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고(고려)

 



王暠
(? ~ 1345년)
고려의 왕족이자 제2대 심왕. 충렬왕정화궁주의 장남인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의 차남. 몽골식 이름은 왕올제이투(王完澤禿).
충렬왕은 태자 시절 정화궁주를 태자비로 맞았으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왕비로 맞으면서 그 입김 때문에 정화궁주는 제2비로 밀려났다. 따라서 정화궁주의 아들 왕자도 태자가 되지 못했다. 즉 장자상속제에 따르면 원래는 충렬왕의 장남 왕자의 아들인 왕고가 차남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보다 계승 순위에서 앞선다.
어릴 때 작은아버지 충선왕의 양자가 되어 궁중에서 길러지면서 연안군에 봉해졌다. 1313년에 충선왕이 김문연을 원나라에 보낼 때 왕고는 원나라에 체류해 인질이 되었으며, 1315년 10월에는 통주에서 계국대장공주를 알현했다. 1316년 3월에 충선왕으로부터 심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원나라 양왕의 딸이자 계국대장공주의 조카인 노룬공주(訥倫公主)에게 장가를 갔다.
왕고는 고려의 왕이 될 뜻을 넘보고 충숙왕 왕도를 여러 차례 참소했는데, 1322년 3월에 왕고가 원나라영종(5대)에게 총애를 받자 많은 대신들이 그를 위해 충숙왕을 참소했다. 원나라에 충숙왕이 입조했을 때 형부에 가뒀다가 머리를 깎아 석불사에 출가시켜 승려가 되도록 만들기도 했다.
심왕부의 신하인 백응구가 고려로 도망치자 영종에게 아두라를 보내 백응구를 연경으로 돌려보내는 지시를 내리게 했으며, 충숙왕이 이를 즉시 이행시키지 않자 왕고는 충숙왕이 그 칙서를 찢었다고 참소했다. 이로 인해 1321년 충숙왕이 입조하자 영종이 크게 노해 그 일을 힐책해서 인장을 거두고 사신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또한 왕고는 고려의 재상들에게 "충숙왕이 왕위를 계승한 이래로 영종의 사신을 영접하지 않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놀기만 했다"면서 "샤데이가 도착하면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답해야 한다"고 했으며, 왕고는 고려에서 충숙왕에게 돈과 재물을 많이 보내는 것을 싫어해 양성주를 보내 영종의 명이라면서 그 재물들을 가로챘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충숙왕 9년(1322년) 원나라에서 왕고의 모친인 안비에게 손수건과 만전향을 선물하고 모시를 요구하였다. 이것은 원이 고려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왕고가 얼마나 많은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느냐를 시험해본 것인데, 왕고가 동원한 모시는 원나라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충숙왕이 왕의 인장이 빼앗긴 상황에서도 왕고는 원나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왕고의 일당 10여 명이 원나라로부터 와서 왕고가 이미 나라를 얻었는데도 충숙왕의 과거 악행을 적어서 원나라 조정에 올리지 않겠냐고 따져서 원나라의 중서성에 왕고를 왕으로 옹립할 것을 요청하는 글을 올리게 했으며, 충숙왕이 3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재정이 고갈되자 신하들을 시켜 영종의 명을 내세워 창고를 봉쇄하게 했다. 1323년에 진종(6대)이 즉위해 1324년에 충숙왕이 고려로 돌아가게 되면서 충선왕이 사람들에게 자신과 왕고가 서로 싸워 집안 싸움이 일어났다면서 진종에게 지난 잘못을 생각하지 말고 모두 다 용서해달라고 올렸다고 한다.
1328년 7월에 왕고의 일당이 인종(4대)의 허가를 받아 상왕(충선왕)이 왕도(충숙왕)를 고려 왕, 왕고를 세자로 임명했지만 영종 때에 이르러 왕도가 바얀투그스와 짜고 왕고의 세자인, 그의 전택, 그의 부하들의 전택 등을 빼앗았다고 했으며, "충숙왕이 귀가 멀고 말을 못한다"고 참소했다.
1333년 여름 4월에 충숙왕이 임강의 난산채에 당도하자 왕고는 행궁을 찾아 알현했다가 충숙왕을 따라 귀국했으며, 1339년에는 그의 일파인 조적과 모의해 고려의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시도를 했다가 충혜왕에게 패하면서 실패했다. 그의 부하가 원나라에 가서 왕고가 국왕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자 충혜왕이 기병을 보내 왕고의 계략을 중지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1344년 12월에 원나라로부터 귀국했다가 1345년 가을 7월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