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왕
瀋王
1. 개요
원나라의 간섭기 당시 랴오닝 성 선양 시(瀋陽, 한국식으로 읽으면 심양) 일대에 고려의 전쟁 포로, 이주민 등의 집단이 있다 하여 관련된 명목상의 봉작이 만들어졌는데, 후술할 내용같이 사실상 실권은 없었고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했다. 원나라는 이 자리를 주로 동방 삼왕가를 견제하고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이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사에 있는 제후왕들의 서열에서 고려왕을 39위에 두었고, 심양왕을 37위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왕족이 임명되었는데, 고려 왕이자 심왕이었던 충선왕 이외에는 모두 독립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고려 왕을 노렸다. 원나라가 고려에 대해 주도권을 쥐고 군림하기 위해 때때로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도 이용하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심양왕'''(瀋陽王)이라는 명칭으로도 유명하지만 실제 심양왕은 초기의 작호이고 급이 높아진 '''심왕'''으로 불린 기간이 길다. 드라마 기황후에서도 심양왕으로 등장한다.[1][2]
2. 배경
윤은숙 교수(강원대)가 저술한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에 따르면 고려왕이 심왕에 임명된 데에는 꽤나 복잡한 당대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13∼14세기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였다.
여기서 우선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 옷치긴(1168∼1246)은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스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현재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막대 동생인 옷치긴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커서 자신이 서방원정(1219∼1225)을 떠날 때에 국정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으며, 그덕분에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는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옷치긴 사후 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이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 칸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릭부케(阿里孛哥)를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황제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쿠빌라이칸(원 세조)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서 “항상 쿠릴타이(일종의 화백 제도)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집사>)”고 한다.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제국은 원세조(쿠빌라이칸)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양왕 제도도 옷치긴 제국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 ―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양왕을 두어서 서로 충돌시켜 옷치긴 제국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후에 터지는데 1287년 옷치긴 왕가의 4대 제왕인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은 원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다른 제왕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원 세조는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1287년 나얀을 처형하였다.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충렬왕은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왜 고려 왕실이 원나라 중앙 정부에 의해 심왕에 임명되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13∼14세기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원나라의 대칸들은 개경(원간섭기 고려)과 심양(심왕)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고려 왕실의 심왕 임명 또한 당대의 원나라 중앙과 동방 3왕가간의 파워게임의 연장선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3. 역사
원래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摠官)과 같은 비슷한 역할의 직위가 있긴 했지만 심양왕이란 봉작이 창설된다. 창설되고 처음으로 봉해진건 충선왕이다. 충선왕은 황위 계승 분쟁에서 무종 카이산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훗날의 인종)를 지지한 대가로써 이 직위를 얻었다. 그래서 충선왕은 고려 왕과 심양왕 양쪽의 직위를 가지게 된다. 충선왕이 고려 왕으로 복위한지 1년 후인 1310년, 심왕(瀋王)으로 개칭된다.
그리고 충선왕은 원 인종에게 승상직을 제안 받기도 했으나 너무 잘나가면 견제를 받아 몰락할 수 있기 때문에 사양해야 할 정도로 잘나간 적이 있었다. 때문에 심양왕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하나 더 받게 됐고, 얼마 뒤에는 1자 왕인 심왕으로 격상되었다. 충선왕이 고려왕과 심왕을 겸하던 시절에는 그의 두 왕작을 한데 합쳐서 '''고려심왕'''(高麗瀋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 왕만이 아니라 조카인 이복형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의 차남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를 양자로 삼았다가 그에게 심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는 충선왕의 정책 때문에 고려 내에서의 권력을 잃은 이들이 고려왕이 심왕을 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충선왕 때부터 부원배들의 입성책동이 시작된다.
이 탓인지 왕고가 심왕이 된 후로 더욱 실권은 없어졌고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원나라는 이 자리를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했던 고려인들이 사실상 본국을 괴롭히게 만듦으로써 고려가 끝까지 원의 입김을 받게 만든 직위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심왕 왕고는 고려 왕위에도 욕심을 내어 사촌인 충숙왕을 참소하며 괴롭혔고, [3] 왕고 사후 심왕위는 고려왕(충목왕, 충정왕)이 겸직했다가 그들이 죽은 뒤에 왕고의 손자인 왕토크토아부카(王篤朶不花)에게 이어진다. 왕토크토아부카도 고려 왕위를 노려서 고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376년 고려와의 국경 지역에서 주둔하던 왕토크토아부카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고, 왕토크토아부카와 밀통했던 고려의 승려 소영은 처형당했다.
4. 역대 심왕 목록
[1] 기황후에 등장하는 심왕에 대한 오류로 당시엔 이미 심왕으로 격상되었을 때였고 경칭도 전하가 아닌 저하로 나왔었다. 중국엔 저하라는 호칭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2] 중국에서는 통상 한 글자를 쓰는 일자왕호가 두 글자를 쓰는 이자왕호보다 격이 높다. 한 글자는 국(國), 두 글자는 군(郡)이 영지로 하사되기 때문.[3] 충숙왕은 왕고의 할머니인 정화궁주를 괴롭힌 제국대장공주의 손자이다. 둘 다 충렬왕의 왕비이며 따라서 왕고와 충숙왕도 같이 충렬왕의 손자이다. 장자상속제에 따르면 원래는 충렬왕의 장남 왕자(王滋)의 아들인 왕고가 차남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보다 계승 순위에서 앞서지만 몽골인의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