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왕

 


고려 제27대 대왕
忠肅王 / 懿孝大王
충숙왕 / 의효대왕

<colcolor=#670000> 묘호
없음
시호
고려
의효대왕
(懿孝大王)


충숙왕
(忠肅王)

군호
강릉대군(江陵大君)[1]
성씨
왕(王)

도(燾) → 만(卍)

의효(宜孝)
몽골식 이름
왕아라트나시리
(王阿剌忒訥失里)
왕비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경화공주(慶華公主), 명덕태후(明德太后)
왕세자
왕정(王禎)
왕자
용산원자(龍山元子), 왕전(王顓)
부왕
충선왕
모비
의비(懿妃)
능호
의릉(毅陵)
생몰년도
음력
1294년 7월 7일 ~ 1339년 3월 24일
양력
1294년 7월 30일 ~ 1339년 5월 3일 (44세)
재위 기간
음력
1313년 3월 갑인일 ~ 1330년 7월 갑자일(17년)[2]
양력

재위 기간
(복위 후)
음력
1332년 2월 갑자일 ~ 1339년 3월 계미일 (8년)
양력

1. 개요
2. 첫 번째 재위
3. 아들에게 양위
4. 복위 후 2번째 재위
5. 평가
6. 가족관계
7. 이야깃거리
7.1. 교황 요한 22세가 충숙왕에게 보낸 편지?
7.2.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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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7대 임금.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 원래 이름은 도(燾)였으나 왕으로 즉위 후에 만()으로 개명. 자는 의효(宜孝), 몽골식 이름은 왕아라트나시리(王阿剌忒訥失里).
충선왕차남이자 한국사 최악의 폭군충혜왕과 개혁 군주인 공민왕의 부왕. 그리고 충숙왕의 어머니는 충선왕의 제1비 계국대장공주가 아니고, 제2비인 의비(懿妃)였다. 의비는 몽골인인데 원나라 황족 출신은 아닌 듯하고 이름은 예수진(也速眞)이다.
고려의 왕 중에서도 가장 고려 혈통이 희미한 사람이다. 아버지 충선왕은 모친이 몽골인이고 부친은 고려인이었는데 충숙왕은 모친이 몽골인이고 부친은 몽골과 고려 혼혈이었다. 친할아버지고려인이고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3명 모두 오리지날 몽골인이다. 그래서 충숙왕은 생물학적으로는 몽골인에 가깝다.
그러나 고려말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일 정도로 주로 원나라에서 살던 아버지 충선왕과는 달리 고려에 머물며 통치를 했고 몽골 옷을 입고 몽골식 예법을 올리는 아들 충혜왕을 "네 아비어미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너는 그 꼴이 뭐냐"며 꾸짖은 이야기로 보아서 비록 아버지와 아들보다도 고려인 혈통이 옅었지만 자신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첫 번째 재위


<colcolor=#670000> 역대 강릉(江陵)의 가신
1대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만(王卍)
2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왕전(王顓)
3대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왕우(王禑)
1299년 강릉군에 봉해졌고 이후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진봉되었다. 그의 친형인 세자 왕감이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1310년 부왕인 충선왕에 의해서 살해당한 뒤에 후계자가 되었으며 1313년 원나라의 심양왕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이 책임감 없고 이상한 아버지 충선왕은 평생 아들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결정을 남겼다. 안 그래도 충선왕이 상왕으로 건재해서 충숙왕의 왕권이 약한 상황에서 충선왕이 1316년 자신의 원나라 작위인 심양왕 자리와 고려의 세자 자리를 이복형 강양공[3]의 차남인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준 것이다. 물론 온전한 자의가 아닌 정치적으로 압력을 받은 탓에[4] 조카에게 물려준 듯 하나 이는 충숙왕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나아가 고려 조정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명목상으로 포괄하게 된 요동영토 역시 사라졌다.
왕고는 고려 국왕 자리에 욕심을 품고 지속적으로 사촌인 충숙왕을 모함했다. 결국 왕이 주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원나라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다.[5] 심지어 왕고는 1321년 원나라 영종의 명령으로 충숙왕이 압송되자 2년간 고려 국왕을 자칭하기까지 했다.

3. 아들에게 양위


이런 현실 속에서 왕이 잘 해보겠다는 의욕을 상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싫증이 난 충숙왕은 왕 노릇 못 해먹겠다며 자신을 위협하던 심양왕 왕고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쳤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 이전에도 왕고의 형제들에게 작위를 주는 등 제법 유화적인 자세로 나갔었다.
왕고는 지속해서 충숙왕을 모함했으며 심지어는 원나라 황제에게 아예 그냥 고려를 (省)으로 만들고 원나라가 직접 통치하죠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를 입성책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입성책동은 원나라 내부의 굳이 그럭저럭 안정된 정국에 괜히 불씨를 던질 필요가 있냐는 반대 의견과 이제현의 노력 등으로 무산되었다. 이 때 고려가 원나라의 직할령 시도를 방어하는데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충렬왕의 장인쿠빌라이 칸의 명령인 세조구제. 실제로 원나라가 몇 차례나 고려를 완전 합병하려 할 때마다 이 세조구제는 가장 확실한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도 왕고와의 알력다툼이 끊이지 않자 1330년 아들 왕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이 바로 최악의 폭군인 충혜왕이다.

4. 복위 후 2번째 재위


충혜왕의 막장 짓을 보다 못한 원나라는 결국 2년만에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다시 충숙왕을 복위시켰으나 정치에 뜻을 잃은 충숙왕은 신하도 만나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로 소일하다가 8년만인 1339년 3월 승하했다. 향년 46세. 시호는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 원나라의 시호를 쓰지 않는 경우에는 '의효왕', 고로 '의왕(懿王)'으로 줄여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참고로 의종과는 한자가 다르다.
그나마 충숙왕에게 다행한 일은 충정왕이 폐위된 후 차남인 공민왕이 즉위했다는 점. 그나마 공민왕도 초기에는 반원 개혁을 일으키며 고려를 부흥시키는데 노력했지만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의 승하 뒤 폐인이 된채 암군으로 타락해버렸고 끝내 시해를 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5. 평가


아버지 충선왕의 이해 못할 짓으로 뭘 해 보고 싶어도 해 보지 못하고 의욕 없이 왕위에 있었으며, 원나라에 자주 끌려다니며[6] 귀찮은 재위 기간을 보낸 임금.
하지만 업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1318년의 업적이 특히 많다. 원나라에 보내는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도 했으며, 당시 백성들의 큰 고통이었던 공녀나 환관들을 원으로 보내는 것을 줄여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제주도의 사용(使用, 또는 士用)·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檢校評理) 송영(宋英)을 보내어 안무(按撫)하게 하였다.
같은 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하였으며,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가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문세족이 점령한 땅을 색출하여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또, 채무에 있어서 고리대금업을 막아, 그 이자가 원금에 상당할 때에는 그를 정지시키는 등 단속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안향을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화자거 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 執田民推考都監)을 설치하였다. 최소한 아예 고려 왕이라는 책임감이 부족해 아예 대도에서 원격 통치를 하며 자신의 학문 사업과 원 제국의 정치 싸움에만 몰두하던 충선왕보다는 충숙왕의 치세는 그나마 나았다. 또 여러 혼란이 많았지만 재위 기간이 25년으로 원나라에 끌려간 기간을 빼면 20년, 충혜왕에게 물려준 기간을 더하면 22년 ~ 27년으로 길다는 것도 특기할 만은 하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보다 단명했지만 말이다.
왕 개인적으로는 글씨와 문장에 두루 능했으며 성품은 침착,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고려사는 전하지만 그 평가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애초에 원나라 간섭기의 모든 군주들이 그렇듯 뭘 해 보고 싶어도 할 수 없던 것이 현실이었지만. 신진사대부를 발탁시킨 충선왕과 충목왕 사이에서 충숙왕은 재위가 길었음에도 이런 친위 세력을 기르려던 흔적을 보이지 못한다. 거기에 아들 충혜왕의 막장 짓 때문에 아들을 자주 혼냈다고 전하는데, 아들에 대한 스트레스도 그의 단명을 앞당겼을지도.
최영은 우왕의 난봉짓을 보다 못해 "충숙왕도 놀기를 좋아하셨지만 그래도 농번기를 피해 놀아서 백성들 원망을 듣지는 않으셨는데 지금 전하는 시도 때도 없이 놀아제끼니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간언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충숙왕이 예천군 권한공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을 '거사'라고 칭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가 이 고사를 본따 당시 북쪽 변방에 나가 있던 정도전에게 태조 자신의 호인 '송헌거사'라는 발신자명으로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이성계의 정도전에 대한 두터운 신임이나 임금과 신하가 사적으로도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더라 하는 보기 좋은 미담으로 소개되어 있기는 한데, 정작 그 고사에 나오는 권한공은 채홍철, 유청신 등과 함께 심왕 왕고에게 붙어서 충숙왕에게 고려의 왕위를 왕고에게 넘겨주라고 권하거나 책성입동에 찬성했고 충숙왕에 의해 유배까지 갔던 인물이다.
여러 모로 자식 농사에는 완전히 실패한 왕이라 할 수 있다. 장남 충혜왕은 말할 것도 없고, 삼남 공민왕도 초반에는 잘했다가 나중에는 암군으로 타락했으며 차남 용산원자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큰손자 충목왕은 명군의 자질이 보였으나 요절했고, 둘째 손자 충정왕과 셋째 손자 우왕도 좋은 임금이 되지는 못했다.

6. 가족관계


  • 제1비 :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이린친발라(亦憐眞八刺) - 원나라 영왕(營王) 에센테무르(也先帖木兒,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손자)의 딸
  • 제2비 :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금동(金童) - 원나라 위왕(魏王) 아무가(阿木哥, 원 순종 다르마발라의 아들)의 딸[7]
    • 차남: 용산원자(龍山元子)
  • 제3비: 경화공주(慶華公主)[8] 바얀후트(伯顔忽都) - 원나라 여인
  • 제4비 : 덕비 홍씨 - 남양 홍씨 홍규의 다섯째 딸[9]
  • 후궁 : 수비 권씨(壽妃權氏) - 안동 권씨 권렴의 딸

7. 이야깃거리



7.1. 교황 요한 22세가 충숙왕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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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바티칸 비밀문서고에서 1333년에 당시 교황 요한 22세충숙왕에게 보낸 서한의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서한이 충숙왕에게 도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께서 그 곳(고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대해주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라는 구절이 있기에 당시 고려에 소수이든 다수이든간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또한 영상에서 라틴어 번역자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려 왕 당신은 하느님의 좋은 종(Good Servent)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낸 신자들을 환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편지 내용을 요약해주는데, 만약 '우리가 보낸'이라는 게 번역자가 임의로 붙인 내용이 아니라면,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가 고려 땅을 밟은 셈이 된다.[10] 다만 임의로 붙인 내용이라면,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과 연결되어 있었고 몽골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고려에 거주하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가톨릭이 아니라 네스토리우스파라고 하더라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다만 해당 기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슨 서유럽고려 간에 교류가 있어서 고려의 금속활자가 서유럽의 금속활자에 영향을 줬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신빙성이 낮으며 서유럽의 금속활자는 동양의 금속활자와는 다른 독자적인 체제를 통해 만들어 졌기에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해당 문건은 고려 시대 당시 한반도 내 크리스천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로만 봐야 한다.해당 기사 오류 지적[11]
하지만 "위의 편지가 고려 충숙왕에게 보낸 것이라는 주장은, 라틴어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반박 주장이 나왔다. 편지를 받는 Regi CorumCorum을 고려인의 복수로 보는 건 라틴어를 잘못 해석한 것으로 편지를 받는 당사자는 라틴어 문법으로 보든 당시 정황으로 보든 고려 충숙왕일 수 없다는 것이다.교황이 고려 왕에게 편지? 잘못된 해석
해당 논문으로 들어가보면 "Corum의 문법적인 형태를 고려해 볼 때, Corum은 Ci이고 이는 Khitan에 더 근접해 있으며, Khitan은 그런데 Chigista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Sece de Chigista를 Seecede Chingista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도 고려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편지를 받는 Regi Corum은 고려 충숙왕이 아니라 원나라 황제이거나 서방 칸국의 칸들 중 하나로 보인다.

7.2.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코에이원조비사에서 시나리오 3 '원조의 성립'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는데, 이 시나리오의 시작 년도는 1271년[12]으로 태어나기 전에 고려의 국왕이 되어 있다. 덩달아 아들인 충혜왕공민왕도 등장하며 수하 무장으로 최영이성계가 있다. 능력치가 그저 그렇다 보니 많은 유저들이 충숙왕을 죽이고 아들인 공민왕을 후계자로 해서 플레이하기도 했다고. 현실에서도 안습이었는데 게임에서까지 안습.
[image]
  • MBC HD 창사 특집 드라마 <직지>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이정길
[1] 참고로 그의 아들인 공민왕 역시 같은 군호를 받았다.[2] 1321년부터 1324년까지 3년간 대도에 압송되어 고려 국왕인(도장)을 빼앗겼다.[3] 충렬왕과 고려인 정화궁주의 아들. 이름은 왕자.[4] 제국대장공주나 그 소생인 충선왕이 아니었다면 고려의 왕위는 당연히 강양공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충선왕 입장에서 심양왕 자리를 조카에게 준 건 나름 미안한 마음에 챙겨준 보상 비슷한 것이었을 수 있다.[5] 왕고의 모략 때문만이 아니라 충숙왕의 아내인 복국장공주가 갑자기 승하한 일이 있었는데 이게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피흘릴 정도로 두들겨 패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원나라에서 문제삼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올 때부터 몸이 이미 좋지 않은 상태였으며, 애당초 두 부부의 사이는 좋지 않아서 하루가 멀다하고 부부싸움을 벌였다고 한다.[6] 충렬왕충선왕은 제 발로 원에 자주 들락거렸으나, 충숙왕이 원에 갈 때에는 강제 호출된 경우가 많았다.[7] 신원사에 따르면 공민왕의 처 노국대장공주가 위왕 아무게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원사에 위왕 아무게가 충숙왕 때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위왕 자리를 물려받은 차남 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즉 노국대장공주의 고모인 셈이다.원 무종과 원 인종의 이복형이지만, 훗날 이들에게 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탐라로 유배되고 죽는다.[8] 숙공휘령공주라고도 한다.[9] 충선왕의 후궁 순화원비 홍씨(順和院妃 洪氏)의 친동생이다. 즉 이들은 부자지간이면서 동서(同婿)지간이 된다.[10] 당시 원나라 수도 대도에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파견되어 있었으므로, 고려에 가톨릭 신자가 가는 게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11] 여담으로 이 시대에는 아예 고려인 무슬림도 있었다. 개경에는 몽골에서 건너와 고려에 체류하던 위구르인들이 지은 마스지드가 있었고 당시에는 그곳을 '예궁(禮宮)'이라 불렀다고. (출처 : 조선불교통사)[12] 역사적으로 이 때 고려 국왕은 원종. 일본 원판에서는 국왕이 원종이지만 한국에 수입되면서 비스코에서 몽고와 관련된 인물들로 고려 측을 싹 갈아버려서 충숙왕이 대신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