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

 

1. 王符
2. 王裒
3. 王富


1. 王符



(83 ~ 170)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절신(節信).
안정 임경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마융, 두장, 장형 등과 친했다. 당시 안정의 풍속에는 서얼을 하찮게 여겼으며, 왕부는 외가도 없었고 지방 사람들의 천대를 받았다.
당시 왕부는 천거되었지만 왕부는 은거해 당시의 정치, 도덕의 장단점을 지적하는 30여 편의 책을 지었고 이름을 밝히기 싫어서 이를 잠부론이라 했다.
후에 황보규가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뇌물로 안문태수를 얻은 자가 명함을 내밀고 찾아오자 누운 채로 제 때에 일어나지 않고 군에서 기러기를 먹었는데 맛있냐고 물어 뇌물로 안문태수를 얻은 것을 비꼬았다. 잠시 후 왕부가 문에 있다고 하자 황급히 일어나 허리띠도 두르지 못하고 신발을 끌고 나와서 손을 잡아 끌고 들어와 앉았는데, 극진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봉천 2천 석의 벼슬 아치를 만나는 것이 일개 유생을 만나는 것만 못하다고 했으며, 왕부는 끝내 벼슬을 하지 않고 죽었다.
후한서는 왕부와 왕충, 그리고 중장통을 한 열전으로 묶었는데, 세 사람 모두 기존의 유학을 비판적으로 해석한[1] 체제비판적 지식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 王裒



(? ~ 311?)
삼국시대, 서진 시기의 인물. 자는 위원(偉元). 왕의의 아들, 정사 삼국지 배송지 주석 왕은의 진서에서는 '王襃'라고 하는데 뜻은 똑같이 '모을 부'이다.
성양 영릉 사람으로 아버지 왕의가 252년의 동관 전투에서 책임을 묻는 일로 사마소에게 살해당하자 왕의가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숨어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살았으며, 조정에서 3번, 군국에서 7번을 불렀지만 사양했다. 아버지 묘 옆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아 밤낮으로 항상 묘소에 절하면서 꿇어 앉아 잣나무를 붙잡고 울었는데, 눈물이 나무에 닿으면 나무가 말라죽었다.
시경을 읽다가 육아 편의 "애닯고 애달프다, 우리 부모님이여! 나를 낳으심에 수고로우셨네."라는 글귀에 이르면 세 번을 반복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제자들은 육아 편을 빼고 읽지 않았다.
집이 가난해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식구 수를 계산해 밭을 갈고 옷 입을 사람을 헤아려 누에를 쳤으며, 몰래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왕부는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진나라가 건국되자 왕부는 평생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앉지 않는 것으로 진나라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311년에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었고 친척들은 모두 강남으로 피난했는데, 왕부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다가 난리에 휘말려 사망했다.

3. 王富


(? ~ 268)
서진 초기 촉군 강원, 임공현에서 왕부의 난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왕부는 원래 촉한의 병사였다. 태시 4년(268년)에 죄를 저지르고 제갈첨을 닮은 용모를 이용해 제갈첨의 이름으로 반진복한을 구호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강원 방략리 이고는 왕부의 반란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임공현에서 전투를 벌여 대파하고 왕부를 생포한 후, 익주자사 동책에게 왕부를 넘겨주고, 동책은 왕부를 죽였다. 이고는 이로 인해 발탁되어 중용되었다.
장영서(臧榮緒)의 진서에 따르면 촉 사람 왕부가 난을 일으키자 군현에서 토벌해 평정했다고 한다. 당초 제갈공명은 촉나라 땅에 크고 훌륭한 덕을 보였는데, 아들 제갈첨이 또한 임금을 위하여 하는 나랏일로 몸이 죽었다, 촉인들은 제갈첨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옛 장수가 일러 왕부에게 말하길 "그대의 용모는 제갈량을 심히 닮았으니 그대 때문에 생각하니 파촉의 맹주가 되어 이기고 복구할 것이오."
화양국지에 따르면 태시 4년(268년) 옛 중군사(中軍士) 왕부는 죄가 있어 도피하며 은밀히 결탁하여 형벌을 받는 무리에게 망명하여 수백인을 얻었다. 자칭 제갈도호(제갈첨)이라 하고 촉군 임공현에서 일어나 강원현 주변을 침범하였다. 강원의 방략리 이고(李高)[2], 여술(閭術, 일설에는 이고의 자(字)라고 한다.)이 왕부를 포박해 주에 보냈고 자사 동책(童策)이 참수했다. 당초 제갈첨과 등애의 전투가 면죽에서 있었는데 당시 몸이 죽고(전사본에서는 죽지 않고라고 쓴다) 잃어버려, 혹 말하길 살아서 깊이 도주했다고 했다. 제갈첨의 친병들이 왕부의 용모가 제갈첨과 비슷해 그런 까닭으로 왕부가 가짜로 썼다고 말했다.

[1] 특히 전한 이후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사상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던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에 반대되는 견해를 드러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왕충과 중장통의 주장은 동중서와 커다란 차이점이 있으며, 왕부는 이들에 비해 덜하지만 동중서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욱 중시하였다.[2] 이고는 파서군 낭중현 출신으로 무예에 능란하여 오나라를 평정시 아문장으로 손호를 포획해 현후가 되었다. 왕혼, 주준왕준을 시기해 그가 오나라를 멸하여 많은 이로움을 얻었고, 그 중에 이고가 손호의 궁전을 태웠다고 표를 사마염에게 올렸다. 왕준은 손호는 좌우사람들이 손호를 위해 싸운다고 하니 금은보화를 모두 꺼내 그들에게 하사해줬다는데 보화를 얻자마자 지니고 도망가니 손호가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는 사신이 떠나자마자 좌우가 재물을 겁탈하고 처첩을 약취하며 궁전에다 불을 질렀다고 했으며 자신은 궁전에서 마침내 앉을 만한 자리조차 없었고 보물도 챙기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후에 관직이 금성(金城), 안문(鴈門)태수에까지 올랐다.