받은 셈. 바로 2년 전인 1980년 도쿄 대회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결승에 올라가 쿠바에게 져서 준우승했다. 이후 1994년, 1998년, 2005년 대회에서 한국과 쿠바는 결승에서 다시 만났으나 한 번도 이기질 못했다. 한국과 쿠바가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 시작한건 2008년부터로, 잠실에서 가진 2차례 평가전에서 1승 1패씩을 주고 받았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2차례 만나 2승을, 그리고 2015 서울 슈퍼시리즈에서 1승 1패, 2017년 평가전때 2승을 기록했다.[11] 趙士强. 언론에서 차오시창으로 표기했는데 대만에서 웨이드-자일스 표기법(Chao Shih-chiang)에 따랐기 때문이다. 한어병음은 Zhao Shiqiang이다.[12] 장효조, 김시진, 최동원, 한대화 등은 이듬해인 1983년 프로에 입단했고, 김재박은 원년 후기의 잔여 경기부터 곧바로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